제주 힐링 스토리 / 선녀와 나무꾼
글,사진 / 김덕길
‘선녀와 나무꾼’입장권이 싸지 않다. 싸게 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제주 관광앱을 설치하고 20%를 할인 받는다. 한참을 달리고 있을 때다.
“아차! 어떡하지?”
아내가 왜 그러느냐고 묻는다.
“펜션 나올 때 두고 나왔어. 냉장고에 술이랑, 콜라랑…….”
5초를 망설인다. 이미 떠난 지 10분이 지났다. 그 거리를 왕복할 때 들어가는 기름 값과 냉장고에 들어있는 물건 값을 비교한다. 물건 값은 어림잡아 만 원이다.
“찾으러 가자고……. 아깝잖아.”
포기할 줄 알았던 아내가 돌아가자고 한다. 펜션에 갔더니 아직 물건이 그대로 있다.
“헌저 가져 갑주께…….”
주인 남자의 사투리가 잔디마당에 넓게 퍼진다.
‘선녀와 나무꾼’ 매표소를 들어서자 기찻길이 반긴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밀랍인형이거나 모형마을이다. 기찻길도 그렇다. 기찻길 옆에는 학교에 가는 고등학생이 보인다. 여름 교복을 입은 고만복 군은 책가방을 옆구리에 파지한 채 김덕순 여학생을 바라본다.
아이를 업은 아주머니의 한 손은 머리에 인 봇짐에, 한 손은 업은 아기를 받치고 있다. 그 옆에는 코흘리게 어린이가 엉거주춤 서 있다. 어머니의 양손이 놀지 않아 어린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고민이다. 그들은 아마도 기찻길을 건너려는 모양이다.
모형 마을의 ‘만나 양과’ 과자점이 한가롭다. 장사를 하는 가게일까? 이미 폐업했을까?
연탄을 실은 리어카가 언덕배기를 오른다. 아버지가 끌고 아들이 밀고 있다. 연탄이 반밖에 없는 걸로 보아 이미 여러 집을 배달 한 상태였으리라. 아래 마을부터 배달하고 위로 올라가야 덜 힘들다는 것을 아버지는 삶의 체험으로 알았고 아들은 리어카를 미는 손바닥의 힘에서 느꼈으리라. 리어카의 무게는 아들의 손바닥을 타고 힘겹게 실렸다가 팔뚝을 타고 어깨로 전달된다. 어깨와 목 사이에 굴곡이 깊어질 때 뱃살은 힘이 들어갔고 허리는 그 힘을 지탱하고자 몸서리친다. 손에 전달된 힘은 마침내 다리 종아리를 지나 발바닥을 박찬 후에야 끝났다. 박차고 나갈 힘이 길바닥 어딘가를 찍을 때 땀은 비 오듯 했고 리어카를 끄는 아버지의 호흡은 달리기를 한 듯 가빴다.
골목 너른 공터에는 새마을 모자를 쓴 아버지가 강냉이를 튀긴다. 장작을 패서 풀무질을 해 불의 강도를 올리면서 뻥튀기 기계를 돌려야한다. 초등학교에 가는 나에게 아버지가 말씀하신다.
“오늘은 창동 마을로 갈 테니까. 학교 끝나면 그리로 오너라!”
아버지는 일부러 공터에 자리를 잡으면 일찍부터 강냉이 서너 방을 튀긴다. 그 소리는 대포와 같아서 우렁찼고 냄새와 소리는 천리를 갔다. 포플러 가지에서 놀던 새가 도망치다 날아오고 강아지들이 짖는다. 마을은 일순 생기가 돈다. 학교에 가지 않은 어린 아이들이 엄마의 손을 잡고 먼저 몰려오고 일을 못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오신다. 오후가 되면 초등학생들이 몰려온다. 어린 아이들은 길바닥으로 튀어나간 강냉이를 주워 먹으며 행복해했다. 일손이 바쁜 사람들은 밤에 튀기러 왔다. 온 동네에 뻥튀기의 구수한 냄새가 진동했고 튀겨놓은 콩 냄새가 허기를 부추겼다. 명절을 앞둔 날은 눈코 뜰 새도 없었다.
늦은 밤 아버지는 큰 방 아랫목에 두둑해진 지폐와 동전을 펼쳐놓고 헤아리셨다. 지폐의 두께에 따라 아버지의 표정은 변했고 장사가 잘 된 날은 뻥튀기 보다 맛있는 과자가 손에 들려있었다. 그 당시 강냉이를 한 방 튀기는 데 250원, 지금은 6천원을 받는단다. 나는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기억은 아득하게 내 머릿속에 저장되었다가 어느 순간 불쑥 튀어나오는 모양이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강냉이를 튀겨 먹으라는 말씀에 나는 다시 뻥튀기 튀기는 곳을 알았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다시 뻥튀기 장사를 하게 되었다. 방바닥에 펼쳐놓은 지폐와 동전을 헤아리는 나의 모습이 40년 전, 아버지가 헤아리던 그 모습과 너무 닮아서 나조차 깜짝 놀란다.
뻥튀기 이야기는 책 한권을 써도 모자란다. 그래서 쓴 책이 ‘노점일기’다.
내가 뻥튀기 장사를 하지 않았으면 아마 영화배우가 되었을 것이다. 대한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출신 배우, 혹은 이대근 뺨치는 애로배우, 한때 탤런트 권해효를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같이 연기해보고 싶은 여자배우 ‘송윤아’가 ‘설경구’와 결혼하고선 배우의 꿈을 접었다. 물론 농담이다.
교복을 입은 여고생과 남학생이 태극당 빵집에 앉아 데이트를 한다. 내성적인 사내는 여고생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다. 중간에 놓인 빵은 여고생이 산 모양이다. 탁자에 올려놓은 여고생의 손이 위압감을 준다.
아이 둘을 들쳐 업은 아주머니가 광주리에 생선을 인 채 시장을 본다. 생선 장사를 하다 모두 팔지 못한 채 집으로 갈 모양이다. 국이라도 끓여놓아야 자식들 먹일 텐데…….
연탄 한 장에 12원 하던 1978년의 겨울은 혹독했나 보다. 객지에 나간 자식이 돈을 보내온 덕순네는 연탄 30장을 주문했고 언덕 위 신랑이 아파 누운 양철집네는 13장을 주문했다. 배달이 끝난 연탄 집 아주머니의 털신이 연탄보다 검다.
골방에 틀어박혀 타향살이 노래를 부르는 아저씨의 표정이 쓸쓸하다. 군용 모포 한 장으로 겨울을 견디며 살았나 보다. 설날인데도 육지에 두고 온 가족 곁으로 가지 못하는 쓸쓸함이 기타 줄에 실린다.
아침마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공중변소의 어린이가 자기 차례가 되어 힘을 주어본다. 뒤에 기다리는 사람들 때문일까?
.....빨리 좀... 아이고.... 배야... 쌀 것 같아....
볼 일은 더디었다.
오랜만에 교복을 입어본다. 중학교 때 교복 자율화가 되어서 나는 고등학교 때 교복을 입어본 적이 없다.
공포심을 유발하는 유령의 집을 들어갔을 때 간이 콩알만 해졌고 갑자기 튀어나오는 귀신들을 보며 기겁을 한다. 어른인 나도 무서운데 아이들은 얼마나 무서울까…….
군대 내무반 앞을 지나는데 갑자기 “충성! 근무 중 이상무!”라는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다시 보니 근무초소다. 모형 군인들이 근무를 선다. 나는 “그래 수고 많구나!”하며 내무반으로 들어선다. 31년 전 내무반이 그대로 놓여있다. 관물대의 옷가지가 엉성한 것을 보니 군기가 빠진 내무반일 것이다. 내가 군 생활 할 때 모든 옷은 각으로 시작해서 각으로 끝났다. 심지어 말투까지 각을 세워서 해야 했다.
“모든 말은 ‘다’와‘까’로 끝난다. 알겠습니까?”
“알았어요.”
“어라? 야! 김 이병 대가리 박어!”
아무리 사회에서 서울대를 다녔더라도 군대에 들어오면 기가 죽는다. 얼이 빠진 상태가 된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 군대다. 그렇게 견뎠고 그렇게 살아온 청춘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오해하지 말길 바란다. 지금의 군대는 내 집처럼 편하고 좋은 곳일 테니까.
두어 시간을 구경하고 밖에 나오니 해가 떴다. 따뜻한 바람이 부드러워 미칠 지경이다. 속살 익힌 햇살이 따뜻해 설날 즈음인데도 마치 봄의 중턱에 온 기분이다. 제주도는 벌써부터 막 움트고자 꿈틀대는 새싹들의 아우성이 보이는 듯하다. 우리는 이제 비자림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