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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4. 묵상글 ( 사순 제1주간 토요일. - 전에 원수였어도 이젠 아닌 경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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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4. 사순 제1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전에 원수였어도 이젠 아닌 경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이 말씀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원수를 사랑하려고 애를 무척 씁니다.
그러니 원수를 사랑하려고 도무지 애쓰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전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과 아닌 사람을 가르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저는 원수를 사랑하려고 애써야 할까 생각합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지금까지 생각해온 것에 반기를 들 듯이.
무슨 얘기냐 하면 원수를 만들어 놓고 사랑하려고 애쓰지 말고
원수를 만들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원수를 만들지 않으려고 아예 아무 관계를 맺지도,
누구와도 엮이지 말자는 뜻은 물론 아니고
누가 원수의 짓을 해와도 원수를 만들지 않겠다는 그런 뜻에서 말입니다
그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데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리 원수 짓을 해와도 원수로 만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게 원수가 악한 짓을 해도,
다른 모든 사람에게는 그것이 악한 짓이어도
내게는 그것이 악이 아닌 그런 경지에 이르면 애초에 아무 원수가 없고,
전에 원수였어도 이제는 원수가 아니라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경지가 오늘 하느님 사랑의 경지입니다.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과 비를 주시는 경지 말입니다.
이는 마치 연기에 그을려도 그을음을 전혀 타지 않는 것처럼
인간이 어떤 악을 저질러도 그것이 그에게는 전혀 악이 되지 않는 경지입니다.
어렸을 때 수인선 협궤 기차를 타고 인천을 갔다 오다 보면
굴을 몇 개 통과하게 되어 있는데 굴을 지나고 나면 석탄 연기에
얼굴이 모두 검둥이처럼 되어 서로 킥킥대며 웃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머리를 좀 쓰는 친구들은 얼굴을 보자기로 감쌉니다.
그것처럼 누가 아무리 악의 비를 퍼부어도
우산을 큼지막하게 쓰면 그 비에 젖지 않겠지요?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노래를 보면
얼굴빛 차돌처럼 만든다는 노래가 있습니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그런데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건 얼굴에 보자기를 써 그을음 타지 않는 것과 같고,
차돌처럼 얼굴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원치 않는 상황이 벌어지면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합니다.
그러나 모욕과 수모는 원치 않는 사람에게만 모욕이고 수모이고,
모욕과 수모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만 악이기에 원하는 사람에게는
그것들이 악이 되지도 않고 얼굴빛 변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지만 프란치스코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곧 자기도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 외에 자기가 원하는 것은 없는 경지입니다.
전에 원수였어도 이제는 원수가 아닌 그런 경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 외에는 원하는 것도 없고 원치 않는 것도 없는
그런 경지를 당장 이룰 수는 없어도 감히 꿈꾸고 마음먹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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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4.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현대의 대표적인 영성가로 ‘토마스 머튼’을 뽑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트라피스트 관상 수도원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작가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글 쓰는 일에 회의를 느꼈고, 진정으로 기도하는 관상가로 살기 위해 수도원에 입회한 것입니다. 입회 후에 그에게 수도원 장상이 불러서 소임을 맡겼습니다. 어떤 일이었을까요? 바로 ‘글 쓰는 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신비만을 바라보는 관상가가 되고 싶은데, 다시 세속의 일을 한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글 쓰는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면 이곳에서 살 수 없다는 생각까지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갈등 속에서 어느 날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관상가가 되느냐, 작가라는 활동가가 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 후 자기가 싫어하는 일도 기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 역시 하느님을 위해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위해 산다’라는 사실만 바라봐야 했습니다. 하느님을 위해 사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과 함께하려고 하며, 포기하려는 텅 빈 마음에 그 자리에 하느님을 초대합니다. 즉, 하느님과 한편이 되기에 기쁨과 희망 속에서 살 수 있게 됩니다.
지금 싫어하는 일이 있지 않습니까? 또 싫어하는 사람은 어떠합니까? 싫어하는 일과 사람 속에서 우리는 평화와 기쁨을 갖지 못합니다.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고, 미움 등의 부정적인 마음이 가득하게 됩니다. 바로 잊어버린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느님을 위해 산다’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포함하는 사랑을 명령하십니다. 그래서 박해자까지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이었습니다. 원수를 대하게 되는 것, 나를 반대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 모두 싫은 일이고 피하고 싶은 자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갑자기 그 사람이 변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안에 계신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 하느님을 위해 살려면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싫어하는 일과 사람은 계속해서 우리 앞으로 다가옵니다. 그때마다 싫다고 도망가서는 안 됩니다. 적대적인 마음으로 싸워서도 안 됩니다. 그보다는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을 앞세워 사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의 명언: 화는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독이지만, 실제로는 당신에게 가장 큰 해를 입힙니다(로버트 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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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4.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오늘 <복음>도 어제 <복음>에 이어, ‘의로움’에 대한 말씀을 들려줍니다. 오늘은 마지막 여섯 번째의 ‘의로움’인, ‘완전한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
이는 이웃과 원수를 구분해서 처우를 달리 해온 그동안의 관행을 완전히 뒤엎어, 이웃이나 원수를 가리지 않고 똑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원수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며, 우리 자신에게서 미움을 없애기 위한 것만도 아니며, 사랑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있는 그대로’를 호의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그가 잘 되기를 구원되기를 바라며 부족한 이를 부족한 채로, 원수를 원수인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곧 그가 나를 미워하지 않게 되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채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가 부족하기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사랑이 더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죄인이기에 처벌받아야 하기보다, 죄인이기에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듯이 말입니다. 동시에, 이는 나 자신만 구원받아야 할 존재요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만이 아니라, 타인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요 사랑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우쳐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다음에, 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나아가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마치, 스테파노가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기도한 것처럼(사도 7,60), 사도 바오로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한 것처럼(1코린 4,1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을 넘어 사랑할 때라야, 악을 피하는 것을 넘어 선을 행할 때라야, 비로소 의로움을 행하게 되고 완전해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놀라운 소명을 주십니다. 곧 하느님처럼 되라고 하십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
그런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묘하게도, 자신의 결핍을 메울 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비울 때 일어납니다. 자신의 결핍과 한계를 극복하고 채울 때 생기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수락할 때 생겨납니다. 그러기에, ‘완전함’이란 그 어떤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있는 채로 완전하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자기의 결핍을 오히려 타자를 받아들이는 통로로 받아들이는 일이요, 그리하여 부족과 한계를 받아들일수록 온전해지게 되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부족과 한계는 스스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선물을 끌어들이는 통로기 되고, 우리의 불완전함은 완전함이 들어오는 통로가 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주님!
되갚지 않을 뿐 아니라 억울한 고통도 기꺼이 지게 하소서.
미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받아들여 사랑하고,
사랑할 뿐 아니라 기도하게 하소서.
죄짓지 않을 뿐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고,
용서할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소서.
개방할 뿐 아니라 받아들여 수용하고,
수용할 뿐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변형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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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4. 사순 제1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이 약이다
홍문택 신부님의 ‘사람을 상대할게 아니랍니다’라는 글입니다.
“누가 당신을 모함합니까? 누가 당신을 두고 빈정거립니까?
누가 당신을 험담하고 다닙니까? 누가 사사건건 당신을 반대합니까?
누가 당신을 미워합니까?
그래서 얼마나 속이 상하십니까? 얼마나 분하십니까?
얼마나 야속하십니까? 얼마나 그가 밉겠습니까?
하지만 당신이 미워하시는 사람들과 싸우지 마십시오.
당신이 싸울 상대는 그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이 싸울 상대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악(惡)의 세력입니다.
그러니
그가 상대가 아닌 만큼 그를 미워하거나
그에 대한 미움과 실망을 부질없이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싸움 상대가 악의 세력인 만큼
악의 세력과 싸워 이기는 방법을 생각하십시오.
악을 이기는 방법은 오로지 완전한 선(善)입니다.
오로지 완전한 사랑입니다. 오로지 진실뿐입니다.
그리고 철저히 자제된 침묵입니다. 그렇게 싸워야 이길 수 있습니다.
악의 세력과 싸워 이긴 예수님의 방법이 바로 그 방법이었답니다.
절대,
당신을 비난하고 욕하며 미워하는 사람과 상대하여 싸우지 마십시오.
그건 적을 모르고 싸우는 꼴입니다. 싸움을 부추긴 장본인은 멀쩡히 놔두고
엉뚱하게 딴 사람과 아웅다웅하는 꼴이 되는 셈입니다.”
미운 사람을 용서하기란 너무도 힘이 듭니다. 용서를 넘어 사랑하기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먼저 길을 알려주셨기에 믿고 따르면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마태5,44-4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원수를 골라서 사랑하라는 말씀도, 원수이기 때문에 사랑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가리지 말고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서 만난 억울한 일들을 그저 ‘억울함’으로 안고 살면 그것은 억울한 채로 남아서 슬픈 인생을 만들어 냅니다.” 따라서 그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가슴에 담고 행복해야 하겠습니다. ‘돼지는 열받으면 바비큐’가 된답니다. ‘사람은 열받으면 쓰러집니다.’ 그리되면 누가 손해입니까? 마음에 화를 담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많은 사람이 로멘틱한 사랑을 진정한 사랑으로 착각하고 살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서로에게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커다란 맛을 느끼는 데 있지 않고,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십자가의 성요한). 매사에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한가할 수 없고 한가로운 사랑은 벌서 잘못되었다는 표시인 것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따라서 십자의 죽음을 통해 드러난 사랑,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랑에 지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 밖에 난 사람에게도 마음을 두어야 하고 허물을 안고 있는 상대방을 보면서 바로 나의 숨겨진 연약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상처를 입힌 미운 사람을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의 모습이 곧 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 안에도 어둠이 도사리고 있으며 언제든지 걸려 넘어질 수 있으니, 그는 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는 결국 나를 올곧게 살아가게 하는 빛입니다. 따라서 그에게 감사해야 하고 한편으로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의 허물은 그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 어둠의 세력에 한순간 이용당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면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나를 어렵고 힘들게 하는 사람과 마주치게 될 때 오히려 내 마음의 넓이와 깊이를 확인하는 순간으로 받아들이고 그를 위해 사랑으로 기도할 수 있는 시발점으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미움에는 세월이 약이 아니라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약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결코, 자만하지 마십시오. 방심하면 한순간에 어둠의 세력에 지배당하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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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4.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중학생 때까지 저는 산수를 좋아했습니다. 구구단을 외우고, 삼각형과 사각형의 내각 합을 구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수에는 정수와 유리수 그리고 무리수까지 있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산수는 수학이 되었습니다. 수를 계산하는 것에서 수에 대한 학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소위 말하는 ‘수포자’가 되었습니다. 수학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물론 계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고등학생 때 학교의 방침은 시험 때면 학년을 바꾸어서 앉게 하였습니다. 제 옆에는 한 학년이 높은 2학년 형이 같이 시험을 보았습니다. 과목도 달랐습니다. 저는 수학 시험이었고, 형은 영어 시험을 보았습니다. 원천적으로 ‘커닝’을 차단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문제가 생겼습니다. 2학년 형이 영어 문제 중의 하나를 제게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다행히 아는 문제라서 알려 주었습니다. 감독 선생님이 그것을 보았고, 저희 둘은 따로 선생님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답해야 했습니다. 다니엘이 못된 일을 하려 했던 두 노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따로 물어보았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사실대로 이야기했고, 선생님은 제 수학 답안지 중에 한 문제를 감점 처리하면서 문제는 일단락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수학이 어려워졌습니다. 미분과 적분도 어려웠고, 확률도 어려웠습니다. 커닝 사건만 없었다면 어쩌면 저는 계속 수학을 좋아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나를 떠나겠느냐?” 그러자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이는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기가 더 쉽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 중에는 ‘예포자’들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는 신앙인들을 보았습니다. 저는 아름다운 신앙을 보여주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비가 많이 오는 여름날, 성당 창문을 닫고, 하수구의 오물을 걷어내고,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고 가시는 분을 보았습니다.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명절이 되면 어르신들에게 떡을 나누어주시는 분도 보았습니다. 본당 신부가 피정을 가면 매일 성당에 나오셔서 마당을 치우고, 수녀님을 도와주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화가 치밀어 싸움에 이르려는 순간에 본당 신부의 말을 생각하며 용서했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성직자, 수도자들이 있어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마음을 삶으로 드러내는 신앙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사랑은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이고, 우리가 살기 위한 길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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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4. 사순 제1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님의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완전한 사람’이라는 말에 힘이 쭉 빠집니다. 왜냐하면 저는 완전한 사람도 아니고 완전한 사람이 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같은 마음이시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오늘 복음의 완전한 사람은 결점이 없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태양이 떠오르게 하십니다. 의로운 사람에게도 불의한 사람에게도 비를 내려주십니다. 하느님의 완전함은 여기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들려주고 계십니다. 모든 이에게 공평한 사랑을 내려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바로 완전한 모습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합니다. 부끄럽지만 저만 놓고 보아도 그렇습니다. 저는 저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더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 더 사랑합니다. 세리들이 하는 그 정도만 저도 하고 살아갑니다.
결점이 없는 사람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미숙하고 부족하고 결핍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공평해지려 노력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팔은 안으로 굽겠지만 그 팔을 가끔은 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도전해 볼까요? 하느님 닮아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에 말입니다. 무결은 아니지만 공평하게 사랑하려 도전해 보세요.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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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무언가 잘 됐을 때
하늘을 향하여
감사합니다.
무언가 안 됐을 때
하늘을 향하여
감사합니다.
누군가가 도와줄 때
하늘을 향하여
감사합니다.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을 때
하늘을 향하여
감사합니다.
그저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리는
마법의 주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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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4.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평생공부, 평생과제
-완전한 사람, 사랑이 되는 것-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행복하여라, 그분의 법을 따르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시편119.1-2)
교황청 홈페이지를 열으니 사순시기를 맞이하여 교황청에 근무하는 고위성직자들을 위한 칸탈메사 추기경의 사순 첫 강론이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35절을 바탕한 강론이었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누구든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고, 나를 믿는 누구든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영어에서 직접 직역했습니다. 참 반갑고 은혜로운 복음입니다. 첫눈에 “나는 생명의 빵이다” 말마디를 보는 순간 “나는 사랑이다”가 말마디가 연상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그대로 “예수님은 사랑이시다”로 바꿔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몇해전 연중피정때 “사랑이 되기(Becoming Love)”라는 주제도 생각났습니다. 날로 예수님을 닮아 사랑이 되어가는 존재론적 변화가 바로 우리의 평생공부요 평생과제입니다.
아직도 눈은 쌓였지만 곳곳에 녹아 흐르는 물이 완연한 봄이 시작됐음을 알립니다. 봄되면 맨먼저 마리아의 집 피정집 뜨락에 피어나는 영춘화(迎春花)를 어제 보니 참 반가웠습니다. 개나리보다 1-2주 빨리 피는 꽃으로 꽃말은 ‘희망’, ‘사랑하는 마음’으로 봄과도 잘 어울립니다. 겨울을 통과한 파스카의 꽃 영춘화입니다. 문득 오래전 써나눴던 “예수님은 봄이다”라는 시가 생각났습니다.
“예수님은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
봄이 입맞춘 자리마다
환한 꽃들 피어나고
봄의 숨결 닿은 자리마다
푸른 싹 돋아난다
예수님은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1999.3
시공을 초월하여 25년이 지난 지금도 현실감있게 와닿는 시입니다. 예수님은 봄입니다. 봄은 사랑입니다. 다시 사랑을 공부해야할 봄입니다. 하느님은 자연을 통해 사랑을 가르치십니다. 평생공부가 사랑이요 평생과제가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통한 완전한 사람입니다. 사랑공부에는 영원한 초보자라는 자각하에 다시 봄과 더불어 시작해야할 사랑공부입니다.
우리의 연장되는 날들은 사랑하라 주어지는 선물의 시간들입니다. 살아 있을 때 사랑이지 죽으면 사랑도 못합니다. 죽음을 앞둔 마지막 아쉬움도 아마 사랑을 다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일거란 생각이 듭니다. 허무나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도 사랑뿐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사랑밖엔 답이 없습니다. 사랑도 훈련입니다. 우보천리, 한걸음 한걸음 사랑을 선택하고 배워 훈련하여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19년전 반가운 자작시가 생각나 나눕니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지난간 일을 생각하지 마라.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두지 마라.
보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다.’(이사43,18-19ㄱ)
그렇다
흘러간 것들에 마음 아파해 하지 말자
아쉬워하지 말자
쓸쓸해하지 말자
흘러간 물이 다시 돌아오지 않듯
흘러간 사람은, 사랑은,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사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늘이고
설레는 마음으로 내일을 기다리는 것이다
오늘 지금 여기서 만나는 사람에, 사랑에, 시간에 충실할 때 구원이다
이게 영원한 현재를, 젊음을 사는 길이다
시간이 아무리 흐르고 흘러도
늘 새롭게 만나는 주님이 우리의 기쁨이요 행복이요 힘이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게 아니라 사랑에 있다”-2005.3
그렇습니다. ‘오늘’입니다. 오늘 다시 시작하는 사랑공부, 사랑과제입니다. 제1독서 신명기 모세를 통한 주님의 말씀은 시공을 초월하여 그대로 오늘의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오늘 너희를 두고 이렇게 선언하셨다. 그분께서는 너희를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민족들 위에 높이 세우시어, 너희가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게 하시고,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분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시공을 초월하여 모세와 예수님은 참 좋은 짝을 이룹니다. 모세의 말씀을 구체화하는 예수님의 멋진 강론이 오늘 복음입니다. 뭇사람들의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고 거룩한 백성이 되는 구체적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참으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명심하여 실천해야 할 평생과제가 평생공부가 완전한 사람이 되는 사랑공부입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죽어야 끝나는 평생과제요 평생공부입니다. 예수님 당신을 닮아 완전한 사람이, 참사람이,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우리에 대한 기대 수준은 이처럼 높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인생의 유일한 궁극의 목표입니다. 다산 어록의 한 말씀도 생각납니다.
“목적없이 공부하면 지식을 많이 쌓는다 해도 신기루처럼 사라질 뿐이다. 배우지 않으면 재능을 펼칠 수 없고, 뜻이 없으면 학문을 성취할 수 없다.”
참사람,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한 사랑공부요 평생 사랑을 배우는 여정에 충실할 때 사랑의 대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성적, 육체적 ‘에로스’ 사랑도 아니고, 친밀한 우정이나 배우자간의 상호사랑의 ‘필리아’ 사랑도 아니고, 대가가 없을 지라도 상대방의 유익을 깊이 배려하는 아가페 사랑입니다. 싫어도 미워도 할 수 있는 순수한 사랑, 하느님다운 사랑, 아가페 사랑의 절정을 보여주는 주님의 오늘 멋진 복음 강론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
사랑의 완전성은 이런 실천적 사랑의 완전성입니다. 참으로 상생의 공평무사한 보편적이자 구체적 사랑입니다. 결코 애매모호한 낭만적 추상적 사랑이 아닙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윈윈(win-win)”의 상생(相生)의 사랑입니다. 원수나 박해자를 미워하고 저주하다보면 내가 먼저 다칩니다. 그러니 원수에 대한 최고의 복수는 사랑이요 박해자에 대한 최고의 복수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약한듯 하나 참으로 적극적이고 강한 두려움 없는 용감한 사랑입니다.
사실 우리 눈에 원수요 박해자이지 그 나름의 깊은 사연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무지의 악에 눈이 가려 있을 수도 있고 나름대로 깊은 상처가 있을지 모르는 치유받아야 할 무지의 환자일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무사(無私)한 아가페 사랑을 실천할 때 악은 무장해제되고 보복의 악순환의 유혹에서 벗어나 무지의 병도 치유될 수 있습니다.
이런 아가페 순수한 사랑은 결코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또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하는 끼리끼리의 유유상종의 배타적 닫힌 사랑이 아니라 모두에게 활짝 열려 있는 햇빛같은 사랑이요 모두에게 내리는 봄비같은 사랑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만 인사하는 유유상종의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사랑이요 주님께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사랑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부단한 자기초월의 아가페 사랑을 통해 날로 사랑의 주님을 닮게 하십니다.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를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시편19,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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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4.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완전한 사랑>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언제든
멈추지 않는
늘 사랑
어디든
가두지 않는
너른 사랑
아무도
버리지 않는
모두 사랑
무엇도
바라지 않는
그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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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4. 사순 제1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마태 5,46-47)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완전하게 되어라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때문에 친구를 사랑하는 것이므로 보물을 지닌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그 자체가 그에게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사랑합니다. 따라서 그는 큰 보물을 지녔습니다. 그가 자기 본능을 거슬러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수고하며 씨를 뿌리면 열매를 거둡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48절)고 하였습니다.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죄는 짓지 않지만 사실 의로움을 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악에서 떠났으나 선을 추구하지는 않으므로 반만 선합니다. 그러나 악에서 달아날 뿐 아니라 선을 행하기도 한다면 완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이 친구를 사랑하며 악을 피하고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의로움을 지니도록,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악을 피함으로써 벌에서 벗어나고,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영광으로 인도됩니다. 하느님의 상속자가 행실로 하느님을 닮지 않는다면 완전한 상속자가 아닙니다.
-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3 피조물은 하느님이다
피조물이 하느님을 드러내는 곳에서 하느님은 하느님이 되신다
엑카르트는 창조계를 신뢰한다. 그는 이러한 신뢰의 증거를 성서에서 끌어낸다. 설교 3의 본문으로 삼은 성서 구절은 아래와 같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일 수 없는 자들을 겁내지 말고,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시오. 참새 두 마리가 한 아스에 팔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가운데 한 마리도 그대들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분은 그대들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놓고 계십니다. 겁내지 마시오. 그대들은 그 많은 참새보다 귀합니다”(마태 10,28-31).
아버지 창조주는 우리 자신은 물론이고 피조물 가운데 작은 것까지 돌본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는 우주적인 신뢰가 자리 잡고 있다. 엑카르트가 영은 영을 죽이지 않고. 영에게 생명을 준다고 말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생명을 주는 것, 곧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가 뛰어들어 귀 기울이고 신뢰해야 할 대상이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126)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이슬람교의 유일신 신앙과 '믿음의 다섯 기둥'
위의 구절과 비슷한 성구가 <꾸란>에는 여러 군데 나온다. <꾸란>에서 한 군데 인용해 보겠는데, 표현은 다르나 유일신 신앙이 지닌 그 지향성과 높고 숭
고한 신앙심은 서로 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지의 모든 것들이 알라를 찬미하나니 , 실로 그분은 권능과 지혜로 충만하심이라. 천지의 왕국이 알라 안에 있어 생명을 주시고 생명을 앗아가는 분은 그분이시라. 실로 그분은 모든 일에 전지전능하심이라. 그분은 태초에도 계셨고, 마지막에도 계시며, 현존해 계시되 나타니지 아니하시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니라."(꾸란 57 : 1-3)
"알라와 더불어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그분 외에는 신이 없나니, 그분을 제외한 모든 만물은 멸망하고, 심판히심도 그분이시라. 너희 모두는 그분께로 돌아가니라.”(꾸란 28 : 88)
셋째, 이슬람교의 유일신 신앙은 초차연적 실재들, 곧 천사나 영, 악마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그들을 철저하게 영적 피조물로 보아 유일신 하나님 알라와 근본적으로 구별한다. 따라서 '성령'도 글자 그대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거룩한 영'일 뿐 하나님 자신과 구별되어야 하므로 '성자'의 신성이 부정되듯이 ‘성령'의 신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슬람교의 유일신 신앙은 알라의 절대적 초월성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매우 역설적이게도 알라는 천지만물 가까이 현존하며 권능과 지혜로 충만한 분으로 고백된다. 그리스도교 개신교 찬송가 4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의 가사 되는 종교시를 쓴 프레드릭 레만(F.M. Lehman) 목사는 이 시를 짓는 동안 다음과 같은 일을 겪었다(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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