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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不滅)에의 제의(祭儀)
- 2004 시조 총평 - 이정환
“존재와 언어 사이에는 아무래도 틈이 있는 것 같다. 언어는 그만치 불완전한 것이다. 그 틈을 우리는 시로 메우는 것이다.”
허만하 시인의 산문집 《낙타는 십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에 나오는 글이다. 존재와 언어 사이에 있는 그 허허한 틈을 메우는 일은 ‘불멸(不滅)에의 제의(祭儀)’이다. 시(詩)란 종국에 가서는 영원성을 지향하게 마련이고, 그렇기에 그것은 삶에 대한 하나의 대항 방식이 되기도 한다. 금년 한 해 우리 시조단은 과연 어떤 작품으로 자신과 시대 혹은 역사에 대해 부단한 싸움을 해왔는가. 존재와 언어, 그 사이의 버성긴 틈서리를 메워온 작업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2004년 11월 20일 토요일 밤 자정 가까울 무렵 백수 정완영 선생을 모시고 시조 이야기를 들었다. 경북 청도군 각북면 비슬산 자락 아래 어느 외진 산방(山房)에서였다. 최근에 쓴 작품들이 주된 화제였다. 하루에 10시간 이상을 시조 쓰는 일에 골몰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나이로 86세인데도 지칠 줄 모르는 열변으로 어리석은 후학을 깨우치고자 함에 무릎 꿇은 심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시인이라고 다 시인인가? 시인은 드물어, 찾아보기 정말 힘들어.”라는 말씀은 의미심장했다. 자신을 유폐할 줄 모르고 어제, 그저께 문단에 나온 신인이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어깨를 흔드는 꼴불견의 행태들이 문득 생각났다.
하늘을 기대 선 바위, 바위 기대 사는 암자/
어제는 청도 운문사 북대암(北臺庵)을 다녀와서/
오늘은 나도 북대암, 하늘 기대 앉았네라
― 정완영, 〈북대암 다녀와서〉 전문, 《개화》 13집
운문사 북대암을 다녀와서 노시인은 북대암이 되었다. 짧은 시에서 ‘기대’가 세 번, ‘북대암’, ‘하늘’, ‘바위’가 각각 두 번씩 나온다. 바위는 하늘을 기대어 서 있고, 암자 북대암은 바위에 기대어 살고 있다. 그런 암자에 다녀왔으니, 북대암이 되어 하늘에 기대어 앉을 만한 일이다. 이제 걸릴 것도, 거칠 것도 없는 드높은 경지에 이르렀기에 흡사 사자후를 터뜨리듯 중후한 우주적인 시편을 빚은 것이다.
북대암으로, 하늘을 기대어 앉아 한때 도저한 사색에 잠겨 있었을 노시인(老詩人). 그 때 그 고절(孤節)의 눈빛은 이 어지러운 세상에 대한 하나의 준엄한 채찍이 되고도 남지 않았으랴?
안다/안다/다리가 저리도록 기다리게 한 일/
지쳐 쓰러진 네게 쓴 알약만 먹인 일 다 안다/
오로지 곧은 뼈 하나로/견디어 왔음을//
미안하다, 어두운 빗길에 한 짐 산을 지우고/
쑥국새 울음까지 지운 일 미안하다/
사랑에 빠져 사상에 빠져/무릎을 꿇게 한 일 미안하다//
힘들어하는 네 모습 더는 볼 수가 없구나/
너는 본시 자유의 몸이었나니 어디로든 가거라/
가다가 더 갈 데가 없거든 하늘로 가거라
― 김제현, 〈몸에게〉 전문, 시조집 《백제의 돌》
우리 시단에서 몸에 관한 시편들은 적지 않다. 그러나 시조 문단에서는 드문 편이다. 〈몸에게〉는 실존적 삶의 천착을 통해 인생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보여 주고 있다. ‘다리가 저리도록 기다리게 한 일, 지쳐 쓰러진 네게 쓴 알약만 먹인 일’에 대해 깊이 반성한다. 또한 ‘오로지 곧은 뼈 하나로 견디어 온’ 몸에게 미안하다고 뒤늦게나마 사과한다. 그 사과엔 진정성이 내재되어 있다. 둘째 수가 그것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어두운 빗길에 한 짐 산을 지운 일, 쑥국새 울음까지 지운 일’과 더불어 사랑과 사상에 빠져 때로 ‘무릎 꿇게 한 일’에 대해 미안하다고 거듭거듭 말한다. 이 시편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곳은 ‘한 짐 산을 지운 일’과 함께 ‘쑥국새 울음까지 지운 일’이라는 대목이다. 이 비유들은 관주(貫珠)일 뿐만 아니라 의미의 중첩을 통해 깊이를 획득하고 있다. 가장 소중히 해야 할 몸에게 ‘쑥국새 울음을 지운 일’까지 사과하고 있는 시인의 섬세한 감성을 눈여겨볼 일이다.
그렇기에 셋째 수에서 본시 자유의 몸이었기에 어디로든 가도록 권할 수 있는 것이다. 종내 하늘로 갈 것을 말하는 구절에서 생명의 영원성, 구원(久遠)의 길을 암시하고 있음을 본다. 죽음은 종언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임을 시사한다. 〈몸에게〉는 그만큼 이채롭다. 일생을 두고 단 한 편밖에 쓸 수 없는 탁월한 인생시(人生詩)라는 생각이 든다.
별 떨기 튀밥같이 어지러이 흩어질 때
어둑새벽 등 떠밀고 달려오는 만 산줄기, 풍경이 풍경을 포개어 굴렁쇠 굴려간다, 자궁 훤히 드러낸 회임의 연못 하나, 제각기 펼친 만큼 내려앉은 햇살 속으로 염소 떼 주인을 몰고 질라래비 질라래비……. 이 땅의 잔가지들 손잡고 살비비는가. 질라래비 훨훨, 질라래비 훨훨, 활개치는 풀빛 아이들.
봄날도 향기로 와서 생금 가루 흩뿌린다
― 윤금초, 〈질라래비 훨훨〉 전문, 시조집 《주몽의 하늘》
《주몽의 하늘》은 최근에 펴낸 사설시조집이다. 그가 그 동안 해온 장시조 세계의 집약편이다. 이른바 옴니버스 시조의 형태도 적지 않다. 우리 시조단에서 장시조에 가장 주력해 온 시인으로서 이 시조집은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텍스트이다. 누군가가 이 점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하리라 믿고, 우선 〈질라래비 훨훨〉 한 편을 보겠다.
원래 “질라래비 훨훨”은 어린 아이가 두 손과 팔을 흔드는 모습이 마치 나비가 날개짓을 하는 듯해서 붙여진 말이다.1) 독특한 정경을 그리고 있다. “봄날도 향기로 와서 생금 가루 흩뿌리”는 그런 날의 의미심장한 풍경을 역동적으로 제시하면서 삶에 대한 의욕을 북돋운다. 굴렁쇠와 회임의 연못, 염소 떼, 활개치는 풀빛 아이들……. 이와 같은 것들을 적절히 등장시켜 신생의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다.
서술성을 통한 현대시조의 양식론적 확장2)에 오랜 기간 동안 힘쓴 흔적이 곳곳에 역력한 《주몽의 하늘》은 시간을 두고 논의되어야 할 중요한 시조집이라는 생각이 든다.
봄에 하는 이별은 보다 현란할 일이다//
그대 뒷모습 닮은 지는 꽃잎의 실루엣//
사랑은 순간일지라도 그 상처는 깊다//
가슴에 피어나는 그리움의 아지랑이/
또 얼마의 세월 흘러야 까마득 지워질 것인가//
눈물에 번져 보이는 수묵빛 네 그림자//
가거라, 그래 가거라 너 떠나보내는 슬픔/
어디 봄 산인들 다 알고 푸르겠느냐//
저렇듯 울어쌌는 뻐꾸긴들 다 알고 울겠느냐//
봄에 하는 이별은 보다 현란할 일이다/
하르르 하르르 무너져 내리는 꽃잎처럼//
그 무게 견딜 수 없는 고통 참 아름다워라
― 박시교, 〈이별 노래〉 전문, 시조집 《독작》
《독작》 역시 최근에 펴낸 시조집이다. 굳이 〈이별 노래〉를 든 것은 서정시의 미학이 온전히 잘 녹아 있다고 본 때문이다. 특히 “어디 봄 산인들 다 알고 푸르겠느냐//저렇듯 울어쌌는 뻐꾸긴들 다 알고 울겠느냐”라는 대목은 연륜의 깊이에서 빚어진 절창이 아닐 수 없다. 진실로 봄 산인들 자연의 섭리 혹은 존재의 의미를 다 헤아리고 푸른 것은 아니리라. 또한 뻐꾸기인들 다 알고 울 턱은 없으리라.
“가거라, 그래 가거라”라고 수월하게 떠나보내고는 있지만, 붙들고 싶은 강렬한 열망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사랑의 무게, 삶의 무게를 견딜 수 없어 종내 하르르 무너져 내리는 꽃잎처럼 진정 봄에 하는 이별은 현란한 만큼 그 슬픔은 더욱 깊으리라. 화인처럼 남은 상처가 영영 지워지지 않듯.
《독작》은 그의 말을 빌리자면 게으름 중에 이제부터 더 게으를 참으로 엮은 시조집이다. 이제 중진의 자리에 이른 만큼 이번 《독작》의 상재(上梓)를 계기로 후진들에게 더 전범이 될 만한 시 세계를 열어 보이리라 기대해 본다.
너는 위안이다 말없는 약속이다/
짓밟혀서 돌아오는 어두운 사내를 위해//
누군가 몰래 두고 간/테라스의 불빛 하나
― 이우걸, 〈섬〉 전문, 시조집 《지상의 밤》
《지상의 밤》은 선집이다. ‘가다듬고 정진하는 기회’로 여기고 펴낸 것이다. 오래 전에 발표되어 이미 널리 알려진 〈섬〉을 다시 살핀다. 기나긴 일정으로 대양을 항해하는 이들에게 섬은 실로 위안과 말없는 약속이 될 법하다. 망망대해와 같은 세파를 여러 날 동안 헤쳐나가다가 돌아온 한 사내가 있다. 그는 어두운 사내이다. 짓밟혀서 돌아온 사내이다. 왜 어두운가. 왜 짓밟혔는가. 그 사정을 속속들이 알 길은 없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로 보았을 때 충분히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다.
어두운 사내, 짓밟힌 사내가 귀가할 때 그를 위해 마련된 것은 ‘누군가 몰래 두고 간/테라스의 불빛 하나’이다. 그것이 섬이다. 그러므로 섬은 이 시편에서 작은 소망이 된다. 오늘날에 와서 더욱 실감나게 하는 대목, ‘짓밟혀서 돌아오는 어두운 사내’라는 현장감 생생한 이미지를, 일찍이 창출한 점은 주목할 일이다. 시대의 가장 아픈 곳을 집어내어 형상화한 점에서 〈섬〉은 그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할 것이다.
우리가 떠나온 길이 너무 멀고 힘겨울 때/
하늘을 걸어서 성자처럼 가을은 온다/
제 발길 제가 붙드는 지난 일은 잊으라며//
우리가 버리지 못한 미움으로 괴로워할 때/
그 미움 태우라고 불꽃처럼 가을은 와서/
타다만 불씨 몇 개를 가슴 한켠 묻어두란다//
보내지 못한 사람으로 우리가 아파할 때/
이미 지난 일은 침묵 속에 남겨두라며/
두 손에 촛불을 들고 기도처럼 가을은 온다
― 민병도, 〈가을은〉 전문, 《개화》 13집
그렇다. “떠나온 길이 너무 멀고 힘겨울 때” 가을은 하늘 길을 걸어서 온다. 종종 “지난 일” 때문에 “제 발길 제가 붙드는” 일이 있는데 그것을 이제 잊으라고 타이른다. 둘째 수에서는 미움마저도 태우고 혹여 남은 불씨 몇 개가 있다면 가슴 한켠에 묻어 두기를 권하고 있다. 셋째 수에서는 보내지 못한 사람 때문에 마음 아파할 때 가을은 말한다. “이미 지난 일은 침묵 속에 남겨 두라”고.
“기도처럼 온 가을”이 일러주는 말을 잔잔한 어조로 다시금 들려 주고 있는 〈가을은〉은 소중한 깨달음을 담고 있다. 쉽게 읽히면서 깊은 의미를 주는 시편이다.
막 껍질을 깨고 나온, 채, 눈도, 뜨지 못한, 그러면서
연거푸, 연거푸 뻗대는 새의…… 살 없는, 다리뼈에 번지는,
감파르족족한, 저, 핏물
그 뒤로
새를 보면
잔약한 가슴뼈가, 입안에서 바싹 씹히는 물 젖은 날갯죽지가,
날 것의 비린내 속에 덧게비치곤 한다
― 박기섭, 〈새―부화〉 전문, 《문학과 창작》 여름호
한 생명의 탄생을 세밀화로 그리고 있다. 스타카토처럼 놓인 잦은 반점 탓에 독해에 다소 지장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의도적이다. “연거푸, 감파르족족한, 잔약한, 덧게비치곤”과 같은 신선한 낱말들이 적절히 배치되어 의미 확장에 도움을 주고 있다.
정밀묘사가 획득한 생명성은 실로 주목할 만하다.
“연거푸, 연거푸 뻗대는 새의…… 살 없는, 다리뼈에 번지는,/감파르족족한, 저, 핏물”이 곧 그것이다. 또한 “입안에서 바싹 씹히는 물 젖은 날갯죽지가,/날 것의 비린내 속에 덧게비치곤 한다”가 보여 주는 실감나는 표현은 가히 한 경지에 이른 것으로 인식된다. 정완영의 논리로 볼 때 경(境)을 연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새―부화〉는 오래 기억될, 특별히 새로운 시편이라 하겠다.
유월 한낮/붉디붉은/수박 속 한가운데를//
일순, 내지르는 칼 끝/날카로운 경적//
한 남자 건장한 몸을/내던졌다/수직으로//
절벽에 가 부서지는/백시(白視)의 새였는가//
눈보라 자욱한 한강/생의 한가운데//
날개를 찾아 헤매던/충혈된/구두 한 켤레
― 김일연, 〈투신〉 전문, 《다층》 가을호
우리 시대의 아픔의 한 단면을 치열하게 노래하고 있다. 하도 자주 일어나는 일인지라 면역이 되어 충격을 받기보다 ‘또 그런 일이 일어났구나’ 하는 정도로 넘기기가 십상이다. 문명이 첨단으로 향할수록 인간성은 더욱 황폐해지는 시대다. 〈투신〉은 다시금 생명에 대한 깊은 자각과 자성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산다는 것은 진정 무엇인가? 이 시편은 ‘잘 익은 수박을 자르는 칼 끝 이미지’를 도입하여 ‘한 건장한 사내의 자살’을 묘사하고 있다. 그 비유가 퍽이나 신선하다. 스스로 죽음과 입맞춘 한 사람의 비극적인 삶이 몹시 안타깝지만, 그 점을 냉철하게 읽어낸 시인의 지적 통제가 돋보인다.
그런 점에서 둘째 수 초장, 절벽에 부딪쳐 산화한 “백시의 새”도 마찬가지이다. 날개를 찾아 헤맸지만, 결국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극단적인 길로 내닫고만 상황을 십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죽음의 파장은 크다. 특히 그 가족에게는 영영 씻지 못할 상처를 남긴다. 때로 어디로 치닫는지도 모를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적지 않다.
또한 살면서 한두 번쯤 죽음과 직면하지 않은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가 “충혈된 구두 한 켤레”만을 남기고 이 땅을 떠난 것은 아니리라. 종생토록 일관된 삶을 살기 어려운 시대이지만, 생명의 존엄성은 끝까지 잘 지켜가야 할 것이다.
메-!/메-께!/메-께라!/메-시께라!/메-시께라!/메-께라!/메-께!/메-!//수화기 저편에서도 입술 끝에 묻은 소리//필시 그 소리는, 사십구재 지내는/망장포구 휘파람새, 울음 공양 같은 거/이 세상 선뜻 못 뜨는 숨비소리 같은 거//누이야, 오사카에 떠돌던 내 누이야/반도의 해안선도, 저승길 한 귀퉁이도/수평선 바싹 당기면, 끌려오지 않겠느냐//파도의 아가미에도 감탄사는 붙어 있다//가는 길 환전하라 엔화 몇 장 올려놓고/망장포 바다는 잠시 조아린 게 아니겠느냐
― 오승철, 〈환전〉 전문, 《열린시학》 가을호
오승철의 시의 이면에는 한이 내재되어 있다. 하긴 삶 자체가 한이 아닌 사람을 이 땅에서 찾아보기란 쉽지 않으리라. 제주라는 역사적, 지정학적 배경이 그의 시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하여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이 점이 소재의 한계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환전〉은 개인사적이다. 일본 오사카에 살던 누이가 이승을 뜬 사건을 다루고 있다. 낯선 땅에 이주하여 산 만큼 특별한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편의 첫 수의 구조가 눈길을 끈다. 글자 모양은 다르지만 한 가지의 뜻―남이 하는 짓이나 말이 기막힐 때 반사적으로 나오는 제주 여인들의 감탄사 격인 언어―을 가진 ‘메, 메께, 메께라, 메시께라’라는 말들이 ‘!’와 함께 어떤 일정한 형태미를 이루면서 아픔의 극치를 시각적으로 일순 표출한다.
“수화기 저편에서도 입술 끝에 묻은 소리”를 “망장포구 휘파람새, 울음 공양 같은” “이 세상 선뜻 못 뜨는 숨비소리 같은” 것으로 아프게 읽는다. 그리고 누이가 몹시도 그리워했을 “반도의 해안선”을, 또한 어쩔 수 없이 건너가야 할 “저승길 한 귀퉁이”도 수평선 바싹 당기면 끌려오리라고 단언한다.
마지막 가는 길에 환전하라고 엔화 몇 장 올려놓고 망장포 바다가 잠시 조아리는 장면에서 이 시편은 끝맺는다. 〈환전〉은 1997년 한국시조 작품상 수상작인 〈사고 싶은 노을〉과 그 궤를 같이 한다. 개인사를 노래하고 있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민족 비극의 역사가 클로즈업되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의 시편은 구조가 튼실하다. 군더더기가 전혀 없다. 길이가 만만찮은 네 수 한 편을 이끌어 가면서도 잘 승화된 세계를 보여 준다. 선이 굵고 불끈거리는 힘줄, 힘찬 맥이 느껴진다.
보은군 속리산 기슭 중티리 양지쪽에/
여든 해 살가운 정 꼭꼭 묶어 다져놓고/
차양진 잡풀밭 위에 국밥처럼 널브러진,//
눈물 삼킨 만큼 목젖은 부풀어서/
비 젖은 산등성이를 젖은 채 흔들어 놓고/
마지막 수저 드시던 눈빛만이 선연한,//
움켜진 손 다 풀고 휘휘 돌아가시는가/
그 눈물의 그늘조차 헤아리지 못한 죄를/
서둘러 짚어 읽느라 산울림도 먹먹한,
― 이승은, 〈곡(哭)〉 전문, 《개화》 13집
죽음을 노래하고 있되 슬픔에 매여 있지 않고 그것을 잘 승화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시인의 기량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 수 모두 종장 끝 부분을 ‘널브러진, 선연한, 먹먹한’으로 맺고 있다. 다분히 의도적이다. 그러한 마무리가 이 시편을 떠받치는 역할을 한다. 자칫 감정적으로 흐르기 쉬운 〈곡〉을 끝까지 한 호흡으로 이끌고 간 것은 범수(凡手)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리라.
“움켜진 손 다 풀고 휘휘 돌아가시는” “그 눈물의 그늘조차 헤아리지 못한 죄”를 “서둘러 짚어 읽느라 산울림도 먹먹한”이라는 마지막 수는 실로 먹먹한 아픔을 건네 주고도 남음이 있다. 우리는 그 얼마나 움켜쥐기에 급급한 삶을 살고 있는가. 〈곡〉은 그런 문제를 죽음을 통해서 넌지시 제기하고 있다.
별처럼 깨끗한 새 소리 속에 핀다//
송이버섯 같은 암자 풍경 소리 가락따라//
실핏줄 파닥거리는 달팽이 목 보고 핀다.
― 김경자, 〈감꽃〉 전문, 《개화》 13집
참으로 소박한 생각을 담고 있다. 살아 있는 신선한 감성과 언어 미학이 작은 정경을 열어 보여 준다. 새소리 속에 피고, “송이버섯 같은 암자의 풍경 소리 가락따라/실핏줄 파닥거리는 달팽이 목 보고 핀다” 감꽃이.
이런 담백한 세계는 그것 자체로서 소중한 것이다. 김경자는 그런 점에서 그 동안 매우 뛰어난 작업을 해온 시인이다.
빌딩 속 사무실 내 갇힌 곳 아니다//
아내가 차려내는 늦은 저녁 상 위//
오롯이 놓인 밥그릇/ 그 환장할/공간이다
― 문무학, 〈내 갇힌 곳은〉 전문, 시조집 《풀을 읽다》
시조집 《풀을 읽다》에서 단형시조 한 편을 살핀다. 물론 비중 있는 〈잠-코의 시간〉 등과 같은 작품이 있지만, 다른 지면을 통해 이미 다룬 관계로 소시민의 애환이 집약된 이 작품을 택했다. 시의 화자가 갇힌 곳은, 늘 일하고 있는 일상적인 공간인 빌딩 속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그 환장할 공간은 오롯이 놓인 밥그릇이다. 물론 그것은 사랑하는 아내가 손수 만들어 차려내는 늦은 저녁상 위에 등장한 것이다.
일견 평범하게 보이기도 할 법한 ‘생활의 발견’에서 우리는 삶의 애환을 어렵지 않게 읽게 된다. 그렇기에 “오롯이 놓인 밥그릇” 안에 갇혀서도 눈물겨운 행복을 느낀다. 그가 아니면 부를 수 없는 질박한 노래이다.
풍장에서 매장으로 긴 길을 헤적이며/
일련번호가 매겨진 고인돌 군을 본다/
누천년 주검의 집에 뿌리내린 시간을//
불시에 따라 묻힌 권속들의 신음을/
풍상에 되새기듯 으늑한 저 표정이/
일몰을 휘감고 앉은 마지막 족장 같다//
그러나 앉은 채로 풍화를 꿈꾸기엔/
순장의 침묵이 비명보다 깊어서/
아직도 눈뜬 주검의 주문을 받는다고//
밤이면 그 혼일랑 모조리 들쳐업고/
청동기 우물께로 마실 다녀오는지/
육중한 죽지 안쪽에 바람이 그득하다
― 정수자, 〈고인돌〉 전문, 《개화》 13집
죽음의 문제를 진지하게 천착 중이다. 네 수 전편이 고른 호흡으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앉은 채로 풍화를 꿈꾸기엔/순장의 침묵이 비명보다 깊어서”와 같은 대목은 되뇌어 읽게 한다. 또한 “밤이면 그 혼일랑 모조리 들쳐업고/청동기 우물께로 마실 다녀오는지/육중한 죽지 안쪽에 바람이 그득하다”와 같은 마지막 수는 과거 역사의 현재화에 성공하고 있다. 특히 종장은 고인돌에게 생명을 부여하여, 그로 하여금 곧장 날개 짓을 하며 날아오를 듯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고인돌〉에서 서로 부단한 길항 작용을 하고 있는 삶과 죽음의 공존을 본다.
여름 한낮 발길 멈춘다 갓길 차를 세우고
주암댐이 훤히 뵈는 어느 마을 정자에 앉아
저 깊은 우물의 뚜껑 열어 내부를 몰래 본다//
햇살 떼 날을 세워 몸 찌르고 달아난다
물풀에 가리워진 마을들이 소곤소곤
옛길로 자전거 몰며 푸성귀 냄새 맡는다//
페달 힘껏 밟을수록 더욱더 선명해진
언덕배기 학교도 정미소도 사당도
더러는 강바닥에 누워 두 눈을 부릅뜬다//
때늦은 장대비가 사정없이 퍼붓는다
물 속에서 걸어 나온 수의 걸친 사람들
고향의 흔적을 찾아 백비(白碑)처럼 서 있다
― 박현덕, 〈주암댐, 수몰지구를 지나며〉 전문, 역류 동인지 제6집
주암댐이 훤히 뵈는 어느 마을 정자에 앉아 깊은 우물의 뚜껑을 열어 그 안을 들여다보는 시의 화자의 모습에서 문득 ‘귀거래사’를 떠올린다. “물풀에 가리워진 마을들이 소곤소곤”거리는 그 옛길로 자전거 몰며 푸성귀 냄새 맡는 모습이 선연하다.
그리운 것이 어찌 학교와 정미소와 사당뿐일까. 많은 이들과 함께 한 잊을 수 없는 시공간은 물 속에 깊이 묻혀 버렸기에 추억은 더욱 애절할 수밖에 없으리라. 마지막 수 중장과 종장 “물 속에서 걸어나온 수의 걸친 사람들이 고향의 흔적을 찾아 백비(白碑)처럼 서 있”는 것을 환상적으로 그리고 있는 대목은 퍽 인상적이다. 이 작품에 생명력을 부여한 결구라는 생각이 든다.
봄날 양지쪽에 세 사람이 앉았습니다//
딸아이와 장모님 그리고 아내입니다//
꽃처럼 흙돌담처럼 장독처럼 앉았습니다//
햇살에 움돋던 정(情)도 렌즈 앞에 놓고 보면//
여자의 가는 길이 이마 위를 타고 가다//
무수히 실린 말들이 사무치게 숨습니다//
딸아이는 꽃가지 꺾어 병에다 꽂지만//
장모님은 외손녀와 아내 가슴에다 꽂습니다//
필름이 다 못 찍어도 마음만은 남겠지요
― 채천수, 〈사진 찍기〉 전문, 《시조세계》 봄호
마지막 수 종장이 다소 안이하게 처리된 점이 아쉬움으로 남지만, 전체적인 구도로 볼 때 〈사진 찍기〉는 그 의미하는 바가 크다. 삼대를 함께 한 장면에 배치하여 정에 넘치는 가족 사랑을 소박하게 그리고 있다. “꽃처럼, 흙돌담처럼, 장독대처럼” 앉았다고 표현하고 있는 점이 무척 살갑게 다가온다. “여자의 가는 길이 이마 위를 타고 가다/무수히 실린 말들이 사무치게 숨습니다”라고 하는 대목 역시 그 의미가 깊다.
“외손녀와 아내”를 “가슴에다 꽂은 장모님”의 모습이 클로즈업되어 화면을 가득히 채우는 듯하다.
복사꽃 펄펄 지는 불콰한 사월 달에 허리를 다쳤어요, 꽃구경 나온 꽃뱀, 꽃구경 가던 바퀴에 찡겼어요.//어떡해?
― 이종문, 〈어떡해?〉 전문, 《개화》 13집
어느 날 청와대 뜰에 꿩이 꿩, 꿩 날아와서/
꿩, 꿩, 꿩, 꿩, 울음을 터뜨렸네//
뭐라고? 청와대 뜰에 꿩이 울고 있다고?//
어? 꿩이로군. 꿩이 꿩, 꿩, 울고 있군.//
꿩, 꿩, 저 꿩에게 먹이를 뿌려 주라//
뭐라고? 직무 정지된 대통령이 지시를?
― 이종문, 〈저 꿩에게 먹일 주라〉 전문, 《개화》 13집
이종문의 시편은 허를 찌른다. 어떤 점에서는 장난기 어린 측면도 있다. 기발하다. 시종 유머와 위트가 시를 견인해 간다. 그러나 단순히 그런 차원이라면 한번 웃고 지나칠 것이다. 그 속에 삶의 의미를 담고 있다. 특별한 정황을 제시해 놓고 독자로 하여금 오랫동안 생각하게 한다. 상황을 죄다 설명하지 않고 늘 여지를 둔다. 독자의 몫으로 남기고 있는 셈이다.
이와 같은 그의 작업은 우리 시조의 지경을 넓히는 데 긍정적으로 이바지할 것이다. 이미 지금까지 보여 준 것만으로도 적잖은 파장을 가져 왔으므로 앞으로 더 큰 기대를 걸어도 좋을 것이다. 두 작품에 대한 자세한 해석은 독자에게 넘기고자 한다.
다시 나를 보내다오 아프리카 밀림으로/
맘모스와 공룡이 어울려 함께 어울려/
광막한 푸른 초원 위/야자수 잎새 춤추던//
수억 광년 빛의 세월 거슬러 내려가면/
거기 가슴 저린 손발 저린 진폐증/
눈물도 검은 눈물도/말라붙은 동공이//
푸르러 더 싱싱한 지구의 허파 그 시대로/
철철철 넘치는 수액 온몸을 적셔주는/
돌아가 태어나고 싶다/다시 푸른 몸으로
― 하순희, 〈석탄〉 전문, 시조집 《적멸을 꿈꾸며》
〈석탄〉은 존재에 대한 천착을 추구하고 있다. 원초적인 회귀를 꿈꾼다. 아직은 원시시대와 같은 아프리카 밀림으로 되돌아가고 싶어한다. 야자수 잎새 춤추던 광막한 푸른 초원 위 맘모스와 공룡이 어울리는 꿈을 꾸고 있다. 더불어 석탄을 캐다가 진폐증에 걸린 이의 말라붙은 동공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분명 석탄의 뜻은 아니다. 그것을 캐내어 생활에 긴요하게 이용한 사람의 잘못일 뿐이다.
‘철철철 넘치는 수액’이 온몸을 적셔 주는 그 시대로 회귀하여 다시 푸른 몸으로 태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석탄이 원래 자신의 몸을 얻기를 소망하듯이, 사람 역시 자연 그대로의 삶을 희구하게 마련임을 이 시편은 절실하게 떠올려 주고 있다. 자연의 회복을 꿈꾸는 일은 진정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모두가 잠든 새벽, 나는 몰래 깨어 있다/
고장난 시간들이 귀를 뚫고 지나가고/
쓰다만 시의 문장들이 흩어져 나를 괴롭힌다//
십년 식솔, 자궁보다 깊은 여자의 숨소리/
나와 그녀가 만든 피보다 진한 아이들/
시보다 더 희망적인 새끼들은 잠들어 있고//
그리워하는 것은 모두 시가 되는 새벽 두 시/
눈물은 다 말라붙어 눈물이 될 수 없는 세상/
하룻밤 물먹은 별이 유리창에 반짝인다
― 정성욱, 〈새벽 두시〉 전문, 역류 동인지 제6집
시속의 화자는 시를 쓴 지 너무 오래 되어 시 한 편 쓰는 일이 너무 고되다고 토로한다. 경황이 없을 근황이 짐작되고도 남는다. 별다른 기교가 드러나지 않는 솔직 담백한 표현이 눈길을 끈다.
홀로 깨어 있는 새벽 두 시, 시를 쓰려고 하지만, 쓰다만 시의 문장들이 흩어진 채로 시종 괴롭힌다. 그리고 십 년 동안 함께 하며 아이들을 낳고 기르느라 애쓴 아내가 곤히 잠든 모습을 본다. 그 정경을 “자궁보다 깊은 여자의 숨소리”로 그리고 있다. “나와 그녀가 만든 피보다 진한 아이들”, 그 잠든 아이들을 두고 “시보다 더 희망적인 새끼들”이라고 말한다. 고개가 끄덕거려지는 대목이다.
시란 대체 무엇인가? 분명한 것은 정말 시보다, 아니 시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 사랑하는 자녀들일 것이다. “그리워하는 것은 모두 시가 되는 새벽 두 시” 몰래 깨어 있는 시인이 홀로 속울음을 삼키며 빚은 〈새벽 두 시〉는 자신만의 호흡과 가락, 거침없는 언어 운용이 돋보일 뿐만 아니라 치열한 시정신이 살아 있다. 언어가 가짐 힘, 그 위력을 느끼게 한다.
소나기를 맞는다 회화나무 밑에서/
다 젖은 바짓단에 감기는 해미읍성/
먼 새벽 익지도 않은 빗줄기에 쓸린다//
머리채 휘감으며/나무에 날 던진다/
밧줄로 꽁꽁 묶어/가지에 나를 건다/
너 또한 여숫머리지?/긴 칼 마구 긋는다//
회화나무 밑에는 이제 비 그친다/
수천의 잘린 머리 속에서 내 머리 찾는 나를/
햇살이 낯선 얼굴로 물끄러미 보고 있다
― 강현덕, 〈소나기〉 전문, 《열린시학》 가을호
특별한 역사적 배경이 작품 속에 잘 녹아 있다. 서산 해미읍성은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그곳에 있는 회화나무엔 박해 당시의 못자국 등이 아직도 선연히 남아 있다고 한다. 수천의 목숨들이 산화한 곳에서 마침 맞은 ‘소나기’가 이 시편을 빚게 했다.
비를 맞은 곳은 순교의 현장인 회화나무 밑이다. 그렇기에 젖은 바짓단에 해미읍성이 감긴다는 표현이 가능했을 것이다. 터무니없는 까닭으로 죽음을 맞이한 이들 역시 “익지도 않은 빗줄기”에 쓸린 것과 다를 바 없었으리라.
둘째 수에서 소나기는 박해자 역할을 하고 있다. 한 수를 6행으로 놓은 것은 급박한 상황을 반증한다. 나무에 던져지고, 밧줄에 묶이어 가지에 내걸린다. 여숫머리―예수 마리아, 즉 예수교인―가 되어 긴칼에 온몸을 마구 난자당한다. 절정이다.
셋째 수에서 비는 그치고, 수천의 잘린 머리 속에서 시의 화자는 자신의 머리를 찾는다. 치열성의 극치를 본다. 역사적 사건과 개인의 내면이 서로 조응하여 밀도 높은 시적 성취를 이루고 있다. 순교와 비견될 수는 없겠지만, 살다 보면 이와 엇비슷한 내적 고통에 시달릴 수도 있음을 이 시편은 넌지시 일러주는 듯하다.
1957년 스푸트닉 1호는 신의 성전에 들어가서/
졸고 있는 신의 수염을 어루만지고 돌아왔다//
이로써 신 몰래 쌓아온/바벨탑은 재건되었다//
잠든 신은 죽었다고 서양인들은 보도했으며/
주인 없는 성전으로 앞다퉈 이주하려 했다//
그러나 신의 번개 앞에/바벨탑은 자꾸 파괴되었다//
1400년 전 백제 땅에 모여 살던 석공들은/
눈 맑은 백성들 위해 밤새도록 별을 쪼아//
인류의 최초 우주로켓인/미륵사지 석탑을 만들었다//
56억 년 후 찾아온다는 신의 약속 믿으며/
뭉뚝한 손가락이 잘려 나가도 정을 다잡았다//
이 땅에 불립문자로 선/석탑이야말로 최초 우주로켓이다
― 장수현, 〈석탑은 최초의 우주로켓〉 전문, 시조집 《기억의 모서리에 푸른빛이 스며 있다》
상식적인 생각을 완전히 뒤집고 있되 외형으로만 생각해도 공감이 간다. 로켓과 탑의 조형 형태, 그리고 대 우주적인 내포까지 닮아 있다. 미처 우리는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는데 장수현은 최초로 그 비밀을 온 세상에 공포하고야 말았다. 그가 젊어서 이런 새로운 발견을 해내었는가. 단순히 자연 연령이 어리거나 젊다 해서 그가 쓰는 작품도 그럴까? 그렇지 않다.
사고 문제이다. 이것은 철저한 프로정신이 낳은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부단히 새로운 길 찾기에 힘쓰지 아니 하면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신은 불교에서 말하는 미륵불을 뜻하고 있다. 그렇기에 56억 년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 땅에 불립문자로 선 석탑”을 “최초 우주로켓”으로 인식한 그 사유의 활달함, 상상력의 이채로움은 그 자체로서도 이미 값지다. 그러나 이 작품이 단순히 놀라움을 우리에게 선물하고 만다면 시정신보다는 유희정신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테지만, 뜯어 읽으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
고금동서뿐만 아니라 머언 미래까지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있다. “졸고 있는 신의 수염”이라는 비유가 인상적이다. 인간으로서 넘어서는 아닐 될 선―일테면 선악과―에 대한 도전은 패망으로 가는 지름길일 수가 있다. “뭉뚝한 손가락이 잘려 나가도 정을 다잡았다”는 말이 함의하고 있는 것이 흡사 시인이 갖추어야 할 의지 혹은 자세로 읽힌다.
석수장이와 과학자의 손길에서 빚어진 결과물이 ‘시’라는 아주 특별한 존재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다. 이 점은 시인의 의도와는 배치되는 해석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이 작품은 독창적이고 그 시사하는 바가 예사롭지 않다. 텍스트에 대한 지나친 주관적인 견해일까. 작가의 의도를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이런 대전환의 발상 끝에 얻은 시편이 〈석탑은 최초의 우주로켓〉이라고 확신한다.
이제 첫 시집을 세상에 널리 내놓은 만큼 창창한 앞날을 더욱 환히 열어 갔으면 한다. 역량 있는 신진 시인의 등장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인 만큼 《기억의 모서리에 푸른빛이 스며 있다》의 시인 장수현에게 거는 기대는 그만큼 크다.
물풀 한 포기 없는 투명한 플라스틱/
너의 행동반경은 얕은 수조의 깊이/
아랫배 둥근 나선형/오랜 유영의 흔적이다//
또 며칠 굶다 보면 어느 생 짧아진 꼬리/
옅은 햇살 속에 손톱 만한 개구리가 되는//
오월의 사각 수조는 오늘을 방생한다
― 김세진, 《올챙이》 전문, 《시조21》 하반기호
박기섭의 〈새-부화〉와 그 맥이 닿아 있는 작품이다. 사람들은 필요에 의해서 올챙이를 잡아 수조 안에 가두어 키운다. 동물원에 살고 있는 숱한 동물들도 그런 점에서 다를 바가 없다. 실험 관찰을 위해 사각의 수조 안에 물을 담아 키우던 올챙이가 손톱 만한 개구리가 되자 방생한다.
시인은 그것을 단순히 개구리 한 마리의 방생으로 인식하지 아니 하고 “오늘을 방생한다”라고 표현한다.
한 마리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는 과정을 지켜 보면서 이와 같은 시편을 생각해 낸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생명시학적인 관점에서 시적 형상화의 모티브를 추출해 낸 작품이다. 사소하지만 소중한 이러한 작업은 우리 시조의 지평을 확장하는 데에 적잖이 이바지하리라 믿는다.
지난 1년 동안 활동한 주요 시인들의 궤적을 샅샅이 읽지 못한 아쉬움은 있으나, 웬만큼은 조망된 것으로 본다. 극히 평범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시인은 항상 신인의 자세로 시와 마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긴장의 고삐를 다잡지 아니 하면 곧 안주에 빠지게 되고, 독자와의 거리는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다. 장옥관 시인이 한 대담3)에서 밝힌 것처럼 ‘미적 흥분 상태’를 부단히 유지하지 않고서는 결코 울림이 큰 시를 쓸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인의 분발도 한층 요구되겠지만, 지도자 격인 중견이나 중진 시인들의 부단한 탐색과 천착이 더욱 요청되는 때가 아닌가 한다.
시조의 밝은 미래는 지난 90년대 말에서 지금까지 등단한 일군의 시인들의 활약 여부에 달려 있다. 그들의 창작에 선배 시인들이 견인차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온갖 정보들이 범람하는 인터넷 시대의 소용돌이 속으로 시조문학이 곧 함몰되어 버릴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시조문학상과 각종 심사에서 후배들에게 과감히 길을 터주는 일도 필요할 것이다. 그리 넓지 않은 시조단에서 소수의 사람들에게 상이 집중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왜 등단 연도에 지나치게 묶여 있는가. 시단이나 소설 같은 장르에서 등단 연조에 구애되지 않는 폭넓은 운용을 하는 것을 눈여겨볼 일이다. 언제까지 극히 폐쇄적인 안목으로 시조단을 꾸려 갈 것인가. 문을 더 열어야 하고, 먼저 이룬 이들이 한껏 품을 넓히지 않으면 아니 되리라.
각종 시조문학상에서 그 상의 제정 취지와 정신에만 맞는다면 신인과 중견을 가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격려하는 방향으로 운영해 나가야 할 것이다. 20대와 30대의 신인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는 현실을 직시하고 시조의 발전을 위한 다채로운 모색과 전략을 세워 나가지 않으면 시조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시조가 이 궁핍한 시대에 한 줄기 빛을 비추어 줄 수 있는 정신적인 한 양식이 되리라는 것과, 나아가 이 질곡의 시대에 거센 파도를 잠재울 만파식적(萬波息笛)이 될 수 있으리라 굳게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하는 고언(苦言)이다.
은바늘로 콱 내리찔러 지구의 자전을 일순 멈추게 한 시(詩)로 백수 정완영 선생은 이호우의 〈오(午)〉를 들었다.
2004년 11월 20일 한밤의 산방시화(山房詩話)에서다. 필자가 지난 10월에 펴낸 《@로 여는 이정환의 아침시조 100선》에도 수록되어 있다.
새해엔 우리 시조단에 그러한 작품들이 많이 생산되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삶의 한 대응 방식이자, 아울러 ‘불멸(不滅)의 제의(祭儀)’를 위한 심혼(心魂)이 실린 시편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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