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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캄캄해도 희망하십시오!
일반 교우들뿐만 아니라 의외로 많은 사제 수도자들이 정말 어렵다고 하소연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 기념일을 맞이하시는 아빌라의 데레사 수녀님 같이 진한 하느님 체험 제대로 한번 해보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곤경 중에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느님께서는 깊은 침묵 중에 계시는 느낌을 받는답니다. 혹시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하느님 부재체험을 겪는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우리 가톨릭교회 안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영성생활의 대가들께서도 우리와 비슷한 그런 체험을 하신 기록이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사실 데레사 성녀의 인생에서 묵상과 관상을 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삶이었습니다. 이런 데레사였지만, 그분 역시 오랜 세월 동안 영혼의 깊은 밤을 헤매 다녔습니다.
깊은 하느님 부재체험과 더불어 오랜 방황과 고뇌를 거듭했습니다. 자서전에서 그녀는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고 잊혀졌다는 느낌, 고통스러웠던 세월의 흔적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는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한편으로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신다고 느꼈지만, 다른 한편으로 나는 세속을 찾아 헤매 다녔습니다. 세속적인 향락에 자신을 던질 때는 하느님께 빚진 것에 대한 기억이 나를 괴롭혔습니다. 하느님 일에 종사하면 세속적인 성향이 나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나는 하느님과 세속 사이에 어느 것도 포기하지 못하고 가운데 끼어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이 그렇게 뚜렷하게 들리는데도 나는 그 소리에 따를 힘이 없었습니다.”
보십시오. 이 영성생활의 대가께서도 오랫동안 수녀복을 입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조금도 하느님께로 가까이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영적인 삶에로의 발 돋음이 얼마나 힘겨웠던지 그녀는 이렇게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오, 지루하고 고통스런 삶이여! 산다고 할 수 없고 완전히 버림받아 그 누구로부터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삶이여! 주여, 언제이옵니까? 아직 얼마나 더 계속 되려나이까?”
영적인 삶에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듯한 수직상승이 없습니다. 기도 생활 역시 힘 하나 안들이고 에스켈레이터 타고 올라가듯이 편안하게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한 발 한발 오르막 계단을 이용해 밟고 올라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오랫동안 지속된 깊은 영혼의 밤, 끔찍한 하느님 부재 체험, 지루한 자신과의 싸움이 데레사의 신앙 여정 안에 계속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데레사는 영혼의 무미건조함에 대해서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아주 소중한 깨달음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귀여워하시는 이들을 고생길로 이끄시고 많이 아끼실수록 많은 고생을 내리십니다.”
“최고 단계의 완전성은 내적 위로나 고상한 황홀감이나 현시, 예언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뜻을 그분의 뜻에 합일시키고 그분의 뜻을 우리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뜻과 우리의 뜻을 동일시하는데서 출발합니다.”
“여러분에게 청합니다. 여러분의 이성을 가지고 그분에 대해 생각하지 마십시오. 많은 개념들도 끄집어내지 마십시오. 대단하고 복잡한 명상도 하지 마십시오. 그분을 바라보는 것 외에 나는 아무것도 청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영혼의 성(城)깊은 곳에 있는 궁방으로 들어가는 거대한 은총의 문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알고 자신을 알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통과해야하는 문입니다. 좋은 벗과 함께 있기를 원하는 것, 하느님과 단둘이 우정을 나누기를 원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리고 데레사는 오늘도 영혼의 깊은 밤 속에 하느님 부재 체험을 겪으면서 지루한 영적 투쟁을 해나가는 우리에게 역사에 길이 남을 소중한 조언을 해주고 계십니다.
“무엇으로도 마음을 흐트러트리지 말며 무엇에도 놀라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지나가나 하느님만은 변하지 않습니다. 인내는 모든 것을 성취합니다. 하느님만을 차지한 사람에게는 부족할 것이 없으니 하느님만으로 충분합니다.”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영혼의 어두운 밤, 하느님 부재 체험, 버림받은 느낌이 다가 올 때 마다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가 있습니다.
캄캄해도 희망하는 일입니다. 언젠가 이 어둠이 걷히고 밝은 대낮이 다가오는 것을 확신하는 일입니다. 그저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앞길이 막막해도 우선 내 발에 묻은 진흙을 털어내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로 내 등 뒤에서 나를 떠받히고 계심을 확신하는 일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루카 11,37-41
지나친 의전이나 형식주의는 내적 탐욕과 사악의 열매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의 ‘형식주의’를 비판하십니다.
예수님은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관습을 따르지 않으십니다.
이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는 바리사이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사람이 형식주의자가 되는 이유는 속이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숨기기 위해 그 반작용으로 겉은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겉을 지나치게 깨끗하게 하고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는 사람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들 안에는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다면 형식주의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랑하면 됩니다.
사랑이 있으면 형식에 신경 쓸 에너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저의 동기 신부 하나가 보좌 신부 때 랍스터를 처음으로 단 한 번 먹어보고는 다시는 먹지 않겠다고 말하던 기억이 납니다.
동기 신부가 부자 동네 본당에서 제2 보좌를 할 때였습니다.
그 신부의 영명축일을 맞이해서 본당 청년들이 신부님께 음식 대접을 해 드리겠다고 청했습니다.
그 신부는 학생들이 돈이 어디 있느냐며 거절을 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선배 신부인 제1 보좌 신부님을 통해 청년들에게 잘 좀 이야기를 해 달라고 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제1 보좌 신부님은 신부님이 청년들에게 부담 주기 싫어서 그러는 것이니 이해하라고 청년들을 설득했으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신부님은 워낙 고급스러워서 너희들 돈 많이 들걸?
그 신부님은 최고급 호텔 레스토랑 아니면 안 가.”라고 겁을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청년들은 돈을 모아 호텔 레스토랑에 랍스터를 예약해 놓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축일 날 그 신부님은 청년들을 따라 레스토랑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자마자 주눅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몇 개씩 놓여있는 스푼과 나이프, 포크 등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고, 또 랍스터가 나왔는데 함께 나오는 서로 길이가 다른 가위와 뱀 혀처럼 생긴 꼬챙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몰라서 청년들을 보며 따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청년들은 또 신부님이 먼저 드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식은땀을 흘리며 먹고 있는데 이번에는 청년들이 포도주를 시키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부님께 어떤 포도주를 좋아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촌스러웠던 그 신부님은 “어? 그냥 다 좋아!”라고 말을 흘렸고 청년들은 자신들이 고른 포도주를 시켰습니다.
웨이터는 포도주를 따고 신부님에게 “테이스팅 하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신부님은 “어…. 그냥 주세요. 좋은 포도주 같은데….”라고 하였고 청년들은 급기야 자기들끼리 키득키득 웃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 긴장 속에 식사를 마치고 집에 와서 라면부터 찾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결론적으로 말했습니다.
“내가 아닌데 그런 척하려니까 정말 힘들더라. 그냥 음식은 맛있게 먹으면 되는데.”
맞습니다.
본질보다는 형식에 주위를 더 기울이며 살면 인생을 즐기는 것은 포기해야 합니다.
어떤 유명한 포도주 전문가가 말했습니다.
“포도주는 마시고 취하면 그만입니다.”
아마 음식 전문가도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먹어서 맛있으면 좋은 음식입니다.”
옷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은 것을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면 잘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형식이 가미되면 그만큼 힘들어집니다.
청년들이 고급 레스토랑에 가기를 싫어하는 사제를 억지로라도 그런 곳으로 모셔서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과연 사랑일까요? 만약 사랑했다면 형식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형식을 차리며 먹는 랍스터보다 집에서 혼자 끓여 먹는 라면이 더 맛있습니다.
형식에 얽매이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음식을 대접하는 것일지라도 말입니다.
자유롭게 해 주는 게 사랑입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사람들은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자기가 먼저 그런 형식을 파괴함으로써 주위 사람들을 편하게 해 줍니다.
저도 유학을 10년 가까이 다녀왔기 때문에 물론 어느 정도는 레스토랑 식사법에 대해 압니다.
그러나 약간 어려워하는 신자들과 그런 곳에 가면 스테이크를 자르지도 않고 그냥 포크로 찍어서 한 입 베어 뭅니다.
삶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형식을 중요시 하는 곳에 가면 숨이 막힙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교회 내에도 이런 형식주의가 얼마나 만연한지요? 예를 들어 이탈리아는 신부님, 주교님, 추기경님, 교황님이라 부르기보다는 Reverendo(존경할만한 분: 사제),
Eccellenza(탁월하신 분: 주교), Eminenza(위대하신 분: 추기경), Santita(거룩하신 분: 교황) 등의 칭호를 붙입니다.
예수님이 들으시면 웃으실 것입니다.
이런 용어들은 하느님도 어쩌면 부담스러워서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직자들이 이런 용어로 불리고 있는 것입니다.
본질과 형식은 어떻게 균형을 맞추어야 할까요? 그냥 본질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본질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형식만 하면 됩니다.
이는 마치 나뭇잎과 열매의 관계와 같습니다.
나무는 분명 잎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언제나 열매에 있습니다.
열매가 가져가야 할 에너지까지 잎을 키우는 데 쓰면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게 됩니다.
그러면 못 쓰는 나무가 됩니다.
에너지를 잘 조절해야 합니다.
열매를 최대한 많이 맺게 하려면 잎은 최소한의 에너지를 쓰게 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나라 오셨을 때 의전 차량을 가장 작은 것으로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고심 끝에 소울로 의전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돈을 자랑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면
교황님께서 그렇게 하는 것이 기분 나쁠 수도 있습니다.
돈 자랑할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이 커지기 위해 형식은 작아져야 함을 압니다.
형식이 지나치면 모두가 사랑의 에너지를 빼앗는 것입니다.
나무는 열매와 잎의 균형을 맞출 줄 압니다. 그러나 인간만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균형을 맞추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 안에 있는 탐욕과 사악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무 형식에 치우치고 있다면 그만큼 사랑에 쏟을 에너지가 줄어들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11,37-41: 겉은 깨끗이 닦아도 속에는 착취와 사악이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38절). 주님의 행동이 보통 사람과는 다른 특별한 것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의인이요 예언자라고 하는 자가 전통적 습관을 따르지 않은 것을 보고 놀랐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39절) 예수께서는 식탁에 놓인 잔과 접시를 들어 비유로 말씀하셨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육신의 더러움뿐 아니라, 마음에 감추어진 것까지 씻어내야 한다고 하신다. 이는 육체를 지으신 분이 영혼도 지으셨다는 뜻이다. 겉과 속이 다 하느님의 작품이기 때문에 씻을 때는 똑같이 씻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자선을 통해 깨끗해질 수 있다. 자비가 우리를 깨끗하게 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깨끗하게 한다. 또한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 주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 준다.”(토빗 12,9) 했으며, “네 곳간에 자선을 쌓아 두어라. 그것이 너를 온갖 재앙에서 구해 주리라.”(집회 29,12) 하셨다.
자비로운 행위는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나그네에게 잠자리를, 도망자를 숨겨주는 것만이 자선이 아니다. 병든 이와 갇힌 이를 찾아가고, 포로를 풀어 주고, 지친 사람의 짐을 져 주고, 눈먼 사람을 인도하고, 슬퍼하는 이를 위로하고, 병든 사람을 고쳐주고, 길 잃은 이에게 바른길을 일러 주고, 조언을 해주는 것도,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도 자선이다. 용서하는 것도 자선이고 훈육하여 잡아주는 것도 자선이다.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의 죄를 용서하고 그가 용서받기를 기도한다고 하면 그는 자선하는 사람이다. 용서하고 기도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잘못한 자를 꾸짖고 적절한 벌과 함께 그를 바로잡아 줌으로써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자선에는 종류가 많다. 자선을 베풀면 우리 죄를 용서받는 데 도움이 된다. 언제나 자선을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어렸을 때, 본당 신부님은 외국 신부님이셨습니다. 키도 크고 호리호리한 외형, 머리 색깔도 다르고 피부색깔 또 눈색깔도 다른 외국분이었습니다. 이렇게 우리와 다른 외모에 처음에는 거리감도 많이 느꼈었지만,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잘 놀아주셔서 지금은 포근함과 따뜻한 분으로 신부님의 모습을 기억의 한 편에 담아두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5년 전의 기억입니다. 이 외국 신부님에 대한 기억은 이렇게 완성형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존재, 절대 실수란 없을 것 같은 분, 심지어 화장실도 가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당시 신부님의 나이를 계산해 보니 30대 초중반인 것 같습니다. 지금 제 나이가 50대 중반이니 저 역시 완성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부족하고 불완전한 것투성이입니다. 오히려 부족함이 더 첨가되었습니다. 노화로 인해 눈도 잘 안 보이고, 잘 뛰지도 못합니다. 헛된 고집만 세진 것 같습니다.
나이를 먹는 줄도 몰랐는데 자각할 틈도 없이 세월만 흘렀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살았을 뿐인데 어느새 지금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완성형이 되지는 못할지라도 후퇴는 해서는 안 될 텐데 점점 뒤로만 가는 것 같습니다. 몸의 후퇴는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마음의 후퇴는 있어서는 안 되는데 말이지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강조하셨던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사랑의 반대편에 살면서 부정적인 마음으로 가득했던 것이 아닐까요? 몸뿐 아니라 마음도 후퇴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주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쓸데없는 욕심과 이기심으로 뒤로 가는 삶이 아닌,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서 하느님 나라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떤 바리사이가 예수님을 초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손을 씨지 않는 것을 보고서 놀랍니다. 단순히 유다인의 관습일 뿐인데, 이를 지키지 않는다고 불편하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라고 꾸짖으시면서, 자선을 베풀라고 그래야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는 위선적인 신앙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이는 주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주님에게서 멀리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후퇴의 길이 아닌 완성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면 참으로 깨끗해진다는 예수님 말씀을 따르면서 완성의 길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세르반테스).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루카 11,39)
만일,
우리 안에
탐욕이 담겨있다면
우리는
남들에게
악한 것들을 내어주게 되지만
진정,
우리 안에
사랑이 담겨 있다면
우리는
남들에게
선하고 좋은 것들
즉, 용서와 자선을
스스럼없이 내어주게 된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말로써 신앙을 고백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천으로 자신의 믿음이 올바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많은 강론과 강의를 하면서
자주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
나를 전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있지는 않은지
또 신자들을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나는 지키지 못하는 것들을
가르치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 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저 자신의 모습을
냉정하게 들여다보라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사제인 저에게
가식과 위선으로 이중적인 삶을 극복하는 것은
평생에 걸친 화두요 숙제입니다.
열 개는 아는 사람은
단 하나를 알더라도
그 하나를 실천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는 것이 많지 않아도
겸손하게 단 하나를 실천하는 사람이
그래서 더 아름답습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루카 11, 41)
아래로 아래로
고개를 숙이는
가을들판의
벼이삭을 봅니다.
기도로 힘을
얻습니다.
마지막까지
하느님께
충실했던
아빌라 데레사의
삶입니다.
감춰진 신비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안 풀리는 삶도
찢어지는 이
마음도 사랑의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신앙의 여정은
끊임없이 하느님을
선택하는 선택의
절제된 여정입니다.
끝까지
가봐야 아는 것이
신앙의 참된
여정입니다.
뜻을 이루시는
하느님의 계획은
깊고 깊습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먼저 우리의
마음을 씻는
회개입니다.
회개없이는
깨끗해지는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일치를 체험합니다.
기도는 열매를 맺고
회개는 고개를
숙이는 정화가 됩니다.
우리 영혼의
방향은 언제나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로
나아갔던
아빌라 데레사
성녀처럼
오늘도 그분께로
나아가는 아름다운
날 되십시오.
모든 것은 지나가고
모든 것은 우리를
가르치는 스승입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10.15)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11,41)
'본질에 충실하자!'
오늘 복음(루카11,37-41)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을 꾸짖으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예수님을 초대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 식사를 하시는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십니다.
"정녕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11,39-41)
율법은 십계명과 모세오경(창세기.탈출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이 근본을 이루고 있고,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613개나 되는 또 다른 율법 규정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주신 십계명과 모세오경이 율법의 본질입니다. 그 본질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이 본질에 충실하지 않고,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형식에 충실하였습니다.
마음 속을 깨끗이 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마음 속에 탐욕과 사악한 것들을 쌓아놓고서, 겉으로 열심히 신앙생활 하고 있는 것처럼 살아가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형식과 규정에만 머물지 말고, 본질을 바라보고, 본질을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만 충실하지 말고, 마음 속을 깨끗이하는 본질에 더 충실합시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갈라5,6)
(~ 1역대 10,12)
복음말씀
제1독서
<할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5,1-6
형제 여러분, 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2 자, 나 바오로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할례를 받는다면
그리스도는 여러분에게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3 할례를 받는 모든 사람에게 내가 다시 분명히 말합니다.
그들은 율법 전체를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4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와 인연이 끊겼습니다.
여러분은 은총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5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믿음으로 의로워지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6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37-41
그때에 37 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
38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39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41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