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편지 / 황동규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 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한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 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에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밤에 내리는 비/황동규
밤 이슥히 찻값에 너무도 가까운 번역을 하고 두 시에 멎은 머리 밖에는 오래 비가 내리고 나무의 발목들을 얼리는 겨울비가 내리고 두시에 내리는 비.
손으로 덮은 한 잔의 차 손 주변의 무한한 빗소리 연탄난로 위에서 잦아드는 물 〈청빈하게 살며 몸짓을 하지 마라.〉 몸짓을 하지 말라 두 시에 멎고 무한히 내리는 비 두 시에 내리고 무한히 멎은 비 두시가 넘으면 쉽게 누워지지 않는다
누워지지 않는다, 아시아 지도 등고선 뒤로 자꾸 흐려지는 불빛 〈이세계에서 배울 것은 조심히 깨어있는 법일 뿐,〉 법 뿐일까, 뿐일까, 문득 정신 차리면 살았다 죽었다 힘들여 좌정한 골편이 남몰래 떨고 있다.
땅 속을 흐르는 강이여/황동규
땅 속을 흐르는 강이여, 앞에 단 얼굴만 다른 여러 꿈의 근원이여, 흘러가는 모든 것의 뵈지 않는 깊이여! 나는 언덕에 앉아 그대가 언덕에 오르려다 채 오르지 못하고 미끄러지듯 되내려가 마을을 몇 바퀴 돌며 숨 고르고 연(蓮) 하나 촉 내민 못도 돌고 이윽고 방향 되틀어 언덕을 향해 달려오는 걸 본다. 초여름과 여름 사이 시퍼런 창(槍)들로 몸 꾸민 엉겅퀴만 피어 있다. 마지막 몇 뼘을 채 못 오르고 그대 다시 되지쳐 내려간다. 땅 속에 흘러내리는 성호(聖號) 그림자, 마을을 돌고 되달려 오르는 기호(記號) 그림자, 위아래서 엉겅퀴들이 서로 창 끝을 겨눌 뻔 한다.
탁 족(濯足)/황동규
휴대폰 안 터지는 곳이라면 그 어디나 살갑다. 아주 적적한 곳 늦겨울 텅 빈 강원도 골짜기도 좋지만, 알맞게 사람 냄새 풍겨 조금 덜 슴슴한 부석사 뒤편 오전(梧田) 약수 골짜기 벌써 초여름, 산들이 날이면 날마다 더 푸른 옷 갈아 입을 때 흔들어도 안 터지는 휴대폰 주머니에 쑤셔 넣고 걷다 보면 면허증 신분증 카드 수첩 명함 휴대폰 그리고 잊어버린 교통범칙금 고지서까지 지겹게 지니고 다닌다는 생각!
시냇가에 앉아 구두와 양말 벗고 바지를 걷는다. 팔과 종아리에 이틀내 모기들이 수놓은 생물과 생물이 느닷없이 만나 새긴 화끈한 문신(文身)들! 인간의 손이 쳐서 채 완성 못 본 문신도 그대로 새겨 있다. 요만한 자국도 없이 인간이 제풀로 맺고 푼 것이 어디 있는가?
풀이 무성한 좁은 길에서/황동규
1
오래 벼른 일, 만보(萬步) 걷기도 산책도 명상도 아닌 추억 엮기도 아닌 혼자 그냥 걷기!
오랜만에 냄새나는 집들을 벗어나니 길이 어눌해지고 이른 가을 풀들이 내 머리칼처럼 붉은 흙의 취혼(醉魂)을 반쯤 벗기고 있구나. 흙의 혼만을 골라 밟고 간다. 길이 속삭인다. 계속 가요, 길은 가고 있어요. 보이는 길은 가는 길이 멈춘 자리일 뿐 가는 것 안 보이게 길은 가고 있어요.
혼자임이 환해질 때가 있다.
2
바람 잘 통하는 한적한 곳이 하늘과 가깝다고는 얘기 않겠다.
3
등성이 오르다가 이름 모를 빨간 열매들을 지나친다. 이름을 모르다니? 산수유겠지. 산수유, 저 나무의 황홀한 보석들, 저걸 어떻게 다 꿰지? 꿰서 어디 걸지? 보석 탐하며 걷다 미끄러져 사람의 삶 한 토막이 길 위에 눕는다. 삶의 토막들이 줄지어 누워 있어도 연결되지 않고 서로 부를 때가 있지. 누운 김에 다음 토막을 불러본다. 대답이 없다. 옷의 흙의 털며 일어난다.
4
늙었다고 생각하면 길이 덜 미끄러워진다, 조심조심. 그러나 늙음은 사람이 향해 가는 그런 곳이 아니다. 방금 빨간 열매를 쪼러 온 허름한 새의 흰 꽁지에는 열매를 쪼는 기쁨 외에 아무것도 없다. 영원히 젊은 삶이라는 헛꿈이 사라지면 달리 늙음과 죽음이란 없다. 소리꾼에겐 마지막 소리가 대목(大木)에겐 마지막 집이 잡혀 있을 뿐. 사람은 길을 가거나 길 위에 넘어져 거기가 길이라는 것을 알려줄 뿐. 머리 위 나뭇가지들이 레이스 친 둥근 하늘을 만들고 돌고래 구름이 헤엄쳐 가고 마음속이 아기자기해진다. 사람 하나가 어느샌가 뒤로 와 스치고 지나간다. 나보다 바쁜 사람, 메뚜기들이 바지에 달라붙는다.
샘이 잦아들고 있는 밭귀에서 발을 멈춘다. 물이 흐르지못하고 땅에 잦아드는 것을 보면 주위가 온통 젖다 마는 것을 보면 누군가 가다 말고 주저앉는 모습, 가지 못하면 자지러드는 것이다. 주위를 한참 적시고 마는 것이다.
5
길 위에 멈추지 말라. 사람들의 눈을 적시지 말라. 그냥 길이 아닌 가는 길이 되라. 어눌하게나마 홀로움을 즐길 수 있다면, 길이란 낡음도 늙음도 낙담(落膽)도 없는 곳. 스스로 길이 되어 굽이를 돌면 지척에서 싱그런 임제의 할이 들릴 것이다. 임제는 이 길만큼 좁은 호타(?) 물가에서 길이 되라고 할하고 채 못 되었다고 할하고 그만 길이 다 되었다고 할했다. 임제여 임제여, 그대와, 내가 읽는 『임제록』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둘 다 같다는 손쉬운 답은 말라. 땅이 만드는 풀의 열기 나뭇가지의 싱싱한 냄새 살아 있는 잎들의 서로 무늬 다른 살랑거림. 시인과 그의 시는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다르다면 어느 것이 진품인가? 모르는 사이에 하늘 한편에 가볍게 걸려 빙그레 웃는 낮달. 공들여 빚은 것과 빚은 사람 다 진품이라. 시인은 시가 타는 심지, 허나 촛농이 없다면 그게 무엇이겠는가? 어느 순간 한 삶의 초가 일시에 촛농이 된다면? 할하라, 할하라, 아직 꺼지지 않은 심지를 향해.
6
무너진 사당 앞 나뭇가지에서 도토리를 먹는 다람쥐와 그 옆 나무 둥치 구멍에 숨어 있는 나무 결 빼어닮은 올빼미를 만난다. 올빼미는 눈을 감고 있지만 곤두세운 촉각이 손에 잡힐 듯하다. 그들에게 고개 끄덕이며 사람의말로 인사한다. '안녕하신가?' 다람쥐는 움직이던 목젖을 순간 멈추어 인사를 받고 올빼미는 몸을 조금 숙였다 편다. 다람쥐도 올빼미도 팽팽한 삶 속에 탱탱히 가고 있는 자들.
조금 걷다 뒤돌아보니 다람쥐의 목젖도 올빼미의 촉각도 다 그대로 있다. 내 삶이 어느 날 그만 손놓고 막을 내린다해도 탱탱히 제 길 가고 있을 촉각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한가로워진다.
7
이제 길이 다시 집들 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양돈장이 나타나고 버려둔 밭이 나타나고 메마른 검은 사내가 나타나고 서로 인사 않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가고 있는 길에 물든 눈으로 도시 상공에 한창 타고 있는 저녁놀을 본다. 잠깐, 그 무엇보다도 더 진하고 간절한, 보면 볼수록 안공(眼孔) 속이 깊어지는. 다리를 건너다 한 사내에게 무심결에 인사를 한다. 얼떨김에 그가 인사를 받는다. 모르면서 서로 주고받는 삶의 빛, 가다 보면 그 누군가 마음 슬그머니 가벼워지는 순간 있으리, 없는 빛도 탕감받는. 길의 암전(暗轉), 한 줄기 빛!
서서히 동굴 벽이 밝아지고 그림 하나가 부활한다. 한 손엔 횃불, 또 한 손엔 붓을 든 사람 하나가 큰 대(大)자로 취해 노래, 노래 부른다.
시인 황동규 1938 4월 9일: 평안남도 평원군 숙천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
1950 덕수초등학교 1학년에 재입학
1952 서울중학교에 입학.『학원』지에 투고하여 조지훈 선생으로부터 우수상 받음
1953 서울중학교
서울고등학교. 평생의 지우인 마종기와 사귀게됨.
1957 서울대학교 영문과 입학(국비 장학생)
1958 『현대문학』에<시월><즐거운 편지><동백나무>를 미당이 추천,등단
1961 서울대학원에 진학
시집 『어떤 개인 날』(중앙문화사)대학원 한 학기를
1964 군에서 제대하고 대학원에 복학
1965 두번째 시집 『비가』(창우사)
1966 금란여고 교사(한학기)
영국 에든버러 대학으로 유학
1967 유학후 미국과 유럽 기행.
1968 서울대 교양학부 전임강사
대학원 동기 고정자(高靜子)와 결혼
시 집 『태평가』
1970 `국제 창작 캠프'의 일환으로 미국 아이오와 대학에 체류
1972 시월 유신을 겪고, 동아일보에 「계엄령 속의 눈」을 발표
발표 당시의 제목은 「흙빛 눈」
1974 1월 조모상
1975 서울대 인문대학 조교수
시선집 『삼남에 내리는 눈』 (민음사)
1976 『사랑의 뿌리』(문학과지성사)
1978 시집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문학과지성사)
1979 산문집 『겨울 노래』(지식산업사)
1980 <한국문학상>수상
1982 시선집 『열하일기』(지식산업사)
유럽과 중동 지방을 여행
1984 문학선집 『풍장』(나남)을 출간
1986 시집 『악어를 조심하라고?』(문학과지성사)
1987 교환 교수로 미국 뉴욕 대학에 적을 두고 뉴욕에 체류
1988 뉴욕에서 귀국
시선집 『견딜수 없이 가벼운 존재들』(문학과 비평사)
<연암문학상>수상
1991 시집 『몰운대행』(문학과지성사)
<김종삼문학 상>수상 <이산문학상>수상
<서울대 대학신문> 주간
1993 시집 『미시령 큰바람」,문학과지성사)
1994 2월에 인도를 여행
자작시 해설 『나 의 시의 빛과 그늘」출간
1995 14년 간의 노력 끝에 5월『풍장」 연작 70편 완성
『풍장』(문학과지성사)을 출간
1996 시집 『외계인』(문학과지성사)
『풍장』이 독일어포 출간 (괴팅겐의 에디치온 페페코른 출판사)
1998 2권으로 된 『황동규 시전집』(문학 과지성사)
2003 홍조근정훈장
2006 제10회 만해대상 수상황동규(1938~) 소설가 황순원의 장남으로 1958년(현대문학)의 추천을 받고 등단(어떤개인날)(삼남에 내리는눈) (나는바퀴를보면굴리고싶어진다)등 많은 시집과 평론집을 발표했다. 비극적인 세계관에서 서정성의 회복을 추구하는 등 다양한 시세계을
시집 한켠을 들추면 꼭 어디엔가 사람 좋은 그가 웃고 있을 것 같다.
한 번이라도 그와 은밀한 만남을 기약했던 이라면 눈치챘으리라.
그가 시를 썼던 것이 아니라 몸 구석구석 빼곡이 들어찬 여행의 추억이
그의 생을 써오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인지 이 시집을 읽고 있노라면 문득 사람이 그리워진다.
책갈피 갈피마다 낯익은 이름들이 선연히 들어차 있는 정신의 우듬지를 보고 싶다.
여행을 떠나기 전, 이미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람의바다에 풍덩 빠지고
싶어진다. 그의 우연은 정말 ‘ 우연 ’ 에 불과했던가?
혹시 그가 만났던 우연이 어쩌면 우리를 이끌어 온 운명은 아니었을까?
오랜 여행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가 우리에게 많은 여백을 비워두고 있듯이,
우리 역시 뻣뻣하게 길들여진 시선을 버려야 할 뿐.
30.JULY.2013 by jace
▶ Armik - Cartas de Am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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