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참으로 황망하고 비통한 일을 당한 지체를 위로해 주옵소서.
자녀를 앞서 보내는 것은 어쩌면 생의 가장 큰 고통이겠습니다.
깊은 슬픔 중에도 주님만 의지하게 하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먹먹하고 우울한 마음입니다.
십자가 보혈로 덮어주옵소서.
진리의 성령님, 말씀을 조명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 왕 열여덟째 해에 아비얌이 유다 왕이 되고
2. 예루살렘에서 삼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마아가요 아비살롬의 딸이더라
3. 아비얌이 그의 아버지가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고 그의 마음이 그의 조상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나
4.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등불을 주시되 그의 아들을 세워 뒤를 잇게 하사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하셨으니
5.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
6.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사는 날 동안 전쟁이 있었더니
7. 아비얌과 여로보암 사이에도 전쟁이 있으니라 아비얌의 남은 사적과 그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8. 아비얌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니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아사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본문 주해)
1~2절 :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 18년째 해에 르호보암의 아들 아비얌(아비야)이 유다의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3년 동안 다스린다.
아비얌의 어머니는 아비살롬(압살롬)의 딸 마아가이다.
압살롬의 딸은 다말 하나인데 마아가를 딸이라 한 것은 다말이 나중에 기브아의 우리엘과 결혼하여 딸 마아가를 낳은 것이다. 그러므로 아비얌의 모친 마아가는 압살롬의 손녀인 것이다.
그런데 ‘아비살롬의 딸’이라고 한 것은 히브리어에서 아들과 손자 또는 딸과 손녀를 같은 단어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3절 : 아비얌이 그의 아버지 르호보암이 이미 행한 모든 죄를 그대로 행하였다.
르호보암의 죄란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상을 세웠고, 남색 하는 자를 있게 하는 등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족속의 모든 가증한 일을 본받아 행한 것을 가리킨다.
4~5절 : 아비얌의 이러한 죄를 다윗과 비교한다.
다윗은 일평생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는데, 아비얌은 다윗의 온전함같이 행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우상숭배를 하였다면 여호와를 배반한 것이다. 그러면 나라가 망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등불을 주신다는 약속을 하셨고, 온전하지 못한 아비얌이지만 그 아들 아사를 세워 나라를 보전하여 주신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일하신 것은 결국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언약하셨기에 그 언약을 지키신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이 구원을 받고 다윗 언약 안에서 구원을 받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결국 다윗의 왕위도 끊어진다. 나라가 망하고 다윗의 왕위가 바벨론에 의하여 끊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신실하시다. 그 신실하신 언약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이다.
6~8절 :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전쟁이 끊이지 않은 것처럼, 아비얌과 여로보암 사이에도 전쟁이 있었다. 역대하13:1~20에는 둘 사이의 전쟁에 대해 자세히 언급한다.
아비얌은 40만 명의 군사로 출전하였고, 여로보암은 80만 명의 군사로 출전하였지만, 아비얌이 승리한다.
아비얌은 아내 열넷을 거느려 아들 스물둘과 딸 열여섯을 낳았고(대하13:21), 3년의 통치 기간 중 동족과 전쟁한 것밖에 없다.
그가 죽고 아들 아사가 왕이 된다.
(나의 묵상)
르호보암은 아버지 솔로몬을 따라 우상을 숭배하고, 아비얌 역시 자기 아버지 르호보암의 죄를 그대로 답습한다.
하나님께 죄지은 이 나라가 망하려면 솔로몬 때 이미 망했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솔로몬도 참아주시고, 르호보암도 참아주시고, 아비얌도 참아주신다. (장차도 참아주셔서 나에게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아비얌의 아들 아사를 세워 뒤를 잇게 하시어, 잠시지만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하신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를 ‘다윗을 위하여’(4절)라고 하신다.
‘다윗을 위하여’라 함은 ‘다윗과 맺은 언약을 위하여’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 언약은 다윗의 어떠함 때문에 하신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하신 약속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이루시는 것이다.
다윗 언약은 창세전 언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세전 아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을 우리에게도 주신다는 창세전 약속을 하나님께서 지키신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주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부활하게 하셨다. 그것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을 가진 자에게 영생을 주신 것이다.
복음을 알지 못하였을 때, 이 세상의 중심은 당연히 나 자신이었다.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신앙에서도 나의 선택과 행함을 중시했다.
하나님?....하나님조차도 내가 ‘믿어주는’ 분(믿고 안 믿고는 나의 선택에 달렸다는 생각)이라 여겼으니 얼마나 자기중심적인가 말이다.
죄 중에 태어난 자는 이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죄요, 우상숭배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그것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교만하게 보일 수 있으니, 적당히 겸손을 떠는 것도 필요하다.
그런데 복음을 알게 되니 세상 모든 만물과 그 현상의 중심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신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또 그분이 창조하신 것이다. 내가 존재하니 나를 도우시는 주님이 아니라, 주님이 계시니 그의 뜻을 위해 존재하는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오늘 본문에서 ‘다윗을 위하여’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로 이해가 된다.
벌써 망했을 내 인생이지만 주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아들의 생명을 가진 자로서 아들의 나라를 누리며 사는 자가 된 것이다. 이것은 나를 위하여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하여 된 것이다.
예수님을 위하여 나를 구원하여 주시고 영생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 삶은 이제 나를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사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5:15)
(묵상 기도)
주님,
자기 중심으로 사는 것이 우상숭배라는 것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것이 기뻐지니,
이것이 기적입니다.
지금까지 참아주시고, 기다려 주시며, 두루 거름을 주신 것이
나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위해 살게 하려 하심이니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주님 부르시는 그날까지,
주님을 위하여 살 수 있도록
주님의 보혈로 덮어주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