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수·기수 강물 교차하는 하비성 조조 두 개 뚝 무너뜨리고 총공세 고대전쟁에서 중세전쟁까지 성을 공격하는 공성전은 전쟁의 압권이었다. 수많은 희생을 치러도 견고한 성을 함락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성을 공격하는 방법으로 물이 사용된 것은 공성전의 어려움 때문이었다. 기원전 547년 페르시아 대제국을 건설한 키루스 대왕은 바빌론 공격에서 물을 이용한 공격으로 성공한다. 성을 둘러싸고 흐르는 유프라테스의 강줄기를 바꾸어 승리를 쟁취한 것이다. 일본 통일을 이루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수공전술의 대가였다. 1582년 다카마쓰 성을 공격할 때 성 주변으로 물을 막는 둑을 쌓아 성에 물이 차게 했다. 적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2년 뒤에 타케가하나 성 공방전 때도 동일한 방법으로 승리를 거두는 등 물에 의한 성 공격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삼국지에도 물로 성을 공격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조가 여포를 공격한 하비성 전투에서의 일이다. 삼국지 최고의 맹장 중 하나가 여포다. 용맹과 개인전투능력만으로 볼 때는 가히 최고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머리가 둔하고 신의가 없어 당시 모든 나라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폭정을 부리던 동탁을 죽였음에도 어떤 영주도 여포를 상대해 주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유비가 영주로 있던 서주로 가서 신세를 지게 된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더니 여포는 유비를 쫓아내고 서주를 차지해 버렸다. 여포에게 쫓겨난 유비는 어쩔 수 없이 허도에 있는 조조에게 의지하게 된다. 196년 조조는 원술을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켜 서주를 공격했다. “용맹하기로는 범 같은 자나 절개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으니 살려두면 후환이 있을 것이다. 이번 기회에 여포를 없애도록 하자.” 조조는 하비성을 본거지로 삼고 있는 여포를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삼국시대 당시 서주는 하비군에 포함돼 있었다. 그리고 서주의 남쪽 교외에 위치한 사수(泗水)와 기수(沂水)의 강물이 교차하는 지점에 하비성이 있었다. 수많은 병력을 동원한 조조였지만 기수와 사수 등 수비하기 좋은 요충지인 하비는 공격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여포는 성안에 많은 군량과 말을 비축해 장기전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그리고 진궁이라는 잔꾀에 능한 모사가 여포를 보필하고 있었다. 조조와 여포는 성을 사이에 두고 두 달 이상 대치하고 있었으나 뚜렷한 승기를 잡을 수는 없었다. 여포의 모사인 진궁은 여러 가지 계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여포가 받아들이지 않아 소극적인 방어에만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조조 역시 하비성의 견고함과 여포의 용맹성으로 인해 공격에 소극적이었다. 대치가 계속되면서 조조의 병사들이 지쳐갔다. 회군하자는 의견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조조의 참모인 곽가가 기막힌 전략을 내놓았다. 하비성의 천연방어선이기도 한 사수와 기수를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즉 사수와 기수의 둑을 무너뜨려 성 안으로 물이 들어가게 만들어 고립시켜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조조는 곽가의 전략을 채택해 두 개의 강둑을 무너뜨렸다. 물은 이내 성벽까지 차올랐고 성은 점점 고립돼 갔다. 이제 시간이 지나면 성은 저절로 무너질 것이었다. 이런 와중에 여포가 부하 장군인 후성에게 가혹한 체벌을 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후성, 송헌, 위속 세 장수는 여포의 애마인 적토마를 훔쳐내 성 밖의 조조에게 항복했다. 이젠 여포 진영에는 여포 외에는 싸울 장수도 없었다. 그날 밤 조조는 물이 덜 차오른 동문으로 총공격을 감행했다. 여포를 배반한 송헌과 위속은 병사를 이끌고 침실을 습격해 여포를 생포했다. 생포된 여포는 비굴하게 조조에게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여포, 꼴사납소.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다 죽는 법이라오.” 가차없이 여포의 목이 달아났다. 일세의 영웅이었던 여포는 이로써 삼국지의 무대에서 쓸쓸히 사라졌다. 하비성 전투는 곽가의 전략을 따른 조조의 수공작전이 큰 위력을 발휘했다. 한 뛰어난 참모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를 잘 보여준 전투가 하비성 전투다. 이 싸움에서의 승리로 조조는 당대의 패자로 일어서는 전기가 됐다. [TIP]뛰어난 참모는 리더에겐 큰 복 곽가는 원소의 참모로 있다가 원소의 졸렬함에 실망해 조조의 모사로 옮긴 후 최고의 참모로 자리매김했다. 하비성 전투 때는 기수와 사수를 끊어 물로 성을 공격하자는 전략을 내놓아 승리의 일등공신이 된다. 대기근 때 조조가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보리밭을 어지럽힌 자는 참수형에 처한다’고 군율을 정해놓았다. 공교롭게도 조조의 말이 놀라 보리밭을 짓밟았다. 곤경에 처한 조조에게 곽가는 “춘추의 법은 고귀한 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라는 말로 난관을 해결해 준다. 오환 정벌과 원상, 원희 형제문제까지 해결하는 놀라운 탁견으로 조조를 도왔으나 38세의 나이에 풍토병으로 죽는다. 적벽대전에서 패한 조조가 “곽가가 있었으면 이렇게 지지 않았을 터인데”라고 울었다고 할 만큼 조조에게는 제갈공명보다 뛰어난 참모가 곽가였다.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