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향 개인전
Nostalgia(노스텔지어)
이태향 회화의 오브제는 건축물. 특히 고성(古城)과 성당이 주를 이룬다. 시점은 중세, 밤과 해 어스름이다.
이태향 회화에서 오래된 성채와 성당은 오브제 이상의 의미로 읽힌다.
화폭을 부유하는 중세 오브제를 통해 이태향이 환기시키는 것은, 동경(憧憬)이다.
글 : 김용운(음악칼럼니스트, 전 조선일보 기자)
[2013. 11. 13 - 11. 18 인사아트센터 6F (T.02-736-1020, 인사동)]
어둠에서 길어올린 빛, 구원-이태향의 노스탤지어
희뿌연 어둠속에서 성채가 떠오른다. 이미지는 몽환적이다. 꿈속의 실루엣이랄까. 선명한 즉물(卽物) 즉자(卽自)의 공간이라기보다, 피안(彼岸)에 가닿는 세계다. 바르고 긁고 덧바르기를 거듭한, 우툴두툴 마티에르는 예스런 질감을 드러내고, 꿈인듯 환영(幻影)인듯 부유하는 성채는 아련한 그리움을 자아낸다. 화폭은 대체로 어둡다. 그런데, 어둠속에, 빛이 눈뜨고 있다. 마치 오래된 이콘(Ikon) 속 빛처럼, 이태향 회화의 <어둠 속 빛>은 어떤 구원/건짐(salvation), 상승/고양(enhancement)으로 우리를 이끈다. 어둠속에서, 어둠 자체를 이루면서, 스스로 뿜어져나와 솟구치는 빛줄기…. 우리를 화폭 앞에 오래도록 머물게 하는, 이태향 회화의 매력이다. 이태향 그림을 서양미술사학자 홍진경은 <건축회화>라고 적었다. ‘특히 이태향은 나이프를 잘 사용한다. 전체적으로 그림을 그려놓고 깎아내는 듯한 특징은 이태향만의 독특한 기법이다. 그리하여 어두운 듯 개성적 색감과 질감, 감성적 아우라를 연출해내는 것이다. 두꺼운 유화의 마띠에르도 감소되며, 어떤 때는 투명한 속살을 드러내기까지 한다. 특히 프러시안 블루의 배경과 황금색 교회 건물 같은 것은 매우 신성한 종교적 인상을 드높인다’ - 홍진경 <이태향의 건축회화 - 노스탤지어> (2011 이태향 개인전, 발췌) 이태향 회화의 오브제는 건축물. 특히 고성(古城)과 성당이 주를 이룬다. 시점은 중세, 밤과 해 어스름이다. 이태향 회화에서 오래된 성채와 성당은 오브제 이상의 의미로 읽힌다. 화폭을 부유하는 중세 오브제를 통해 이태향이 환기시키는 것은, 동경(憧憬)이다. 지상의 모든 것이 하늘을 향해 열려있던 계절, 인간과 인문은 불모였으되, 꿈만큼은 하늘을 향해 오롯이 모아지던 계절…. 중세와 그 아이콘(Icon)으로 풀어내는 이태향의 노스탤지어는 작가의 독실한 신앙과 무관치 않다. 이태향은 <노스탤지어> 연작(連作)에 몰두해왔다. 작가가 전생에 거닐고 호흡했을 것 같은, 고색창연한 옛 성(城)과 고도(古都), 그곳을 향한 진한 그리움을, 빛과 어둠을, 스크래치 기법과 붓을 사용해 야경(夜景)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태향은 개성적 이력의 작가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독일에서 수학하고, 클래식 독주/협연/실내악 콘서트 무대와 강단을 누볐다. 그러다 영감의 외연(外延)을 캔버스로 넓혔다. 활과 붓의 양수겸장(兩手兼掌)이다.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음악은 시간예술이다. 연주행위는 시간좌표 위에서, 일회적으로 완성된다. 화가에게 회화는 공간예술이다. 캔버스 공간좌표 위에, 이미지는 자리잡는다. 시간의 영감인 음악, 공간의 영감인 회화…, 두 예술은 한 지점을 바라본다. 그것은 바로, 불멸(!)이다. 완결된 미감으로서의 불멸. 시간의 그물로 낚든, 공간의 프레임에 가두든, 불멸의 자기완결성이야말로, 무릇 예술의 궁극적 덕목이요 지향점일 것이다. 이태향의 회화는 독일 유학시절 쾰른/프라하/피렌체/베네치아 등을 배경으로 모티브를 취한다. 음악은 추억이 되고, 그리움은 그림이 된 것일까. 음악의 시간작업과 캔버스의 공간작업 - 두 시공(時空)의 통섭과 아우름이 이태향의 손끝에서 개성적 회화예술로 날아올랐다. 성채가 중세의 밤을 채운다. 성당의 종소리가 화폭을 울린다. 이태향의 노스탤지어는, 고즈넉하되 회고조가 아니다. 중세의 어둠에서 길어올린 빛을 통해 구원을 꿈꾸는, 실존적 노스탤지어다. 공간은 캔버스에 갇혀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주되고 확장된다. 이태향 회화의 독창적 지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