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글이니 바쁘신 분들은 패스하세요!~]
조선 성종 때 아름다운 풍속의 기록이 이렇다.
첫째는 상례(喪禮)에 관한 예법,
둘째는 관리에게 토지를 지급하는 제도인 직전(職田),
셋째는 재가(再嫁)한 여자의 자손에 대하여 관직의 진출을 막는 일(이하 ‘재가녀자손금고법(再嫁女子孫禁錮法)’)
셋째가 아름다운 풍속이라고 한다?
재가녀자손금고법은 성종이 제정되었고, 당시 성종의 법 제정에 적극적으로 찬동했던 대신은 4명뿐이었다. 대부분 반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법은 조선의 법이 되어버렸다. 권력을 가진 미친 인간 하나가 끼치는 폐해는 엄청나다. 임금 자기는 여자가 무지 많으면서 말이다.
2.
본래 조선에는 재가(再嫁)를 제한하는 제도가 없었다.
다만 삼가(三嫁)한 여성은 실행(失行)한 것으로 간주해 성적(性的)으로 문란한 부녀자의 명단인 자녀안(恣女案, 마음대로 하고 사는 여자들 명단)에 이름을 기재하고 그 자손을 주요 관직에 등용하지 않는 법이 있을 뿐이었다.
요즘 세 번 결혼하면 능력 있는 여자(남자)라고 하던가!
그러다 성종 8년에 그 법을 더 강화하여 재가한 여성의 자손은 아예 관직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처가 시행되었고, 성종 16년에는 이 내용이 『경국대전』에 실려 국법으로 명문화되었다.
이런 미친!!
법에 다가 못을 박아버렸다.
그리고는 이것이 아름다운 풍속이란다.
‘재가한 여자의 자식은 아무리 뛰어나도 사대부가 될 수 없었다.’
이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유전인자 땜에 부질없이 자식들에게 집착성 엄마들이 양산된 것이다. 자신의 삶은 어떻게 되던 자식! 자식!
그래서 ‘자식 앞길 막는다’는 말이 생겨났다.
수많은 여인들이 자신의 삶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고 그게 미덕인줄 알고 살다 갔다.
그래서 온갖 고생하면서 악착같이 사는 자갈치 아지매 문화가 만들어졌다. 역으로 설명하면 그 문화가 지금 우리나라가 잘 사는 나라가 되는 원천이 되었다. 아주 역설적이게도 말이다.
여기서 교육열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그 교육열의 효과로 이 정도 살고 있는 것이다. 유교가 만들어준 역설적 관점이라 슬프다.
3.
필자가 문화재나 유적을 답사하다가 행적을 적어 놓은 비석을 읽으면서 실소를 금치 못하는 글이 복사한 것처럼 보인다.
“강직하고 청렴했다”
웃기는 소리다.
조선 사대부란 자들의 거의는 유연성과 포용성이 없었고, 뒷구멍으로 백성들 수탈만 했다. 물론 몇몇 청렴했던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성리학자들은 위선자들이었다.
지금도 교육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형식만 있고 실질이 없는지, 질문해보자!!
회원여러분!
조선시대 한 살 차이로 살다간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규장각에서 선후배로 정조와 많은 일을 한 두 사람입니다.
다산을 아시지요?
풍석을 아시나요?
아마 다산 정약용은 잘 알면서 풍석은 누군지 아는 이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자기가 사대부이면 다산을 공부해야겠지만 아니면 전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풍석에게는 실질이 있습니다.
백성이 먹고 사는 방법을 30년 동안 직접 연구해서 만들어 두었습니다.
아직도 방대하여 번역을 다 못하고 있는 책이 『임원경제지』입니다.
그런데 풍석 서유구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의 형수 빙허각 이씨가 만든 책이 조선 최초의 생활백과사전 『규합총서』입니다.
형수와 시동생의 드라마 같은 재미나고 감동적인 많은 이야기 거리가 있지만 넘어 갑니다
4.
조선시대에 과부가 되면 생계가 가장 큰일이었는데 사대부 자기들 배가 부르면 백성들 배도 부르다고 생각하고 그저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겠다고 또라이 짓을 한 것이다.
성종은 ‘굶주려 죽는 일은 작은 일이고 절개를 잃는 것은 큰일이다.’라는 중국의 초기 성리학자 정이(程頤)의 말을 내세워 40여 명에 달하는 신하의 반대를 묵살하고 기어코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켰다. 미친 임금이다.
일을 이룬 성종(成宗)이 아니라 무자비한 성종(猩宗)이다.
재가녀자손금고법이 만들어진 이후 사대부 집안에서 과부를 재가 시키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었고 이로 인해 과부들이 많아졌다. 이 법에 의해 세뇌된 부녀자들이 임진왜란 때 스스로 정조(貞操)를 지켜 몸을 더럽히지 않고 자결하였다. 환장할 일이다.
재가에 대한 금기가 강화됨에 따라 일부종사의 원칙과 여성은 반드시 한 명의 남편과만 성적 접촉을 해야 한다는 정조에 대한 강박 관념도 함께 심화하였다. 정절을 위하여 여성의 죽음은 ‘작은일’로 치부하며 성립된 이 법은 점점 더 비정한 방식으로 여성을 억압했다.
드라마 ‘연인‘의 내용처럼 병자호란 이후 벌어진 환향녀에 관한 논란도 마찬가지다. 청나라 군사에게 끌려갔던 아내들이 집으로 돌아오자 대다수의 남편이 포로로 끌려갔던 여자는 재가하여 실절한 여자와 마찬가지라고 주장하며 이혼을 요구했다.
남자놈들이 무능해서 지켜주지도 못했으면서!!
정말 웃기는 짬뽕은
위에서 언급한 ‘굶어 죽은 것은 작은 일이고 정조를 잃는 것은 큰일이다.’라고 말한 장본인인 정이(程頤)가 도리어 과부가 된 자기 조카딸을 재혼시켰던 사실은 숨겼다. 그러니 그들이 위선자들이 아닌가!
21세기 대한민국 여성들이 아직도 조선의 여인처럼 사는 것이 미덕이라 생각하는 것이 답답하기 그지없다.
“삶은 딱 한번 뿐이다!!”
쉬운 통치를 위해 만든 규정을 아직도 금과옥조로 여기며 자신의 본능을 학대 하는 여성들이 안쓰럽다.
끝으로 위에 등장한 『규합총서』 의 저자 빙허각 이씨의 절명시(絶命詩)로 그녀를 위로코자 한다.
1824년 2월, 66세의 빙허각 이씨는 2년 전 남편 서유본을 잃은 뒤 식음을 전폐하고 자리에만 누워있었다. 그녀는 붓을 잡고 마지막으로 절명시(絶命詩) 한 수를 남긴 뒤 끝내 남편의 뒤를 따라갔다.
"사는 것은 죽는 것 또한 꿈이리니
살고 죽는 것은 본디 참이 아니네
부모에게 받은 목숨을 무슨 이유로 티끌처럼 여기는가!
태산과 홍해처럼 베풀고
서로 의를 따라 살았네
우리 혼인할 때의 사랑을 생각하니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비할 바가 없었네
평생을 짝을 이루어 아름다운 부부의 연을 맺은지
오십년 세월이네
그대가 내 사랑을 얼마나 받았는지 알지 못하나
지기(知己)의 은혜를 보답해야만 하리
이제 죽을 자리를 얻었으니
일편단심으로 신에게서 질정(叱正)받으리라
나 죽어서 지우(知友)에게 사례하리니
어찌 내 몸을 온전하게 하리오"
부부가가 의(義)를 따라서 살았으니
먼저 간 남편을 아내가 따르면서
친구같이 대해 준 남편의 은혜를 보답코자한다고 하고있다.
2025.2.27
티비를 보다가 열 받아서
서우진 씀
첫댓글 그 옛날에..
재가를 못한이유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네요.. ^^
언제 시간되실때 풍석에 대해서도 글을~!!
숙제를 주시네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