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를 보내며
351 행촌수필, 안골은빛수필문학회 이윤상
황금돼지의 해인 기해년 설을 맞았다. 올해 설 연휴는 5일로 알맞은 것 같다. 재작년 추석엔가 연휴가 10여 일이나 되어 너무 지루하지 않았던가. 형수님 생존하실 때는 형님 댁에 가서 설을 맞았다. 하지만 형수님이 별세한 이후로는 형님이 강요해서 조카 집으로 가서 설을 보내며 세배를 받았으나 올해부터는 내 집에서 보내기로 했다. 출가한 딸이나 아들이 모두 우리 집에서 가까운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아내는 며칠 전부터 갈비를 사다가 양념하여 다지고, 식혜와 강정, 굴비, 과일 등 손주들이 먹을 음식을 마련하느라 바빴다. 하지만 선친이 생존 시에는 집에서 외부 손님을 맞이하기도 하고, 마을 세배객들을 맞아 접대하던 형수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집에는 손자들과 손녀가 와서 세배를 하고 떡국으로 점심을 먹으며 떠들썩했다. 딸네 가족이 김제시 큰댁에서 설을 쇠고 오후 5시쯤 우리 집으로 와서 세배를 받았다. 아내는 저녁상을 걸쭉하게 교자상에 차려냈다. 11명 가족이 모여서 함께 식사를 하니 대가족 설맞이 기분이 들었다. 설 명절은 이렇게 혈육이 모여서 웃음꽃을 피우며 음식을 나누어 먹고 담소를 나누는 것이 행복이 아니겠는가. 설을 전후해서 1천만이 대 이동을 하여 고속도로가 주차장이 된다는 뉴스도 이제 점차 시들해져 가는 것 같다. 물론 명절에 즈음해서 고속도로가 막히고 교통대란이 일어나며 교통사고로 피해가 엄청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서울에 사는 조카들에게도 차표를 예매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자가용으로 올 테면 오지 말고 평소 주말에 오라고 권유한다.
형님은 설 전날 손자가 모셔가서 혁신도시에 사는 아들집에서 설을 맞이하셨다. 초 이튼 날 문안전화를 드렸더니 조반을 드시고 당신 아파트로 오셔서 혼자 계신다고 하니 마음이 짠했다. 바로 형님 댁으로 가서 세배를 드리고, 모시고 나와서 가까운 전주역사박물관 5층부터 전시관별로 세세히 돌아보았다. 다음은 바로 건너편 국립박물관을 함께 관람하면서 담소를 나누니 형님이 매우 만족해 하셨다. 91세이지만 거동에 불편이 없어 박물관도 돌아보고 주변 산책도 하시는 모습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박물관에는 설을 맞이하여 특색 있는 전시물도 없고 그저 평소 모습 그대로였다. 박물관 측의 무성의가 아쉽지만, 오후 3시부터 방문객들에게 떡국공양을 한다는 현수막이 나부끼고 있었다. 예년에 비해 방문객도 적고 어린이도 별로 없었다. 요즈음 아이들이 모두 게임에 빠져서 옛날 민속놀이인 연날리기, 팽이치기, 투호 던지기 등을 좋아하지 않으니 전통적인 민속놀이가 사라져 가는 것 같아 아쉽다.
내 자식들은 전주에 살기 때문에 명절 때, 교통지옥 내왕을 안 하는 것도 큰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전주는 유사 이래 재해나 재난이 없는 곳이요, 서울이나 수도권도 3시간 이내 한나절 생활권이니 살기 좋고 안전한 온 고을이라 한다. 세계적인 도시공학자가 발표한 것을 보니 선진국일수록 인구 40만~60만이 사는 도시가 가장 살기 좋은 도시라고 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을 보라. 인구 50만을 백여 년간 유지하면서도 세계를 움직이는 정치중심도시로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역시 미국은 도시 정책만 보아도 세계를 지배할 만한 나라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음날은 형님을 모시고 인근에 있는 현대옥 콩나물국밥으로 점심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데 옆 자리에서 혼자 식사를 하는 아주머니가 뜻밖에 자기 식대를 미리 내면서 우리형제 몫까지 지불을 하니 깜작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면식도 없는 초면이요 사전에 인사를 나눈 바도 없다. 그런데 서빙하는 분한테 현금을 내면서 옆자리 두 분까지 계산을 하라고 돈을 내밀었다. 나는 어리둥절하여 사양하고 만류했으나 자기는 가끔 노인들에게 이렇게 대접하는 것이 상례라고 태연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형님! 이런 분을 우리가 본받아야 합니다. 이분이야 말로 실지불공을 하고 정초부터 복을 짓는 분 아닙니까?”
하면서 그 분께 그저 감사하다는 말로 답례를 하고, 전화번호라도 알고자 했으나 그럴 필요 없다면서 먼저 식당 밖으로 휑 나가셨다. 70여 년 살아오면서 오늘 같은 호의는 난생 처음이다. 그 분은 나에게 큰 깨우침을 주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날 평생 살아오면서 생면부지(生面不知)한 사람에게 언제 밥 한 그릇 대접해 본 일이 있었던가. 앞으로라도 그분을 따라서 배우고 보시하라는 시범을 보이는 것 아니겠는가. 형님도 90평생에 처음 겪는 호의라며 감격해 하셨다. 점심을 무상으로 공양 받고 나와서 바로 앞에 있는 홈플러스 CGV영화관으로 갔다, 마침 이병헌 감독의 「극한직업」이라는 영화 상영시간이라 입장하여 영화를 감상했다. 류승룡 진선규 이동휘 등이 출연하여 마약범을 검거하는 강력계 형사들이 수사하는 액션 코미디영화였다. 낮에는 치킨 집을 운영하며 잠복근무를 하면서 마약범을 소탕하는데 마치 조폭들과 격투를 벌이는 것 같은 코믹한 옛날 수사반장 비슷한 영화였다. 그러나 이 영화가 개봉 15일 만에 1천만의 관람객을 돌파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청소년들은 좋아할지 모르지만 우리 같은 노인들에게는 별로 감동을 주는 영화가 아니었다. 끝날 무렵 형님이 미리 나가자고 해서 영화관을 나와 형님을 모셔다 드렸다. 형님과 박물관 관람도 하고 공짜 점심도 먹고 영화도 보니 설 연휴를 즐겁게 보낸 성싶다. 앞으로 몇 해나 더 형님과 설 명절을 즐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 2003 .5. 봄 호 문예운동78호 수필 신인상 등단 (성기조추천)
2005. 2 전주북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 (43년 봉직)
2005.2 제1수필집-사랑을 먹고사는 사람들
2013.12 제2수필집-버리기 연습, 2014.12 제3수필집- 지구촌 문화기행
2014.12 행촌수필 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