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4선 대통령
나는 몇 년 전에 골동품상에서 1945년 4월 15일자 신문을 구입 한일이 있는데 일면 톱기사에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관이 일면을 채웠으며 천정에는(지금도 백악관 2층 이스트윙[east wing] 실에 들어가면 볼 수 있음 크기가 약 2평에 해당하는 크디큰 샨델리아 밑에서 목사가 고별예배를 하며 알링턴 묘지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백악관을 돌아보게 하여주고 있다고 설명을 덧 부쳐 놓았다.
2면에는 쪽 곧은 워싱턴 시의 칸스티투션 가(Constitution; 헌법 Ave.)에서 의장대들이 여섯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를 이용하여 백악관으로 운구하는 장면이 보이는데 항공 촬영이었다.
오래전에는 내가 개인적으로 백악관을 3번 방문을 했는데 911테러후 부터는 단체관광만이 존재한다.
지금은 여기에 5개(총 13개 중, 흑인, 미국기계역사, 보이는 자연사, 예술, 예술동쪽문)의 박물관이 한 줄로 서있지만 그 사진에는 인류 자연사 박물관 1동만이 덩그렇게 세워져 있었고 부근은 큰 나무숲이 있었으며 거리에 구경나온 여자들의 정장에는 더 멋을 내느라고 산뜻한 둥근 창의 모자에 액세서리로 꽃을 꽂고 있어 남자들이나 여자들이 모자를 애용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눈물의 여자와 뻔뻔스러움의 여자들이 칸스티튜트 에브뉴로 운구되는것을 보고 있음 이라고 되어 있다
모자 쓰는 풍습이 없어진 것은 2차대전 당시 군인들이 무거운 철모를 쓰니 기피 현상이 생겨 지금까지도 전 세계에서 모자를 쓰지 않는단다.
워싱턴과 포토맥 강을 사이에 둔 알링턴 국군묘지는 남군의 총사령관인 리(Lee)장군의 저택이 자리 잡고 있고 남북전쟁(실은 내전임; Civil war)이후 20만개를 약간 웃도는 비석이 있으며 더 이상 수용이 불가하므로 앞으로는 다른 지역에 안치를 한단다.
남북전쟁(1861-1865)이 끝난 후 재판소에서 4월 9일 북군의 그랜트 장군은 항복한 남군의 리 장군에게 항복조서를 작성하는데 조항에
“모든 병사들은 석방하고 장교는 무기를 그대로 휴대해도 좋으며 말이나 노새는 필요하면 가져도 좋다!”
하자 리장군이
“제 부하들이 너무 굶주렸습니다. 그들에게 식사를 제공해 주셨으면 합니다.”
해서 그는 들어 주었고
“전쟁은 끝났다! 이제 반란군은 우리의 국민이 되었다!”
라고 했단다.
그러나 5일후인 4월14일 링컨 대통령은 포드극장에서 저격을 당하는데 범인은 무대에서서 배우인양 “폭군의 운명은 이런 것이다!” 하고 말을 타고 사라졌는데 링컨기념관의 천정은 평평한 대리석이지만 채광이 되는데 그 시절 미국에는 사진기가 이미 있었고 36개의 도리아식 원주(圓柱)는 그 당시 주의 수이다.
링컨 기념관 반사연못[refracting pool]이 되는데 159m높이의
죠지 와싱튼기념탑 위의 창문에서 촬영.
기념관 후면은 포토멕강이고 강건너 왼쪽은 알링튼 국군묘지.
오른쪽은 롸슬린지역이며 값이비싼땅이되는데 여기에는 소문이난
일본스시 식당이 있다.
직걍이 약 1m가 되는 원형의 자연석을 깎아서 만든 기둥은 36개이며 천정에는 수평의 대리석을 덮어서 내부가 어둡지를 않게 은은하게 채광을 하는데 우리집의 비싼 샨데리아도 천연대리석을 앏게 깎아서 만든것을 사용을 하는데 돌을 투과한 백열등의 빛은 부드럽다.
한동안 서부에서는 몇 만 마리의 소를 방목하는데 두당 4불이고 동부해안에는 40불이어서 소몰이가 시작 되는데 이때에 카우보이가 생겨나며 서부극영화에서 볼 수 있고 농업이 인력 아닌 기계의 몫이 되니 농부 1인당 160에이커(195,000평)의 땅이 주어진다.
1814년 영국은 프랑스를 격파하고 영국군은 병력을 증강하여 방비가 약한 워싱턴을 체사피크만으로 거슬러 올라와 백악관(화이트 하우스)에 불을 질렀는데 끄을 리어 바깥벽을 흰색으로 칠하는 바람에 연유된 이름이며 지금까지도 펜실베이니아 에브뉴 1,600번지에(지하1층 지상3층, 132개의 방) 흰색 그대로 서 있는데 공개하는 2층에는 오래전의 집무실, 연회장, 크디큰 식당, 등(비디오 휴대가능, 촬영 금지)200년 전의 건물이 되어 크긴 해도 현대식건물 구조와 비교하면 예상보다는 조금은 초라함을 느끼게 하는데 그 당시 기계가 없던 시절의 건축물이라면 굉장히 큰 셈이다.
지금은 대통령이 리무진으로 바깥으로 나들이를 갈 적에는 경호순경들이 개인들의 사진촬영을 금하고 평평한 지붕위에서는 2명의 경호원이 무장을 하고 왔다 갔다 하며 주위를 감시를 하는데 헬리콮터로 날적에는 3대가 같이다니는데 경호상 안전을 유지하기 위함이며 나의 손아래 동서가 이계통 건물 내부 수리반에 근무를 한다.
30 년 전에는 정신병자(?)가 훔친 경비행기로 돈키호테같이 백악관 잔디밭에 착륙할 수 있었던 것은 법에의하여 워싱턴에 10층(130ft)이상의 고층 빌딩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경호에 구멍이 난 일이 있었는데 지금은 개인비행기라면 워싱턴 상공의 통과를 불허하고 올 봄, 처음으로 대공포 방공체제를 구축했다.
지금은 철책으로 안을 볼 수 있는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긴 해도 누가 원격조정 작난감 비행기에 폭발물을 장착하여 들여보내든지 또는 자살테러의 위협 때문에 9,11사태이후부터는 주위에는 차량통행을 못하도록 칸크뤼트(concrete; 발음 부호 kɑ́nkrit)바리게이트로 막아 놓았는데 200년 전에 세운 것이어서 현제의 위치가 적합하지 못하니 다른 곳으로 이전을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백악관 방문 때 주는 안내서에는 링컨 대통령 때에는 군인들이 경호를 맡았으며 그들은 심심하니까 마당에 장기판(chess board)을 갖다놓고 즐겼다고 하며 그 시절 총의 개머리판 끝에는 각진 놋쇠를 붙여놓아서 총을 한발 쏜 후에 재 장진할 시간이 없을 때는 개머리판으로 적을 때리게끔 날카롭게 고안 되어있는데 대통령이 국회의사당으로 행차할 때는 마차를 이용했다고 한다.
국회의사당(캐피털 빌딩) 옆에 위치한 보타닉 가든에 빼곡히 차 있는 꽃들은 플로리다에서 작은 것들을 사와 볼링 에어포트 옆 5에이커 화원에서 기른 후 캐와 여기에 심는데 유리 속에서는 일찍 시들기에 다시 캐어서 화원으로 옮기는 작업을 하는 관리자가 50명이나 되지만 일손이 부족하여 공무원들에게 오버타임을 주는데 붙박이로 철따라 드문드문 피는 우리 집의 성긴 꽃들과는 대조적으로 이곳에는 밀집 되어 있다.
보타닉 아트(Botanic art)클럽이라고 있는데 사진기가 없던 시절엔 보기 좋은 꽃은 그림으로 남기는데 우리 집에 있는 유명화가가 그린 꽃의 복제품은 그리는데 시간이 걸려 약간 시들어 있다는 것이다.
사물을 묘사하던 화가들은 꼭 닮은 그림을 그려내는 사진기에 밀려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그리게 되니 후에 등장하게 되는 것이 야수파와 입체파가 된다.
링컨은 학교는 별로이지만 글 읽기를 좋아하여 큰소리로 읽으면 눈으로 읽고 귀로 들으니 2중으로 효과를 본다고 했는데 지금까지도 그가 한말은 모든 독서인들에게 적용된다.
그는 남북전쟁중인 1863년 1월1일 노예해방을 선포할 때
‘노예해방을 찬성 할 것이냐 반대 할 것이냐 2가지 중 하나를 택해야지 중간은 불법행위이다’
라고 말 했고
“이날즉시, 그리고 영원히 자유를 부여한다!”
라고 했는데 그대상은 300만 명에 해당되며 어떤 노예들은 독립을 하더라도 땅이 없으니 주인과 같이 지내고 싶다고 했다.
연방정부에 대하여 반감을 가진 흑인들의 환호를 받았고 영국은 미국의 남부에서 나오는 면화로 그들의 섬유사업을 유지하기 때문에 실은 남부를 지지하고 있을 때 이지만 영국의 자유주의자 혁신파 등은 숭고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다하여 환영을 받았고 영국은 미국의 남쪽에 독립된 국가가 있을 수 없다고 단념을 했단다.
전쟁직전 남군은 수도를 리치몬드로 옮겼는데 제임스 강이 교두보이기 때문이고 워싱턴이 가깝다는 이유이지만 워싱턴으로 봐서도 같은 조건이 되며 첫 전투는 워싱턴 시에서 47km떨어진 메나사스(Manassas, Man assassins, 남자 암살자에서 유래한 도시 이름일까?)시의 불뤈(Bull run, 황소 달리기)작전인데 포토맥공격군이 북 버지니아 수비군보다 더 유리하니 첫 번째 작전에서 북군이 크게 패했는데 지금도 이곳에는 불런 공원, 불런 사격장, 불런 골프장(재미동포 소유)이 만들어져 있으며 내가 모두 다 이용해 보았다.
첫댓글 우리가 자주 접하지 못한 여러가지 이야기
긴글에 수고 많으셨습니다 잘보고 갑니다
저는 2개의 나라에서 생활을 하니 머리속에 든것이
많은 편입니다.
감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