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씻는 동안 외 2편
김향미
2009년 「유심」 등단.
사과꽃가지를 꺾어 화관을 만들어야 하나
바닥과 등이 서로를 뒤적인다
잡으려는 듯
벗어나려는 듯
이파리가 떨리고 사과가 떨리고 손이 떨리는 동안을 골몰하는 바닥들
손을 펼치면 말라버린 지류가 있다
부딪쳐 휘돌던 소금기가 말라있다
발원지가 눈이었을까 가슴이었을까
골이 패이고
묵묵하게 드러나는 깊이
손은 왜 바닥과 등으로 나뉘었을까
회오리를 감싸는 바닥
안쪽으로 접혀지는 구조는
맞서라는 뜻이었을까
안으로 눌러 앉히는 것들로 등이 자주 구부러진다
허락된 공중의 지분이 아귀에 모일 때
깊이와 흔적으로 굳어가는 지류
콸콸 쏟아지는 물이란 때로 쩔쩔매는 수압이다
하루에 몇 번씩 손을 씻는 일
난감이란
바닥에서 등까지 한 가지 일로 뒤척이는 일이다
등과 바닥이 어루만지는 동안
푸른 사과가 짙어지는 동안
비의 징후
침상의 머리는 언제나 문이 잘 보이도록 놓여 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걸 알아차린 걸까
샛강 돌들이 움찔한다
호스로 이어진 코로 받는 식음을 거부하고
긴 여정에 드는 걸음
제 무덤을 찾아가는 코끼리
그 깊은 눈동자를 본 적이 있는가
맥박과 혈압을 그리느라 가쁘게 오르내리는 그래프
몬순의 전위적 행위예술처럼 읽다가
잠든 모습으로 맞이하는 얼굴을 쓸어내린다
몰려온 마지막 색깔을 저장하고
낮아진 하늘
널어놓은 고추의 꼭지들이 들뜬다
어스름 거미집의 중심이 되는 나비
멀리 있는 것이 가까이 보이는 것이다
들판 곳곳이 굳어가는 물관을 연다
통렬(痛烈)의 발견
사무실 바닥에 쓰러지는
사기 분(盆) 깨지는 소리가 경쾌하다
깨진다는 건
오래 지키던 것들이나 품었던 속을 드러내는 일
날카로운 파편
어우러져 하나의 통을
둥근 품을 이뤘던 것들
포장하는 둥'E을 잃어버리는 순간이다
키가 크고 우아한 이국풍 문양의 화분
박살난다는 건
자기를 잃어버리는 모멸인 줄 알았다
얽히고설키게 감싸던 뿌리를 팽개치듯
상처 난 마음
삐죽빼죽한 창이나 칼날 같더니
파편들, 모멸의 조각들
잘근잘근 밟아준다
제자리 찧는 듯, 발바닥 아래
다시 터지는 파열음
빠드득, 결 잃어가는 소리
바닥과 바닥을 찌르며 더 잘게 해부되는
통 - 분
금기(禁忌) 하나 지워진 자리의 공허는
아름다운 잔혹
모멸이 박살나는 순간이다
담지 못할 말을 담아내고 되뇌어 보는
희열에 감전되듯
장렬한 무(無), 깨어져야 보이는 세계를 만나다
자미(滋味)와 의도
김향미
세상에는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일이 일어났으므로, 그건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되었고, 하여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생각의 꼬리를 자르면 사라지는 꼬리에 대해 생각하겠지.
우리 동네 공원에는 저류지가 있다. 바닥에 물의 흔적이 조금 있지만 늘 비어있는 저류지, 그곳에 철제 펜스가 둘러쳐져 있는 것은, 그 비움을 철저히 지키려는 굳은 의지이고, 의지가 높아 가시장미까지 울타리에 가세하고 있다. 여름이면 비움을 지키는 꽃이 필 것이다.
비움은 채움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야 한다. 비움을 자랑하지 않아야 하며 강요하거나 강조하지도 않아야 한다. 비움을 비움이라 인식하지 않는 것, 비어 있음의 존재는 존재인지 비존재인지 의심하지도 않는 것, 채움을 위해 준비된 상태가 아닌 비움으로 가득하여 어떤 다른 의지나 의도 등, 무엇도 끼어들 수 없는 상태이어야 할 것이다.
왜 시가 필요할까. [비]생물이므로, 시를 길러야 하므로. 이미 키우거나 함께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모를 수도 있는. 시는 없어도 있는 것이므로, 기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 것이므로, 씨 뿌리고 추수하여 나누는 양식 같아서,
오늘 아침, 나뭇잎이 떨리는 것은 내가 춤추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햇살이 눈부셨기 때문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나는 춤꾼, 바람이 멈추는 게 두렵다. 늘 조금 모자란 바람이 나를 살아나게 한다. 늘 조금 모자란 바람이 나를 춤추게 한다. 바람은 운명의 선물이다. 지치지 않는 놀이이다.
‘희망, 그 관대한 거짓말, 그 편집증적 꾸며대기, 사건 부정하기를 보자. 희망이란 현실 착오이고 허구이다. 삶은 바로 그 현실 착오 속에 존재하며, 그 허구를 먹고 산다.’
一 에밀시오랑, 「독설의 팡세」 중에서
언제나 끝을 산다. 그치지 않는 너와 너의 너희들. 끝을 밟고 선 자리에 가라앉는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바람이 발끝에서 또 밀고 올라온다. 행사장의 풍선인형처럼 채움이 목적이 될 수 없는, 흔들리는 생을 춤추며 살 줄 알아야 한다.
진심으로 춤이라는 세계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지금도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생각해봐야할 일일까. 동경에 대한 제약이 있을까. 동경은 자유다. 착각이 자유이듯, 동경은 의지도 아니고, 시도 이전이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다. 의지와 시도 사이에 의도가 있을까.
일기를 가끔 썼던 적이 있다. 내 안에 갇혀있는 내가 꿈틀거리는 그것이 빛을 보고 싶다는 발버둥이었을 것이다. 다시 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에 일기장을 펼치고 펜을 든다.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페이지, 빈 페이지에는 설렘이 있다. 줄을 찾아 펜을 댄다. 어떻게 시작할지 고민한다. 일과를 복기하며, 스스로의 심상을 들여다본다. 뭔가 잡힐 때까지 손에 든 펜이 낙서를 한다. 동그라미를 그리거나 네모를 겹쳐 그리거나 뭔가 썼던 글자를 까맣게 칠하고 있거나,
나의 일기쓰기가 그렇게 시작되곤 했을 것이다. 잘 되거나 잘못되는 사건의 원인과 결과와 후속책을 생각한다. 못 볼 것을 볼 줄 아는 것. 못 볼 것 중에는 보이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며, 볼 줄 안다는 것은 처참하거나 참혹하거나 보고 싶지 않은 것까지 볼 수 있는 시선을 포함한다.
있을 수 없는 일까지 볼 수 있다는 의미도 있다. 그것은 시의 내용이 될 수도 있다. 사물과 인간, 인간과 인간, 자신과 자신 사이에 머물러 있던 영적 감각이 세상에 드러내는, 시는 하나의 새로운 종으로 구분해야 하는 [비]생물이다.
누군가, 정립되지 않은 문제들로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거듭하고 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한 가설이나 이론. 보이지 않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면 가설이나 이론으로도 충분하지 않을 수 있겠으나. 의도는 시도 이전의 단계이다.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인간적이란 말로 위로한다. 나의 의사와 무관하게 초대하는, 미래에서 방문하는 손님들. 두려움은 미래에서 온다. 우리의 현재는 그들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 채워진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불완전이란 극복하고 싶지 않은 인식이다.
뼈를 깎는 고통으로 만든 시를 무용지물이라 한탄하는 것은 반어적 표현이다. 스스로에게 그렇게 가치 있는 무용지물이란, 한 마리 물고기처럼 바늘을 입에 문 시인의 피 흘리는 어느 한 조각인 것.
그래서 시란 나 아닌 나 아닌 나 아닌 나, 중의 어느 하나였을 자기 자신이다. 가상의 화자나 가상의 이야기가 시가 되었더라도 시는 시인을 대신하는 어떤 부분이다. 페르소나, 탈이 탈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탈의 역설이다. 자신이 만들어내는 탈이 자신의 인상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저녁 메뉴를 고민하고 화분에 심어진 행운목과 벤자민, 선인장에 물을 줘야 한다. 어항 속 물고기들 먹이를 줘야한다. 우유와 아이스크림을 산다. 영양가를 비교하고 유통기한을 확인하고 무게와 가격을 비교하는 일상을 돌아보며 하루를 또 받아서 쓴다.
그렇다. 받아서 쓰는 것이다. 육체를 받아서 쓰고 시간을 받아서 쓴다. 받아서 쓰는 것으로 무언가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줄 것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시를 찾는 것이다.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 아닌 것이다. 유는 유에서 온다. 그렇다면 무는?
소인은 세인이고 세인에게는 시가 필요하다. 기둥이 멀리 있어서 지붕이 내려앉을 것처럼 불안하다. 낯선 불안이 주인인 양, 어스름으로 감싸는 시간이다. 불이 켜지기 전의 실내는 나를 객처럼 맞이한다. 불안의 공기를 호흡한다. 시를 길러 불안을 정화시키기로 한다.
누구나 재미를 좇는다. ‘자미(滋味)’가 재미의 어원이라고 한다. 영양분이 많고 맛있는 음식이라는 의미라 한다. 우리의 생이 추구하는 것이 그 맛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글에도 영양과 입맛에 따른 기호가 있을 것이다.
‘당신은 거의 전적으로 자신을 떨쳐내기 위해서 쓴다. 당신의 환상과 괴상한 논리를 현실화하기 위해서,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자신의 면모로부터 벗어나거나 그것을 변형시키기 위해서 쓴다. 그런 일은 정말 가능하고, 그것이 가능할 때 글쓰기는 엄청나게 재미있다. 그런데 만약 당신에게 행운이 찾아와서 사람들이 당신의 글을 좋아하는 것 같다면 (중략) 그러나 이제 상황이 차츰 복잡해지고 혼란스러워지는데, 더구나 무서워지기까지 한다 (중략) 순수한 개인적 재미라는 동기는 남들의 호감을 받고 싶다는 (중략) 낯설고 예쁜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하고 당신에게 감탄하고 당신을 좋은 작가로 여겼으면 하는 동기로 교체되었다. (중략) 유혹의 시도가 동기가 되었다. (중략) 당신의 자아가 게임에 끼어들었다. (중략) 당신은 이제 글쓰기에 아주 많은 것을 걸게 되었다. 이 일에는 이제 당신의 허영이 걸려 있다. (중략) 이 구속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재미로 돌아갈 길을 찾아내는 것이다. (중략) 되찾은 재미는 허영과 두려움의 불쾌함을 거치면서 변형된 재미이고, (중략) 이 재미는 말하자면 놀이로서의 일이다. 혹은 규율 잡힌 재미가 충동적이거나 방종한 재미보다 더 재미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 「재미있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중에서
반복되는 고통이 가장 견딜 수 없는 고통이다. 그렇지만 변화가 반복된다면 끝없이 반복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는 끝없이 변화하고 반복되지만 선물이라 하지 않는가. 이상한 것이 많은 시간을 발견하고 밟고 서기를 갈망한다. 이상한 일이란 신선한 일이니까.
이상한 일이 이해 안 되는 일이라 하더라도 인식되었다는 것이 반가운 일이다. 이해를 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일 것이다. 그 일에 어떤 영양분이 있을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어떤 맛을 낼지 감식해 볼 여유마저 있다면 좀 더 재미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찾아야 한다. 나는 눈이 어둡다. 그래서 모든 발견에 느림을 인정한다. 나는 느리게 걷는 보행자이다. 그러나 느리다는 말은 비교대상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느리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로 한다. 그냥 나의 보폭과 나의 걸음이 나의 길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느리고 빠르다는 건 달리기에서나 필요한 의미이다. 춤에서는 느린 박자와 빠른 박자의 선과 무늬와 감동이 다르게 존재한다. 생은 달리기라기보다는 춤이라는 생각 쪽으로 기운다. 각각의 아름다움과 재미가 있으니까.
‘여기 아직 기쁨은 있다. 다만 네 스스로 고통에 집착함으로써 알아채지 못할 뿐이다.’
― 「이성복 아포리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