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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다해 5월5일 목요일 복음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수도회]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는 원리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사도 18,1-8
† 복음 요한 16,16-20
◈ 오늘의 묵상
우리는 질문합니다. “이 시대가 어디로 갈까? 세속주의와 물질주의가 팽배한
이 세상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하느님과 교회의 가르침이 젊은이들에게
매력을 주지 못하고,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현상들이 늘어나는 이
시대가 우리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우리 개인의 삶에서도, “왜 하느님께서는
나의 어려움과 아픔을 모르고 침묵하시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도 이와 비슷한 혼란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을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부활의 영광을 아직 체험하지 못하였습니다.
어쩌면 우리 삶이 어두울 때, 예수님의 수난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삶의 수난과 십자가를 넘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 마음은 기뻐 뛰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어지러운 이 시대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존재지만, 바로 그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은 이웃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사람은 하느님의 ‘때’를 알아보고,
그분의 인류 구원 계획에 동참하게 됩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2016년 다해 5월5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제1독서
<바오로는 그들과 함께 지내며 일을 하였고, 회당에서 토론을 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8,1-8
복음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6-20
오늘 새벽 일어나자마자 시계를 보니 1시 30분입니다. 이런 너무 일찍
일어났습니다. 조금 더 자야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불을 끄고 잠이 들었다가
다시 일어나니 이번에는 2시 55분입니다. 보통 3~4시에 일어나니까 5분
정도 더 일찍 일어난 것입니다. 순간 조금만 더 누워 있다가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있다가 일어나보니 글쎄 4시 30분입니다.
이제 정신없이 바빠집니다.
아마 저와 같은 경험을 해보신 분이 많을 것입니다. 나의 이성적인
측면에서는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정확하게 일어나서 할 일들을 충실하게
이행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다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감성적인
측면은 따뜻한 이불 속에서 미적거리면서 단 몇 분만이라도 더 자고 싶어
합니다. 이 감성적인 측면이 이겨서 잠에 곯아떨어져서 낭패를 겪은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미국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위한 자명종 시계가
발명되었다고 하지요. 이 세계에는 바퀴가 달려서 자명종을 울리면서 곳곳을
휘젓고 다니기에 어쩔 수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시계와의 추격전을 해야
한답니다.
이성적인 측면이 이기는 삶을 살아야 하지만, 사실 우리는 감성적인 측면이
주가 되는 삶을 살 때가 많습니다. 죄를 짓겠다고 마음먹는 사람이
있습니까? 남을 미워하고 판단하고 단죄하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사는
사람은 어떤가요?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희생과 봉사를 하고 싶다는 마음을
품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다 이성적인 측면에서는 이런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립니다. 보다 더 옳게 살겠다고, 보다 더 주님의 뜻에 맞게
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성적인 측면보다는
감성적인 측면에 쉽게 이끌리곤 합니다. 그래서 죄를 짓고, 남을 미워하고
판단하고 단죄하며,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의 죽음과 수난 그리고
부활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을 미리 해주셨을까요? 제자들이
감성적으로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이성적으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받아들여서 보다 더 올바르고 적극적으로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감성적으로 자신도 모르게 악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막고,
대신 이성적인 측면에 의지를 세워서 선으로 향하는 삶을 살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쉬운 일만 좋아하는 사람은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다. 어려운 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성공할 것이다(중국속담).
오늘은 어린이날.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이 행복하길 바랍니다.
왜 부자들은 모두 신문배달을 했을까(‘따뜻한 하루’ 중에서)
세계적인 마케팅 컨설턴트 제프리 폭스는 우연한 기회에 유명한 기업들의
CEO들이 대부분 신문배달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이들이 신문배달을 통해 배운 것을 다음과 같이
'신문배달 10계명'으로 만들었습니다.
1. 절대로 빼먹어선 안 된다.
2. 시간이 생명이다.
3. 아프지 않게 몸을 관리해라.
4. 휴가를 함부로 쓰지 말라.
5. 캠프도 가지 말라.
6. 비에 젖어 찢어진 신문은 있을 수 없다.
7. 자전거를 관리해야 신문을 잘 돌릴 수 있다.
8. 길을 절대로 잃어버려선 안 된다.
9. 피곤한 생활 습관을 버려라.
10.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제프리 폭스는 이 가르침이 모든 경영의 기본이자 자기 관리의 기본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신문 배달은 작은 일이지만 이처럼 많은 노력과 헌신이
필요한 일입니다.
저도 초등학교 때에 신문배달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는 그저 용돈 좀
벌어보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이런 뜻이 담겨 있네요. 그런데 어쩌면
모든 일이 다 그렇지 않을까요? 어떤 일에도 다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
의미를 바라보지 못하고 어렵고 힘들다고만 하면서 불평불만 속에 매여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어제 강한 바람에 성지의 나무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는 원리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5얼5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요한 16,16-20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요한 16,20)
"You will grieve but your grief will turn to joy."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는 원리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십자가상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이별과
다시 만남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16,16)
이 말씀은 육신의 죽음을 맞겠지만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을 이길 수
없고 죽이지 못함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일으켜지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랑을 보여주시고 박해와 죽음의
상황에서도 살아갈 준비를 시켜주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이야말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오히려 생명을
주고, 어둠에 빛을 밝히시며, 절망을 희망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바꿔주시는
길이요 문이심을 보고 체험해왔음에도 그분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절망하고 슬퍼합니다.
우리 또한 영적인 메마름, 하느님의 부재 체험, 무의미, 사회 부조리를
경험하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며 절망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많은 순간 고통과 시련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그것 너머의 의미,
곧 그것을 통해서 주시는 하느님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세월이 한참
지나서야 지나온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다고 깨닫는 것은 어리석음이
아닐까요?
우리도 고통 없는 인생, 불의가 닥치지 않는 평온한 삶을 원하고, 또 그렇게
살다가 겪는 아픔과 시련과 슬픔에 대해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 상황을 피하거나 부인하려 들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의미를 찾으려 하기보다는 거부하고 저항하며 자기식대로 반응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특히나 내가 원하지 않은 고통과 빈곤, 육신의 병과 영혼의 어두움과 불행을
겪을 때면 왜 하필이면 이런 것들이 나에게 주어지는지 묻곤 합니다. 도대체
왜 이런 상황에서 자비하시고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침묵하시는 것일까 하며
의심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세상에 의미없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행복은 고통과 환란을 거쳐 오는데 우리는 고통의 한복판에서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언제나 내 곁에서
서성대는 고통의 한복판으로 들어갈수록 그 고통의 원인을 곧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고백록'에서 깊이 있게 성찰하였듯이
고통과 죄악은 주님께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에서부터 나오는
죄로 기우는 경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근심 저편의 기쁨을 보지 못하는 것은 나의 교만과 이기심 때문입니다.
교만은 십자가 너머의 부활을 알아보는 눈을 가려버립니다. 그 결과 내
뜻대로 되지 않아 고통스럽고, 내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다른
이들에게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오늘도 교만과 탐욕, 자신만 아는 소아적 이기심을 벗어던지고 십자가의
주님과 더불어 고통을 받아들임으로써, 근심을 기쁨으로 바꿔주시는 주님을
뵙고 다 함께 영원한 기쁨 안에 머물렀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행복으로 가는 길이겠지요!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5월5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요한 16,20)
여러분!
이런저런 근심거리 많으시죠?
하나 해결하고 나면 또 하나 근심거리가 생기고
끝없이 꼬리를 물고 근심 또 근심거리입니다.
그런데 가만 보면 근심거리도 두 부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부질없는 근심거리가 있고 꽤 영양가 있는 근심거리가 있습니다.
내가 기준이 되는 근심이 있고 남이 기준이 되는 근심도 있습니다.
내 안위를 지키기 위한 근심도 있고 사랑 때문에 고민하는 근심도 있답니다.
부질없는 근심걱정은 우리를 힘들게 만들지만
사랑 때문에 하게 되는 근심은 언젠가 큰 기쁨이 됩니다.
그러니 오늘은 좀 영양가있는 근심을 해보자구요.
어떡하면 하느님을 더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까?
어떡하면 저 사람이 더 웃도록 만들어 줄까?
어린이 날인데 내 사랑하는 아이들, 손주들이
해맑게 기뻐하는 날이 되게 해 줄 수 있을까?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근심도. 이렇지 않을까요?
하느님의 자녀인 어린이 여러분, 축하합니다.
여러분의 해맑은 미소가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겁니다.
어린이 여러분 축하합니다.
여러분의 순수함이 부모님들을 흐뭇하게 해 드릴 겁니다.
오늘 우리가 하는 근심이 더 큰 기쁨이 되어
모두가 행복하게 웃는 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 20)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5얼5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 20)
그 어떤 기쁨에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은 주님을 다시 뵙는 큰 기쁨입니다.
우리또한 기쁨의 참뜻을 통해 우리자신을 다시
만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적인 근심을 신앙적인 기쁨으로 바꾸어 주시는
우리의 주님이 계십니다.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고 있는 기쁨이 가장 성숙된
우리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과 미움이라는 근심을 신앙의 여정 안에서 내려놓습니다.
'조금 있으면'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안에서 기다림을 다시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기다림도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생명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예수님의 참기쁨은
이미 우리 삶안에 함께 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통해 세상과 욕심을 향했던
거짓된 분주함을 내려놓게 됩니다.
삶의 참된 기쁨을 주님께서 채워주십니다.
기쁨을 향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주님의 기쁨은 우리의 근심을 당신의 기쁨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 삶의 처음과 끝또한 주님의 기쁨과
함께하는 기쁨의 여정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다림을 통해 주어지는 참기쁨을 믿기 때문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부활 제6주간 목요일
2016년 다해 5월5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 요한 16,16-20
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직장인들에게 연휴는 반가운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족들과 친구들과, 이웃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입니다. 저도
이번 연휴에 지인들과 함께 속초엘 다녀오려고 합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인다는 말처럼, 잠시 자연 속에서 충전의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여행에는 준비물들이 필요합니다. 이번 여행에서는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이라는 책을 읽으려고 합니다.
사제가 되면서 ‘특별대접’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임의 자리에서는
상석에 앉으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어딜 갈 경우에는 차량을 준비해
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당에서 주보를 정리하거나, 화장실 청소를
하려고 해도, 말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부님은 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만류하십니다. 성사를 집전하는 사제에 대한 예우가 크시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에 모임이 있어서 가양동엘 갔습니다. 퇴근 무렵이라서 길도 막히고,
지하철이 정확하기 때문에 지하철을 이용했습니다. 을지로에서 2호선으로
당산역까지 갔고, 당산역에서 9호선으로 환승하였습니다. 퇴근 무렵의
9호선은 정말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승객들은 모두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도 한 대를 보내고, 겨우 탑승할 수 있었습니다. 출, 퇴근
시간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잠시 잊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렇게 힘들게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면서 일터로, 가정으로
다니고 계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직업이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하는 일을
하면서도 일을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직업은 ‘천막을
만드는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사도는 특별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 보다 더
큰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모범을 보여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걱정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걱정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사제라는 자리에
안주하려고 한다면, 사제에게 주어지는 특권에 연연하려고 한다면, 말로만
복음을 전하려고 한다면, 주님의 길을 따르는 것이 걱정으로 바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살기를 원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제들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처럼 살아간다면,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마음으로 사랑한다면,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기려는 결심으로
살아간다면 그래서 모든 이를 위해서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면 지금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도
기쁨으로 가는 디딤돌로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 사람이
되신 그분의 겸손입니다. 섬김을 받을 수 있지만 섬기로 오셨다는 그분의
희생입니다. 자신의 역할이 끝났지만 협조자를 보내시려는 그분의
책임감입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가난하고, 헐벗고, 병든 사람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라는 그분의 열린 마음입니다. 힘든 일, 어려운
일은 앞장서서 하시고 영광은 하느님께 돌리는 그분의 양보입니다.
우리는 모두 가족, 친구, 이웃, 직장, 성당에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웃음이 꽃핀다면, 그곳에서 사랑이 열매 맺는다면, 그곳에서 더
오래 머물고 싶다면 그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곳에서 원망과 불신이 자라난다면, 분열과 갈등의 골이
깊어진다면, 그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 공동체는 세상의 가치와
질서에 따라가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근심은 기쁨으로 바뀐다 했습니다.
2016년 다해 5월5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근심은 기쁨으로 바뀐다 했습니다.
비참에 몰아넣고 기뻐 날뛰는 사람들을 눈살 찌푸리며 명상해 봅니다.
물욕, 금욕, 권력, 순 썩은 사람들의 작태로 예수님이 그걸 당했지요.
울며 애통하는 사람과 기뻐 날뛰는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어떨까요.
기뻐하는 사람이 비통해 하는 사람을 우선 맞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순서랄까 질서를 무시한다면 사람의 기본이 안 됐다 생각합니다.
괴물 같은 인간들과 선인들이 함께 있는 세상, 잠시 뿐이라 하셨어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슬퍼하는 사람들을 돕는다며 집단이나 자기자랑 점수 얻기 같은? 안돼요!
능구렁이 같고 속 검은 인간들이 세상 지배하려듭니다. 진리는 다 압니다.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청주]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부행정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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