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 관상, 성명철학, 점성술 등 인간의 운명과 길흉화복을 미리 내다보는 갖가지 형태의 점술을 비과학적 미신 따위로 마냥 타기(唾棄)할 필요는 없겠다. 이를 테면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는 ‘일기예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예보대로 폭우가 쏟아진다면 미리 들고 나간 우산을 더없이 긴요하게 쓸 것이고, 설령 비가 오지 않는다 해도 우산 들고 다니는 불편함만 감수하면 될 터이다. 나쁜 점괘가 나오면 대비하면 되고, 좋은 점괘가 나오면 절대적이라고 맹신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잠시나마 즐거워하면 그뿐이다.
최근 주역이론을 독특하게 집대성한 ‘육갑경’을 펴낸 역술가 마의천(59·본명 심세영)으로부터 갑신년 나라의 운세와 그의 역술인생에 얽힌 얘기들을 들어보았다. 인터뷰는 그가 자신의 본관(청송 심씨)을 따서 이름붙인 서울 삼청동 ‘청송산방(靑松山房)’에서 진행됐다.
마의천은 “올해 우리나라는 ‘군웅취합(群雄聚合)’과 ‘거구생신(去舊生新)’의 운세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지난해의 경우 각 부문마다 외형적인 틀은 마련됐지만 그것을 실제로 이끌어나갈 인물들이 없었는데 올해는 수십년의 은둔생활 끝에 강태공이 출사(出仕)하듯이 수많은 인재들(군웅)이 속속 모여들어(취합) 활동을 개시함으로써 나라의 운세가 전반적으로 좋아진다는 것이다. 이는 극적인 대선승리에도 불구하고 지난 1년동안 혹독한 어려움을 겪은 노무현 대통령에게도 적용된다고 마의천은 말했다. 경제사정도 지난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몇곱절 좋아질 것이라고 낙관적 전망을 내놓았다.
=한나라당 총선이전 갈라질것=
마의천은 또 이번 4·15총선에서는 옛세력이 가고 새로운 인물들이 진출하는 ‘거구생신’의 추세가 그 어느 때보다 뚜렷해질 것이며 한나라당은 총선 이전 분당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마디로 기득권세력이 패퇴한다는 것이다. 그는 정가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여성 대통령론’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20년 전 갑자년부터 여성들의 운세가 상승하기 시작했는데 차기는 아니고 차차기에 건국 이래 최초로 여성대통령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강금실 법무장관과 박근혜·추미애 의원 등 잠재적 주자 중에서 누구냐는 질문에 그는 “세 사람 중에서 나올 수도 있고 지금으로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일 수도 있다”며 직답을 피했다.
마의천의 총선정국 전망이나 여성대통령론이 그대로 들어맞을지는 그야말로 끝까지 지켜봐야 알 일이다. 다만 그는 지난 대선때 ‘이회창 대세론’의 시점에서 ‘노무현 당선 이회창 낙선’을 예고해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다. 마의천은 “정치적 편견은 전혀 없었다”면서 “두 사람의 관상으로 그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이회창의 경우 이마가 윤택하고 단정하나 전반적으로 얼굴이 얇아(薄) 모든 영달이 60세 이전에 다한 운세였으며, 노무현의 관상은 전체적으로 두터워(厚) 대운(大運)이 따를 가능성이 높았다는 것이다.
마의천에 따르면 인간의 명(命)은 태어날 때 타고나는 선천운(先天運)인 숙명(宿命)과 가변적 후천운(後天運)인 운명(運命)으로 나눠지는데 그 비율은 7대 3이라고 한다. 사주팔자를 비롯한 역학이 필요한 것은 자신의 노력에 따라 만들어갈 수 있는 운명의 존재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의천은 “역학은 인간이 가야 할 길을 비춰주는 등대와 같은 것”이라며 “바로 이 때문에 역학은 결코 미신이 아니라 사주명리학(四柱命理學)의 학문”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마의천은 해방되던 해인 45년 광주(당시 전남 광산군 서방면)의 천석꾼 대부호 집안의 1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위로 형 4명이 있는 상태에서 어느 도인이 ‘아들 한 명이 더 있어야 한다’고 조언하는 바람에 누나 8명이 내리 태어났다. 마의천 바로 위의 형이 태어나 도인의 가르침을 따랐으나 18개월 만에 병사하는 바람에 마의천은 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아버지가 환갑을 맞아 얻은 만득자(晩得子)였다. 마의천은 “내가 예지력을 갖게 된 것은 그때 죽은 형의 동자신이 옮아왔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의대 지망생의 모범적인 길을 걷던 그가 옆길로 샌 것은 중학시절 자신이 빨간색과 푸른색을 보지 못하는 적록색맹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부터였다. 이후 마의천은 칸트, 니체, 헤겔 등의 철학서적을 탐독하는 한편으로 ‘주먹들’과도 어울렸다.
뒷날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조직폭력배 광주 서방파의 두목 김태촌도 그때의 멤버였다. 마의천은 “서방파의 원조는 바로 나”라고 웃었다. 마의천이 역술가로서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졌을 무렵 서울 유흥가를 평정한 김태촌이 고향선배인 그를 찾아와 서방파의 고문역을 맡아달라고 요청했을 때 ‘이미 사주쟁이가 됐는데 어떻게 건달을 하겠느냐’며 물리쳤다.
=28세때 팔자대로 사주쟁이 길로=
19살 되던 해 어느 날 자신이 나아갈 길을 직감한 마의천은 홀연히 공주 마곡사에 입산해 운명적인 스승인 법옹장사를 만났다. 승려였다가 환속한 뒤 절에서 계속 수도를 하고 있던 법옹은 유·불·선·도·역에 통달한 기인이었다. 스승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오대산 월정사로 옮긴 마의천은 탄허선사로부터 동역거사(東易居士), 광하(狂河) 등의 아호를 하사받았다. 마의천(麻衣天)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도 이때였다.
군복무를 마친 마의천은 한때 볼링장과 당구장을 운영하기도 했으나 ‘팔자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28살때 역술가의 길을 걷기 위한 입산수도를 재개했다. 하산한 그는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영업’과 ‘공부’를 병행했다. ‘노류장화와 관상쟁이는 선산 아래서 하지 않는다’는 철칙에 따라 그는 선산(광주)을 제외하고는 거치지 않은 땅이 없을 정도로 옮겨다녔다.
서울로 온 그는 한때 ‘욕망과 열정은 가득한데 현실은 그것을 따르지 못하는’ 것을 아파하면서 인사동 일대에서 매일 만취한 뒤 대로에서 옷을 벗는 등 기행을 일삼기도 했으나 역술가로서의 명성은 점차 알려지기 시작했다. 유명인들의 운세를 봐주면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유명인사들 관상봐주다 유명세=
마의천에게 운세를 물었던 고객들 중에는 정계·재계·연예계 등 각계의 내로라 하는 인사들이 즐비하다. ‘학상(鶴相)’으로 사주관상으로서는 대통령감으로 충분했던 고건 국무총리의 경우 여러 번 출마를 권유했으나 결국 시기를 놓쳤다고 한다. 열린우리당 김근태 원내대표가 아직 옥중에 있을 무렵 마의천은 ‘1∼2년의 변혁기를 거쳐 해를 쫓는 금까마귀’의 운세라고 예견했고 김대표는 금배지를 단 뒤 쌀 한 가마니를 보내왔다.
서울 서대문에서 낙선한 뒤 실의에 빠졌던 민주당 김상현 의원은 ‘광주로 내려가 출마하라’는 마의천의 귀띔을 받고 재기에 성공했다. 고객은 아니었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경우 마의천은 10·26 훨씬 이전에 ‘흑표(黑豹)’의 상을 지닌 박대통령이 ‘전상지화’(箭傷之禍-화살에 맞는 화를 입음)를 당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고 정주영 회장에게는 ‘사업으로 빛을 내야지 대권에는 도전하지 마라’고 말렸으며 대우 김우중 회장에게는 눈밑의 자식궁(子息宮)을 보고 장자(長子)운이 없음을 예견했는데 결국 김회장의 장남 선재군은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한화 김승연 회장은 마의천으로부터 결혼택일을 잡았다. 코미디언 이주일에게는 ‘얼굴이 얇아 가난하면 장수하는데 돈이 많아 단명한다’고 말했고, 가수 나훈아에게는 ‘같이 살고 있는 여자(김지미)와 빨리 헤어지는 것이 좋다’고 넌즈시 귀띔하기도 했다.
청송산방을 나서기 전 마의천에게 관상 한번 봐달라고 요청했다. 그의 형형한 안광(眼光)이 얼굴 곳곳에 내려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이윽고 돌아온 대답이 ‘2년 안에 그만둘 운세’라는 청천벽력이었다. 그럼 장사나 사업을 해야 하느냐고 캐묻자 ‘그 고비만 넘기면 5년은 해먹으니 신문쟁이를 계속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오륙도’에는 이르지 못하지만 ‘사오정’은 통과하는 것일 테니 다행인가 불행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