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고대 역사학의 태두(泰斗)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토대 사학과 명예교수, 1927~)박사는 일본 최초로 백제 칠지도(七支刀)가 백제왕으로부터 백제 식민지였던 왜의 후왕(侯王)에게 하사되었다고 밝혀 일본 사회에 큰 파문을 던졌다. 또한 일본 고대사학자 이시와타리 신이치로(石渡信一郞, 1926~ )씨는 저서 [구다라에서 건너 온 오진천황]을 저술하여 일본 사학계에서 크게 주목 받고도 있다.
우에다 박사는 일본 제30대 비타쓰(敏達, 민달)왕의 생부는 백제 제26대 성왕이며, 비타쓰왕은 백제 제27대 위덕왕의 친동생이다. 백제 제24대 동성왕과 제25대 무령왕은 모두 일본에서 모국 백제로 귀국하여 백제왕이 되었다고 밝혔다. 백제 제26대 성왕은 서기544년 신라군과 전투에서 사망한 것이 아니며, 이 당시 장남 창(昌)을 백제 제27대 위덕왕으로 계승시키고 일본 왕실로 건너갔다. 성왕은 이미 그 이전 서기539년부터 일본제29대왕을 겸임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일본왕실에서 서기794년 교토(헤이안경)로 새 왕도를 천도해왔을 때 성왕의 일본왕실 사당(平野神社)을 왕도 북쪽에 웅장하게 세웠으며 현재까지 성왕의 사당(京都市平野宮本町)은 잘 보존되어있다.
4세기 후반, 백제 곤지왕자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오진왕이 된다. 그리고 그의 네 번째 왕자가 일본의 닌토쿠왕이 되고, 또 다른 왕자들이 백제 24대 동성왕(모대왕)과 25대 무령왕(사마, 일본의 남제왕)이 된다. 그리고 백제25대 무령왕의 아들인 26대 성왕은 일본에 건너가서 킨메이왕이 된다. 또한 성왕의 장남은 백제 27대 위덕왕으로 즉위하고 둘째 아들은 일본의 제30대 비타쓰왕이 된다. 이 사실은 [신찬성씨록]에 기록되어 있다. [신찬성씨록]은 일본 고대의 왕도였던 헤이안경(平安京, 지금의 교토)의 왕족과 귀족들 1,182가문의 신분을 기록하여 입증해주는 중요한 역사 계보서로 백제계 제50대 간무왕(781~806 재위)의 왕명으로 왕실에서 직접 편찬되었다.
일본서기(서기720년 일본왕실 편찬)라는 역사책에 보면 제30대 비타쓰 천황(572~585 재위)은 나라(奈良) 땅에서 구다라오이궁(百濟大井宮)을 지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즉 비타쓰왕이 나라 땅의 백제인 집단 거주지인 구다라오이(百濟大井)라는 곳에다 왕궁을 지었다는 기사이다. 이것도 비타쓰왕이 백제왕족 출신이라는 것을 방증한다. 더구나 비타쓰왕의 친손자인 제34대 조메이(서명)왕(舒明, 629∼641 재위)도 나라땅의 구다라강(百濟川) 옆에다 구다라궁(百濟宮)과 구다라노데라(百濟寺)라는 큰 가람을 지었다. 조메이왕은 구다라궁에서 살다가 서거했을 때는 구다라노 오모가리(百濟大殯)로 장례를 치렀다고 기록 되어있다. 백제대빈(百濟大殯)이란 백제 왕실의 3년상 장례로서, 백제 제25대 무령왕(501∼523년 재위)이 백제 왕도였던 곰나루(웅진, 공주) 지역에서 백제대빈 3년상 장례를 치룬 것도 1971년 7월8일 출토된 무령왕의 묘지명에서 입증되고 있다.
서기572년에 제30대 왜왕으로 등극한 비타쓰왕이 백제대정궁을 세운 오이(大井) 땅은 지금의 나라현의 고료초 구다라(廣陵町 百濟)라다. 이곳에는 현재 구다라 우편국(百濟郵便局)도 영업 중이다. 고료초 구다라의 땅 명칭은 일본정부의 ‘백제’라는 행정지명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두 곳 중 하나이다. 현재 남아있는 또 다른 한곳은 교토시 동쪽의 히가시 오우미시 햐쿠사이지초(東近江市百濟寺町)다. 우리말로는 ‘백제사정’이다. 일본 최대의 비와코 호수 너머 히가시 오우미시 햐쿠사이지초의 스즈카산(鈴鹿山) 등성이에 지금도 우뚝 서 있는 유서 깊은 백제사 때문에 행정지명조차 ‘백제사정’으로 남아 있다.(홍윤기/한국외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