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사찰과 고승들의 사랑 전설
영주 공영터미날에 도착하니 저녁무렵이다. 영주에서 목적지는 무량수전이 있는 부석사와 희방사 그리고 죽령옛길이다. 영주는 유교의
본고장으로 유서깊은 서원들과 선비촌이 있어 불교와 유교문화를 한 번에 볼 수 있다. 나는 마침 버스정류소에 부석사행 버스가 서 있기에 무작정
올라탔다. 늦은 시간이지만 부석사에 가면 민박집이 있을 것 같았다. 버스는 인삼의 고장 풍기를 지나 부석사까지 1시간 이상 걸린다. 시내를
벗어나자 도로 폭이 갑자기 넓어져 한참 곧게 뻗어 있다. 전시에는 비상활주로로 이용되는 것이다. 부석사에 도착하니 예상대로 민박집이 보인다.
관광철이 아닌지 손님은 나홀로이다. 현관에 유흥준 씨 등 이곳에 묵었던 사람들의 싸인과 소감이 붙어 있다. 요금 2만 5천원에 별로 불편한 것은
없다. 다만 산중이라 4월인데도 무척 추워 샤워를 포기했다. 식사하려고 나갔는데 식당문이 모두 닫혔다. 한군데 불이 켜져 있어 들어갔더니 파전
밖에 안된다고 한다. 전날 허연구 신부께서 나에게 안동소주 한 병 주신 것이 기억나 파전을 사가지고 방에서 안동소주와 곁들여 먹는다. 안동소주는
위스키와 같은 40도 술이라 석잔 쯤 마시니 취기가 오른다. 대충 일기를 기록한 뒤 전기장판을 올리고 자리에 누웠다.
이튿날 새벽 부석사에 올랐다. 이른 아침이라
왕래하는 사람이 없다. 부석사는 676년 당나라에서 귀국한 의상대사가 창건한 1300년 고찰이다. 나는 '태백산부석사'라 쓰인 일주문을 넘으며
동 시대 우리나라 불교 양대산맥인 의상(625-702)과 원효(617-686)의 상반되면서도 결국에는 하나로 통합된 결실을 이루어낸
과정을 생각했다. 경주 김 씨로 귀족인 의상과 평민 설 씨인 원효는 출신성분부터 다르다. 8년 연상인 원효는 의상과 함께 불교의 신지식을 배우기
위해 650년 당나라 유학길에 오르지만 요동에서 순찰군에게 간첩으로 몰려 억류되었다 추방된다. 두 사람은 10년 후 다시 중국사신 귀국선을
이용하기로 하고 떠났는데 원효는 산중에서 노숙하다 잠결에 해골에 담긴 물을 맛있게 마시고 다음 날 깨어나 토해버린 체험 끝에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깨우침을 얻고 발길을 되돌렸다. 그러나 의상은 중국에서 지엄화상으로부터 화엄경을 배워 우리나라 화엄종
개창자가 된다. 화엄사상이란 한마디로 우주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은 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 원인이 되어 일어나고
통합된다는 것이다. 귀족 출신 의상은 왕실의 전폭적 지원으로 부석사를 비롯해 해인사, 낙산사, 갑사, 화엄사 등 10대 화엄대찰을 창건하고
체계적으로 제자를 양성했다. 반면 원효는 민중 속에 들어가 함께 춤추며 노래하고 술마시는 등 계율을 초월한 무애행으로 과거 귀족들의 전유물이던
불교를 민중에 확산시켰다. 학문적으로 원효는 일심사상, 무애사상, 화쟁사상 등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의상은 '화엄일승법계도' 등을 저술했다.
지금의 보수와 진보로 비교될 수 있겠다. 재미있는 것은 여자관계다. 평민출신 원효는 왕족인 요석공주와 사랑해 설총을 낳았고 귀족출신 의상은
당나라 유학시절 평민인 선묘낭자의 사랑을 받았다. 이렇듯 두 사람이 걷는 길은 달랐지만 비난하거나 충돌했던 적도 없고 서로를 존경했다. 이들의
상반된 노선은 각자의 분야에서 불교를 확장시켜 결과적으로는 신라를 불교국가로 통합시켰다.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다.
부석사 창건 전설도 의상과 선묘낭자에 관한
것이다. 의상을 애타게 사모한 선묘는 사랑을 이룰 수 없자 바다에 몸을 던져 용이 되어 의상이 절을 지을 때 이교도들이 방해할 때마다 거대한
바위를 번쩍 들어올려 물리쳤다는 전설이다. 같은 내용이 이곳 뿐 아니라 충청도 서산의 또다른 부석사에도 전해진다. 1919년 무량수전과 조사당을
해체해 수리했는데 이때 허리부분이 잘린 석룡(石龍)이 발견되었다. 옛부터 이 전설을 대중들에게 각인시켜 포교에 적절하게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공중에 올려졌다는 커다란 바위도 부석(浮石)이라 새겨져 보존되어 있다. 의상대사와 중국 낭자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함께 여인이 용이
되어 절을 지켜주었다는 전설은 신자들에게 신령하게 받아들여졌을 것 같다. 절에는 선묘각이 세워져 선묘낭자 영정을 모시고 있으며 돌이 떳다해서
부석사(浮石寺)라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또한 조사당(祖師堂) 앞에는 '선비화'라 불리는 의상대사 지팡이나무가 자라고 있다. 수 백년동안 크기가
처마에 닿지 않을 정도만 자라고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 선묘낭자와 함께 부석사의 양대전설인 선비화는 콩과 관목식물로 퇴계 이황이 시를
남기고 택리지에 기록된 것을 보면 수령 5백 년이 넘은 것은 확실하다. 1300년 전 의상대사가 지팡이를 꽂은 것이 자라나 꽃피운다는 전설이다.
높이 170센티, 굵기 5센티에 불과한 이 나무는 애 못낳는 여인이 잎을 다려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로 훼손되는 일이 많자 지금은 철망을
둘러 보호하고 있다. 나라가 태평할 때만 노란꽃을 피운다는 선비화가 올해는 꽃을 피웠는지 참 궁금하다. 내가 갔을 때는 4월 초순으로 앙상한
가지만 보였다.
일주문부터 은행나무가 가로수처럼 늘어서
있다. 다른 나무들도 섞여있지만 부석사 은행나무는 적당한 크기에 소박한 느낌이다. 조금 오르면 1미터 간격에 높이 4미터가 넘는 돌기둥 두개가
보인다. 보물 255호 신라 당간지주로 상층부에 비스듬히 새겨진 조각과 좌대에 연꽃이 새겨져 있다. 은행나무길이 끝나고 사천왕문을 지나면 동쪽에
보물 249호인 신라 3층석탑과 정면에 범종각이 있다. 범종각 누대 밑을 통과해 안양루 아래 좁은 돌계단을 오르면 비로소 국보 18호인
무량수전을 만나게 된다. 2층 누각인 안양루로 오르는 33계단은 극락세계로 가는 길이다. 33계단은 제석천(帝釋天)이 다스린다는 33하늘 즉
도리천을 의미한다. 마지막 5계단은 극락세계 영역이다. 안양(安養)이란 불교에서 극락세계를 뜻한다. 안양루부터 무량수전은 극락인 셈이다. 경기도
안양시도 같은 뜻이며, 보신각 종을 33번 타종하는 것도 33하늘의 의미이다. 이렇듯 우리나라 곳곳에 불교 흔적이 진하게 배어 있다. 조선후기
건축물인 안양루는 지정문화재는 아니지만 부석사의 명소다. 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을 찾아 누각에서 내려다보이는 태백산 줄기와 사찰아래 아름다운
경관을 노래했다. 내가 갔을 때는 누각에 오르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무량수전(無量壽殿)은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수명을 뜻한다. 다른 절의
대웅전이다. 특이하게 정사각판에 세로로 두글자 씩 써있는 무량수전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친필로 650년 오랜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내가 흥미있게 본 것은 안양루 현판이다. 안양루에는 현판이 두 개 있다. 원래 안양루 현판은 아랫층에 걸려있고 부석사라 쓰인 이층
현판은 우남(雩南) 이승만 전 대통령 친필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곳곳에서 우남의 글씨를 대할 수 있었다. 오랫만에 그 분 글씨를 본다. 역시
권력의 무상함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56년 1월 16일 야간열차로 부인과 주한미군들을 대동하고 이곳을 찾아 무량수전과 소사당 등을
관람하고 현판을 쓴 뒤 당일로 귀경했다. 부석사 관람만을 위해 행차한 것이다. 무량수전에 모신 높이 2.8미터 소조 여래좌상도 국보 45호이다.
소조 여래좌상은 구리나 돌이 아닌 찰흙을 빚어 도금한 것이다. 무량수전 앞 국보 17호 신라석등은 석등 중 가장 오래되고, 아름답고 우아하다고
한다.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무량수전은 1200년 경 고려시대에 건축된 것이다. 의상대사 지팡이나무가 있는 국보 19호 조사당은
1377년 고려 우왕 때 지어진 확실한 기록이 있지만 무량수전은 그보다 백년내지 150년 정도 앞선 것으로 본다. 나는 어릴 때 학교에서
무량수전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라고 배웠는데 그후 안동 봉정사 극락전이 더 오래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건물 규모나 형태는
무량수전이 압도적이다. 무량수전은 건축학적으로 우리나라 한옥 팔작지붕의 원조로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배흘림 주심포 기둥으로 유명하다. 배흘림
기둥이란 기둥 아래와 윗부분은 가늘고 중간부분이 불룩하게 튀어나온 것을 말한다. 그 앞에 서면 "정말 멋있구나"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나는
이날 무량수전을 보면서 정남향 건물에 불상은 왜 동쪽을 바라보고 배치되었는지 궁금했지만 사람이 없어 물어보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불교나
풍수지리적인 의미가 있을 것 같이 생각된다.
무량수전 뒷편에는 자그마한 선묘각이 세워져 있고 약간 떨어진 산기슭에 조사당이 있다. 조사당 안의 부처님 일생을 묘사한 벽화 6점은
국보 46호이다. 그러나 원본은 보존을 위해 떼어내 범종각 아래 성보전시관에 진열되어 있고 현재 벽화는 모사품이다. 이날 나는 너무 일찍 온
탓에 전시관은 관람하지 못했다. 부석사에는 많은 보물과 문화재들이 있다. 보물 735호 고려목판은 13세기 거란에서 수입한 화엄경의 여러
번역본을 나무판에 새긴 것이다. 정원본 40권 진본 60권 주본 80권 등 각기 다른 번역을 한줄에 34글자 씩 배열한 634개 목판이다.
이밖에도 원융국사비와 또다른 삼층석탑은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나는 8백년 이상 온갖 풍우와 전란에 시달리면서도 꿋꿋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무량수전을 손으로 쓸어내리면서 한동안 상념에 사로잡힌다. 무수한 조상들의 손길이 스쳤을 건물과 수 많은 민중들이 소원을 빌었을 불상을 보면서
나는 조국의 험난한 오랜역사와 함께 한 이곳에 경의를 표했다. 우리나라에도 그리스, 로마 못지 않은 훌륭한 천년유적들이 있는 것이다. 절입구
매표소에는 이제야 사람이 나와 준비하고 있다. 나는 사하촌 식당에 들어가 아침부터 산채비빔밥을 먹고 다음 행선지 희방사로 가기위해 풍기행 버스를
기다렸다.
(2014.7.26 뉴욕
虛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