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수업 – 수행자도 꼭 기도를 해야 하나요?
질문
스님 불교의 수행법은 자력수행이 대표적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절에 가면 수행을 해야 한다는 말보다 기도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에게 의지하며 기도한다면 교회 다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껴집니다. 수행을 하는 사람도 기도를 꼭 해야 하나요?
기도와 수행
기도는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이를 성취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수행은 원하는 마음을 조절하고 줄이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욕망의 대상에 초점을 맞추지만, 수행은 욕망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렇기에 결이 조금 다릅니다.
기도는 그 마음씀의 태도에 따라 곧 수행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수행자의 기도법입니다. 자력으로 삶을 개선하는 노력을 이어가는 수행자라고 하더라도 분명히 기도는 필요합니다. 물론 필수과목이 아니라 선택과목입니다. 하지만 수행의 효율을 높이고 싶다면 선택하기를 권장하는 필수 같은 선택과목이라고 해야 할까요? 용수보살은 배를 타고 건널 수 있는 험난한 강를 왜 수영해서 건넌다고 목숨을 거는지 의아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수행자는 타력에 의지하는 기도를 통해 배를 타는 것을 병행함을 고려해봐야 합니다.
탐욕 = 욕구 + 어리석음
수행이란 무엇인가요? 탐욕과 분노 그리고 우치인 삼독을 해독하는 노력입니다. 수행자의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번뇌의 디톡스를 통한 심청정’
기도를 수행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난해한 이유는 욕망 디톡스를 위해 욕망을 쓰기 때문입니다. 물론 독도 약으로 쓸 수 있지만, 독을 잘 조절하는 기술이 없다면 독은 그저 독일 뿐입니다. 수행자의 기도법은 이 욕망을 조절하는 실천적 중도의 힘이 핵심 기술로 요구됩니다.
기준이 있습니다. 욕구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더불어 정진의 강렬한 에너지원입니다. 그렇기에 성취하고자 하는 이는 욕구를 활용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도, 수행할 때도 욕구는 필요합니다. 눈을 부릎뜨고 지켜야 하는 선이 있습니다. 탐욕으로 변질되는 그 지점.
‘탐욕 = 욕구 + 어리석음’
탐욕은 욕구가 어리석음을 만나 생성된 심병입니다. 어리석음이란 인과에 어긋나는 불공정입니다. 예를 들어 100원을 빌려주고 만원을 기대하는 것, 공부하지 않고 서울대를 가기를 원하는 것, 단 것을 즐기면서 당뇨병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 등의 모든 ‘도둑놈심보’가 바로 탐욕입니다.
수행자의 욕구는 명확합니다. 무탐무진무치의 본래 마음을 회복하는 것, 청정한 마음의 본성에 귀의하는 것이 모든 수행자의 공통 욕구입니다. 이것은 탐욕일까요? 서원일까요? 수행자의 일상과 삶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수행이라는 씨앗을 심지 않은채 열매만을 바라고 있다면 이는 그저 수행자라는 껍데기로 변화된 도둑놈심보일 뿐입니다. 반면 인과가 공정하다면 서원이고 보리심일 것입니다. 핵심이 이해가 되시나요? 탐욕은 대상이 무엇인지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인과율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라는 점을.
수행자의 기도법
수행자의 기도법은 탐욕의 조절이 핵심입니다. 인과에 알맞은 것을 욕구한다면, 이를 성취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력을 중시한다면 수행, 타력을 중시한다면 기도입니다. 이 원리를 바탕으로 수행자가 기도를 활용하는 세 가지 방법을 소개하겠습니다.
첫째, 0.1%의 도움을 받기 위해 기도합니다. 성공, 합격, 승리 등은 경쟁이 필연적입니다. 이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 성취한다는 것은 99.9도를 넘어 100도씨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성공할 뻔 한 것과 성공한 것은 0.1%의 차이이지만, 그 성격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타력기도와 자력정진의 가치를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99.9%를 채우는 과정, 이것이 스스로 돕는 것입니다. 나머지 0.1%를 채워주는 것이 바로 하늘이 돕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기도는 성취하는데 0.1%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평가합니다. 하지만 이 0.1%는 대개 스스로 채울 수 없는 영역입니다. 그렇기에 귀한 것입니다. 최선을 다했다면 이제 하늘에 맡기는 것입니다. 물론 수행자는 최선을 다한 후에도 최선을 다해서 간절하게 기도하겠지만 말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둘째, 99.9%를 채워가는 정진을 지속하기 위해 기도합니다. 이 때의 기도는 자성불에게 발원하는 확언에 가까운 성격입니다. 이 우주는 온전히 내 편입니다. 내가 말하는 모든 소원은 우주가 들어줍니다. 우주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해도 좋고, 부처님이라고 이름 붙여도 됩니다. 분명한 것은 사람들의 착각과 달리 기도의 갑을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볼까요? 요청하는 자와 요청을 도와줄 자 중 누가 갑인가요? 당연히 후자겠죠? 그런데 이 후자가 부처님인 기도는 반대입니다. 부처님과 하나님 그리고 하늘은 어떻게 해서든 우리를 도와주고 싶습니다. 이것이 무조건적인 자비, 아가페적 사랑입니다. 다만 허락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카카오톡 메시지를 계속 보내십니다.
“내가 도와줘도 될까요? 도와주고 싶은데... 제발...”
하늘이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이유에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스스로를 돕는 것’
이것이 바로 허락입니다. 99.9%를 채우는 것 이것이 바로 권한위임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도움을 받겠다는 OK 사인입니다. 자유의지 시스템과 인과율 시스템에 의해서 이런 웃픈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갑질을 그만두고 제발 99.9%를 좀 채워주셔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간절히 중생에게 기도하는 요청, 도움을 좀 받아주세요.
수행자는 이런 원리를 이해하고, 99.9%를 채우는 과정을 지속하기 위해 기도를 활용합니다. 기도란 결국 두뇌에 내리는 명령어이고, 마음을 자극하는 신호입니다. 어디로 나아가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반복해서 알려주는 메시지입니다. 스스로를 돕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명료하게 기억한다면, 끝까지 지속할 수 있을테니까요.
셋째, 소원성취를 위한 디톡스 기법으로 활용합니다. 소원성취는 어떤 원리로 이루어질까요?
‘소원성취확률 = 욕구 – 의심’
많은 사람들이 이 공식을 이해하지 못해 자꾸 ‘내탓’을 합니다. 의지력이 부족해서 원하는 것을 성취하지 못했다는 식입니다. 욕구의 간절함, 동기의 충만함 등도 물론 중요하지만, 놓치고 있는 부분에 주목해야 합니다.
‘의심’
의심이라는 독소를 줄일 수 있다면 소원성취의 확률은 간절함 없이도 증가합니다. 우리의 모든 소원은 100% 이루어진다고 표현했습니다. 확고한 진실입니다. 이 우주는 마음에 자주 그리고 강렬하게 품고 있는 것을 ‘원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의심을 자주 강렬히 품고 있으니 의심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100% 성취율이죠.
의심을 뿌리 뽑는 것은 난해하지만, 의심을 줄이는 방법은 단순합니다. 의심은 항상 불안이라는 친구와 함께 다닙니다. 그러니 불안을 해결하면 의심은 힘을 잃습니다. 수행자가 기도하는 또 다른 이유는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불안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한 안심은 의심이 활동할 무대 자체를 무너뜨리기에, 의심이라는 노이즈가 사라진 마음은 욕구에 초점을 맞추기까지 합니다. 마음방에 의심과 욕구라는 두 명의 주인이 싸우는 상황을 해결한 것입니다. 눈을 감고 부처님 앞에 앉아 기도하는 것만으로. 대단한 효과입니다.
수행의 성과가 있다는 의미는 무탐무진무치의 의식에 가까워졌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현실에서 검증되는 하나의 지표는 ‘현실화’입니다. 수행자끼리는 얼마나 수행을 했는지, 무슨 성과가 있었는지 유치하게 논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가 봐도 명백하게 판단이 가능한 지표가 있지 않습니까?
‘원하는 것이 얼마나 현실화되는가?’
소원성취율, 이것이 가장 확고한 지표입니다. 수행자는 스스로 돕는 자입니다. 수행자가 기도를 활용하면 하늘이 돕습니다. 이 둘이 만나 청정한 마음 속 소원의 성취율이 높아지고 또 높아지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소원이 얼마나 잘 성취되는지... 한 생각을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여차하면 실수로 망상을 했다가 황제가 될지도 모릅니다. 순치황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