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43
10월14일[연중 제27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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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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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ul16ieNX9X8?si=7HkDJa40Hpc-KFHT
[성바오로수도회 조용준 니콜라오 신부님 집전(가톨릭영화인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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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는 틀렸다고 포기하지만, 하느님 앞에는 절대 불가능이 없습니다!>
매실이며, 감나무며, 무화과나무 묘목 수백 그루를 심은 지 벌써 3년이 지났습니다. 여린 묘목을 한 그루 한 그루 심을 때, 참 고생이 많았습니다.
초보들이라 삼백여 평 되는 밭을 갈아엎고, 멀리까지 가서 묘목을 사오고, 구덩이를 깊이 파고, 묘목을 심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다들 나무라고는 심어본 적이 없는 초보들이라 웃기는 일도 많았습니다.
접붙인 부분은 비닐로 감싸져 있었는데, 그걸 벗기지 않고, 심었다가, 다시 파내서 제거하고 다시 심고…. 그리고 수시로 들여다봤습니다. 언제쯤 열매가 맺히려나? 밭이 워낙 돌밭이고 척박했던지? 아니면 저희가 게을렀던 탓인지, 성장이 엄청 더뎠습니다.
최근에는 잡초가 허리까지 올라와, 너무나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오랜만에 예초기를 돌리다가, 그야말로 감동적이고 눈물겨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아직도 여리고 키가 덜 자란 감나무 묘목에서 튼실한 감이 2개나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열매를 맺은 것이 너무나 신기했습니다.
그간 제 머릿속에 우리 과수원은 삼 년째 아무런 결실도 없으니, 실패인가보다 했습니다. 그런데 딱 감 두 개로 인해 새로운 희망이 생겼습니다.
우리 각자의 인생도 마찬가지겠지요. 우리는 자주 지난 삶 돌아보며, 내 인생은 이렇게 실패로 끝나는구나,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것 없겠구나, 하지만, 하느님 입장에서 보면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좌절하고 낙담하고 슬퍼하는 어느 날,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은총에 힘입어 마치 기적처럼, 동화 속 이야기처럼 우리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찍고 반전할 수 있음을 굳게 믿습니다. 우리는 틀렸다고 포기하지만, 하느님 앞에는 절대 불가능이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나자렛의 마리아 인생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변방 중에 변방 갈릴래아, 그 중에서도 낙후된 지역 나자렛이었습니다. 당시 나름 잘 나가던 예루살렘 사람들은 나자렛 사람들을 대놓고 무시하며, ‘나자렛에서 뭐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는가?’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 척박하고 낙후된 변장 나자렛의 어린 소녀 마리아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상상조차 못한 일을 시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총애하셨습니다. 그녀를 당신께서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실 사다리요 통로로 선택하셨습니다.
마리아 입장에서 이보다 더 큰 축복과 은총은 다시 또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외아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찾아오셨습니다. 자신의 몸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열 달 가까이 자신의 태중에 모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육체를 통해 탄생하셨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젖을 물렸습니다. 당신 품에 안고 애지중지 키웠습니다.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연유로 군중 가운데 누군가가 크게 외쳤습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을 행복합니다.” 그 말씀을 들은 예수님 반응이 의외입니다.
저 같았으면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과 예우를 갖추는 차원에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렇다마다요. 저희 어머님 마리아,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모릅니다. 신앙심을 또 얼마나 깊으신지? 이 세상에 저희 어머님 같은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이랬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여러분, 이 대목에서 보이신 예수님의 반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불효막심한 대답일까요? 도무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예수님일까요?
사실 인류 역사상 가장 하느님 말씀을 잘 경청하고 구체적인 삶 속에서 지키고 실천한 사람은 바로 성모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은 불효막심한 말씀, 어머니를 깎아내리는 말씀이 아니라, 바로 어머니에 대한 극찬의 말씀, 칭송의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제 모습, 우리의 모습을 내려다봅니다. 매일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는 잘합니다. 그러나 지키고 실천하는 모습은 너무나 부족합니다. 선포되는 말씀 따로, 구체적인 생활 따로인 우리입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 하느님 대전에 서게 될 텐데, 그때 가장 큰 관건은 바로 이것입니다. 들은 말씀을 얼마나 마음 깊이 간직했고, 얼마나 그 말씀을 매일의 구체적인 삶, 구체적인 관계, 구체적인 사건 안에서 실천했는가?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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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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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주님의 뜻이 행복인가, 괴로움인가?>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는 동생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무기징역자로 수감돼 있는 형을 악명 높기로 소문난 교도소에 들어가 탈출시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교도소는 워낙 경계가 삼엄해서 누구도 탈출을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동생까지 죄인으로 자신을 찾으러 감옥에 들어왔으니 형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동생이 온 몸에 새긴 문신이 바로 그 교도소의 지도이고 완벽하게 짜인 탈출 방법임을 알게 되었을 때는 형도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됩니다. 무기징역을 받아 평생을 감옥에 있어야 하는 형에게 그 감옥을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은 그 자체로 행복입니다. 그리고 그 동생을 쫓아 감옥을 탈출하여 결국 누명을 벗게 됩니다.
참다운 행복은 우리를 가두고 있는 행복하지 못하게 만드는 환경으로부터 탈출할 때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탈출시키기 위해 우리 불행 안으로 들어오신 분의 뜻이 우리 행복의 시작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여인이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여인의 행복의 기준은 사랑하는 분과 함께 머무는 것에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행복은 함께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머무르는 분의 뜻을 배우고 실천하는 데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함께 있기만 하면 뭐하냐는 것입니다.
부부가 한 집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 평생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런 행복은 한계가 있습니다. 참 행복은 누군가의 뜻으로 내 뜻을 죽이는 데 있습니다. 내 뜻 자체가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감옥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대부분 사람이 자기 뜻을 고통으로 느끼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십일조를 내라고 하는 주님의 뜻이 우리에게 정말 기쁨일까요? 그 뜻이 행복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머물기 위해 성당엔 나오지만 십일조는 내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따르면 모든 악의 근원이 돈을 좋아함이고(1티모 6,10 참조)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돈은 미워해야 한다고 합니다.
감옥이 행복이라고 믿으면 감옥에 들어와 자신을 탈출시켜 주려고 하는 이를 비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이 참 행복임을 먼저 믿어야 합니다.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고 결국엔 주저앉아 우는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에겐 장난감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그러나 이젠 그런 장난감을 가지고 놀 나이가 아닙니다.
이때 어머니는 그 아이에게 컴퓨터를 사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더는 장난감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장난감을 갖지 못한 고통스러움은 자연스레 사라집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세상의 집착으로부터 끊기 위한 선물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있기에 우리는 세상 것을 좋아하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내 뜻을 없애는 것이 오히려 참 행복의 이유인 것입니다.
일반 대학교 다니며 결혼도 하고 돈도 많이 벌어보겠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이때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밀물처럼 밀어닥쳤습니다. 하지만 결혼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주님의 뜻을 알면서도 1년간 버텼습니다. 주님의 뜻이 나의 행복을 빼앗는 것처럼 느꼈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주님의 뜻이 저를 수많은 세상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었음을 압니다. 결혼해서 지금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을 것을 압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과 함께 머무는 것만이 행복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이 내 안에서 나를 바꾸어놓아야 행복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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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뉴욕에 온 지 4년 만에 한국으로 휴가를 가려고 계획하였습니다. 성지순례를 전문으로 하는 여행사에서 ‘한국 성지순례’를 기획하였고, 제게 같이 갈 수 있는지 문의하였습니다. 저는 한국 휴가를 계획하고 있었기에 시간이 맞으면 함께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지난 10월 2일부터 한국 성지순례를 하였고, 어제부터는 저의 개인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3년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12년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아버지 옆에 나란히 있었습니다. 그토록 사랑했고, 그토록 존경했던 아버지 옆에 있으니 어머니는 참 좋으실 것입니다.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3년 늦게 갔지만 어머니는 늘 그렇듯이 따뜻한 미소로 아들의 인사를 받으십니다. 오늘은 가족들과 함께 절두산 성지에서 미사를 봉헌하기로 했습니다. 성지 신부님이 배려해 주었고, 순교자들의 전구로 부모님께서 천상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기를 기도하려 합니다. 가족들은 부모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도록 기도할 것입니다. 이제 주교님께 인사도 드리고, 그리운 동창 신부님들도 만나면서 남은 날들을 보내려고 합니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감사할 일입니다.
한국에 오니, 뉴욕에서 저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 분들이 생각납니다. 제가 4년 동안 무탈하게 잘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가족처럼 지냈던 브루클린 한인 성당의 신부님들이 있습니다. ‘삼인행이면 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는 말처럼 비록 저보다 나이가 어린 신부님들이지만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한 신부님은 큰 바위 얼굴처럼, 고향의 느티나무처럼 모든 신부님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였습니다. 신부님의 사제관은 고향을 떠나온 신부님들에게 ‘사랑방’이 되었습니다. 한 신부님은 캠핑을 좋아했고, 자전거를 좋아했습니다. 우리는 팬데믹 동안 함께 캠핑을 하였고, 자전거를 타면서 팬데믹을 견디었습니다. 한 신부님은 계획의 달인이었습니다. 여행을 가면 모든 것을 혼자 준비하였습니다. 항공권 예매, 호텔 예약, 자동차 렌탈, 식당 예약, 음식준비를 모두 완벽하게 해 주었습니다. 한 신부님은 언제나 말이 없지만 뒤에서 부족한 것들을 채워 주었습니다. 신부님의 요리는 거의 요리사 수준이었습니다. 캠프장에서는 장작을 태워서 따뜻하게 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들이 많았기에 저는 아무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습니다.
교우들 중에도 착한 사마리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신문 홍보를 위해 LA에 가면 언제나 따뜻하게 저를 맞이해 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공항까지 마중 나와 주시고, 편안한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바쁜 중에도 저를 위해서 차량 봉사를 해 주었습니다. 매일 아침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었습니다. ME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ME 봉사자들은 함께 피정을 준비하였고, 야유회를 다녀왔습니다. 팬데믹 기간에 줌으로 하는 강의를 도와주었습니다. 집으로 초대해서 집밥을 준비해 주었습니다. ‘사랑은 결심이다.’라는 ME의 가르침대로 부부들은 사랑으로 대해 주었습니다. 브루클린 한인 성당의 공동체가 있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아파서 제가 잠시 미사를 도와주었는데 어느덧 3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았는데 이제는 제가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물고기는 물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행복한 것처럼 사제는 교우들과 함께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고, 보람 있습니다. 브루클린 한인 공동체와 함께 있는 시간들이 제게는 행복이었고, 즐거움이었습니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감사할 일입니다.
살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성공, 재물, 업적, 인간관계, 가족, 건강’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것들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아프고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것입니다. 친구가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함께 가주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같은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우선순위는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이타적인 삶이었습니다. 신앙인들이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삶의 우선순위로 정한다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삶의 우선순위로 정하면 좋겠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것을 삶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제들은 행복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삶으로 드러나는 신앙인들은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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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1,27-28: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있던 한 부인이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27절) 하고 있다. 부인의 찬사는 우선은 예수님을 두고 한 것으로, 바로 그의 어머니인 마리아에 대한 찬사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28절) 하신다. 더 중요하고 우리가 모두 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며, 이런 사람들이 진실로 행복한 사람들이다. 혈연관계로 그분의 형제나 친척이라고 해도, 그분을 믿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아무것도 아니다.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미 당신의 신앙으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이웃 사랑으로 실천한 분이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세상의 구세주로 낳아주실 수 있으셨던 분이기 때문에 복되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낳아 기르신 까닭에 복되기도 하시지만, 그보다 더 큰 의미는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신앙인들 가운데 한 분이신 까닭에 복되시다는 뜻이다. 마리아께서는 몸과 마음으로, 즉 신앙으로 예수님을 품으셨기 때문에 복된 분이시다. 예수님의 몸을 잉태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을 믿으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마리아께서 복되신 것을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도 주신다. 마리아께서 복되신 것처럼 이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이 계속 누릴 수 있도록 해주셨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하느님을 체험할 수도 있고, 이 체험으로 신앙인의 삶을 갖게 된 것을 감사하기도 할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삶이 끝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 항상 새로이 태어나는 것을 체험한다면 구원을 항상 체험하며 완성해 가는 것이다. 구원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뵐 때 완성되겠지만, 이 세상에서부터 구원은 체험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말씀에 한순간 감격하고 체험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 꾸준히 지키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바로 예수님을 낳아 젖을 먹이신 성모님이 행복하신 것 같이, 아니 오히려 더 행복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제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항구하게 살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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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시는 신적 행위를 보여 주셨고, 이에 군중은 놀라워하면서도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힘의 원천을 비판하고 부정하였습니다(어제 복음 참조). 위태로운 예수님의 위치를 바라본 한 여인이 군중 속에서 나와 예수님의 신적 지위와 역할을 알리려고 합니다.
군중 속 여인이 예수님의 어머니를 칭송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이 여인의 선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두 개의 행복 선언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찬미를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첫 번째 행복 선언을 교정하시면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선포하십니다. 마리아께서 ‘행복하다’고 칭송을 받으실 수 있었던 이유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자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낳아 키우셨다는 사실에서 생각하여 볼 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으며(1,45 참조), 실행하는 이들(8,21; 사도 1,14 참조) 가운데 한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향한 모성애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시고 실천하셨다는 점에서 마리아께서는 ‘복된 여인’이라고 칭송받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지나치기 쉬운 것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참제자 또는 참신앙인이 되려면 먼저 하느님께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말씀을 귀담아 들으며, 들은 바를 실천하여야 합니다. 그러한 삶 속에서 참행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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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도회 왜관수도원 이성근 사바 신부님]
오늘의 짧은 복음은 군중 속에 있던 한 여자의 외침으로 시작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하시는 일에 탄복한 여자는 예수님을 실제로 낳으시고 기르신 성모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복음 8장 21절)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낳고 기른 인간적인 인연보다 더 높은 행복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함으로써, 구원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진정 행복하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렇다고 성모님께서 당신을 찾아오셨을 때나 이 대목에서,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부인하시거나 깎아내리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성모님을 올바로 보도록 도와주십니다.
성모님께서 복되신 것은 단순히 구세주를 낳으신 어머니이시기 때문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명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주님 탄생 예고를 들으셨을 때부터 당신을 ‘여종’으로 자처하셨고,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도록 순명하신 것에 성모님의 진정한 위대함이 있습니다.
예수님 곁에 계실 때도 아드님과 관련된 모든 것을 마음에 간직하신 분이시기에, 성모님께서는 이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로 정의되는 신앙인들의 모범이 되십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성모님을 따라 그 말씀에 의지하고 복음을 실천함으로써 행복의 길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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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씀드리자,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하고 이르십니다.(루카 복음 11장 27절-28절)
원래 이 말씀은 성모님께서 예수님과의 혈연관계 때문에 복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신앙인들이 복되다는 뜻으로 전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루카 복음사가는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을 낳아 기르신 분이기에 복되시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신앙인이셨기에 복되다는 뜻으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관계 속에 살아갑니다. 하느님 친히 인간과 세상 우주만물을 창조하시어 우리와 사랑의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먼저 우리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신 것입니다. 사실 사랑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서 관계의 절정을 볼 수 있지요.
세상살이에서도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 외에도 피조물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 다른 이들과의 관계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무조건 관계를 맺는다고 해서 다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지요. 관계 속에서 행복을 맛보기도 하지만 관계 때문에 상처받고 마음이 불편해지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지만 혈연관계에서도 유산이나 다른 이해관계가 얽히면 철천지원수가 되는 경우도 흔하지요. 문제는 무엇을 고리로 관계를 맺으며 왜 무엇을 위해 관계를 맺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이 복되신 것은 예수님의 혈육의 어머니라는 생물학적인 관계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이루신 ‘하느님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행복하고 싶거든 성모님처럼 하느님을 품어야겠지요.
하느님의 마음을 지니고,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품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십자가 사랑의 길, 보편적 구원의 길을 걸어갈 때 비로소 행복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아니라 금새 사라져버릴 돈이나 감성적 만족, 비슷한 취향과 성격 등이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결정적 고리가 될 순 없을 것입니다.
혈연관계라는 숙명적으로 주어지는 관계나 소수의 해당 구성원들만의 유익을 위한 울타리 속의 관계, 이해타산을 따지며 형성되는 인맥, 자본과 정치권력의 유착관계, 힘 있는 자와 약한 자들 사이에 맺어지는 갑을관계 이런 관계 속에서 행복이 꽃필 수는 없겠지요.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패거리 문화나 이익 집단이 아니라 모두의 행복이요 사랑 뿐입니다.
행복으로 가는 길에서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문은 말씀의 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살을 취하여 사람이 되신 말씀이신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고 그 문을 통과할 때 행복의 들판이 펼쳐질 것입니다.
말씀을 아예 듣지 않는 이들이나 듣기는 하지만 실행하지 않는 이들도 행복을 퍼올릴 수는 없겠지요. 행복의 샘이요 씨앗인 말씀과의 관계를 맺으려면 먼저 경청해야 합니다.
경청한다는 것은 다른 사물이나 사람과의 관계를 멈추고 영혼의 귀를 열고 행복의 뿌리이신 하느님께 집중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게 할 때 말씀이 우리 마음과 영혼에 스며들게 되고, 그 말씀이 나를 사로잡아 행복의 꽃을 피우게 될 것입니다.
행복하고 싶거든 예수님처럼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교리적인 의무 실행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와 생명을 구체적으로 재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도 사랑이신 하느님,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애정어린 눈길로 세상과 동료 인간들을 바라보고, 서로를 가엾이 여기며, 말씀 따라 하느님 나라의 의가 실현되는 세상이 되도록 행복을 퍼올렸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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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께 시선을 두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는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행복을 원하면서도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처지, 상황에 행복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행복은 주변 환경에 있지 않고 오히려 내면에 있습니다.
결혼을 앞둔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남자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멀리 부산에서 청주라는 곳까지 올라온 여자 친구에게 ‘힘들었겠다!’고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올라오는 동안 너무도 설레고 기뻤습니다. 친구를 만난다는 것이 행복이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중심을 어디에 두는가가 중요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할 때가 행복의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성 요한 비안네는 주님을 위해“박해와 모욕을 당할 때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행복은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느님 안에 있음이 행복입니다. 하느님을 차지한 사람이 행복합니다. 인간적인 차원을 넘어 시선을 하느님께 고정해야 하겠습니다.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큰 소리로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8) 참된 행복은 말씀을 실천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채워져서 행복하기보다는 행하는 그 자체가 곧 행복입니다.
성모님이 모든 여인 중에 가장 복되시다는 것은, 훌륭한 아들을 낳아 젖을 먹여서가 아니라 오히려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지켰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말씀대로 순명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고, 믿음에 따르는 순명을 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 믿음이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고,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실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순간이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수고와 땀도 기쁨입니다. 어렵고 힘든 고달픔에도 불구하고 지금 하는 일을 할 수 있음이 곧 행복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양보와 배려, 희생한다면 행복합니다.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면 복됩니다. 혹 어떠한 시련이 오더라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희망을 그치지 않는 한 행복이 거기에 있습니다. 순교자들은 목숨을 내놓으면서도 행복했습니다. 하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정오만 되면 성당에 들어갔다가 금방 나오는 노인이 계셨습니다. 이를 이상히 여긴 관리인이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노인이 말했습니다.
“나요, 기도하러 옵니다. 그런데 저는 기도할 줄을 몰라요. 그래서 그저 12시만 되면 이리로 와서 ‘예수님, 나요. 나예요’하고 인사만 하고 가는 겁니다.”
얼마 후에 그 노인이 병으로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노인은 병실에서 밝고 환한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 모습을 본 간호사가 그 비결을 여쭤봤습니다.
노인이 말했습니다. “그건 매일 나를 찾아오는 방문객이 나를 즐겁게 해 주기 때문이오.” 간호사는 주변을 둘러보며 “날마다 찾아오는 방문객이라뇨? 할아버지는 가족도 친지도 없으시잖아요?”
“그래도 매일 오는 사람이 있지.”
“그 방문객은 언제 오시나요?”
“매일 정오가 되면 내 침대 저쪽에 그분이 오시지. 내가 그분을 쳐다보면 방긋이 웃으면서 한 말씀 하고 바로 돌아가셔.”
“뭐라고 하시는데요?”
“간단해. ‘여보게, 날세. 나, 예수네!”라고 하지.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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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남편은 가장의 책임을 다하지 않고 술에 빠져만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며, 아내가 말합니다.
“언젠가는 아이들은 집을 떠날 거예요. 그러면 당신은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은 걸 후회하겠죠.”
이 말에 남편은 “그건 미래의 내가 겪을 문제지. 나는 그 인간과 상관없어.”라고 말한 뒤에, 곧바로 보드카를 병째 부어 마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갑자기 심장마비를 쓰러집니다.
이 주정뱅이 남편처럼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나’와 상관없을까요? 깊은 상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래의 ‘나’라는 목표를 설정하고, 그 지점에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의 ‘나’가 해야할 것이 분명해집니다.
미래의 ‘나’가 아이들과 함께 즐겁게 잘 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장 술을 끊고 아이와 함께해야 할 것입니다. 미래의 ‘나’가 건강한 모습으로 튼튼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금 당장 운동을 시작하고, 몸에 좋지 않은 것을 피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미래의 ‘나’가 하느님 안에서 기쁘게 생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금의 ‘나’는 기도해야 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하느님과 더 가까운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의 ‘나’가 가지고 있는 악습이 있다면 미래의 ‘나’를 바라볼 때 해결책을 찾게 됩니다. 미래의 ‘나’와 단절된 사람은 눈앞의 목표만 추구하거나 도파민이 잠깐 활성화되는 쾌락만을 추구합니다. 당연히 지금 원하는 ‘나’가 될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미래의 ‘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의 ‘나’가 미래의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세상의 것만을 추구하면서 주님의 것을 잊어버립니다. 과연 무엇이 미래의 ‘나’에게 필요할까요?
군중 속에 있던 어떤 여자가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을 행복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면서, 이렇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 예수님을 낳은 성모님이야말로 행복할 것이고 하지요. 하지만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 안에서 늘 고통과 어려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의 순종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신 성모님의 모습입니다. 지금의 고통과 어려움만이 전부라고 생각했다면, 하느님이 말씀을 듣고 지킬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미래의 ‘나’,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나’를 떠올렸기에 철저히 하느님 말씀에 충실하실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를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미래의 나‘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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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행복한 사람>
루카 11,27-28 (참행복)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행복한 사람>
그 사람
믿음이기에
그 사람
믿는 이는
행복합니다
그 사람
희망이기에
그 사람
희망하는 이는
행복합니다
그 사람
사랑이기에
그 사람
사랑하는 이는
행복합니다
그 사람
기쁨이기에
그 사람
기뻐하는 이는
행복합니다
그 사람
함께이기에
그 사람
함께하는 이는
행복합니다
그 사람
베풂이기에
그 사람
베푸는 이는
행복합니다
그 사람
품음이기에
그 사람
품는 이는
행복합니다
그 사람
돌봄이기에
그 사람
돌보는 이는
행복합니다
그 사람
섬김이기에
그 사람
섬기는 이는
행복합니다
그 사람
살림이기에
그 사람
살리는 이는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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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듣기만 하여 자기를 속이는 사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 어머니가 부럽다는 여인의 말을 듣습니다. 이는 주님의 말씀이 그녀의 인생을 바꿔놓을 정도로 대단한 감동과 깨달음을 주는 말씀이었기 때문일 것이고, 이런 아들을 두면 자기도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난주 제주 지구 회원들의 서약 피정을 동반하고 강의도 했는데 다른 어느 곳보다 반응을 잘해 주셔서 저도 열과 성을 다해 강의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인지 제가 생각하기에도 강의가 잘 됐고 회원들도 만족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강의가 좋았다고 인사해주시고, 심지어 제가 존경스럽다는 말씀까지 하셨는데 그들도 이 여인처럼 저의 강의로 힘을 얻고 행복감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마움을 표현할 때 그저 고맙다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지만 오늘 복음의 여인처럼 저의 어머니가 참 행복하시다고, 그래서 부럽다고 표현할 수도 있고 그러면 더 멋스러울 수 있을 겁니다.
아무튼 주님께서는 그 말을 들으시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아들을 잉태하는 것보다 하느님 말씀을 잉태하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뜻이지만 이 말씀이 오늘 저에게는 이렇게 들립니다.
좋은 강의를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겠지만 듣고서 그것을 실천까지 해야 더 행복할 것이라고.
또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을 들었으면 듣기만 하지 않고 그 사랑을 실천할 때 진정 행복하다고.
말씀을 듣는 것은, 씨앗이 내게 떨어진 것과 같다면 실천하는 것은, 그 씨앗이 열매를 맺는 것과 같지요.
사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만도 행복합니다. 하느님 말씀 듣고 걷어차는 이들과 비교하면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만도 행복하다고 해야겠지요.
그러나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보다는 말씀대로 실천할 때 더 행복하겠지요. 말씀을 듣는 것은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니 말입니다.
그래서일까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야고보 사도는 아주 강력하게 말하지요.
그런데 듣기만 하는 것이 왜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마 상상 임신과 같을 것입니다.
들은 것만으로 이미 그리되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것을 이렇게 비유합니다. 얼굴을 거울에 비춰 보고는 이내 자기 얼굴을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얼굴을 거울에 비춰 보는 이유는 자기 얼굴을 가다듬기 위해서인데 가다듬지 않고 거울을 본 것만으로 됐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거울을 봤을 뿐 자기 얼굴을 본 것은 아닌데도,
얼굴을 봤어도 얼굴을 가다듬은 것은 아닌데도.
아무튼 마리아처럼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들은 것만으로는 행복하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될 때 진정 행복함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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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오히려 행복한 사람>
이미 몇 번인가 얘기한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피정 때 어머니들께 질문을 드리지요. 천국에 가서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면 어떤 관계를 맺겠습니까? 우선 지금의 남편과 꼭 다시 부부의 연을 이어가겠습니까? 대다수가 싫다거나 꼭 그럴 필요가 없다고 답을 하십니다.
그러면 당신 아들과 어떻습니까? 관계를 끊겠습니까? 이어가겠습니까? 백이면 백 아들 관계는 끊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일생 말썽꾸러기에다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어도 그렇겠냐고 물으면 그래도 지금의 아들이 계속 당신들의 아들이면 좋겠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고서 저는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용서도 이런 것이구나!' 아니, '이보다 더 큰 사랑과 용서이구나!'하고 이해합니다.
이제 한 걸을 더 나아가 이런 질문을 드립니다. 지금 말썽쟁이 아들과 예수님 중에서 누구의 어머니가 되고 싶습니까?
더러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겠다고 하는 분도 있지만 대개는 예수님보다는 지금 아들의 엄마가 되고 싶다고들 하십니다. 그런데 보통의 엄마들이 이러한데 오늘 복음의 여인은 다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참으로 행복하다며 부러워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도 자기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 아니고, 말썽쟁이 아들 때문에 불행해서 부러워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육신의 어머니에서 마리아처럼 주님의 어머니가 되고 싶은 것일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오히려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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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행복하여라>
-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 -
10월13일 어제 이태리의 젊은 교회 지도자들인 고등학생들의 모임 첫날에 교황님이 보낸 메시지 핵심 내용이 멋졌습니다.
“꿈은 크게, 하느님 역시 그렇다!(Dream big, God does too!)”
꿈의 하느님, 희망의 하느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저절로 꿈의 사람, 희망의 사람이 됩니다. 지금 우리가 평화롭게 지내는 이 시간에도 우크라이나에서, 이스라엘에서는 비참한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와의 7일째 전투에서 1만여명의 사상자에 이르고 있습니다.
참 역설적인 것이 전쟁하는 나라 모두가 유일신 하느님을 믿는 나라들입니다. 참으로 꿈의 하느님, 희망의 하느님을 믿는다면 결코 이런 비참한 전쟁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원대하고 영원한 꿈이, 희망이 무엇입니까? 하나, 단 하나 평화입니다. 누구나 소망하는바 평화의 꿈인데 참 역설적으로 인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된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참 역설적이게도 대부분 하느님을 믿는 나라들이 그렇게 전쟁을 많이 합니다. 모든 전쟁이 영적 전쟁으로 바뀐다면 얼마나 좋고 바람직할까요!
아마 종교간의 평화공존이 한국처럼 잘 되는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이 또한 우리의 자랑입니다. 이런 하느님 평화의 꿈을 앞당겨 실현하며 살아가는 곳이 여기 가톨릭의 요셉 수도원입니다. 그리하여 “평화의 집”이란 피정집 명칭도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평화를 찾아, 그리스도의 평화를 목말라 평화의 집, 기도의 집, 주님의 집인 수도원을 찾는지요!
요즘 그동안 계속해서 읽은 매일미사 제1독서는 에즈라, 하까이, 즈카르야, 느헤미아, 바룩, 요나, 말라기, 요엘의 말씀으로 모두가 바빌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이후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예언자들입니다. 예언자들의 궁극적 특징은 하느님의 꿈을, 하느님의 희망을 그대로 대변한다는 것입니다.
칠흑같은 절망의 현실에서도 결코 하느님의 꿈을, 하느님의 희망을 선포하고 노래하며 살았던 꿈과 희망의, 생명과 빛의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오늘로서 요엘서는 끝나고 다음 월요일부터 제1독서는 신약으로 넘어갑니다. 오늘 요엘서의 빛나는 희망의 대목입니다.
“그날에는
산마다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언덕마다 젖이 흐르리라.
유다의 개울마다 물이 흐르고
주님의 집에서는 샘물이 솟아
시팀 골짜기를 적시리라.”
이 거룩한 미사를 드리는 오늘이 그날입니다. 그날의 평화를 오늘 앞당겨 살게 하는 미사은총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꿈, 하느님의 희망을 앞당겨 살아갑니다. 무엇보다 우선적인 것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모두를 사랑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듯 모든 수행을 사랑합니다. 수행덕목들뿐 아니라 삶을, 이웃을, 자연을, 말씀을, 모두를 사랑합니다. 베네딕도 규칙 4장 “착한 일의 도구들은 무엇인가”는 76절까지 계속되며 첫절은 하느님 사랑입니다.
“첫째로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느님을 사랑하라”라는 1절입니다. 그리고 41절은 “자신의 희망을 하느님께 두라”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 희망을 둘 때 비로소 참행복입니다.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 희망을 하느님께 두어라”(시편131,3) 말씀도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나에게 공평히 열려있어 선택할 수 있는 참행복입니다. 시편의 두 고백도 생각납니다.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시편16,2).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저의 힘이시여.”(시편18,2)
우리가 배운 모든 참행복은 하느님께 있음을 봅니다. 엊그제 화답송 후렴도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주님을 신뢰할 때, 참행복이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은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에서 보다시피 우리의 참기쁨도 주님께 있음을 봅니다. 여기서 연유한 제 행복기도 다음 대목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주님과 함께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그러니 참행복은 우리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사랑의 주님을. 희망의 주님을, 평화의 주님을 선택하여 주님의 말씀대로 살 때 참행복입니다. 이래서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란 고백도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역시 참행복에 대한 내용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
참행복은 우리의 권리이자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참행복을 선택하여 살 수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노력에 항구할 때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말씀을 사랑하여 듣고 지키는데 한결같이, 끊임없이 항구한 열정과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단 두절로 짧습니다만 참행복의 비결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어떤 여자와 주님이 주고받은 대화가 흡사 불승들의 선문답같고, 사막교부들의 언행록에 나오는 제자와 스승이 주고 받은 대화처럼 긴 여운을 남깁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잘 난 자녀를 둔 어머니에 대해 선망하는 마음은 인지상정, 모든 어머니의 공통적 심정일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질문했던 어머니는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주님을 사랑하여 찾는 모든이들에게 희망과 구원을 주는 복음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합니다.”
‘오히려’란 말마디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다하지 못한 말씀을 제가 보완합니다. 그대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심중을 반영하는 묵상이란 확신이 듭니다.
-“내 어머니 성모 마리아는 행복한 분입니다. 그러나 나를 낳은 육신의 어머니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켰기에 행복합니다. 사실 내 어머니 성모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지킨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내 어머니 성모 마리아야 말로 시종여일 ‘예스-맨(yes-man)’으로 ‘순종의 사람’이었고 끊임없이 한결같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켰으며 평생 저와 함께 했습니다.
여러 어머님들 참으로 행복하고 싶습니까? 참행복은 순전히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제 어머니 성모님을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제 어머니 성모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지키십시오. 참행복의 비결입니다. 당신의 자녀들은 바로 당신의 이런 모습을 고스란히 보고 배울 것입니다. 나도 성장과정중 성모 마리아의 이런 모습을 배웠고 지금도 배웁니다.‘-
참행복은 모두에게 공평히 활짝 열려 있는 선택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욕망도 무지도 허무도 아닌 사랑이요 말씀입니다. 사랑과 말씀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사랑하듯 말씀을 사랑하여 자나깨나 깨어 말씀을 듣고 지키는 공부에 온힘을 다할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참행복을 살 수 있도록 우리의 하느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북돋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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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8)
<참 행복!>
오늘 복음(루카11,27-28)은 '참 행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놓여 말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11,27)
주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행복'을 언급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8)
'참 행복!'
행복은 '모든 인간의 화두(話頭)'입니다. 모든 인간은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행복을 추구합니다. 행복해지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이를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가짐으로써, 또 어떤 사람들은 더 높은 자리에 오름으로써, 행복함을 느낍니다.
이는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보편 행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 행복'이 인간의 보편 행복 안에 있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 안에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영원한 행복을 믿고 희망하는 이들은 세상이 주는 행복에 근본을 두지 않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 행복에 근본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보이는 것 안에서도 행복을 찾지만, 보이지 않는 것 안에서도 행복을 찾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의 행복을 훨씬 뛰어 넘습니다.
모든 사람이 지금 여기에서 행복해지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참 행복'을 추구합니다.
오늘 독서(요엘4,12-21)에서 요엘 예언자는 "주님의 날이 가까웠다." 라고 외치면서,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보다 더' 참 행복이 있는 곳으로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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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FexEXd8dTG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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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 27)
모든 것은
말씀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말씀이
곧 가족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믿음이 열리는
믿음의
행복입니다.
하느님의 가족은
하느님의 말씀과
함께합니다.
행복의 집을
짓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살아낸
한 여인의 삶이
오히려
더 행복한
삶입니다.
행복의 중심이
되어주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을 지키며
우리는
말씀과
하나가 됩니다.
말씀의 드라마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삶이란 이와 같이
말씀을 듣고
말씀을 지키는
여정입니다.
말씀을 믿는
사람은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면서
오히려
우리가 아닌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지켜주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빼앗길 수 없는
말씀의 선물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바라보고
말씀이 우리를
기다리고
말씀이 우리를
지켜줍니다.
말씀이
우리 가족들을
부드럽게
어루만집니다.
말씀의 거주지
안에 말씀의
가족이 있고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참된 행복은
말씀을 사는
말씀의 삶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고 마리아는
말씀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말씀으로
더욱 깊어지는
사랑이며
말씀으로
더욱 구체화되는
행복입니다.
말씀을 따르는
말씀의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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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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