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遼東이라는 이름은 우리 고대사의 절대적 키워드 입니다, 따라서 고대 요동과 불가분의 나라인 燕나라의 실제 위치는' 古朝鮮과 고구리 그리고 漢四郡의 위치와 馬韓과 辰韓의 실제 위치, 이에 따르는 백제와 신라의 실제 위치를 알수 있는 키워드가 遼東이라는 이름입니다. 이제 부터 연나라의 실제 위치를 통해서 동아시아 고대사가 어떻게 조작 되엇는지를 알아 보겠습니다. 遼東이라는 이름은 元代 이전의 요동과 元代 이후의 요동으로 구분되어 사용되어야 합니다. 참조 ; http://cafe.daum.net/mijiwon/OV4b/35 다음은 中華人民共和國의 위키 백과의 수, 당나라 시대의 요동군에 관한 설명 입니다. 하 상 시대에는 요동지구는 영주에 속해 있었다. 하상 시대의 中原은 오도로스 평원입니다. 즉, 이 시기의 영주는 湟水(황수) 남쪽의 400여리에 존재 했으며 황수는 황하 상류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상 시대에는 지금의 오도로스 평원이 遼東땅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설명입니다,' 실제로 陝西省과 山西省은 우리가 읽으면 "섬서성"과 "산서성"으로 읽지만 중국 사람들은 이 두의 행정지명을 다같이 "산시성"으로 읽습니다. 무슨 의미냐 하면 이 두 땅은 본래 하나의 땅입니다. 서주 시대에는 유주를 포함하고 있었다. 서주 시대의 유주란 지금의 陝西省과 山西省 일대 입니다. 周武王四年(公元前1066年),箕子至“则教民以礼义、织作”, 为辽东带来了中原的文化和先进的生产技术,促进了生产发展,促进了民族融合。 주무왕 4년(기원전 1066년), "기자를 보내 백성들에게 예의와 양잠과 방직을 가르 쳤다." 그러나 역사의 팩트는 箕子는 절대로 주무왕이 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箕子는 商나라 王族으로 보입니다. 商나라가 주무왕에게 멸망을 하자 伯夷와 叔齊가 엣 孤竹國이 였던 首陽山으로 망명을 떠났지요. 이때 망명을 떠난 사람은 箕子도 있었던 것입니다. 箕子는 스스로 조선의 땅으로 들어 갔던 것입니다. 伯夷와 叔齊그리고 箕子는 모두 商나라 왕족이거나 귀족들로 보입니다. 참조 ; http://cafe.daum.net/mijiwon/OkwR/8 그러나 箕子는 홀로 조선으로 떠난 것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무리 또는 병력과 함께 조선으로 들어 간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기자가 조선으로 돌어 오자 檀君장당경으로 옮겨 갔다는 기록 때문입니다. 藏唐京(장당경)은 古朝鮮의 都邑地라고 하며, 唐臧京(당장경)이라고 합니다. 三國遺事는 古記를 인용하여, "檀君이 朝鮮을 세우고 平壤城에 도읍을 하였다가 白岳山의 阿斯達로 옮겨 1천 5백년을 다스렸으며, 周나라 초기에 箕子를 피해 장당경으로옮겼다"고 합니다. 許穆의 眉叟記言(미수기언)에는 장당경을 唐臧京이라고 하였으며, "幽州(유주)에 唐臧京이 있었으니 高麗史에서는 그곳을 檀君朝鮮의 都邑地" 라고 되어 있습니다. 장당경의 위치는 지금으로서는 전혀 알수가 없다고 하지요. 장당경이 幽州에 있다면 幽州는 지금의 陝西省과 山西省 일대 입니다. 그런데 장당경에 관한 기록에서 몇가지 아이러니한 부분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단군이 조선을 세우고 장당경이라는 곳에 도읍을 하였다가 백악산의 阿斯達에서 나라를 1500년간 다스렸는데 周나라 초기에 箕子를 피해 장당경으로 다시 들어 갔다는 것이지요. 藏唐京의 "藏"이라는 글자는 "要塞와 같은 城" "숲이 우거진" "억새와 같이 생긴 풀" 이라는 뜻의 글자 입니다. "唐"이라는 글자는 "陶 陶
帝堯陶 京이라는 글자는 "서울"을 의미하는 글자 입니다. 결국 장당경이라는 용어를 해석해 보면 ※"唐이라는땅에 있는 城이며 그곳이 나라의 서울"이라는 의미의 용어 임을 알 수 있습니다. "周나라 초기에 箕子를 피해 장당경으로옮겼다" 식민사관자들은 箕子朝鮮이 실제로는 존재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箕子朝鮮은 중국 최초의 역사서인 尙書大傳을 비롯하여 司馬遷의 史記를 비롯해서 많은 역사서에 등장 합니다.' 오히려 단군에 관한 기록 보다도 箕子朝鮮에 대한 기록이 더 맣은 것이 현실이며 더 구체적 입니다. 기자가 조선으로 들어 가자 檀君은 무엇 때문에 장당경으로 숨어 든 것일 까요? 참고로 기자가 들어 간곳은 아래 지도의 위치 입니다.
참고 : http://blog.daum.net/omye-mail/897 / 孤竹國과 箕子國의 위치 필자는 지금 까지 箕子가 단독으로 조선으로 망명을 떠 났다고만 생각 했습니다. 그러나 단군이 기자를 피해 장당경으로 숨어 들었다면 무언가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기자는 단군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리와 함께 조선으로 들어 왔을 가능성 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단군이 장당경으로 숨어들 이유를 찿기 힘듭니다. 또 하나는 대한민국 식민사관자들은 단군을 어느 특정 인물이라고 해석을 하지요. 만약 단군이 어느 특정 인물이라면 어떻게 나라를 세우고 1500년 동안이나 조선이라는 나라를 다스렸다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단군이 특정인이라고 해석 하는 것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들이 단군조선을 神化로서만 인식할 뿐 正史로 서의 역사로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며 이런 신화적인 요소로 인해 우리 나라 사람들이 단군의 역사를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 식민사관자들의 의도된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운 부분입니다. 汉族或鲜卑族政权多设置辽东郡管辖今中国东北,辽东郡始于戰國時期燕國。 한족 혹은 선비족 정권은 전국시기 연국 시기에 요동군을 설치 했는데 중국 동북에 요동군 관할 정권을 요동군에 설치 했다. 오도로스 평원에 존재 하던 요동을 한족 또는 선비족 정권이 연나라가 있던 시기에 요동군이라는 행정 구역을 설치 했는데 그 위치가 지금의 중국 동부 즉, 지금의 요하 일대에 요동군을 설치 했다라는 설명입니다. 여기서 한족 정권이란 漢武帝를 말하는 것이지요, 한무재가 조선을 멸하고 한사군을 설치 했으며 한사군 중에 요동군은 하나의 군현이라는 것 까지는 팩트 입니다. 그런대 왜 느닷 없이 혹은 선비족을 요동군을 설치한 정권으로 끼워 넣는 것일 까요? 이것은 한무제가 조선을 정벌하고 한사군을 설치 햇다는 그 시기에도 지금의 요하 일대는 선비족이라는 유목민족이 여전히 요하 일대를 장악하고 활동한 흔적이 역력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대묵이 지금의 중화인민공확국의 역사 해석이 필사적으로 지금의 요하일대로 고대 요동의 퍼즐을 끼워 맞추려는 노력의 결과인 것입니다. 燕昭王二十八至三十三年(约公元前284年至公元前279年), 燕国派大将秦开却东胡、拒箕子朝鲜,设置辽东郡,同时置襄平县, 연소왕 28년~33년(기원전 284년~기원전 279년)에 연국은 대장 진개를 보내어 동호를 물리치고 기자조선을 막기 위해 요동군을 설치하고 동시에 양평현을 설치 했는데 구, 현의 치소는 양평성에서 관할 했다. 燕나라가 기자조선을 막기 위해 설치 했다는 것으로 연나라의 동쪽에 잇엇다는 조선을 기자조선이라는 것은 명백한 조작 입니다. 기자가 나라를 세운 이후 40여세가 흐른 후 연나라는 진번조선을 멸망 시키는 것이 역사의 팩트 입니다. 즉, 기자가 나라를 세운 이후 40여세 이후의 나라 이름은 진번조선인 것이며 연나라는 진번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영토화 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사마천의 사기의 기록에 "연나라의 동쪽은 요동과 조선이다"라는 기록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公元前222年,燕国终被秦吞并。秦始皇二十六年(公元前221年), 그리고 기원전 222년에 진시황이 연나라를 멸하고 기원전 221년에 전국을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누고 연나라가 설치 햇던 행정구역을 그대로 물려 받아 군부를 양평현이라 햇다는 것입니다. 양평현의 위치는지금의 河北省 遼陽이라고 주장하지만 절대로 헛소리일 뿐입니다. 遼陽의 위치 元나라판 식민사관인 遼史에 기초한 주장일 뿐입니다. 참고 : http://blog.daum.net/omye-mail/1044 이 遼史의 기록을 설명하는 壤平(遼陽)지도가 위 지도 입니다. 東胡를 지금의 요동 반도로 비정하고 있지요. 천만의 말씀 입니다. 東胡는 지금의 "몽골 초원과 그 동쪽 내몽골 까지의 유목민 또는 유목민족의 땅"을 말하는 것입니다. 위 지도는 紀元前 280년의 燕나라 위치로 그린 역사 지도 입니다. 명백한 거짓 입니다. <史記>에 기록된 燕國을 통해서 위지도가 왜 거짓인지 밝혀 보겠습니다. <史記 -蘇秦列傳>의 기록 입니다 史記 遼東 옛 遼東이라는 이름은 전설의 시대라는 夏商時代 때에도 불리던 이름이라는 것으로 보아 요동의 역사는 그 끝을 알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 지도는 夏나라의 영향이 미치는 범위를 그린 지도 입니다. 즉, 하나라가 존재하던 시기에는 지금의 랴오허 일대는 역사가 존재 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 지도는 상나라의 영향권을 그린 지도 입니다. 영향권이라는 것은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영토가 아닌 상나라의 문화 형태가 미치는 지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나라 시기에도 지금의 遼河 일대는 역사가 존재 하지 않는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 지도는 商나라가 멸망을 하고 周나라 시기의 영향이 미치는 지역을 그린 지도 입니다. 하지만 周나라 시기에도 지금의 遼河 일대는 역사가 존재 하지 않는 지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동이라는 땅이 夏商時代에도 존재햇으며 그 땅이 지금의 요하 일대라고 소설을 써 대는 것이 동아시아 역사의 현실입니다. 즉, 요동이라는 땅은 유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중원에 존재 햇던 땅임을 알 수 있는 것이며 절대로 지금의 요하 일대가 요동일수 없는 명확한 증거 입니다. 이것도 믿을 수 없다면 조금더 detail한 증거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겟습니다. 燕東有朝鮮、遼東,北有林胡、樓煩,西有雲中、九原,南有呼沱、易水, 연 동쪽으로 조선과 요동, 북쪽으로 임호와 누번, 서쪽으로 운중과 구원, 남쪽으로 호저와 역수가 있다, 즉 燕의 영토 범위를 구성하고 있는 地名들을 설명한 기록 입니다.
이 기록을 확대 해석하여 연의 영토가 마치 한반도 평안도 까지 였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요동, 임호, 누번, 운중 , 구원, 호저, 역수는 모두 지명이거나 그 지역에서 활동하던 부족의 이름으로 보입니다. <사기>가 쓰여진 시기는 기원전 109년 ~91년 이라고 합니다. 司馬遷 時期의 遼東과 지금의 遼東半島를 같은 요동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역사를 전혀 연구해 보지 않은 사람들의 주장 입니다. 燕나라 국토의 동쪽은 遼東과 朝鮮이라는 것이지요, 이 기록속의 조선은 樂浪朝鮮 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임호, 누번, 운중 , 구원, 호저, 역수의 위치를 밝히므로서 연나라의 실제 위치가 어디에 존재 햇는가를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의 임호, 누번, 운중 , 구원, 호저, 역수의 위치 설명은 中華人民共和國의 위키 백과가 설명하는 것임을 밝혀 둡니다.
林胡, 又称林人、儋林,字面意義為居住於森林中的胡人。 吊周戰國時代,由遊牧民族建立的部落國家,被歸類為戎。 被趙國擊敗後滅國,其土地被併入趙國,一部份林胡部落人民, 加入匈奴部落聯盟,成為匈奴的前身。 林胡活动于晉國以北(今山西省北部),西与楼烦为邻。 後來林胡一度從晉北向东迁至燕北(河北北部)。 雁门,代三郡,這樣一來林胡被趕到鄂尔多斯高原东部。 林胡後來又被李牧以奇陣所擊敗,單于逃亡,從此林胡不知去向。 唐朝张谓《同孙构免官后登蓟楼》诗:“犹希虏尘动,更取林胡帐。” 즉, 연나라 영토의 북쪽인 임호라는 지명은 지금의 산서성 북쪽이라는 설명입니다. 樓煩, 古代民族與國家,以游牧為生,其領土約在今山西與河套地區一帶。 後被趙國所滅,其地置雁門郡。 他們可能是匈奴的祖先,在冒頓單于時代,北移的樓煩部落被併入匈奴。 연나라의 북쪽의 다른 이름인 루번이라는 땅은 하투지구이며 오도로스 平原인 지금의 陝西省 북쪽 일대의 黃河 流域을 말하는 것입니다. 燕나라의 서쪽은 雲中과 九原이라고 합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雲中 이라는 땅에 관한 설명이 없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입장 곤란한 지명은 설명을 하지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운중이라는 땅이 지금의 내몽골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일본의 입장은 식민사관 그대로의 설명입니다. 하지만 운중이라는 땅은 冒頓單于(묵돌선우)가 직접 통치하던 땅 이름 입니다. 묵돌선우는 초원 스탭의 유목민족을 통일하고 초원 스탭을 삼등분 하여 통치 합니다. 초원 스탭 묵돌선우는 雲中 땅을 다스렸다고 하지요, 지금의 오도로스 평원이 운중일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雲中땅은 秦始皇의 秦나라 핵심 영토 입니다. 劉邦은 진시황의 진나라를 멸망 시켯지만 진나라의 핵심 영토 엿던 지금의 오도로스 평원을 영토화 하지 못했습니다. 위 지도는 중화사관에 입각한 3가지가 명백한 거짓 지도 입니다. 첫째 유벙은 지금의 오도로스 평원을 영토화 자지 못했습니다. 유방은 묵돌선우왕의 전쟁에서 묵돌선우에게 깨지고 漢武帝 집권 초까지 막대한 조공을 해야 했습니다. 오도로스 평원은 초원 유목민족의 영원히 양보 할 수 없는 故國 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묵돌선우가 유목민족의 故國인 오도로스 평원을 그대로 둘리가 없지요, 묵돌선우가 직적 통치하는 땅은 오도로스 평원이며 雲中인 것입니다. 둘째 운중의 동쪽은 묵돌선우의 좌현왕인 眞朝鮮의 땅 입니다. 진조선의 땅은 漢武帝가 집권한 이후 묵돌선우의 三韓이 와해 되면서 東胡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것입니다. 이후 동호는 분열되면서 선비족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선비족은 조선의 다른 용어 이며 선비의 영역은 황하의 북쪽 모두를 말하느 것입니다. 그러나 위지도는 한나라의 영토를 황하의 북족인 山西省의 동쪽과 河北 그리고 한반도 북쪽 까지 그리고 잇습니다. 명백한 거짓입니다. 운중의 서쪽은 西域이라 불리우는 九原인 것입니다. "九"라는 漢子는 "마지막" 또는 "끝"을 의미하는 글자 입니다. 즉, 九原이는 땅이름의 의미는 "(서쪽)平原이 끝나는 땅"이라는 의미 입니다. 그리고 燕나라의 동쪽은 遼東과 朝鮮이라고 합니다. 연나라의 북쪽과 서쪽 땅을 알았으니 연나라는 당연히 지금의 山西省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산서성의 동쪽은 요동과 산동반도 입니다. 산동반도는 舜임금 때부터 朝鮮의 땅이라고 합니다. 遼東이라는 땅은 山西省에서 부터 지금의 泰山 서쪽 까지 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산서성일대에 존재하던 연나라를 왜 지금의 요하 일대에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일 까요? 중화인민공확국 역사가 주장하는 요동은 한무제가 낙랑조선을 멸하고 제2의 요동이라는 땅을 만들엇다는 것입니다. 한무제의 요동을 인정해 주고 역사를 이야기 해 봅시다, 그렇다면 한무제 이전의 산동반도에 존재 했던 樂浪朝鮮 마져 이동 시켰다는 말 아닌가요? 이런 어처구니 없는 억지 주장이 현재의 동아시아 역사 입니다. 그렇다면 원래의 요동과 조선이 통채로 이동되었다면 이게 역사 조작인 것이지요. 地理志云 遼東郡武次縣, 東部都尉所理也 지리지에 전하기를 요동군 무차현은,동부도위가 다스린다 武乡县在中国山西省东南部、太行山西侧、浊漳河上游,是长治市所辖的一个县。 무차현은 현재 중국 산서성 동남부 있으며, 태행산 서측, 독장하 상류, 장치시에 소재하는 현이다. 즉 요동군에 속해 있는 무자현은 산서성 동남부에 있으며 태행산 서쪽에 있으며 독장하의 상류라는 것이며 이 기록대로 라면 요동의 범위는 山東半島의 泰山의 서쪽 일부를 포함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동아시아 고대사는 모두 거짓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역사 해석의 딜레마는 古朝鮮은 그 왕조가 단일 계보라는 해석으로 부터 비롯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입니다. 식민사관적으로는 단군조선->기자 조선-위만 조선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러나 일본과 우리의 일부 사학에서는 箕子 朝鮮은 실체가 없는 허구라는 시각이며 실제로 1963년 이후 우리 국사는 기자 조선을 국사에서 제외 시켰 습니다. 왜냐하면 기자조선은 이름만 존재 할뿐 한반도에서는 그 유물이나 실체는 찿을 수 없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단언하지만 기자조선의 위치는 산서성 일대 입니다. 주무왕이 기자를 조선후에 봉한 시기가 기원전1122년으로 추정을 하지만 주무왕은 기원전 1046년에 재위를 시작하여 1043년의 짧은 왕위를 이은 사람 입니다. 따라서 주무왕이 기자가 조선후에 봉해졌다는 시기 보다 늦은 왕위 등극은 무려 76년이나 느립니다. 따라서 기자 조선은 <사마천>의 허구적 기록인 기록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기자 조선은 역대 중국이나 고려와 조선에서는 정설로 받아 들여 지면서 조선은 시작 부터 아류라는 패러다임의 역사가 고정 된 것이지요. 즉 정도전은 고려로 부터 정권을 탈취 하고 朱元璋에게 國號를 작명해 줄것을 요청하자 주원장은 조선은 有史가 시작 되는 이래로 중국의 속국이라는 뜻으로 "기자조선"을 이엇다는 의미의 조선이라는 국호를 하사 하는 것입니다. 이병도는 왕부의 잠부론을 인용하여 한씨조선설(韓氏朝鮮說)을 주장하였습니다. 잠부론이란 後漢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에 “周나라 선왕(宣王) 때 한후(韓侯)가 燕나라 근처에 있었다. 그후 韓의 서쪽에서도 성(姓)을 韓이라 하더니 衛滿에게 망하여 바다로 옮겨갔다. (…立姓韓 爲衛滿所伐 還居海中)”라는 기록 입니다. 일부에서는 趙나라를 箕子朝鮮으로 추정을 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기지 조선을 심층 분석해 보면 기자조선의 위치는 조나라와 겹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趙나라는 태행 산맥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금의 산서성의 고대 국가 입니다. 기원전 222년 연나라는 진나라에 병탄되면서 그 수명을 마친다. 秦始皇二十六年(公元前221年),全国分为36郡, 진시황 26년(기원전221년) 전국을 36군으로 나누는데 요동군은 沿에서 그대로 물려받아 연국군제라 한 것이며 군부는 양평현에 두었다. 자, 이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요동군이 어떻게 만들어 지고 어느 위치에 존재 햇는지 명명백백히 밝혀지는 순간 입니다. 즉, 최초의 遼東은 산서성에서 부터 岱山(泰山)의 서쪽까지엿지만 한무제가 泰山 서쪽의 조선을 멸하고 한사군을 설치햇지요. 朝鮮과 樂浪이라는 말은 같은 의미로 사용하엿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위만조선 보다는 낙랑조선이 더 맞는 말이지요. 大淸河 燕이라는 나라 이름은 沿이라는 하천 이름에서 유래 했으며 沿이라는 하천은 沇水(연수)라는 하천에서 유래 했으며 沇水는 濟水의 별칭이며 옛 황하의 별칭이라고 중국이 발행하는 백과사전에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水名。沇,音yǎn。《史记·夏本纪》“兖州”作“沇州”。 沇水,“沇”一作“兖”。济水的别称。 古河名,源出中国河南省,流经山东省入渤海" 즉, 沿水는 중국 하남성에서 출발하여 산동성을 경유 하여 발해로 흘러 드는 황하의 하류적인 하천인 것이며 연나라는 바로 沿水를 근거지로 형성된 나라임을 알 수 있는 것이며 산동반도 濟水 유역에 있었던 나라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하여 연수가 제수의 별칭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겟지요. 청나라는 제수와 연수를 연결하고 그 이름을 "大靑河" 라고 명명햇지요. 즉, 연나라의 위치는 지금의 대청하 일대인 것이며 대청하는 요동을 흐르는 하천인 것이지요. 따라서 연나라를 요동군이라 했으며 요동군은 산서성에서 부터 하북 그리고 하남과 산동성 그리고 강소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진조 멸망후 장령한광 항우가 이곳에서 한때 나라를 세우면서 요동국이라 하였는데 진조에서의 요동군. 요서군, 우북평군이다. 위 초한 전쟁의 지도에서도 확인 할 수 있듯이 초나라의 영역은 지금의 하남과 산동반도 그리고 강소성 일대 임을 알 수 있으며 결국 요동과 요서 그리고 우북평은 항우의 초나라 영역에서 찿아야 함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 两汉时期沿袭秦制也设置辽东郡管辖辽东地区, 但是西汉时东北亚大多数事务由后来被称为汉四郡的乐浪郡,玄菟郡等管辖。 양한(前後漢) 시기에는 진나라 때 설치된 요동군 관할 요동지구인 沿을 승계 햇으며 그러나 西漢(前漢)때 동북의 낙랑군과 현도군등 다수의 한사군이 제2의 요동이 되었다. 연의 동북 지역이라면 지금의 하북성 동쪽을 의미 한다 할 것입니다. 따라서 낙랑군과 현도군은 하북성 동쪽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뭔가 조작의 냄새가 납니다. 동한 때 제 3의 요동군을 만들었다? 아마도 이 부분은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의도된 설명으로 보입니다. 오리지널 요동이 분명히 존재 함에도 불구하고 도데체 무엇 때문에 제2의 요동군을 만들어야 하는 겁니까? 그리고 東漢 어느 임금의 시기에 제 2의 요동을 만들엇다는 기록이 존재하는 가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연나라의 위치를 지금의 하북일대라고 그리고 있는지요? 중화인민공화국의 위키 백과의 설명대로라면 적어도 동한 이후에나 돼서야 제 2요동을 그려야 하는 것인 데도 말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존재 하는 역사의 기록을 감출수 없자 역사 조작의 당위성을 위해 만들어 낸 이야기가 분명하지요. 하북은 절대로 낙랑이 존재 할 만한 조건을 가진 지역이 없기도 하지만 낙랑은 황하 북쪽을 넘지 못합니다.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의 설명을 믿는다 해도 낙랑군은 한반도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 일 뿐이라는 것만은 분명하지요.
따라서 동아시아 역사는 모두 거짓말입니다.. 지금의 동아시아 고대사는 모두 요동이라는 지명의 위치 비정으로 설정되어 해석 되는 것입니다. 그게 낙랑이 돠엇든 연나라가 돠엇든 한사군이 되였든 그 키워드는 遼東이라는 이름인 것이지요. 箕子朝鮮현재 대한민국과 북한의 역사 학자들은 箕子朝鮮의 실체를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철석 같이 믿고 있는 古朝鮮(단군 조선과 기자조선 그리고 위만조선)의 위치는 지금의 북한 지역과 만주 일대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기자 조선의 실체는 한반도와는 거리가 먼 역사속의 미스테리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기자조선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尙書大傳(상서대전)과 司馬遷의 史記의 기록에 등장 합니다. 은나라를 무너트린 주무왕은 드넓은 중국 땅을 통치 하기 위해 수 많은 제후들을 각지역에 봉지를 주어 제후로 봉햇다는 것이며 그 제후 가운데에 하나가 箕子(기자) 이며 주무왕은 기자를 봉한 곳이 기자 조선이라는 것이지요. 기자가 조선 후에 봉해지고 기자 조선이 열린 때가 기원전1122년이라고 하는데 주무왕이 은나라를 멸망 시카는 때가 기원전1046년 이라고 합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주무왕이 은나라를 멸망 시키는 때가 1046년이고 기자를 조선후에 봉하는 때가 1122년이면 주무왕은 논리 적으로 태어나지도 않앗을 때에 기자를 조선후에 봉하였다는 역사의 時差(시차)가 맞지 않지요? 다시 자세히 언급 하겠지만 중국 역사 공정의 논리의 비약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인류 최초의 大戰(대전)이라는 탁록대전의 역사도 허구적 요소로 가득하며 이후 위촉오가 싸웠다는 전쟁의 역사 역시 논리의 비약을 피할 수 없습니다. 즉, 중국 역사는 그 중요 대목마다 과장된 역사로 점철하고 있는 것이며 이 과장된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지만 우리 고대사도 제 자리를 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성씨 중에 鮮于라는 성씨가 있습니다. 本貫(본관)은 太原 하나 뿐이이지요. 太原 선우씨는 청주한씨·행주기씨와 함께 기자에서 연원을 찾고 있습니다. 선우씨의 유래는 箕子가 箕子朝鮮을 세운 뒤 큰아들 송을 장혜왕에 봉하고 둘째 아들 중을 于山國(우산국)에 봉하여 나라를 세우게 했으므로, 朝鮮과 우산국에 있는 자손들이 선과 우 자를 따서 성을 삼았으며 기자의 출신지 태원을 관향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태원이라는 지명은 중국 산서성의 오랜 古都(고도)입니다. 이것으로도 기자 조선의 위치는 山西省임을 증명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기자의 둘째 아들이 우산국에 봉해 졌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요? 우리 국사가 가르치는 于山國은 鬱陵島 입니다. 만약 기자 조선이 산서성에 존재 한다면 <삼국사기>의 우산국 즉, 울릉도는 어찌되는 건거요? 그야말로 공지가 넘쳐 나던 시기에 기자의 둘째 아들을 울릉도에 보내는 것은 유배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런 논리의 비약은 식민사관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三國史記>于山國의 기록을 점검해 봅시다 . 卷四 智證麻于十三年夏六月條 于山國征服、歳以土宜爲貢、于山國、在溟州東海島、或名鬱陵島、地方一百里、 恃嶮不服、伊喰異斯夫、爲何琵羅州軍主、謂于山人愚悍、難以威來、 可以計服、乃多造木偶師子、分載戰船、抵其國海岸、 誑告曰、汝若不服、則放此猛獸踏殺之、國人恐懼則降, 우산국은 명주동쪽 바다의 섬이며 혹은 울릉도라고 한다는 것이며 이사부가 불복하는 울릉도 사람들에게 나무로 깍아 만든 사자를 풀어 놓겟다고 하니까 그제서야 복종을 하엿다는 기록입니다. 신라는 무슨 이유로 동해 바다의 조그만 섬인 울릉도를 복속 시키려 애를 썼을까요? 오히려 문명과 단절된 울릉도 사람들이 먼저 와서 머리를 조아리면서 복속을 간청해야 하는 것이 순서 아닐까요? 또한 신라가 그토록 영토가 아쉬웠다면 대마도나 일본열도 정벌이 우선 아니였을까요? 또한 사자를 본 일이 없는 울릉도 사람들이 어찌 사자가 무서운 동물인지 알고 두려워서 항복을 햇단 말인가요? 鬱陵(울릉)이라는 漢字를 점검해 보자구요 鬱(울)이라는 글자의 유래는 천자나 왕이 기거하는 城안의 빽빽한 기와집을 보고 답답한 마음을 묘사한 글자라는 것입니다. 陵(릉)이라는 글자 역시 훗 날에는 언덕이라는 뜻으로 쓰이자만 글자가 만들어지는 최초의 의미는 "임금의 무덤"을 뜻하는 글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鬱陵이라는 말은 고도로 밀집된 궁실과 황제나 왕이 사는 도시를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는 단어인 것이지요? 즉, 외딴섬인 울릉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漢字의 조합인 것입니다. 溟洲(명주)의 溟(명)이라는 글자에도 관심을 가져 보자구요. 暝이라는 글자는 "어둡다""멀다"라는는 뜻으로 쓰이지만 원래는 "북쪽 끝"이라는 의미의 글자입니다. 우리 국사는 지금의 강릉의 옛 지명이 溟洲라고 주장하지요. 三國史記의 강릉 명주와 우산국을 인정 한다면 강릉 명주와 울릉도는 적어도 기눤전 1100년대 부터 존재 했다는 의미 아닌가요? 강원도 강릉과 웅릉도가 그 토록 오래된 古都라는 이야기는 금시 초문 입니다. 이런 가당치도 않은 역사를 읊어 대는 대한민국 역사가들 제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인지 궁금해 집니다. 그렇다면 箕子의 우산국과 신라가 이사부를 통해서 정벌했다는 우산국은 별개의 지명일까요? 또다른 기록을 봅시다. 箕子朝鮮과 孤竹國의 위치는 동일한 지역이라는 기록이 존재 합니다. 고구리 영양왕 시절에 수(隋)나라가 고구리를 침공하려 하자 배구(裴矩)가 수양제에게 올린 글에서 “고리(고구리)의 땅은 본래 고죽국이었으며 주(周)나라 때에는 箕子를 봉한 곳이었다.” 라고 隋書 권67의 기록 입니다.
이러한 기록은 <舊唐書>와 <新唐書>의 <배구열전>에도 기록되어 있고, 이를 인용한 일연(一然)의 <삼국유사> 고조선 편에도 똑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孤竹國은 遼西의 영지(令支)에 있으며, <정의 괄지지>에 이르기를 고죽의 옛 성이 平州 盧龍縣 남쪽 10리에 있는데 은나라 때 제후국이었던 고죽국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孤竹國=箕子朝鮮=高句麗라 같은 영역에 존재 하던 나라라는 것이지요? 遼西(요서)라는 지명은 遼東(요동)과 대비되는 지명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아직도 요동을 이해 못하셨다면 제 글을 읽지 않으시는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요동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제 역사는 소설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요동의 정확한 위치는 우리 고대사의 팩트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키워드 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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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일리잇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