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바로크
16세기의 스페인은 중, 남미 대륙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금, 은으로 유럽의 최강국으로 군림하면서, 정치적인 전성기를 린다. 그런데 하느님의 급작스런 이 선물은 준비가 안된 스페인을 당혹스럽게 하였다. 펠리네 2세는 카톨릭의 수호자로 자처하면서 신,구 종교전쟁에 간여하였고, 네델란드 독립 전쟁을 진압하기 위해서 국부를 쏟아 부었다. 1588년에는 무적함대가 영국 함대에게 패하므로 스페인은 점점 쇠퇴의 길로 접어 들었다.
17세기 스페인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운 처지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도 이 시기가 스페인의 문화, 예술이 꽃핀 시기이다. 정부는 프랑스처럼 절대 왕정(루이 14세처럼)을 행사할 수도 없었고, 경제력도 이미 힘을 잃고 있었다. 예술도 중앙에 집중하지 못하고, 지역마다 지역에 맞는 특성을 꽃피우고 있었다.
17세기를 지배하는 미술 사조는 바로크 미술이다. 바로크 시대에 스페인을 대표하는 3대 화가로 엘 그레코, 벨라스케스, 고야를 꼽지만 엘 그레코는 매너리즘으로, 고야는 후기 화가로 취급하면 벨라스케스가 스페인의 바로크를 대표하는 화가가 된다.
1. 벨라스케스(1599 – 1660)
*벨라스케스의 미술
극도의 사실주의적 미술로서 눈에 보이는 것은 공기의 미동까지도 그렸다는 평을 듣지만, 그림이 너무 단조롭다는 (자기 양식에 충실함) 평도 동시에 듣고 있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열정이나, 낭만성이나, 신비성이 모자란다는 말도 듣는다. 이것은 그의 생애가 극적이지 않고, 순탄하였던 것도 원인이리라고 한다.
벨라스케스의 미술에는 무의식의 표현인 의외성, 비상식성, 은밀한 내면의 욕구를 표현하기보다는 순수 시각적 표현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의 작품은 너무 완벽하여 ‘거울에 비친 듯한 사실, ’ ‘세계를 비친 한 장의 유리’라고 평하기도 한다.
벨라스케스는 붓을 빠르게 움직이므로 봇자국이 오랜 머문 흔적이 없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라고 말한다.
초상화는 밝음과 어둠을 대비하여 조각같은 윤곽선을 없애는 대신에 회색의 공간 속에 잘 조화시키고 있다고 한다.
(위의 설명은, 뛰어난 손재주(재능)로 아주 잘 그린 그림이지만, 화가의 의식이나, 창작 의욕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벨라스케스의 년보(1599-1660)
1599 -- 세빌라에서 출생, 아버지는 소귀족 출신으로 공증인이었다.
중류의 생활로 별반 어려움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 세빌라는
스페인의 하나의 중심도시였다.
1611 -- 세빌라의 화가 파체코와 6년간 도제생활의 계약을 맺고
파체코의 화실은 세빌랴의 지식인이 모여든 곳이어서 여기서 인문학과
문학의 지식을 많이 습득하였다. 화가 수르바란도 여기서 만났다.
1618 -- 스승인 파체코의 딸 후아나와 결혼.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온 그리스도’ ‘식탁에 앉아있는 세 남자’
‘달결 프라이를 하는 노파‘를 그렸다.
술집이나, 부엌, 일상적인 생활 모습, 음식물, 조리 기구 등을 함께 그림의
소재로 다루 었다. 이런 양식의 그림을 “보데고네스(=선술집이라는 뜻) 회화” 라고 한다. 이런 양식은
벨라스케스의 초기 회화에 많이 나타난다.
1620 -- 세비야의 물장수를 그렸다.
아주 사실적인 그림이다. 물병 안에 넣어둔 무화과 잎도 선명히 보이도록 그렸다. 이 그림을 자신이
아주 자랑스러워하면서 로마에 갈 때 같이 가지고 갔다. 자신의 그림 실력을 선전할 때 이 그림을
보였고, 실제로 이 그림은 그의 명성을 높여 주었다.
이 그림은 카바라지오의 빛과 사실주의적 기법을 잘 응용하여 그림이란 단순히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을 눈으로 읽고 화폭 속에 자신의 형상으로 그려내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1621 -- 펠리페 4세가 16세에 왕위에 올랐다. 이때부터 세비야 출신의
올리바데스 백작이 대권을 쥐고 권력행사를 한다. 세비야 출신의 벨라스케스 를 후원하여 앞으로
벨라스케스를 탄탄 대로로 나아가게 했다. 벨라스케스를 궁정으로 불렀다.
1623 -- 올리바데스 백작에 의해 궁정으로 들어와서 펠리페 4세이 초상을
그렸다. 다른 화가의 견제가 심했다.(이때 6명의 궁정화가가 있었다.)
이때 그린 펠리페 4세의 초상화는 이후 왕의 초상화의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1628 -- ‘바쿠스의 축제’ --외교 사절로 스페인에 온 루벤스를 만나서
그의 영향이 보이는 그림이라고 한다. 벨라스케스가 신화를 소재로 그린
최초의 그림이라고 한다. 고전적인 누드 양식이 나타난다. 다른 인물은
세파에 시달리는 민중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이태리 여행을 하였다.
1634 -- 말을 타고 있는 왕실 가족,
1635 -- 브레다의 항복
1631년 로마에서 스페인으로 돌아온 이해 이후의 시기가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한다.
*브레다 함락 -- 1625년 일 년이나 저항하던 네델란드의 브레다가 함락하자 패배한 장군이 무릎을 꿇으려 하자, 승리한 스페인 장군이 같이 말에 내려서 꿇어앉지 않게 한다.
승자의 아량, 패자의 자존심을 지켜준다는 --- 신사도 정신을 표현한 것이다. ===> 이후 벨라스케스의 지위가 계속 높아져 간다. --시종관으로
1640 -- 카탈류 지방의 반란, 네델란드 독립운동의 격화 등으로 스페인
궁정은 어려움에 빠지고 올리바데스 백작도 1643년에 실권한다.
1649 -- 이태리 방문
1650 -- 48-49 50, 어느 해인지는 모르지만 “후안 데 파레하” 초상화 그림 후안은 무어인의 피가 섞인
벨라스케스 화실의 조수겸 노예였다.
서민의 티가 베여있는 얼굴과, 약간은 깔보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는 모습, 오젤로의 눈빛을 닮았다고 한다.
후안도 화가였다. 노예신분과 화가로서의 예술적 감성이 어울린 내면이 어울린 그 눈빛이 너무 잘
표현하였다고 한다. 비평가는 같이 전시한 다른 작품을 그냥 단순히 작품이라고 부른 반면에
이 작품은 ‘예술적 진실’이라고 불렀다.
벨라스케스는 곧 후안을 자유인으로 풀어주었다. 후안은 그냥 미미한 화가로 살았다고 한다.
*교황 “인노켄타우스 10세”의 초상
로마에 온 벨라스케스에게 교황이 직접 부탁하여 그렸다. 인노켄타우스 10세는 평범한 교황이나 이 그림의 모델이 되므로 유명해진 교황이 되었다고 한다. 후안과 마찬가지로 색을 거칠게 칠하여 질감을 나타낸 작품이다. 정면이 아닌 약간의 측면으로 그려서 위엄 있는 모습이 되도록 하였다.
그러나 표정에는 약간 얼굴을 찌푸리고 자의식이 어린 눈빛(신분이 높은 사람이 하위의 사람이 못마땅할 때 바라보는 눈빛)을 띄므로 그도 인간임을 잘 나타낸 작품이라고 한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고통에 찬 인간으로서 교황이다 라고 읽고 그의 작품에 모델로 응용하엿다고 한다. 그러면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초상화 중의 하나이다 라는 평을 하였다.
*거울을 보는 비너스 = 로크비 비너스 (1648-9)
이 시대의 스페인은 엄격한 카톨릭주의가 충만한 시기였으므로 섣불리 누드를 그릴 수가 없었다.
벨라스케스는 왕의 신임을 믿고 가장 요염하다는 이 그림을 그렸다. 티치아노의 영향이 많이 나타난
그림이라고 한다.
그는 신화에서 소재를 취하여 성적 매력이 발산하는 여인의 그림을 그렸다. 올린 머리를 한 표현과 몸매는 여신이 아니고 섹시한 인간의 몸을 그렸다. 그러나 거울을 들고 있는 큐피드에 의해서 이 여인이 비너스임을 말한다.
거울에 비친 여인의 얼굴은 자기 몸을 바라보는 감상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거울의 방향은
얼굴이 아닌 여인의 성기쪽이어서 감상자에게 온갖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1914년에 영국의 여성주의자 메리 리차드슨이 전시중인 이 작품을 도끼로 훼손한 사건은 유명하다.
그때 언론은 메리를 살인자보다 더 나쁘다고 주장하였다 한다.
1656 -- “시녀들”
워낙 유명한 그림이라서 이동민 카페에 따로 설명한 글이 있습니다.
1660. 6. 7.
사망
42. 세비야의 물장수 1620
43. 펠리페 4세 1623
44. 바쿠스의 승리(축제) 1628
45. 말을 타고 있는 펠리페 4세 1635
46. 펠리페 4세 1644
47. 브레다 항복 1635
48. 초상화들 1632(2명)
49. 거울을 보는 비너스 1650
50. 인노센트 10세 1650
51. 펠리페 3세 1635
52. 돈 카를로스 왕자 1626
53. 말을 탄 올리바데스 대공 1635
54.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 1632
55. 광대 돈 후안 1632
56. 난쟁이 1645
57. 돈 후안(노예) 초상화 1650
58. 미리가리타 공주 1653
59. 마리가리타 공부 1659
60. 시녀들 1656
2. 리베라(1591-1652)
스페인 화가인 리베라는 1615년에 이태리의 나폴리에 정착한다. 나폴리는 당시에 스페인이 총독을 파견하여 통치하던 곳으로서, 총독의 신임을 받고 나폴리에 정착하였다.
리베라를 스페인 회화와 카라바지오로 대표되는 이태리의 나폴리 회화를 연결하였다는 평을 듣는다. 특히 카라바지오의 회화를 이해하고, 이어간 후계자이다.
그는 카라바지오의 사실주의에서 시작하여 심리적인 표현을 하였다. 고통을 겪거나, 긴장하고 있거나, 감성이 격앙된 사람을 몸의 자세를 통하여 표현하려 하였다. 배경은 어둡게 하고, 뒤편에 빛을 주는 방법으로 강조하였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공포, 결핍, 고통을 감추지 않고 표현하려 하였다. 그는 사실성을 강조하고, 그림에 그대로 표현하려 하였다. 이렇게 하여 자기의 양식을 구축하였다.
나폴리에서 종교화를 많이 그리므로 종교화의 지방 양식을 만들었다는 평도 듣는다.
1630년에 이태리를 방문한 벨라스케스를 만난 후에 명암법보다는 색채를 강조하였다. 이후로는 빛을
사용하면서, 배경의 공간감을 없애버렸다. (배경이 검은 색이든지, 색상으로 처리하여 공간의 표현을
하지 않았다.
61. 집시 여인 1637
62. 피에타 1637
3. 수르바란(1598-1664)
벨라스케스 계열의 화가로서, 세비야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세비야에서 활동했다. 17세 때 독립하여
그림을 그리면서 1620년 경이 되면 자신의 양식을 만든다. 특히 색감의 표현에 뛰어났다. 몸짓과
옷차림을 표현하였고, 극적인 명암법을 적용하여 극도의 감정을 표현하였다.(몸짓을 통한)
그러나 옷의 표현은 마치 패션에 민감한 중류 이상의 여인의 옷차림으로 하였다.
수도사, 성인, 성처녀를 극적인 자세와 화려한 옷을 표현하므로 영적인 것을 표현하려 하였다.
그는 카톨릭 성당에서 많은 주문을 받아 종교화를 많이 그렸다. 이렇게 극적으로 표현하는 양식이
널리 퍼져서 지금은 조각에서도 많이 애용하고 있다.
정적인 장면을 동적인 구성으로 하여 깊은 정서를 외적으로 나타내려 하였다.
1634년에 벨라스케스의 초대로 마드리드에 가서 궁중의 그림을 잠시 그렸으나 취향에 맞지 않았는지
곧 세빌레로 되돌아 가버렸다.
1650년 경이 되면 무릴료 양식의 그림(무릴료는 좀 더 따뜻하고, 좀 더 엄숙한 종교화를 그렸다.)과
비교되면서 인기의 자리를 내주게 된다.
그의 그림은 성녀의 표현도 시중의 중류층 여성이 입는 화려하고, 값비싼 패션의 옷으로 표현하였다.
그후 인기가 시들해지자 그림도 팔리지 않아서 무척 가난하고 어렵게 살았다. 1656년에는
마드리드로 옮겼으나, 1664년에 외롭고, 쓸쓸하게 죽었다.
63. 베드로 순교 1629
64. 성 제롬의 유혹 1639
4. 무릴료(1618- 1682)
무릴료(1618-1682)
세빌레의 이발소 아들로 태어나서 평생을 그곳에서 산 세빌레 2세대 화가이다. 1639년에 화가로 독립한다.
그는 사실주의 기법에다, 벨라스케스의 보데고네스 양식으로 그렸다. 일상 생활의 장면을 진실되게 그렸다.
특히 어린이를 소재로 천진한 모습을 많이 그렸다. 인기가 있어서 많이 팔렸다. 그는 11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일찍 많은 아이들이 죽어서 그가 죽을 때는 아들 한 명만이 지키고 있었다 한다. 그래서 아이를 많이 그린 것이 아닌가라고도 한다.
그의 그림은 부드럽고, 품위가 있는 종교화도 그렸다. 리베라의 영향을 받아서 행동을 하는 자세로 표현하였다.
1650년대가 되면서 서사구조를 나타내면서 세밀하게 그림을 그렸다. 수르바란의 엄격한 양식의 그림과 대비가 되면서 쉽게 이해가 가는 그림을 그린 무릴료가 인기를 얻는다.
그는 세빌레에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그림 그리기 기법을 가르쳤다. 제자를 양성하여 모방작 내지 표절작까지도 많이 그리므로 후대에는 그림의 질이 떨어진다는 평도 듣는다.
최근에 와서는 일상 생활을 그린 것이 좋은 평을 받는다.
65. 마리아가 성인에게 옷을 주다 1650
66. 창틀에서, 소녀들 1670
67. 이집트로 피난 16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