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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화가 진상용 원문보기 글쓴이: 국화
요즘 언제고 다시 수채화를 꼭 배우겠다는 결심을 단단히 하는 중입니다. 유화와 달리 수채화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아마 학교에서 배웠던 기억들이 머리 깊숙하게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한편으로는 한 번 해
봤던 것이니까 다시 할 수 있을 것 같은 무모한 건방짐도 있습니다. 당대 최고의 수채화가라는 말을 들었던
영국의 윌리엄 러셀 플린트 경 (Sir William Russell Flint / 1880~1969)의 작품 속에는 낭만적인 여인들 모습이
가득합니다.
파루카 Farruca / 24.5cm x 35cm
파루카는 플라맹고의 한 종류입니다. 플라맹고는 집시들의 춤에서 시작된 것이죠. 원하던 원치 않던, 한 곳에
정착할 수 없다는 것은 몸의 문제이기에 앞서 마음의 문제입니다. 사는 것도 흘러가는 것이라고 보면 우리
모두는 집시인 것이죠. 배경이 생략되면서 여인의 모습이 한층 가벼워졌습니다. 치마는 몸짓에 흔들리며
여인을 하늘로 올려 줄 것 같은데, 눈을 감고 마주 댄 손바닥을 통해 여인은 어디를 향해 마음을 보내는 것
일까요---.
플린트는 1880년,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화가이자 삽화가였는데, 프린트가
어렸을 적부터 미술에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는 점이나 그의 일생을 보면 아버지로부터 재능은 확실하게 물려
받았던 모양입니다. 예전에 배웠던 동시가 떠 오릅니다.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 파보나 마나 / 자주 감자
자주 꽃이 피었는데 하얀 감자가 있지는 않겠지요? 수능을 앞 둔 아들은 무슨 감자일까요 ---. .
균형 Balance
모습을 보면 막 잠자리에서 일어 난 듯 한데, 왼쪽 여인의 모습이 수상합니다. 머리에 이고 있는 광주리도
침실에 어울리지 않는 소품이죠. 아마 일어나서 시트를 세탁하기로 되어 있는 모양입니다. 오른쪽 여인은
몸에 이리 저리 걸쳤는데 광주리를 가져온 여인은 한꺼번에 담고 머리에 이었습니다.
너, 나처럼 이렇게 할 수 있어? 이게 보기하고 달리 어렵지, 균형을 잘 잡아야 하거든.
너나 열심히 하세요.
아가씨, 균형은 몸이 무너지는 것을 잡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적당한 크기로 여러 개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나누기가 어렵기 때문에 세상을 균형잡고 살기 어려운 것이죠.
다니엘 스트워즈 칼리지를 졸업 한 후 플린트는 석판인쇄공의 도제로 6년간 일을 합니다. 디자인도 배우면서
에디버러 왕립 미술학교에 시간제로 등록, 공부의 폭을 넓히다가 스무 살이 되던 해 플린트는 의학 관련
삽화 그리는 일을 하기로 결심하고 런던으로 떠납니다. 미술가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100년 전의 스무 살은
요즘 서른 살과 같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으로는 요즘 세상을 향한 첫 걸음이 자꾸 늦어 지는 것 같아
답답합니다.
보석 상자 The Jewel Box
여인이 손에 들고 상자의 크기를 보니 반지 아니면 귀걸이 같은데 반지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장신구의
종류가 많지만 반지에 유독 애정이 가는 것은 항상 손을 잡고 있는 느낌 때문입니다. 상자 안에 있는 보석을
하나씩 보는 여자에게 보석 상자는 추억 상자도 될 수 있겠지요. 남자들은 대부분 보석상자가 없습니다.
대신 가슴에 하나씩 숨겨 가지고 다니죠. 여인들도 있다구요? 그럼 여인들이 하나 더 가지고 있는 셈이군요.
상자 속 보석이 항상 기쁨만 주던가요? 그렇다면 하나 더 있는 것, 그다지 부럽지 않습니다.
런던에 온 플린트는 2년 정도 의학 관련 삽화 일을 하다가 1903년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Illustrated
London News)에 입사합니다. 그 뒤로 5년 간 근무하며 삽화를 그리는데 평론가들은 이 시기에 그려진 작품을
그의 최초 작품으로 보고 있습니다. 1905년에는 책에 들어갈 삽화를 처음으로 그리기도 했습니다. 이 해에
시벨레 수에테르와 결혼을 하는데, 성으로 봐서는 스페인 혈통의 여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이아몬드 목걸이 The Diamond Necklet / 27.3cm x 47cm / 1961
앞 선 작품 속 여인은 반지를 보고 있었는데 이 여인은 다이아몬드 목걸이에 마음을 맞췄습니다.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라는 말 때문에 변치 않는 사랑을 뜻한다고 하지요. 그런데 이 표현이 생기게 된 유래를 생각하면
다이아몬드 반지를 교환하고 결혼한 부부들이 이혼에 이르는 비율이 자꾸 늘어나는 이유도 이해됩니다.
기억하기로는, 다이아몬드가 화학작용에 의해 탄소가 변화된 것이라는 과학적 사실이 밝혀지면서 다이아몬드
산업은 위기를 맞습니다. 이때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만들어진 표어가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였습니다.
애초에 사랑에는 관심이 없는, 사업 유지를 위한 슬로건이 기가 막힌 탈을 쓴 것이죠. 제 생각에 사랑은 놋쇠
같은 것 아니나 싶습니다. 매일 닦으면 반짝반짝 빛이 나지만 그냥 놔두면 시퍼런 녹이 슬죠. 닦지 않아도
변하지 않는다면, 그게 사랑인가요?
회사에 다니는 기간 동안 플린트의 작품은 대영제국의 여러 곳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세계 각국에
식민지를 팽창시키고 있던 영국의 손 길이 닿는 곳에는 아마 그가 일하던 회사의 신문이 보급되었기 때문
이겠지요. 1907년, 스물 일곱 되던 해 플린트는 프리랜서를 선언하고 회사를 그만둡니다. 장래에 대한 확실한
자신이 있었던 걸까요? 언제쯤 저도 제 인생을 위하여 프리랜서 선언을 할 수 있을까요 ----
‘딴 생각하지 말고 다니는 회사나 끝까지 다니셔’
아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그럼요, 열심히 다녀야죠. 마음을 다잡습니다.
소나기 The Shower
먹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이는 것을 보니 소나기인 것이 분명합니다. 여인들의 시선이 왼쪽으로 쏠린 것을
보면 소나기가 그 쪽부터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살면서 소나기 한 두 번 맞았겠습니까? 소나기 뒤에는 더
맑은 하늘과 바람이 있다는 것을 배운 것도 소나기를 맞고 난 뒤였습니다. 그런데 산 위에 오른 여인들은 전혀
준비가 안되었군요. 발레 슈즈에 맨발 ---- 여인들이 문제인가요, 너무 작위적으로 그린 플린트가 문제인가요?
초기 플린트의 작품은 라파엘 전파의 영향을 받아 화려하고 매력적인 색상 그리고 디테일이 특징이었습니다.
또한 신고전주의 화풍으로부터도 일정 부분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플린트의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수채화였고 낭만적인 자태의 여인들이었습니다. 그의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모델은 세실리아 그린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인데, 스물 살 때 결핵이 그녀를 쓰러뜨리기 전까지는 원래 발레 무용수 훈련을 받았었죠.
플린트와 그녀와의 이야기를 잠깐 해 보겠습니다.
우물가의 수다 Disputation at the Well 53.3cm x 71.6cm
물을 긷다 말고 왜 웃통들은 벗어가지고 보는 사람을 당혹하게 하는 건지, ---- 쳐다보기가 좀 난처하군요.
우물 터는 여인들의 공간이니까 남자들이 뭐라 할 것은 없지만, 저렇게 단체로 벗고 있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물을 긷다 더워서? 라고 생각을 해 봤는데, 혹시 고전주의 시대부터 즐겨 묘사되던 삼미신(三美神)을 패러디
한 것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 ‘물 긷다 수다 떠는 삼미신’이 되겠군요. ‘시원한’ 여인들의 모습에 상상력도
멈춰 섰습니다.
결핵에서 회복한 세실리아 그린은 모델 일을 하기로 했고 그녀가 처음으로 모델을 선 화가가 플린트였습니다.
그 후 그녀는 15년간 플린트의 모델 일을 합니다. 모델과 화가로 만났지만 플린트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
하는 편지를 보냅니다. 저속한 것이 아니고 플라토닉 러브였다는 것을 남아 있는 플린트의 편지를 통해 알 수
있지만, 세실리아 그린은 결국 그의 모델 일을 그만두고 그의 곁을 떠납니다. 남겨진 플린트는 황폐해졌다고
하는데 더 깊은 이야기는 알 수 없습니다. 플린트의 마음, 저는 이해할 수 있지만 세실리아 그린은 그렇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이유가 --- 뭐였을까요?
반짝이는 팔과 시원한 물 Gleaming Limbs And Cool Waters / 48.8cm x 67cm
까까머리 학생시절, 여탕을 훔쳐 보고 온 친구가 한 때 우리의 영웅이었던 적이 있습니다. 정말로 본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목욕탕 집 아들인 그 친구 말을 믿는 수 밖에 없었죠.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친구의 입에서
나오는 환상의 세계를 ‘경청’ 했었는데 결혼을 하고 보니 지나친 상상을 했구나 싶었습니다. 그 때 머리 속에
그렸던 풍경을 그림으로 이렇게 만나게 됩니다. 등을 보이고 있는 여인이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도 플린트의 작품 앞에는 사람들이 모인다고 하는데 부드럽게 퍼져가는 물결에 담긴 이야기를 듣고자
한 것이겠지요? 아닌가요?
1912년 이탈리아로 자리를 옮겨 프리랜서로 작업을 일하면서 성공을 꿈꾸던 플린트는 1차 대전의 발발로
꿈을 접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비행선 감독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동안에도 그는 비행선의 바깥을 두르는
천에 수채화를 그렸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플린트는 스페인과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현지의 풍광과
생활이 담긴 작품을 발표합니다. 그의 작품은 널리 알려졌고 성공한 화가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자료의
표현이 마음이 듭니다. --- 플린트는 그의 정열을 마음껏 펼치기에 충분할 만큼 성공했다 ---- 금전적으로도
성공 했다는 또 다른 표현 아닐까요?
미리엄, 클로에 그리고 제인 Miriam, Chloe and Jane / 57.8cm x 65cm
플린트의 작품 중에서도 아주 매력적인 작품으로 평가 되고 있는 작품입니다. 구성도 재미있는 것이 여인들의
옷을 걸친 상태입니다. 가운데 여인은 옷을 다 갖춰 입었지만 왼쪽 여인은 전라이고 오른쪽 여인은 반라입니다.
섞어 놓았지만 조금씩 정도를 달리한 묘사 때문에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가운데 여인의 옷을 보다가
수채화의 표현이 어디까지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런 허리를 본 적이 --- 기억에도
잡히지 않는 옛날이군요.
평론가들의 플린트에 대한 평은 호의적이었습니다. ‘전적으로 자신만의 방법을 고수하면서 자연을 바라보는
기질을 가진 화가’라는 표현은 그의 작품의 독창성에 대한 것이겠지요. 또 그는 고전적인 주제를 주로
다뤘는데 색상은 현대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것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끈 요인 중 하나입니다.
발레 거울 The Mirror of the Ballet
이 방에 혹시 몇 명이 있는지 세어 보셨습니까? 다섯 명이 있습니다. 발레 복을 입은 두 여인은 연습이 한참
이지만 거울 앞에 앉은 여인들은 발레 담당이 아닌 것 같습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뺨이 붉게 달아
오른 여인의 치마 밑, 발레 슈즈처럼도 보이는데 붉은 구두가 눈에 들어 옵니다. 반 이상을 차지하는 나무
바닥이 무거울 법 한데 날렵한 여인들과 화려한 장식이 더 해지면서 경쾌해졌습니다. 수채화의 기법의 장점
이겠지요?
1920년대부터 30년대 플린트에 화가로서의 경력은 절정에 이른 듯합니다. 1924년, 44세의 나이에 로열
아카데미 준회원이 된 그는 1933년 정회원이 됩니다. 1914년 왕립 수채화 협회 준회원이 된 플린트는
1917년 정회원이 되었는데 1936년 회장으로 선출됩니다. 공직에서도 인정을 받았고 작품에 대한 인기도
대단했습니다. 그가 그린 작품 속 여인들을 보기 위해 구름 관중이 모였다고 하는데 요즘도 그렇다고 합니다.
아주 매력적인 여인들의 모습을 싫다고 할 사람이 있을까요?
허탕친 새우잡이 The Unsuccessful Shrimper / 1969
새우를 잡으러 왔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저런 뜰 채로 새우를 잡는 모양이죠? 왔다 갔다 하며
새우를 잡기 위해 애를 쓰다 보니 옷이 흘러 내린 것도 잊었습니다. 높아지는 파도를 바라보는 얼굴에는
근심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할 수 만 있다면 가까운 시장에 가서 새우 한 봉지 사다 주고 싶습니다. 물론
설정이겠지만 안타깝군요.
2차 대전이 일어나자 플린트는 식구들과 함께 영국 남서부 지역의 데번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전쟁이 끝나자
그의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수채화로 여인을 묘사하는 그의 솜씨는 나중에
전설이 되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수채화가라는 평가와 함께 ‘믿을 수 없는 솜씨’를 가진 화가라는 평가도
있었습니다. 그런 이유가 도움이 되었던 것일까요? 1947년, 67세의 나이에 플린트는 작위를 받습니다. 그런데
일부 자료에서는 작위 수여 시기를 1962년으로 적고 있는데 그렇다면 82세가 되어 너무 늦은 것 아닌가
싶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더 찾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라벤더님이 플린트의 공식 웹사이트에 1962년에 작위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집트 기념 Souvenir of Egypt / 48.4cm x 66cm / 1961
플린트는 전 생애를 통해 후배 화가들로부터 존경과 함께 찬미의 대상이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많이 잊혀졌지만 일러스트레이션에 대해서도 신화를 남긴 그는 90세 생일이 멀지 않은 89세로
세상을 떠납니다. 마지막 해에도 그림 작업을 계속했다고 하니까 그의 정열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화가로서도 장수한 플린트의 작품 속 여인들은 지금도, 여전히 낭만적인 자태로 우리의 눈길을 잡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