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교십도와 선비문화
부석사에서 희방사로 가려면 풍기를 거쳐야
한다. 두 곳 모두 영주 시내버스가 다니지만 노선이 달라 희방사 버스는 풍기에서 타야 한다. 이날 새벽 6시부터 부석사를 관람했으니 시간은
충분했다. 풍기 조금 못미쳐 순흥에는 조선 최초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있고 그 옆에는 선비촌이라는 곳이 있다. 나는 소수서원은 주요
역사유적이지만 평소 유교문화에 별 관심이 없었고 또한 선비촌은 영주시에서 선비문화를 테마로 조성한 관광공원이라고 들었기에 큰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부근에 장인묘소가 있어 여행길에 참배하기로 했는데 수원 작은 처남 말로는 혼자 묘소를 찾을 수 없거니와 농사철이라 현지에서 안내해 줄
사람도 없다고 한다. 나로서는 신혼시절 단 한번 성묘했던 곳이라 위치를 알 수 없다. 나는 아쉬움을 삼키고 그냥 지나칠까하다 시간도 충분하고
이곳까지 온 김에 소수서원이라도 보고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버스에서 내렸다. 결과적으로 현명한 선택이었다. 소수서원 박물관에는 나의 호기심을
만족시킨 생각지도 못한 유물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사액이란 임금이 현판을 하사하는 것으로 그만큼 권위있는 교육기관으로 인정받는다는 의미이다. 당시 교육기관은 서당에서 출발하여 서원은 지금의
지방대학격이며 성균관은 국립 서울대학교인 셈이다. 서원이나 성균관은 당시 통치이념인 유교교육기관으로 공자와 선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사당과 학문을 배우고 논하는 강학당, 기숙사인 재(齋)가 기본시설로 있다. 소수서원은 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우리나라에 처음 성리학을
도입한 고려학자 안향(安珦)의 사당을 겸해 백운동서원을 세우면서 시작된다. 그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임금께 서원의 공식인가를
주청했다. 이에 명종이 소수서원이란 친필 편액을 하사했다.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한다"란 뜻이다. 사액서원에는 나라에서 서적, 토지,
노비 등을 지원한다. 소수서원을 계기로 도산서원 등 여러 사액서원들이 태어났다. 당시 대학자인 퇴계, 율곡 등이 앞장선데 따른 것이다.
소수서원은 설립 후 연인원 4천여 유생들이 공부했다. 소수서원의 규율은 엄격해 학문에 정진하지 않거나 미풍양속을 해치는 경우 어김없이
퇴원시켰다. 우리가 흔히 쓰는 '팔불출'이란 말도 여기서 유랜된다. 유생들이 사서오경 아홉과목 중 여덟과목에 불(不) 등급을 받으면 서원에서
쫓겨나는데 그래서 팔불출(八不出)이란 말이 생겼다. 즉 성적이 나빠 낙제한 사람을 말한다. 요즘에도 팔불출이란 말은 어딘지 좀 모자라는 사람을
지칭한다. 또하나 이 지역에서 비롯된 단어는 '줄행랑'이다. 이 지역은 유교의 중심지답게 양반들이 많아 99칸 대저택이 즐비했다. 하인들이
줄지어 늘어선 행랑채를 뛰어다니며 심부름하는 것을 '줄행랑'이라고 했다. 지금은 급하게 도망친다는 의미로 쓰인다.
서원 입구에 들어서면 서원의 역사와 함께 한
수백년 된 소나무 군락과 수령 5백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버티고 있다. 또한 서원을 끼고 흐르는 죽계천변에는 원생들이 학문을 논하던 경렴정,
취한대가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1543년 건립되어 백운동이란 현판이 걸린 보물 1403호 강학당이 보이고 왼쪽에는 문성공묘, 전사청
우측에는 원생들 기숙사인 학구재와 지락재가 있다. 강학당 뒤에는 교수들이 사용하던 일신재와 원장 집무실인 직방재가 있는데 모두 당시 건물들이다.
이밖에 서원마당에는 해시계인 일영대와 사당 참배시 손을 씻는 관세대, 밤에 불을 밝히던 정료대 등 석조 문화재들과 서원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보물
59호인 신라 옛절 숙수사터 당간지주도 남아있다. 죽계천 건너 산기슭에는 최근 세워진 현대식 건물인 소수박물관과 청소년 수련원이 자리잡고
있다. 박물관에는 2만여 소장품 중 6백여 점이 상설 전시된다. 회헌 안향의 초상화는 국보 11호이며, 설립자인 주세붕 영정도 보물
717호이다. 안향의 초상화는 7백년 전 고려 충숙왕이 화공을 시켜 제작해 안향 종가에 하사한 것으로 소수서원에 봉안되었다. 우리나라 현존
초상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빨간색은 꽃, 검은색은 곤충에서 뽑아 그린 천연염료 채색 작품이다.
이날 국보나 보물보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본
것은 책으로만 대하던 퇴계의 성학십도(聖學十圖) 원판이다. 성학십도는 퇴계가 임금 교육을 위해 유교의 원리를 태극도(太極圖) 서명도(西銘圖) 등
10개의 도표와 해설로 풀이한 유교철학의 요약이다. 성학이란 유교를 말한다. 나는 성리학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의 무지 탓이겠지만 유교철학은
너무 형이상학적인데다 모든 인간관계를 수직으로 정립하고 삼강오륜이나 칠거지악 같은 군신의 도리, 상하의 도리, 부부의 도리 등을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유교철학은 봉건제도를 뒷바침하는 이념과 도덕률로 인식한다. 나는 이조 때 우리나라가 성리학에 빠져 왕실제사나 상례 등
실생활과 관계없는 일로 탁상공론과 당파싸움에 허송하지 않고 실학을 받아들였다면 하는 아쉬움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퇴계의 성학십도는
내용과는 별개로 참 선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높이 평가한다. 성학십도는 칠순을 앞둔 노학자가 17살에 등극한 선조에게 성군이 되기 위해
공부하라고 다그치는 상소문이다. 후궁 소생으로 제대로 군왕수업을 받았을리 없는 임금에게 손자를 타이르는 할아버지 심정으로 복잡한 유교경전을
요즘말로 단기 쪽집게 과외를 시킨 것이다. 퇴계는 서론인 '진성학십도차'에서 “백성의 지도자가 된 분의 마음은 온갖 징조가 연유하는 곳이고,
모든 책임이 모이는 곳이며, 온갖 욕심이 잡다하게 나타나는 자리이고, 여러 간사함이 속출하는 곳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태만하고 소홀해 방종이
따르게 되면, 산이 무너지고 해일이 일어나는 것 같은 위기가 오고 말 것이다. 누가 이러한 위기를 막을 수 있겠는가.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삼가는
마음가짐으로 날마다 생활해도 부족하다.”라고 밝혔다. 현대의 통치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교훈이다.
이황은 왕 한사람의 마음에 따라 세상만사가
좌우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삼가하라고 당부한 것이다. 성학십도 10개 도표 가운데 7개는 성현들의 가르침을 다루었고 3개는
자신의 이론을 펼친 것이다. 그는 10개 도표에 2개를 더 첨가했는데 여기에는 주자학의 핵심인 사단칠정(四端七情)과 이기(理氣)를 도표로 풀어
설명했다. 사단칠정이란 인간 도덕의 근간이 되는 이(理)를 통해 나타나는 마음인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지심의 사단(四端)과 기쁨, 노여움, 슬픔, 두려움, 사랑, 미움, 욕심 등 기(氣)를 통해 나타나는 마음을 말한다. 많은 성현들이
사단칠정의 근본과 상관관계에 대한 가르침을 남겼다. 이황의 사단칠정 해석은 당시 고봉 기대승의 반박으로 논쟁이 시작되었는데 율곡 이이의 가세로
8년이나 계속되어 유학자들 사이에 분파가 생겨나기도 했다. 나는 유교철학의 복잡한 이론을 여러 성현의 글을 인용해 설명한 성학십도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다만 절대군주 제도의 조선에서 곡학아세(曲學阿世)하지 않는 지식인의 올곧은 모습에 감탄할 뿐이다. 퇴계는 임금에게 이를 병풍으로
만들어 곁에 두고 익히도록 했다. 임금의 반응은 뜨거웠다. 퇴계의 충정에 감격한 임금은 이를 모두에게 널리 읽히도록 인쇄판으로 제작해 보급했다.
1568년 성학십도를 상소하고 낙향한 퇴계는 2년 후 70세로 세상을 떠난다. 그가 죽자 선조는 사흘동안 정사를 폐하고 애도했다. 최근 안동
도산서원에서는 성학십도 목판 12개를 완전 복원해 전시하고 있다. 이곳 소수박물관 유리관에 진열된 것은 인쇄본 원판이다. 그 옆에는 성학십도를
목판으로 인쇄한 열폭짜리 병풍도 함께 진열되었다. 일제 때는 성학십도를 괴헌 김영 고택(古宅) 천정에 감추고 도배해 일제의 마수를 피했다.
우여곡절을 넘긴 성학십도는 지금 영주시민의 긍지이자 보물이 되었다.
이와 함께 내가 이날 박물관에서 유심히 본
것은 1985년 발굴된 순흥 고구려 고분벽화이다. 이 지역은 한때 고구려 최남단 영토였다. 그 때문에 539년 조성된 이 고분은 남한의 유일한
고구려식 벽화무덤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벽화에 그려진 서역인이다. 1500년 전 삼국시대 당시 서역인이 이 곳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증거다.
또한 박물관에는 명종이 직접 써서 하사한 소수서원 현판도 전시되었다. 이밖에 박물관에는 유교와 성리학의 발전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다양한
자료들과 다수의 불교유물도 전시되고 있다.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나서자 바로 이웃에 선비촌이 있다. 영주시는 10년 공사 끝에 지난
2004년 양반문화를 테마로 하는 선비촌을 개장했다. 유교문화의 중심지로 선비정신을 계승하고 전통생활 모습의 재현을 통해 관광산업 발전을
도모한다는 취지다. 선비촌에는 수신제가, 입신양명, 거무구안, 우도불우빈이라는 네 구역에 기와집 7가구와 초가 5가구, 누각, 정자, 성황당,
장려각, 곳집, 원두막 등을 조성했다. 또한 옛날 저자거리를 재현해 관광객들이 숙박체험과 함께 저자거리에서 전통음식을 맛볼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선비촌 옆에는 한국 선비문화 수련원이 있어 99칸 한옥을 지어놓고 숙박, 전통음식 체험, 공예공방 체험, 전통찻집 등을 운영하면서 개인이나
단체 숙박객 또는 세미나 등을 유치하고 있다. 유교문화와 선비정신이 오늘날 양반전통 자부심이 대단한 이 지역의 중요한 관광상품이 된
셈이다.
선비촌이 테마로 선정한 양반정신은
수신제가(修身齊家), 입신양명(立身揚名), 거무구안(居無求安), 우도불우빈(憂道不憂貧) 네가지이다. 수신제가란 자신을 수양하고 집안을
올바르게 가꾼다는 뜻이다. 선비들은 우선 몸과 마음을 닦아 학문에 힘쓰며 생활윤리를 실천하는 수신을 중요시했다. 입신양명은 사회에 진출하여
이름을 드높인다는 뜻이다. 거무구안이란 사는데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비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도리를
고민하고 풍류를 즐기는 것을 수양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우도불우빈이란 비록 가난하더라도 잘사는 것을 탐내 선비의 도를 벗어나지 않으며 품격을
잃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가난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청빈하게 사는 것이다. 요약하면 선비는 가난하더라도 자기 수양이 먼저이며
부당하게 벼슬길을 탐해서도 안된다. 그리고 선비는 사는데 편리함만 추구해서는 안되며 주어진대로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살았던 양반들도 많았다. 그러나 많은 양반들이 이같은 양반정신을 내버리고 권력을 추구하면서 재산 모으기에 급급했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소수서원에 모신 퇴계 이황은 평소
처사(處士) 되기가 소원이었다. 그는 자신의 비석에 처사라고 새겨지기를 바랬지만 관직을 지낸 탓에 이루지 못했다. 가문의 영광이라는 말이 있다.
“왕비 친정보다 대제학 집안이
영광이고, 대제학보다는 문묘배향자 배출한 집안이, 문묘배향자보다 처사 가문이 영광스럽다”는 옛말이다. 처사란 당파싸움으로 어지러울
때 벼슬을 단념하고 권력과 명예와 재산을 버리고 학문에 전념하면서 청렴하게 사는 선비를 말한다. 이들은 초야에 묻혀 살면서도 항상 나라일을
걱정해 재야에서 상소문을 올려 임금께 직언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요즘 우리사회에 얼마나 많은 지식인들이 곡학아세하면서 출세의 길을 달리며 재산을
모으는가. 이들은 뻔히 잘못된 정책인 줄 알면서도 집권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학문의 양심까지 속인다. 대통령 앞에서 맞대놓고 따끔하게 잘못을
지적하는 참모들이 과연 얼마나 있는가. 하긴 귀에 거슬리는 충언을 듣기 싫어하는 권력자 앞에서 직언한다는 것은 무모함에 다름없는 현실이긴 하다.
절대왕조 시대에도 직언을 하는 충신들이 많았는데 민주화된 이 시대에는 왜 그런 인물들이 없는 것일까. 양심있는 처사들이 아쉽기만 하다. 나는
조국 현실에 대한 씁쓸한 심정을 안고 희방사로 발길을 옮긴다.
(2014.7.29 뉴욕
虛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