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목)
* 시작 기도
주님...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유다 왕 아하스에게 너희가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의 징조를 하나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하스 왕은 자기가 굉장히 겸손한 듯이 내가 어떻게 하나님께 징조를 구할 수 있겠느냐며 겸양을 떱니다.
그 말을 들은 중재자 이사야는 아하스 왕에게 그것이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을 괴롭히는 것이라면서 직접 하나님이 주시는 징조를 말씀합니다.
이 말씀이 그 유명한 임마누엘 징조입니다.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징조의 말씀입니다.
아하스의 믿음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임마누엘의 역사입니다.
우리의 믿음없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으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뜻임을 믿사오니 그 은혜 앞에 엎드립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님이 주신 새 날, 해 아래 새 것이 없으나 복음으로 생명을 살아가는 그것이 진정한 새 날임을 믿습니다.
순간순간 세상 정욕에 이끌려 겸손한 듯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사 십자가 보혈로 나를 씻어주소서.
그 안에서 참된 기쁨이 솟아나게 하소서.
나의 의는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주께서 주신 빛나고 깨끗한 의의 세마포 옷을 입고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서게 하옵소서.
먼지요 티끌이며 죽은 흙에 불과한 이 죄인 중에 괴수를 주의 신부로 삼아주시고 그 엄청난 의의 자리 곧 하늘에 주와 함께 앉혀주시오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저 이 하루도 감사와 찬양으로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왕상 15:1-8
제목 : 다윗을 위하여 등불을 주시되
1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 왕 열여덟째 해에 아비얌이 유다 왕이 되고
2 예루살렘에서 3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마아가요 아비살롬의 딸이더라.
3 아비얌이 그의 아버지가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고 그의 마음이 그의 조상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나
4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등불을 주시되 그의 아들을 세워 뒤를 잇게 하사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하셨으니
5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
6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사는 날 동안 전쟁이 있었더니
7 아비얌과 여로보암 사이에도 전쟁이 있으니라. 아비얌의 남은 사적과 그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8 아비얌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니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아사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 나의 묵상
아버지 르호보암과 그의 아들 아비얌은 부전자전이다.
3년 동안 예루살렘에서 남유다를 다스리면서 그의 아버지 르호보암이 행한 모든 죄를 그대로 답습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않은 것에 대하여 지극히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위하여 등불을 주셨다.
여기서 등불이라 함은 왕의 후계자를 뜻한다.
이 등불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 언약에 근거한다.
(삼하 7:11b-12)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이 말씀은 일명 나단신탁이라고 하는 하나님과 다윗 사이에 맺은 다윗 언약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신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다윗이라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 역시 인간이었기 때문에 의가 없지만 그는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고 죄를 범했을 때는 즉시 엎드려 회개하였던 것이다.
이를 하나님이 어여삐 여기셨고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된 것이다.
남유다는 철저하게 다윗 왕으로 인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린다.
그래서 그의 아들 솔로몬이 왕위를 잇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과 그의 아들 아비얌 그리고 그를 이어서 아사가 왕위를 잇는다.
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곧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 때문이다.
다윗 이후에 솔로몬을 비롯한 왕위를 이은 왕들이 비록 악을 행하고 범죄할지라도 그들은 왕조가 바뀌지 않고 오직 다윗 왕조 하나로 이어져 왔다.
하지만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으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왕인 호세아까지 19명의 왕이 통치를 하였지만 이들은 무려 9개의 왕조로 수시로 바뀌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은 변함이 없다.
다윗 언약의 가장 근본이 되는 언약은 물론 창세전 언약이다(딛 1:2).
이 창세전 언약에 근거하여 변함없이 신실하신 하나님의 긍휼은 영원하심을 본다.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이들의 면면을 보면 몇 번이라도 그 왕조가 바뀔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다윗을 위하여 그 언약을 이루셨다.
나 역시 이 시대의 왕 같은 제사장이다.
하지만 나는 허물과 죄로 죽은 자이다(엡 2:1).
물론 나의 목숨은 죽지 않고 살아 있다.
그렇다고 내가 산 자는 아니다.
이렇게 살아 있는 세상의 수많은 짐승들이 있지만 이들을 가리켜 성경은 살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움직이는 생물(네페쉬)일 뿐이다.
그렇게 들숨과 날숨으로 목숨을 부지하는 존재들은 사실 다 죽은 것이다.
‘나’라는 존재 역시 이렇게 들숨과 날숨으로 목숨을 부지하는 실상 죽은 흙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모습으로 목사가 되어 목회를 하였으니 내가 행한 목회의 목적이 만물 위에 있지 않고 오직 만물 안에서 무언가를 많이 이루려는데 혈안이 되었을 뿐이다.
교회의 사이즈를 크게 키우는 것, 그렇기 위해서는 교인들 숫자를 늘리는 것, 무엇보다 노회나 모임에 갔을 때 다른 목사들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서 재정이 넉넉해야만 하였다.
그것이 목회의 목적이었으니 이 목회가 온전할 리가 있겠는가?
르호보암의 아들 아비얌 역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않아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못하였음을 성경은 지적한다(3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위하여 그 등불을 끄지 않으시고 왕의 후사를 이어가셨다.
다윗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그 후사를 주신 것처럼 하나님은 오직 당신의 아들 예수만 받으신다.
그 예수만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 100% 순종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본받아 따라갈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못하다.
구약 시대는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의에 들어갈 수 있다.
이를 누구보다 잘 지키고 행한 자들이 곧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오셨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어서 하나님의 의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그 율법을 잘 지켜서 의인이 되고자 하였다.
사실 구약의 율법을 누가 다 지킬 수 있겠는가?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이들 중에서는 예수님 외에 단 한 사람도 할 수 없다(롬 3:10).
하물며 신약 성경에 얼마나 많은 법 곧 우리가 행해야 할 계명들이 많이 있는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수하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최선을 다하여 지키려 하지만 다 지킬 수가 없다.
바로 성경은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 한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을 해도 그것은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힘이 아닌 주의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것을 믿어야 할 것이다.
좀전에 언급했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러한 법을 잘 지켜서 의에 이르고자 했던 자들이다.
그들은 심지어 안식일에는 자기를 해하려고 뒤에서 칼을 들고 쫓아와도 뛰지 않았던 자들이다.
율법을 어기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순교자가 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들의 마음 한 구석에는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하나님처럼’의 의가 태산을 이룬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미워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 어떤 죄보다 자기 의의 죄 곧 자기주장의지가 가장 큰 죄이다.
내가 하나님처럼 되어 하나님과 맞장을 뜨겠다는 심사를 하나님은 그냥 두고 보지 않으신다.
나는 복음을 알지 못할 때는 어떻게 해서든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잘 지키려고 애쓰는 자였다.
그렇다고 지금은 복음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의 힘과 의지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으며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신약 시대의 언약은 주신 말씀으로 주님과 늘 교제와 사귐을 갖는 것이 진정한 언약의 의미이다.
내가 예수님을 본받아서 잘 행하고 말씀에 잘 순종했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위하여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임을 믿어야 할 것이다.
때로는 그 마자도 교묘하게 행해서 나를 속이고 또한 하나님을 속이는 자로 떨어지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그것을 깨닫고 주님 앞에 납작 엎드려 회개할 것이다.
나의 행함은 온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받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 앞에서 면목없음과 함께 파레시아 곧 담대함으로 아버지 품으로 나아갈 뿐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구약 시대에는 주어진 율법을 다 지켜서 구원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 율법을 지키고자 무진 애를 쓰기도 하고 수많은 백성들을 그렇게 하도록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가르침을 받는 백성들은 고사하고 가르치는 이들 역시 이를 온전히 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세상에서 의인이 되고자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대적하고 자기들이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이들을 향하여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일갈하셨지요.
그런 독설을 내가 들어야 함에도 주께서는 나를 살리시고자 나의 모든 불의를 가져가시고 의인으로 삼아주셨습니다.
그 은혜 앞에 두 손으로 입을 가릴 뿐입니다.
나의 생명 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