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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dio and Television)
20세기에 접어들며 전자 산업에 의해 수 많은 제품이 탄생되었지만, 라디오와 텔레비전만큼 그 의미가 큰 것은 없다. 수 백만 년의 인류사(人類史)를 통해 가장 중요한 발명은 둥근 모양의 바퀴(輪, wheel)라고 하는데, 라디오나 텔레비전은 어쩌면 바퀴보다 더 큰 폭으로 사람들의 사고 방식과 행동 양태(樣態)에 영향을 미쳤다. 비교적 최근에 개발된 컴퓨터와 인터넷도 우리 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고 있지만, 라디오나 텔레비전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정도에는 못 미치는 것이다. 사람들은 처음으로 20세기 초에 라디오라는 창(窓)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사는 먼 곳의 세상과 교류하기 시작했으며, 더나아가 이를 통해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시작했다. 소리에 화상(畵像)을 덧붙이고 싶은 것은 당연한 욕망이었으며, 이를 이룬 것이 텔레비전이다. 흑백(黑白)으로만 보이던 것에 색깔이 입혀졌고, 이제는 3차원 영상을 꿈꾸고 있다. 우리가 꿈꾸는 것을 실현하는 것은 엔지니어들이다.
본격적인 라디오의 역사는 이탈리아 사람인 마르코니(Guglielmo Marconi)부터 시작되지만, 마르코니에게 꿈을 심어준 사람들은 영국인 맥스웰(James Clerk Maxwell)과 독일인 헤르츠(Heinrich Hertz)다. 라디오란 사실 무선 전파를 의미하는 라디오 파(Radio Wave)에서 나온 말인데, 맥스웰은 이론적으로 그 정체를 밝힌 사람이다. 1873년 맥스웰은 네 개의 간단한 미분 방정식으로 전기적인 현상 모두를 설명했는데, 이 식들에 의해 세상은 바뀌기 시작했다. 요즘도 대학에서 수 많은 젊은 학생들이 이해하고자 땀 빼는, 이 유명한 네 개의 식은 다음과 같다.
여하튼 맥스웰은 전파나 햇볕이나 이를 모두 전자파(電磁波, Electromagnetic Wave)라는 한 가지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음을 보였다. 전해 내려오는 일화에 의하면, 위에 있는 네 개의 식들이 최종적으로 마무리 된 곳은 식당이었단다. 어느 날 맥스웰이 동료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다가 갑자기 "맞다! 바로 그거다!"라고 소리 지르더니 흰 식탁보에 바로 네 개의 식을 정리했다는데, 식당 주인에게 어떻게 설명하고 그 식탁보를 집으로 갖고 갔을지 궁금하다. 이런 이야기가 지니는 진정한 의미는, 우연히 밥 먹으면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밥 먹을 때도 끊임없이 답을 찾기 위해 골똘히 궁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편 헤르츠(Heinrich Hertz)는 맥스웰이 이론적으로 밝힌 전자파를 실험을 통해 확인했다. 그는 1887년에 처음으로 유도 코일 사이에 스파크 갭을 만들어 무선 신호를 주고 받았는데, 훗날 그의 이름은 전자파의 주파수(周波數, frequency)를 나타내는 기본 단위가 되었다. 처음으로 전자파를 만들어서 이를 전깃줄 없이 보내고 또 받은 사람이 헤르츠다.
마르코니는 1874년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태어났다. 우리나라는 조선 왕조가 기울기 시작하는 고종 11년이었고, 이해에 순종(純宗)이 태어났다. 마르코니는 정식 학교 교육은 거의 받은 바 없지만 어린 시절부터 전기적 현상들에 엄청 흥미를 보이면서, 자기 집에 실험실을 마련하고 무선 통신을 연구했다. 스물 한살되던 1895년에는 약2 km 떨어진 지점까지 무선으로 통신할 수 있는 방법을 처음으로 개발했다. 이 결과에 고무(鼓舞) 된 마르코니는 이탈리아 정부에 그의 아이디어를 설명하고 연구 지원을 요청했지만, 그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이듬 해 이탈리아를 떠나 영국으로 건너가는데, 실제로 그 곳에서 받게 되는 연구 지원으로 자신의 꿈을 이룬다. 언제 어디서나 정부 관리의 역할은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엄청난 부(富)의 원천이 이탈리아를 떠나 영국으로 간 셈이다.
1897년 마르코니는 영국에서 자기 자신의 회사를 설립하고 이를 "Wireless Telegraph and Signal Company Limited"로 이름 붙였다. 이 회사는 날로 발전해서 1899년에는 영국과 불란서의 해협(海峽)을 건너는 130 km 의 거리를 무선으로 통신했고, 1907년에는 처음으로 유럽과 미국 사이의 대서양을 이어주는 무선 통신을 상업화 했다. 미국 뉴욕에서 드포레스트 (Lee de Forest)가 처음으로 라디오 방송을 실험한 해도 1907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같은 해 7월에 일제의 강요와 친일 정객의 매국(賣國) 행위로 고종이 물러나고, 순종이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연호를 융희(隆熙)로 고쳤다. 그나마 1910년에는 한일합방(韓日合邦) 조약(條約)에 의해 순종은 폐위(廢位)되면서 조선 왕조 500 여 년은 끝을 맺는다. 구라파 및 미국에서는 온갖 기술이 화려하게 꽃 피고 사람들이 생기를 갖기 시작할 때, 우리의 한반도에는 안타깝게도 어둠이 내려 앉았다. 이런 불행한 일이 다시는 없어야겠다.
그림 6.1. 마르코니 (Guglielmo Marconi)와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純宗). 두 사람 모두 1874년 봄에 태어났다.
1912년에 발생한 그 유명한 타이타닉(Titanic)호의 침몰은 라디오 방송이 갖는 뉴스 전달자로서의 위력을 전 세계에 처음 떨친 계기가 되었다. 사실 이 무렵에 마르코니가 세운 회사의 주된 고객은 조선(造船) 회사들이었다. 당대 최고의 호화 여객선이었던 타이타닉을 포함해 수 많은 여객 및 화물선의 통신 시스템은 모두 마르코니 제품이었다. 통신실(通信室)을 Marconi Room으로 그리고 통신 기사(技士)를 Marconi Operator로 부르던 시절이었다. 타이타닉에는 당연히 가장 우수한 통신 시스템이 설치되었는데, 낮에는 600 km 그리고 밤에는 3000 km 정도의 거리를 교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타이타닉이 빙산(氷山)과 충돌 한 자정 무렵부터 침몰하기까지 아홉 시간 동안, 통신실에 근무했던 두 명의 통신 기사들이 필사적으로 보낸 구조 요청 신호는 그대로 기록에 남아 있다. 그들은 선장에 의해 대피 명령이 내린 후에도 통신실을 지켰다. 배가 완전 침몰하기 3분 전까지 구조 신호를 보낸 그들의 직업 정신이 놀랍다. 통신 기사 중 한 명은 현장에서 실종되었고, 한 명은 구조되어 영국의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왔는데, 환영식에서 그의 담임 선생님은 학교에서 필수로 가르친 수영 덕택에 그가 목숨을 건졌다고 이야기했다.
그림 6.2. 타이타닉 호 두 개의 마스트에 설치 된 네 줄로 이루어진 무선 통신 안테나를 볼 수 있다.
그림 6.3. 영화 "타이타닉(1997년)"의 한 장면과 거기에 나오는 통신실의 모습- 모든 통신 장비는 마르코니 제품이었다. 영화에서는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선박 "올림픽"의 통신실을 재현 하였다.
앞에서도 이미 이야기한 바와 같이 드포레스트가 발명한 삼극관은 라디오 방송 기술의 전환점이 되었다. 1910년 미국 뉴욕에서는 드포레스트에 의해 메트로폴리탄 극장의 오페라가 처음으로 중계 방송되었으며, 1920년에는 미국의 회사 웨스팅하우스(Westinghouse)가 방송국을 설립하고 호출부호 KDKA로 방송을 시작했다. KDKA는 그 해의 미국 대통령 선거 개표 결과를 중계했는데, 이로서 본격적인 매스 커뮤니케이션(Mass Communication)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 후 방송 사업은 폭발적으로 팽창해서1922년에는 이미 전 미국에 569개의 방송국이 운영되었는데, 영국에서도 같은 해 그 유명한 BBC(British Broadcasting Corp.) 가 방송을 시작했다. 1930년대 중반에는 미국 가정의 대부분이 라디오를 가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선 1926년 11월에 경성(京城) 방송국이 설립되어 이듬해 출력 1㎾, 주파수 870kHz로 라디오 방송을 개시하였다.
그 사이에 라디오는 광석 수신기라 해서 혼자서만 귀에 대고 들을 수 있었던 것이 진공관 식으로 바뀌면서 여러 사람이 모여 앉아 듣는 웬만한 책상 크기로 변했다가, 트란지스터가 개발되면서 드디어는 손 바닥에 들어가는 정도로 작아졌다. 드포레스트는 "라디오의 아버지"로 스스로를 칭하곤 했는데, 훗날에는 아마도 라디오 방송이 잔뜩 짜증스러웠던 모양이다. "시끄러운 재즈 음악과 쓸데없는 광고들로 가득한, 그런 방송을 듣기 위해 라디오를 사야 한단 말인가?" 1950년대 초 기자 회견에서 드포레스트가 한 말이다. 요즈음의 라디오나 텔레비전 방송을 보면 그는 심지어 자기의 발명을 후회하지 않을까?
그림 6.5. 위는 미국에서 1955년에 처음 나온 트란지스터 라디오 (높이 12cm) 개인을 위한 전자 제품의 효시였다. 아래는 1960년대 초 우리나라 금성사가 생산한 라디오.
라디오 방송을 통해 소리가 전달되면서, 텔레비전의 개발을 생각한 것은 너무 자연스런 일이며, 그 길을 개척해낸 수 많은 사람 중의 한 명은 스코트랜드 사람인 베이어드(John Logie Baird)다. 그가 발명한 텔레비전은 요즘의 전자 방식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소위 기계식(Mechanical) TV라 부르는데, 이는 둥그런 원판의 가장자리에 구멍을 규칙적으로 뚫고 이를 모터로 돌리면서 각 구멍을 통해 얻어지는 빛을 전기적 신호로 바꾸어 이를 멀리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방법이다.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도 물론 정확하게 같은 속도로 도는 둥그런 원판이 필요했다. 베이어드의 텔레비전은 원판에 구멍이 30개 있었고, 이를 일초에 열두 바퀴 반 회전시켰는데, 1925년 이 기계식 TV의 제작에 성공한 순간의 느낌을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스크린에 나타난 이미지는 정말 말 할 수 없이 깨끗했다. 드디어 해 낸 것이다. 내 눈을 믿을 수 없었고 온 몸은 흥분 속에 몹시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 실제로 나타난 이미지는 그것이 사람의 머리라는 것을 겨우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였단다. 미친 듯이 일하다가, 일생 중에 한 번이라도 이런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그 또한 멋있는 인생이다. 영국의 BBC는 베이어드의 시스템을 이용해 1929년 텔레비전 시험 방송을 시작했다.
그림.6.6. 베이어드(John Logie Baird, 1888-1946)와 그의 기계식(Mechanical) TV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텔레비전은 전자 기술과 결합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기계식 TV는 곧 경쟁력을 상실했다. 전자식 텔레비전(Electronic Television)의 개발에서 이름을 남긴 두 사람은 판스워스(Philo Farnsworth)와 즈보리킨(Vladimir Zworykin)인데, 특히 판스워스는 별다른 학력 없이 아주 어린 나이부터 텔레비전을 만들어 보겠다는 당시로서는 아주 황당한 꿈을 지니고 평생을 산 사람이다. 그는 21살의 나이에 요즈음도 쓰이는 음극관(陰極管, Cathode Ray Tube)을 발명했고, 1938년에는 스스로가 만든 회사인 Farnsworth Radio and Television Corporation의 연구 소장이 되었다. 한편 즈보리킨은 이십대 중반이었던 세계 일차대전 중에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이민간 사람이다. 그는 웨스팅하우스(Westinghouse)에서 일했는데, 그의 텔레비전 연구에 대해 회사는 별로 탐탁하지 않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가능성 없는 일에 시간 쓰지 말고 좀 더 직접적으로 회사에 보탬 되는 일을 하라는 압박을 피해, 그는 주로 밤 시간을 이용해 텔레비전을 연구했다. 이 시절에 회사의 경비에게 내려진 업무 지침에는, 즈보리킨의 연구실이 만약 새벽 2시까지 불이 켜져 있으면 잊지 말고 그의 방에 가서 일을 마치게 하고 집으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즈보리킨 같은 사람들 덕에 세상은 바뀐다. 즈보리킨은 결국 RCA로 옮긴 후 그곳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TV를 개발한다. 소위 대공황(大恐慌)이라 부르던 어려운 시절에 무려 500만$을 TV개발에 투자한 RCA(Radio Corp. of America)는 그 후 텔레비전 산업의 대명사가 되었다. 1936년에 이르러 영국 BBC 방송은 전자식 TV 시스템을 택했다.
이 무렵의 TV에 대한 기술적 우월성은 히틀러 (Adolf Hitler)가 통치하는 나찌 독일도 지니고 있었다. 특히 1936년에 개최 된 베를린(Berlin) 올림픽을 계기로, 히틀러는 육상과 텔레비전 개발에서 다른 나라를 제압해 전 세계에 독일인의 우수성을 증명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독일의 전자식 TV 방송은1937년2월에야 시작되어, 간발의 차이로 영국에 금메달을 빼앗겼고, 올림픽 육상에서도 미국의 오웬스(Jessie Owens)가 100m, 200m 등 모두 4개의 금메달을 휩쓸어가서 그만 낙담하고 말았다. 믿었던 400m 남자 이어달리기 결승에서 독일이 막판에 추월 당하는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숨 짓던 히틀러의 모습이 기록 영화에 남아 있다.
오웬스는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을 대표해 올림픽에 참가한 사람이다. 베를린에서는 잘 알다시피 올림픽의 꽃이라는 마라톤에서 대한민국의 청년 손기정이 당시 인간 기록의 한계였던 2시간30분을 돌파하며 우승한다. 그러나 베를린의 스타디움에 있는 육상경기 우승자를 기록한 비석에는 당연히 일본인 손기정으로 남아 있다. 수 년 전 어떤 애국적(?)인 국회의원 한 사람이, 베를린에 가서 SON 이라는 이름 뒤에 새겨진JAPAN이라는 글자를 도끼로 쪼아 낸 적이 있는데 이런 비이성적(非理性的)인 일은 안 하는 것이 좋다. 역사는 그렇게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고 느끼는 것이니까.
그림 6.7. 독일의 초기 텔레비전 (모델 E-1); 표면과 내부(1939년 제작)
그림 6.8. 1936년 올림픽이 개최되었던 베를린 스타디움과 성화대. 아래는 육상경기의 금 메달리스트들 ("MARATHON SON JAPAN 손기정" 이 눈에 뜨인다.)
즈보리킨을 스카우트해 간 RCA의 사장 사노프(David Sarnoff)는 마르코니 무선통신 회사 출신의 엔지니어로 사업적인 안목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사실 텔레비전 방송의 초기에는 라디오에 비해 프로그램 자체의 경쟁력이 너무 없어, 사람들은 재미없는 텔레비전보다 아름다운 음악과 뉴스를 동시에 전달해 주는 라디오에 모두 빠져있었다. 사노프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스스로 텔레비전 방송사인 NBC(National Broadcasting Co.)를 세우고, 처음으로 프로 야구 World Series를 중계하면서, 시장을 넓혀 나갔다. 1940년대 미국의 TV가격은 일반인의 두 달치 봉급에 해당하는500$정도였는데, 1950년이 되면서는 200$로 떨어졌다. 사노프도 러시아에서 아홉 살 때 미국에 이민 온 사람인데, 즈보리킨과의 파트너쉽(Partnership)은 컬러TV개발에 까지 이어졌고, 드디어 1954년에는 처음으로 정규 칼러TV방송이 시작된다. RCA는 그 해 5000대의 칼러TV를 생산했고, 10년 후인 64년에는 150만대로 늘어난다. 또 한번의 도약이 TV산업에서 이루어진 때이다.
그림 6.9. 미국에서 처음 나오기 시작한 칼러 텔레비전 (1951년 RCA모델)
전자 산업의 대명사이던 RCA는 70년대 들어 일본의 소니(Sony)에게 기술적인 측면에서 추월 당하면서 쇠락(衰落)의 길로 들어선다. RCA는 결국 GE(General Electric)으로 흡수되었다가, 87년에는 프랑스의 톰슨 (Thompson)으로 넘어갔다. 우리나라의 첫 TV생산은 1966년 금성사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 후 비약적인 발전을 통해 이제는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고 있다. 소니가 브라운관 TV에서 머뭇거리는 동안 화질(畵質)이 더욱 우수한 액정화면(LCD, Liquid Crystal Display), 플라즈마(PDP, Plasma Display Panel) 등에서 LG와 삼성은 경쟁력을 지닌 것으로 믿어진다. 이제 수년 내에 TV 방송은 디지털 방식으로 바뀔 것이며, 이는 컬러TV 이후 또 한번의 크나 큰 변혁이다. 사노프는 "경쟁은 최고의 제품을 만들지만 인간에게는 그야말로 최악이다"라고 말했다. 최고의 제품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고달프게 노력하는 우리의 자랑스런 기업과 엔지니어들을 응원하자. 현대인은 일주일에 약 50시간을 TV와 함께 지내면서, TV라는 창(窓)을 통해 세계를 내다본다. 필수품 중의 필수품이 된 것이다. 2010년의 전 세계 TV 시장은 연간 2억대로 늘어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림 6.10. 텔레비전 광고 금성(1972년) 과 삼성(198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