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에겐 복음으로 대하지만, 예수님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겐 율법의 권능으로 대하신다. 예수님 안에 있다는 건 의의 소원을 갖고 의를 행하며 살아가는 것이고, 예수님 바깥에 있다는 건 죄의 소원을 갖고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죄의 소원을 갖고 극형받을 짓을 하는 자에겐 하나님이 진노가 그 머리위에 있다. 그런데 이런 극악한 범죄자에게 극형을 가하지 않고 가벼운 형벌로 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극형을 받아 죽지 않고 가벼운 징역형만 받았어도 인간의 죄사함이 이루어 질 수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극형에 의하여 죽으셨다는 건, 곧 우리 인간의 범죄 형량이 그와 같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정해 놓은 행악자의 형량을, 인간들의 자비로 감형시킨다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또 하나의 신종 범법행위이다. 이 범법행위는 예수님 안에서 생겨나는 긍휼이 아니라, 마귀 안에서 생겨나는 교만된 자비이다. 즉 하나님이 행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가 아니라 허울 좋은 문명인의 도덕과 자애심에서 생겨난, 범죄자들의 범죄행위를 위한 마귀의 인간애에 불과하다.
이 말세에 멸망을 위해 급속도로 성장하는 타락한 문명, 곧 문화예술인들의 범죄 행위를 진리의 채찍으로 두둘겨 바로잡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의 무지와 우유부단함 때문에 오늘날 인간들의 범죄는 순풍에 돛을 단듯 멸망으로 쾌속항진하고 있다.
성령의 주된 역사(役事)는 먼저 전도받아 구원받을 죄인들을 책망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타락한 그리스도인들을 보라! 그들은 전도받고 구원받아야 할 죄인들에게 책망은 커녕 거짓된 악마의 정치꾼들처럼 한표라도 더 얻어 지지받을려고 다른 종교인보다 더 선량하고 자비로운 체, 가증스런 미소와 아양과 고무신(선심구제) 배급만 하고 있다.
악을 행하는 현행범에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를 책망하면, 그가 뉘우치든지 아니면 악행으로 반항하게 된다. 그러나 악행으로 반항하는 것(십자가의 고통)이 두려워 전도의 방법, 대화 방법등을 신학교에서 부지런히 익히고 배워 남이 들어도 상처받지 않는 선한 말로 전도해야 된다고 가르친다. 남(죄인)이 들어도 상처받지 않는 선한 말?... 그것이 병자에게 행할 진정한 의사의 선한 치료행위이냐? 어느 의사가 환자에게 아픔의 상처를 내지 않고 그 환부를 치료할 수 있는가?
참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단 말인가? 그러니 이들에게 배우는 어린아이부터 청장년에 이르기까지 모두다 예수님에게 채찍으로 두둘겨 맞아 성전 바깥으로 쫓겨날 인간들로만 양성시켜 놓았다. 이런 교인들을 교회 안에 가득 체워놓고 교회를 부흥시켰다고 자랑하니...
죄악으로 인해 멸망할 예술인들과 문명인들, 그들을 꾸짖지 못하고 아첨하며 한표라도 더 얻을려고 구걸하여 교인으로 등록시키는 저질 목자들, 또 새롭게 뜨느 우상, 곧 과학의 힘을 의지하고 죽음보다 몇천만배 더 고통스런 지옥형벌을 만든 하나님을 정죄하는 지식자들, 이 모두가 합심하여 하나님께 도전할 아마겟돈의 대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성도들의 신령한 권세가 다 깨어질 그때, 그 때가 되면 타락한 그리스도인들이 제일 먼저 앞장서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또 그의 종된 진실한 신앙인들을 찾아내어 그들 앞으로 끌어가 처형할 것이다. 그때까지는 그대들의 전성시대니 실컷 허세를 부리고 호언장담하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