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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 동굴 (Elijah of Cave)
갈메산 끝자락에 엘리야 동굴이 있는데, 입구는 왼쪽으로 들어가야 한다.
엘리야 동굴은 하이파 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인 갈메산의 북서쪽 언덕 아래에 우거진 나무숲에 있어 잘 보이지 않는다. 이스라엘 성지 순례에서 가장 신성한 동굴로 여기는 곳 중 하나로 모든 신앙(유대인, 기독교인, 이슬람인, 드루즈)의 의 전통에 따르면, 동굴은 BC. 29세기 갈메산 지역에서 일하면서 예언자 엘리야가 살았다고 전해진다. 하이파로 가는 국도 4번을 따라가다가 오른쪽에 축대를 쌓은 곳으로 빠져서 걸어가야 한다. 엘리야 동굴을 방문하는 성지순례객이나 매일 기도하기 위해 이곳을 찾아온다. 또한 매년 수차례 열리는 대규모의 의식을 거행하는 행사도 치룬다. 엘리야 동굴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동쪽과 북쪽에 작은 구명이 있는데, 가장 긴 동굴의 크기는 길이 14m, 넓이 8m, 높이 3m 정도의 크기로 동굴 양쪽에는 약 120년 전에 건축된 2층짜리 건물이 있는데, 한 동은 관리동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다른 한 동은 호스텔로 사용되었다. 돌계단을 따라 입구를 지나면 동굴로 들어가는데, 중앙에 나무 칸막이로 오른쪽은 남자, 왼쪽은 여자의 기도실로 남녀 구간이 분리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 동굴 벽에 남청색 천으로 가려진 곳이 있는데, 성인 한두 명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1~1.5m 정도의 공간이 있어, 바위에 손을 대고 기도한다. 이 바위 공간은 남녀가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으나 서로 배려를 위하여 함께 들어가지는 않는다. 이유는 동굴 중앙에 나무로 나누었지만, 마지막 동굴 앞에서는 칸막이를 하지 않았다. 엘리야 동굴은 4번 국도인 알렌비 도로(230번)에서 계단을 도로를 계단으로 방문할 수 있으며, 스텔라 마리스 수도원에서 내려가려면 케이블카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걸어서 내려가려면 바위가 미끄러워 조심해야 한다. 성경 열왕기 상 18:42 이것은 선지자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의 학살에 대한 본문입니다. 아합 왕은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그리고 진정한 하느님의 도움을 얻은 엘리야와 경쟁했습니다. 경연 대회의 전통적 장소는 산의 다른 쪽(동쪽)에 있는 케렌 갈메 산으로 엘리야는 갈메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서 땅에 엎드려 무름 사이에 얼굴을 댔다. 또 열왕기 상 17:17 그런데 얼마 후 이 집의 주인인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병들었습니다. 병세가 점점 심해지더니 마침내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나머지 18절에서 24절까지 참조) 위 성경은 지돈 근처의 자렛밧에 있는 엘리야의 치유에 관한 기적을 설명하고 있는데, 아픈 사람들과 불모의 여인들은 모두 선지자에게 간절히 기도할 때 희망과 소원을 이루기를 바란다. 그런 일이 지나가고 여자의 아들이
집안의 여주인이 병들고 몸을 가누지 못하여 아내가 숨을 곳을 찾았으나, 숨을 만한 공간이 없었으며
오른쪽 작은 사진은 엘리야 동굴 끝부분에 있는 작은 동굴이다
엘리야가 여주인에게 말하되 네 아들을 내어주어라. 엘리야가 이르되 나는 네가 하나님의 사람이니 네가 내 죄를 기억하고 내 아들을 죽이려고 오느냐? 그리고는 그의 가슴에서 아들을 빼앗아 갔다.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주 나의 하나님이시여 어찌하여 내가 과부가 된 미망인을 사냥하여 죽이라 하오리까? 그 아들을 세 번이나 뻗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내가기도 하옵소서, 이 아이의 영혼이 다시 오시여 주께서 엘리야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그 아이의 영혼이 다시 그에게 들어와서 부흥을 일으켰다.
이렇듯 엘리야 동굴은 작은 마당에 촛불을 태운 흔적과
갈메 산자락에서 본 하이파 항구와 시내 풍광
하이파는 이스라엘에서 3번째로 큰 도시로 지중해와 접해 있는 도시다. 또한 갈메 산의 끝자락에 있는 후기 청동기 시대인 델 아브하왐으로 불리는 항구의 도시다. 하이파에서 북쪽으로 해안선을 따라가면 아크레, 동남쪽으로 갈메 산 수도원과 벧 쉐아림(바위를 파고 동굴에 많은 시신을 안치하였던 오늘날에 무덤), 동쪽으로는 나사렛의 도시가 있다. 하이파는 염료를 만드는 중심도시로 발전하였으며, 이란의 이슬람 종파에서 분리되어 나온 바하이교의 중심지로 갈메 산 중턱에 성지가 있는데, 이곳에서 하이파 시내를 내려다보는 황홀경 그 잣대이다. 갈메 산 끝자락에 엘리야(안자라에서 북서쪽으로 약 8km쯤 올라가면 그릿 시냇가에 도착하게 되는데, 바로 시냇가 위 언덕에“텔 마르 엘리사”라는 언덕이 있는데, 언덕에서 직선거리로 500m쯤에 집터가 있었던 언덕과 엘리사와 엘리야의 고향인 아벨므홀라가 보인다.
엘리야 언덕에서 본 엘리야 집터와 엘리사의 고향
그릿 시냇가는 북이스라엘의 아합왕 때 가뭄이 들어 엘리야가 잠시 머문 곳으로, 오늘날의 와디(10월에서 4월 사이 우기에만 생기는 하천) 알 야비스이다.)의 동굴이 있고, 12세기부터는 십자군의 지배 받았는데, 예언자인 엘리야를 모방하여 하이파 갈메 산자락에 많은 종교인이 몰려들기 시작하여 여기저기 동굴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은둔자들 사이에서 지도자인 랍비 중에는 예루살렘 총대주교인 세인트 알버트는 하이파에 있는 은둔자에게 서면으로 삶의 규칙을 만들어 선포하기도 하였다. 또한 갈메 산 중턱에 스텔라 마리스 수도원이 있는데, 1799년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을 마치고 돌아갈 때 심각하게 부상한 병사들을 위하여 임시로 병원으로 사용하였다. 지금도 수도원 입구에는 병사들을 치료했던 기념으로 피라미드식 사각뿔 위에 십자가를 만들어 꼽은 기념비가 남아 있다. 반대편에는 테레사 수녀의 기념비가 스텔라 마리스 수도원을 바라보고 있으며, 케이블카로 하이파 시내로 내려갈 수도 있다. 하지만 갈메 산 엘리야 기념교회는 동남쪽으로 27km 정도 떨어져 있다. 갈메 산을 현지인들은 선지자 엘리야를 위하여“선지자의 산”으로 불리기도 하며 갈메 산은“무흐라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이파는 예루살렘에서 기차여행도 가능하며, 갈메 산에서 북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올라가면 손에 잡힐 듯이 아크레가 아련하게 보인다.
이스라엘 성지순례기(1)
성도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 성지순례기는 지난 2017년 6월 13일부터 23일까지 약 10일 동안 북쪽의 텔 단에서부터 남쪽의 에일랏까지 무려 1200km 이상을 돌면서 순례를 창원에 계신 김 목사님과 둘이서 다녀왔습니다. 모든 루트를 제가 정하고 순례하였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이집트 나라와 국경을 이루고, 화약고라고들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가 이스라엘이라고 자부하고 싶습니다. 이스라엘의 텔아비브 공항으로 입국하는데, 텔아비브 국제공항에서 입국 심사할 때 여권에 스템프를 찍어 주는 것이 아니고, 명함 크기의 입국 심사증을 여권과 함께 줍니다. 이 입국증은 호텔이나 검문소에서 제시하라고 요구하기에 여권에 꼭 넣어 다녀야 합니다.
위 패스는 입국 때 받아 호텔 등지에서도 제시하며, 출국 때도 받고 출국한다.
이스라엘로 출국 전에 꼬 체크하고 가야할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일단 호텔 예약은 필수고, 이동 수단인 렌터카를 예약하고 가야한다. 단체 성지순례라면 가이드와 차량이 준비되어 문제는 없지만, 저는 둘이서 성지순례라 이 모든 것을 예약하고 출발하였다. 영어를 못해도 상관없다. 우리 속담에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먹는다.”라고 한다. 이것은 세계 만국 공통어인 바디랭귀지로 하면 다 통한다. 단지 의사 소통에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문제될 것은 없다. 우리는 네타냐에 있는 민박집을 첫날 숙소로 잡았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이스라엘 국립공원 입장권을 사는 것이다. 이 입장권은 이스라엘 국립공원 50곳을 15일동안 입장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입장권으로 가격은 1인당 150 세겔이다. 나는 겨우 15곳만 입장하였으나,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곳이 아주 많으므로 반드시 사야하는 티켓이다.
지금부터는 텔아비브 국제공항에서 출발하여 시계방향으로 북쪽으로 올라가는 여정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가장 합리적은 성지순례 방법으로, 하지만 꼭 시계방향으로 성지순례를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개인의 시간과 체력을 바탕으로 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첫 번째 순례지는 가이사랴를 시작하여 갈메산 수도원, 엘리야 동굴 교회, 악고, 하솔, 게데스(도피성), 가야샤라 빌빕보, 텔단, 니므로 성채, 헬몬산을 너무 멀어서 가지 않았습니다. 멀리서 구경만 하였습니다. 텔단으로 가는 도중에 텔 마아가가 있으나 아직 발굴이 되지 않아 찾기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성지순례 루트를 공개합니다. <참고 : 지도 출처 Google Maps>
이스라엘 성지순례 – 가이사랴(2)
가이사랴 국립공원 남문 입구와 입장권으로 15일 동안 사용할 수 있다.
가이사랴는 지중해에 있는 고대 유적지로 BC. 582~332년경 페르시아가 통치할 때 페니키아인들이 도시를 만들었을 때 지하수 수위가 가장 높은 곳을 찾아서 도시를 건설하였고 한다. 가이사랴는‘도르’주에 속해 있으며, 헬레니즘 시대인 BC. 3세기에 번창한 도시로 피타고라스의 제자였던 제논이 세계 최초로“스트라톤”이라는 항구 입구에 오늘날의 등대와 같은 망대가 있었다고 전해진 곳이다. 가이사랴는 국립공원으로 남북으로 길게 늘어서 있으며, 입구는 남쪽과 북쪽 두 군데에 있다. 성지순례자들은 남문으로 입장하여 원형 극장과 궁전 터 그리고 대전차 경기장을 관람하고 북쪽으로 항구 쪽으로 가지 않는다. 지역이 워낙 넓어서 천천히 관람하려면 아마도 4~5시간은 족히 걸리는 광대한 유적지다. 또한 해변을 따라 북쪽으로 직선거리로 1.5km 지점에 가이사랴에 물을 공급하였던 로마 수로교 일부가 남아 있다.
사도행전을 보면 필립은 예루살렘에서 가자(팔레스타인 자치지구)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길을 가다가 이곳에서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나게 되며, 이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필립은 이사야 예언서와 예수님에 관한 복음의 말씀을 설명해 준 다음 그에게 세례를 주고 아스도에서 가이사랴에 이르기까지 모든 마을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3차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향하는 길에 가이사랴에 있는 필립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머물렀으며 (행 21:8 이튿날 길을 떠난 우리는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사람 가운데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카이사리아의 제자 몇 사람과 함께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갔을 때 (행 21:16 가이사랴의 몇몇 제자들이 동행해 우리를 나손의 집으로 데려다주어 우리는 그 집에 머무르게 됐습니다. 나손은 키프로스 출신으로 일찍부터 제자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되었습니다. (행 21:27 7일 동안의 정결 기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아시아 지방에서 온 몇몇 유대 사람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사람을 선동해 그를 붙잡고) 베드로 사도는 가이사랴에 살고 있는 이방인이었던 이탈리아 군대의 장교에게 세례를 주고 교회 회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행 10:1~11, 18). 이제는 율법에 의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이름으로 구원되는 복음을 세상에 선포하게 된것이다 .
가이사랴는 AD. 9세기에 해상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가이사랴는 항구도시로 역할이 커지게 되었다. 그 후 1101년 5월 17일에 십자군들이 이곳을 점령하고 200년 동안 찬란한 번영을 누렸으나 1187년에 이슬람 제굮의 살라딘에게 빼앗겼으나, 12세기에 다시 십자군이 찾게 되었으며, 12세기 중엽에 맘룩크 왕조가 점령하였으나 대부분 도시가 파괴되어 19세기까지 폐허로 방치되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난민들을 이곳에 정착하게 ㅘ였으며, 1940년에 유대인 집단 농장인 기브츠 스도트얌이 형성되고, 가이사랴는 헤롯 대왕이 건설한 로마 총독들을 위한 군사 도시와 행정수도이기도 했지만 팔레스타인에 있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중심지이기도 한 도시다.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 총독으로 임명된 것을 알리는 비석으로 왼쪽은 진품이고 오른쪽은 복제품이다.
가이사랴의 유적지에서 1961년 발견된 비석이 있는데, 예수님에게 사형을 내린 당시 로마의 유대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에 대하여 관한 비문으로 원형 극장 부근에서“본디오 빌라도”의 이름이 새겨진 돌 판이 발견되었다.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하여 준 티베리우스 시저를 위해서 가이사랴에 있는 티베리우스 신전에 바쳐진 돌 판으로 그곳에는“Tiberieum, Pontius Pilatus, Prefect of Judea”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 비문은 석회암으로 만든 것으로 높이 82cm, 폭 65cm인데, 현재 발굴된 장소에 놓여 있는 비문은 복사본으로 헤롯의 궁전 앞에 전시되어 있다. 이 비문의 첫째 줄에는 TIBERIEUM, 둘째 줄에는 PONTIUS, 그리고 셋째 줄에는 (PRAEF) ECTUS IUDA (EAE) 이라고 쓰여 있는데, 이 글씨는 성경 외에 빌라도에 관하여 언급된 첫 번째 기록이고, 전시된 비문은 복제품으로 그 원본은 이스라엘 박물관 소장되어 있다.
이스라엘 성지순례-3 (가이사랴의 전차 경기장)
가이사랴의 대전차 경기장을 드론으로 본 모습으로 여러 해에 건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을 보면 (행 18:22, 21:8)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후,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음모를 꾸미자 사도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자로서 로마의 황제에게 상소하여 가이사랴에 있는 총독에게 호송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3장 참고) 그리고 가이사랴에서 2년간 옥에 갇혀 있으면서 펠릭스 총독과 그의 후임자 페스투스 총독, 그리고 아그리파스 왕 앞에서 변론하였고(행 24~26장 참고), 사도 바울이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였으므로 가이사랴 항구에서 로마 황제에게 보내졌는데 그는 죄인으로 로마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헤롯은 바닷가에 왕궁을 건축하였으며, 당시의 오락 거리라고는 원형극장에서 연극과 음악회도 있었지만, 환희와 시비가 엇갈린 것이 바로 말의 경기였다. 이는 오늘날에 내부의 정치사를 외부로 돌리려고 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프로야구도 마찬가지로 보면 될 것이다. 경기장은 영화 벤허에 나오는 것처럼, 말 두무리 또는 4마리가 마차달고 달리는 경기다. 물론 벤허는 원형경기장이자만, 가이사랴는 원형경기장이 아니다. 그리고 각종 행사와 시합도 열리곤 하였으며, 검투사들과 사자, 호랑이 등 맹수들과 싸울 때 관람객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일종에 방패막이라고 볼 수 있다. 관중석은 돌을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땅을 파고 계단식으로 만들어졌다.
크기는 넓이가 50m, 길이는 약 250m 정도이며, 직선 부분(북쪽에서 출발)하여 “U”자 모양의 남쪽을 돌아 출발선의 반대편으로 골인하는 경기다. 현재 남아 있는 관중석은 “U” 부분에 12단으로 만들어진 것과 지중해의 반대편인 동편에 일부만 볼 수 있는 정도며, 아쉽게도 서쪽인 지중해 쪽은 침식작용으로 바닷속으로 가라앉아 있다. 경기장의 관중석은 대전차 경기장 바닥에서 높이 1.7m를 올려 만들어졌고, 그 부분에는 동물 또는 식물 등을 그려 벽화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는 달리던 마차가 어떤 물리적 이유로 전복되거나 이물질이 관중석으로 날아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고, 경기장에 최대로 입장할 수 있는 관중은 약 10,000여 명으로 중앙에 귀빈석이 따로 만들어져 있었다. 경기중에 희생된 동물이나 검투사들의 회생을 기념하는 조각상들이 동쪽에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요세푸스는 유대 전쟁사 2권 415장에 이 건물을“스타디움”이라고 불렀는데, 비잔틴 시대나 오스만 시대에는 히포-드럼이라 불렀다. 유대고대사 15권 341장에서 헤롯 대왕이 전차경주를 위해 이 경기장을 지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기독교 수난 시대에는 원형극장이나 원형경기장에서 많은 기독교인이 박해받아 처형되거나 먹이를 주지 않고 맹수들을 1주일 동안 굶겨서 먹이로 주곤 하였다. 원형경기장 가운데 서서 잠시 눈을 감으면 지중해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아니
기도하는 기독교인들의 애절함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간다.
대전차 경기장 결승지점에 파이프로 만든 조형물이 대전차 경기장을 알려주고 있다.
이스라엘 성지순례 – 가이사랴 (4)
가이사랴의 공중목욕탕의 유적지로 바닥에 모자이크가 있다
가이사랴도 로마 제국의 영토였으므로 기본적인 사회시설인 목욕탕이 있었다. 원형경기장의 북쪽에 있는 대중목욕탕에는 사람들이 목욕하기 전에 운동할 수 있는 시설, 즉 오늘날에 스포츠센터 또는 체육관 같은 시설이 있었으며, 로마인들 대부분은 귀족들로 고기와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어 살을 찐 상태를 유지하고 운동은 아주 싫어했다. 영화에서 보면 음식을 먹을 때도 옆으로 누워서 먹었을 정도로 마치 사육장에 돼지들을 사육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로마 시민이나 귀족들은 목욕탕에서 용도에 따라 물의 온도가 나는 찬물, 중탕, 오늘날의 증기탕으로 구분하여 담소도 나누고 땀을 빼는 것으로 몸 관리하였다. 목욕을 끝낸 사람은 면도를 하거나 머리도 깎고 근육을 풀어주는 마사지 시설도 마련되어 있다. 또 서로 토론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아고라가 있었지만, 대중목욕탕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로 사용되어 가족 친지들의 소식들이나 떠도는 소문들을 접할 수 있는 곳이었으며, 재산을 팔고 사는 상업적인 거래도 할 수 장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가이사랴에서 발굴된 목욕탕은 비잔틴 시대에 왕이나 집정관들이 사용하였던 목욕탕과 바닷가의 왕궁터에서 발굴된 목욕탕으로서 십자군 시대에 성벽을 증축하기 위하여 목욕탕을 허물어 건축 자재를 사용하였다.
원형 극장
이스라엘에서 발견된 극장 중 가장 오래된 원형 극장으로 헤롯 대왕 때 만들어진 후 비잔틴 시대까지 수백 년 동안 사용되고 있다. 지금도 음악회나 오페라 등을 공연하기도 한다. 헤롯은 이란 이름은 신약 성서에 등장하는데, 진짜 어느 왕이 헤롯인지 혼동할 수 있다. 유대 땅 남쪽에 위치한 이두메아(이두매, 또는 에둠) 출신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으므로 항상 암살의 위험을 안고 살았던 인물이다. 그래서 헤롯 대왕은 당시에 여러 가지 조건들을 다 조사한 뒤 신중하게 장소를 선정하여 이곳에 극장을 건축한 것이다. 로마 시대의 대표적인 건물은 노천 원형 극장으로 통치자들은 이 부채꼴의 원형 극장에 사람들을 많이 모아놓고 연설하기도 하였고 공연이나 연주회 등을 가졌다. 이곳 가이샤라에 있는 부채꼴 모양의 야외 원형 극장은 크기가 반지름이 43.90m, 높이 15m, 상단에 10줄, 하단에 13줄로 약 5,000명 정도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으며, 마이크가 없어도 무대에서 성우나 음악의 소리가 음향시설도 완벽하여 무대에서 음향 시스템이 없이도 누군가 말을 하면 객석의 뒷부분까지 그 음성이 전달되도록 하는 원리를 잘 파악하여 세운 건축물이다. 그리고 객석 어느 곳에 앉아 있던지
무대 중앙의 주인공을 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공연이나 연극 음악회를 관람하는 관객들을 위하여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이하면서 관람할 수 있다. 그러나 비잔틴 시대에는 무대 아래를 개조하여 요새로도 사용하였으며, AD. 640년 이슬람군이 침공한 이후, 가이샤라는 정치적, 경제적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주민들 대부분은 떠나고, 점점 작은 마을로 변해가고 방치된 것이다.
있던지 무대 중앙의 주인공을 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어 지금도 야간에는 공연하기도 하는데, 별도의 입장료를 내면 공연을 감상할 수 있다. 비잔틴 시대 말기에는 원형 극장의 중앙 무대 아래를 개조하여 요새로 사용하였으며, 이슬람이 침략하면서부터 방치된 것이다.
이스라엘 성지순례 – 4
가이사랴의 헤롯 왕궁터의 바닥에서 발굴된 모자이크 바닥
가이사랴의 헤롯 왕궁터의 바닥에서 발굴된 모자이크 바닥
프로몬토리 해변 (왕궁 터)
이스라엘 성지순례 – 6 (가이사랴 – 싯딤 나무)
사막에서 자라는 싯딤 나무가 가이사랴 유적지에 한 그루가 있다
성경에는 많은 식물과 나무, 동물, 사람 등이 나옵니다. 싯딤 나무는 광야에서 자라는 나무이지만, 가아시랴의 중세 십자군 성 앞에 한 그루의 싯딤 나무를 볼 수 있다. 히브리어로“시팀”으로 현지에서는“쉬타”라고도 부르는데. 사막에서 자라는“아카시아 나무”로 불린다. 이 나무는 성서에서는 조각목으로 소개되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아라바 골짜기와 사막지대인 네게브 전 지역에서 자라며. 시나이반도와 메마른 사막에서 1년에 비가 50mm 이하인 지역에서 잘 자라며. 길 떠나는 나그네와 사막에서 풀을 뜯는 동물들의 그늘막이 되어주는 나무다. 이스라엘에는 성막이 세 군데에 있었으며, 실로에 성막을 치고 법궤를 처음으로 안치하였던 곳이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실로 성소가 중요한 이유는 그곳에 법궤를 안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법궤는 블레셋과의 전투에 그것을 가지고 나갔다가 블레셋에게 빼앗기게 된다. 사무엘상 4:1 그 무렵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러 나갔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에벤에셀에 진을 쳤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을 쳤습니다. 사무엘이 하는 말은 모든 이스라엘이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다만 네게브 광야의 남쪽인 에일랏으로 가는 팀나 국립공원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성막을 그대로 실물 크기로 재현해 놓아 성경의 성막을 볼 수 있을 정도다. 다음에 성막을 소개할 기회가 있을 때 자세히 설명하기로 하겠다. 이 나무의 용도는 다양하며 법궤, 향단, 번제단 등 각종 성막의 기구들을 만드는 재료로, 또 법궤를 메는 채도(긴 나무 장대)로 싯딤 나무로 만들었다. 하지만, 채도는 금이나 놋쇠로 장대를 만들었다. 또한 성막의 기구들뿐만 아니라 기둥이나 성소의 널판을 만들 때도 사용된 아주 중요한 나무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주 신성한 나무로 여겨 일반 백성들은 이 나무로 주택이나 집기 등으로 사용하지않고 절대로 기구들을 만들지도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사막에서 나무를 구하기 매우 어렵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히브리서 9:4 이곳에는 금으로 만든 분향 제단과 전부를 금으로 입힌 언약궤가 놓여 있습니다. 이 언약궤 안에는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이 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 판들이 있습니다. 지정소는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대 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 그곳에는 법궤가 있는데, 법궤 안에는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2개의 10개 계명 돌 판이 있었고, 이 모든 것은 싯딤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금으로 쌌다. 이 속죄소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만나고 대 제사장들에게 말씀하던 곳이다. 이 성경에서 보면 법궤와 금으로 쌌다고 되어 있을 정도로 아주 귀한 나무로 여겨진다.
가이사랴 유적지에서 왕궁은 도시의 한복판에 있는 것이 통상적은 도시의 기본인데 가아사랴에서는 이런 기본적인 상식을 뛰어넘어, 도시의 서쪽으로 지중해의 한복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전차 경기장과 원형 극장 사이의 앞쪽으로 작은 왕궁으로 아주 특별한 풀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대부분 바닷물에 잠기어 있어 아마도 헤롯의 궁전으로 알려져 있다는 상식이다. 왜냐하면 헤롯은 에둠의 사람으로 이스라엘 와이 되었기에 항상 암살의 위험으로 벗어나기 위하여 헤로디움, 마사다, 여리고 등등 많은 곳에 요새를 만들어 암살자로부터 목숨을 부지할 수 있도록 헤롯은 자기 신분을 철저히 숨기는 인물로 알려진 왕이다. 하지만, 이 왕궁터는 로마시대에 건축된 것으로 비잔틴 시대까지 사용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고학자들은 이 왕궁터가 로마 총독의 관저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하지만 비잔틴 시대 때에는 풀장은 지중해에서 잡아온 생선들을 주민들에게 팔기 위해 어시장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행 9:30). 이 사건은 할례 없이 이방인을 교회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와 결별하는 중대한 사건이 되었다. 사울(사도 바울)이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님의 이름으로 대담하게 설교하자 그리스계 유대인들은 사울을 없애버리려고 하였고, 형제들은 이것을 알아차리고 사울을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 그의 고향인 투르퀴예(터키)의 타르수스(고대 지명은 다소)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제2차, 제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가이사랴를 지나갔습니다.
♣ 요새화된 중세 도시
가이사랴의 도시의 대전차 경기장 북쪽으로 고성이 있는데, 일반적인 성이 아니라 요새화된 성으로 AD. 9세기경 항구를 보호하기 아랍인들이 만들었으며, 십자군이 점령하였을 때도 사용된 성이다. 후에 십자군 때에 루이 9세가 이 성을 재사용하여 도시를 둘러싼 성벽을 더 높게 쌓아 현재 남아 있는 성으로 아주 인상적인 요새로 만들었다. 성벽 주변으로 깊이 9m를 파고 전시에는 물을 담아 성을 방어하는 것이지만, 남서쪽에는 항구를
십자군이 만든 요새는 방어할 때 좋도록 해자를 만들어 물을 흘려보냈다.
(항구)
둘러싼 항구 요새를 만들었으며, 바닷물로 채운 해자를 두어 도시와 분리되게 하였다. 현재 북쪽의 문은 원형에 가깝게 복원되어 있으며, 가이샤라 유적지의 입구를 겸하고 있다. 평상시에는 물을 담지 않은 해자를 볼 수 있다. 이 성의 전체 길이는 약 900m이고 높이는 약 13m이며, 성문은 동쪽과 북쪽, 그리고 남쪽에 있고, 많은 지하로 만든 비밀 통로가 만들어져 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세밧스토스 항구는 이제는 배를 정박할 수 없는 변해 버렸다.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을 시작하였던 실루기아 항구의 돌로 배를 묶어두었던 구멍이 뚫린 바위
가이사랴의 북서쪽에 위치한 항구로“세바스토스”가 헤롯 대왕에 의해 이곳에 건설되었다. 길이 400m나 되는 방파제와 함께 바깥 부두와 안쪽 부두로 만들어졌으며, 기둥이 둘러서 있었고, 배를 묶어두는 구멍이 뚫린 돌들이 있는 정박지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돌들은 터키의 사만다으의 실루기아 항구에 가면 구멍 뚫린 돌을 볼 수 있다. 방파제는 로마 시대 때 바다에 가라앉아 파괴되었지만, 비잔틴 시대의 황제 아나스타시우스(AD. 491~518년 재임) 때 보수하여 재사용하였다. 지금도 지중해 쪽으로 일부 방파제가 남아 있다. 이슬람이 침공한 이후에는 항구가 다시 방치되어, 흙으로 덮어져 있다가, AD. 9세기 이르러 도시를 요새화하면서 항구도 재사용되었다. 십자군 시대 때에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가져온 기둥들을 이용해서 새로운 방파제를 만들었다. 내항이 있던 곳은 점차 토사가 밀려와 항구의 기능을 잃게 되었다. 중세 때에는 주거지로도 사용하였으며, 현재의 선착장은 1948년 이스라엘 독립전쟁 이후에 어부들을 위해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