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운드여 안녕!’ 해마다 시즌이 끝나고나면 그라운드를 떠나는 선수들이 생긴다. 유니폼을 벗고 또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선수들이다. 유니폼에 인생의 체취가 그대로 묻어있는 선수들이 이제는 ‘그들’이 된다. 누구에겐들 사연이 없을까. 스타는 스타대로, 무명선수는 무명선수대로 저마다 그라운드에 짙은 자국을 남기고 떠난다. 조금만 지나면 팬들에게는 먼 과거사처럼 여겨질테지만 은퇴선수들의 가슴 속에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진한 사연들이다. 스포츠서울은 올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하는 선수들의 그라운드 인생역정을 되돌아보는 기획시리즈를 시작한다. 유명선수 뿐 아니라 사연을 지닌 무명선수도 포함해 ‘야구와 인생’이라는 테마로 풀어나갈 예정이다.
>지난 10월 5일 LG와 롯데의 경기가 열린 잠실구장. 이미 순위싸움은 물건너갔지만 그라운드를 떠나는 스타 한명을 보기 위해 구름관중이 몰려들었다. 94년 혜성같이 데뷔해 LG에 신바람을 일으키며 ‘꾀돌이’라는 별명으로 프로무대를 누볐던 유지현(33)의 은퇴경기였다. 톱타자겸 유격수로 출장한 그는 변치않는 수비솜씨를 자랑한뒤 10년간 정든 그라운드와 아쉬운 이별을 고했다. 이제는 LG의 코치로 제2의 야구인생을 시작하는 유지현을 만나 못다한 야구 이야기를 들었다.
◇ 밀려난게 아니라 나의 선택이었다
유지현은 지난 겨울 그 어느해보다 혹독한 훈련을 소화하며 권토중래를 노렸다. FA를 앞둔 지난해 데뷔후 최악의 성적을 올리며 찬밥신세를 당했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러나 시즌에 들어서니 막상 그의 설자리가 없었다. 유격수엔 권용관, 2루엔 박경수가 자리를 잡았다. 실력으론 아직 뒤지지 않는다는 자신이 있었지만 팀이 세대교체를 원하고 있었다. 특히 자존심 강한 그는 욕심만 채우며 추하게 선수생활을 연명한 선배들의 전철을 밟기 싫었다. 그는 “은퇴가 몇년 앞당겨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판단에 후회는 없다”며 운명을 당당히 받아들였다.
◇ 무작정 야구가 좋았어요
무작정 야구가 좋았던 코흘리개 소년은 개봉초등학교 4학년때 리틀야구팀에 가입해 야구인생에 첫발을 내디딘다. 이후 초등학교 6학년때 리틀야구국가대표로 선발된 것을 시작으로 청소년,국가대표 태극마크를 한시도 떼놓지 않으며 화려한 야구인생을 펼쳐나간다. 89년 충암고 3학년때는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성인국가대표에 뽑힐 정도로 야구에 천재성을 발휘했다. 94년 프로에 입문한 뒤엔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신인왕에 등극했다.
◇ 싱그런 웃음뒤에 숨은 피눈물
그는 운동을 하면서 항상 작은 체격이 문제가 됐다. 초등학교때는 키가 하도 작아 방망이를 어깨에 메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천재적인 야구센스를 지녔다고 남들은 평가하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다. 신체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피눈물나는 노력이 있었다. 남들보다 배는 넘게 뛰고 또 뛰었고 어깨를 단련하기 위해 애썼다.
◇ 내몸값이 이것밖에 안돼?
94년 LG에 입단할 때 유지현은 7000만원의 계약금을 받았다. 고졸신인 김재현이나 주형광 등에 비교하면 턱없이 처지는 액수였다. 대학 3학년말에 입은 어깨부상 때문이었지만 국가대표를 한번도 뗀 적이 없는 그의 가슴에 상처로 남았다. 절치부심하며 실력으로 유지현의 존재를 알리고 싶었다. 그리곤 투수보다 더 어깨와 팔 근력강화를 위해 피땀을 흘렸다. 시즌을 끝마치고 나니 그에 대한 평가는 변해있었고 목표를 이룬 성취감에 가슴이 뿌듯해졌다. 신인왕 타이틀은 덤이었다.
◇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말라
그가 천재적인 야구센스를 갖게 된 데는 중고등학교 시절 은사 정병규 감독(현 홍익대 감독)의 공이 컸다. 정감독은 그에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실패를 통해 몸을 체득할 수 있다”고 누누히 강조하며 경기중 실수를 해도 나무라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경험이 쌓여가며 결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 인생의 사과나무 부모님
누구에게나 부모님은 소중하지만 그에겐 남다르다. 초등학교시절 야구를 하겠다고 떼를 쓰며 개봉동에서 동대문까지 통학하다 피곤함에 잠이 들어 성북이나 인천까지 간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또래보다 유독 작은 막내아들이 안쓰러웠던 아버지 유근성씨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차를 한대 사 그를 통학시키며 온몸을 바쳐 아들을 뒷바라지했다. 어머니 김청자씨도 자나깨나 기도를 올리며 아들의 성공을 바랐다.
부모님의 무조건적인 헌신이 있었기에 지금의 그가 있었다.
◇ 이제 다시 시작하는거야
최근 몇년간 유지현은 마음고생이 심했다. 연봉조정신청,생애 최악의 성적,FA신청후 찬밥신세,그리고 은퇴 등 말로 표현못할 고충이 많았다. 그러나 그의 곁에 항상 말없이 따뜻한 미소로 감싸주는 아내 이미선씨와 사랑하는 아들 규민이가 있었다. 이제는 어엿한 남편이요,아버지로서 좀더 세상을 멋지게 살아야할 의무가 있었다. 이제 지도자로서 첫발을 내딛는 그는 “우승을 한번 더 못하고 떠나는게 안타깝다. 지도자로서 팬과 후배들에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붓고 싶다”고 힘찬 새 출발을 다짐하고 있다.
이환범 기자
▲ 생년월일 : 1971년 5월25일
▲ 가족관계 : 부인 이미선씨(30)와 아들 규민군(1)
▲ 출신학교 : 충암고 - 한양대
▲ 신체조건 : 175cm,72kg
▲ 프로 통산 성적 : 11시즌 타율 0.280, 379타점,64홈런,719득점, 1134안타, 296도루
▲ 프로 주요 경력 : 94년 신인왕, 98년 플레이오프 MVP, 98~99년 골든글러브, 94~2001·2003년 올스타, 97년 올스타 MVP, 94~2003년 10년연속 두자릿수 도루.
▲ 아마추어 경력 : 87년 대통령배 감투상·도루상, 88년 봉황기 MVP, 89년 청룡기 도루상, 91년 추계리그 도루상, 체육훈장기린장(제31회 세계선수권 3위 공로)수훈.
▲ 대표경력 : 87년 한·일고교친선대회, 88년 한·미·일 고교선수권, 88년 세계청소년 선수권, 89년 제2회 IBA 회장배, 90년 세계청소년 선수권대회, 91·93·99년 아시아선수권대회, 99년 제3회 한일슈퍼게임 등.
첫댓글 유지현, 서용빈, 김재현, 김용수, 한대화, 노찬엽, 이상훈, 정삼흠, 김동수, 인현배, 김태원, 김기범, 차동철, 박준태, 김영직, 김선진, 김영직, 송구홍 등등 눈물난다. 화려한 시절이여
유지현선수 그동안 수고 많으셨구요..이제 지도자로써 제2인생을 시작하니 선수시절보다 더나은 모습기대할께요..최고의 지도자가 되세요...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