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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원갤러리 협찬 내용을 보다 가야비파 구룡요가 있어
검색하다 좋은 내용이라 실어봅니다.
[민족정기살리기]사천다완을 현대에 재현한 김남진님을 찾아서.. | ||
도예가 김남진님의 사천다완(泗川茶碗)전시회가 서울 안국동에 있는 백상기념관에서 2003.12.3부터 12.9일까지 열렸습니다. 김남진님은 사천에서 나고 자라셨으며, 지역에서 농민운동을 해오셨고, 향토사학자이시며, 사천문화 신문사를 발행하시며, 우리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데 앞장서 오신 분입니다. 그 분의 도자기를 사랑하는 장인 정신과 우리의 역사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석문호흡의 민족정기 살리기 운동의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서 그 분을 만나기 위해 백상기념관으로 향했습니다. ‘가마터에서 강한 전율이 느껴졌어요.’ 내가 농민 운동을 하다가 사천문화신문사를 창간하게 되었어요. 우리 마을조합 산으로 되어있는 곳에서 가마터를 발견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면서 온 몸에 전율이 왔어요. 이 가마터가 400년 전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조선도공들의 실체를 밝힐 수 있는 뿌리가 아닐까 하는, 그냥 역사학적으로 전해 내려오던 문헌으로만 일부 전해져 오던 안타까운 일말의 뿌리가 가마터에서 강한 전율이 느껴졌어요. 그 가마터 흔적과 파편은 곧 조상의 유골이라는 느낌이 와 닿았죠. 그렇게 되기까지는 제가 역사적으로 치중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계기가 되었죠. 발에 차이고 눈에 뜨이는 돌부리 하나 흙 한줌을 예사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하지 않았겠느냐 싶습니다. 어릴 때부터 사천고향에 살면서 오로지 내 고향과 문화를 그런 흔적을 소중히 생각해 왔어요. 그래서 농민운동가가 되었고, 지역의 민원과 어려운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이 가마터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내가 해야 할 일이 정해졌구나. 하면서 연구를 거듭하게 되었죠. 관내에 있는 사기장들을 찾아다니면서 밤낮으로 도자기 제작과정에 대한 전문지식을 스승도 없이 저 혼자 취득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도자기란게 흙이나 유약, 불의 조화 속에 나오게 되는데 그 근본이치를 모르고서는 내 조상을 찾아 줄 수가 없다는 확신이 들더라고요. 주위에 있는 많은 분들을 찾아다니면서 물레도 돌리면서 배우는 길을 걸었죠.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 역사에 대해서 또 그 그릇을 빚는 사람들은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더라고요. 그 400년 후에 발견된 파편하나 하나가 학술적으로 문헌상으로 전혀 기록이 되어있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걸 들고 관련부서를 찾아다녔는데 전혀 모르다고 그러고 그러면 내가 나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수밖에 없었어요. 많은 세월 시간을 할애해 가면서 저희 문화신문을 통해서 계속 보도를 했어요. 가마터가 발굴된 이구산은 중국에 공자 맹자가 태어난 산을 닮았어요. 이곳은 예로부터 공자 맹자의 기풍이 배어있는 사람들이 많이 태어났던 곳이지요. 제가 발견한 것은 민간에서 만든 가마(民窯) 중 하나인데, 이 산 부근에만도 여러 군데 그 흔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역사는 관요(官窯)중심의 역사만 기록했지 민요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된 게 없어요. 역사적으로 민요가 한 지역에서 몇 백년 이상 천년 가까이 독자적 생산체제를 가지고 독자적 기술을 가진 가마터가 아예 없었어요. 왜 그랬냐 하면 옛날에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은 중국 한국 베트남 3국에서만 가지고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도자기 만드는 기술은 현대적으로 보면 초 하이테크 기술, 핵 기술에 버금가는 기술이었어요. 당연히 관에서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제도 속에서 생산 할 수밖에 없었고, 그 도자기는 고급화시킬 수밖에 없었죠. 그러다보니 우리나라 도자기의 역사는 모두 관요의 역사입니다. 청자를 만들었던 강진, 이천 조선 시대 백자를 만들었던 광주 모두 관에서 제도적으로 모든 것을 생산하던 가마인데, 어떻게 민요에 대한 기록이 있겠어요? 그러나 저는 이곳 이구산 가마터와, 그 파편들을 봤을 때 ‘뭔가가 있다.’ 라고 판단했죠. 그러나 이곳 가마터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었어요. 세종실록을 보면 사천 부근의 곤양이나 구암에 관요가 하나 있었다는 기록만이 있지 내가 발견한 가마터에 대한 것은 학술적으로나 역사적으로는 전혀 기록이 없었어요. 그러면 내가 왜 이것을 밝히려 했냐면 사천에는 가장 비참한 역사와 가장 아름다운 역사가 존재했던 때가 있었어요. 가장 비참했던 역사는 1592년부터 1598년,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범했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 두 전쟁이 우리 사천의 모든 문화와 양민들을 철저히 말살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사천의 역사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1598년 10월 말에 있었던 선진성 싸움은 마지막 일본군이 자기나라로 마지막 철수하는 과정에서 최후의 육전이 되었습니다. 명나라 군사와 조선 군사가 무려 3만이 넘는 군사가 몰살 되었어요. 당시 성에는 5천명 밖에 안돼는 왜군이 주둔했는데 말입니다. 그러면 왜 그 전투가 중요했느냐?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1차적으로 부산포를 점령하면서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을 일으킵니다. 이후 이순신 장군이 바다를 장악하는데, 이곳 선진성은 이순신 장군이 최초로 거북선을 띠워 해전에 승리를 거두었던 곳입니다.(註:朝鮮王朝實錄/宣祖實錄/券27, 宣祖 25年 5月) 그러다가 1597년 정유재란을 일으켰을 때 주력부대가 부산으로 온 게 아니고 선진성에 본진이 옵니다. 순천을 거쳐 치고 들어오는 길목이 우리 선진성입니다. 그 본류인 일본의 정예부대가 선진성을 점령해서 정유재란 2년을 온통 일본의 약탈 기지로 만듭니다. 그렇다면 왜 정유재란에는 부산이 아니라 선진성이 주 무대가 되었느냐? 여기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도자기 전쟁이라고 하는 임진왜란은 1597년, 98년 2년간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합니다. 초기에는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가고, 치열한 국토 점령을 위한 전쟁이었어요. 그러나 말기에 정유재란은 도자기 전쟁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의 도공을 모두 다 잡아오라고 했어요. 그래서 경상남도의 중심부인 사천에 주력부대가 진을 친 거죠. 그런 역사적 사실을 볼 때 이 지역에는 뭔가가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도자기 전쟁이라는 정유재란이 우리 사천 전체가 공격로와 진격로였거든요. 그런데 제가 발견한 파편들을 볼 때 임진왜란 이전의 것들이 발견되었고요. 뿐만 아니라 가마터는 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대 전체가 가마터였습니다. 그렇다면 이곳에 왜 가마터가 있었느냐? 국가에는 기록이 없는데... 그리고 이 지역은 왜 일본이 선진성을 유린하면서 도공들을 납치해야 했느냐, 그렇다면 이 지역에는 관요가 아니라 민요가 형성될 수밖에 없는 특이한 역사가 있었을 것이다. 기록되지 못한 역사가 있을 것이다, 생각했습니다. 그 역사성을 추적해 가다 보니까,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지역은 천 년 전의 역사까지 올라갑니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8번째 아들 왕욱(주: 安宗 王郁 욱은 경순왕의 딸로 태조의 제5비가 된 신성왕후 김씨의 소생이다.) 이라는 분이 이곳 사천에 귀양을 옵니다.(註:『高麗史』,世家 券 第三 成宗 11年 7月 壬辰, 992년)왕욱이 귀양을 오게 된 이유는 5대 임금인 경종이 일찍 죽고 그 비인 헌정왕후가 사저로 나오자 그 숙부가 되는 욱이 이를 불쌍히 여기고 왕래를 하다가 그 사이에 아들을 낳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왕욱이 사천으로 귀양 오던 그해 헌정왕후 역시 산고로 죽었으므로 성종은 그 아들 순(詢)(註: 뒤에 고려의 8대 임금 현종이 됨)을 궁에서 기르다가 두 살 되는 해 아버지 욱에게로 보냅니다. 그러나 왕욱 마저 5년 만에 귀양지에서 죽게 되고 아들 순은 천애 고아와 같은 신세가 되죠. 왕욱은 문장에 능하고 풍수에 밝은 사람이었는데, 죽기 전에 묘자리를 정하고 “시신을 엎어서 장사를 지내라 그러면 내 아들이 더욱 빨리 왕이 될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기죠. 그 후 순은 후계자가 없던 목종에 의해 大良院君으로 책봉됩니다. 그러나 당시 실권을 장악하고 정권을 휘두르던 목종의 어머니 千秋太后왕의 후계자로 삼고자 핍박하여 12살에 강제로 중이 됩니다.(註:『高麗史』,世家 券 第三 穆宗 6年) 그 후 순은 여러 차례의 자객을 맞는 등 우여곡절 끝에 18세 되던 해, 姜兆의 정변으로 고려의 8대 임금 顯宗에 추대됩니다.(註:『高麗史』,世家 券 第三 穆宗 12年 2月, 1009년) 현종은 팔만대장경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고려 대장경-즉, 初雕大藏經을 완성했고(현종 2년(1011년) 부처님의 힘으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만들었다.), 강감찬을 등용하여 거란족을 물리친 임금입니다. 그 분이 바로 사천에 살았고 부친 역시 사천에 묻혀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사천에 어떠한 변화를 주었느냐? 현종은 부친의 무덤 덕에 왕이 될 수 있었으므로 즉위한 후 그 인근 지역의 인재를 발탁하고(예: 강감찬 등), 泗川懸을 泗州로 승격시킵니다.(註: 당시 고려는 12개의 주를 설치하였다. 사천현은 원래 진주(당시는 姜州) 소속이었는데, 현종 2년 사주로 격상되었다.『高麗史』券 57, 志 11. 地理), 이에 더하여 “사주는 풍패(豊沛)의 땅(한나라 고조 유방이 자신의 고향을 일컫던 말)이다. 사주에 사는 양민은 내 부모형제와 같다.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 줘라, 국가가 경영하는 공전을 민전으로 환수시켜라.”고 조칙을 내립니다. 이러한 덕택에 이 지역에는 민간요가 형성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죠. 그래서 우리나라 역사에 유일하게 민간요가 만들어집니다. 그러면 민간인이 나라를 다스릴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그 땅은 곧바로 부처님이, 천인들이 다스리는 지역이 된 겁니다. 그러면 현종의 아버지 욱이 왜 이 지역으로 귀양을 왔느냐? 그 아버지인 왕욱은 경순왕에게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즉 왕욱은 경순왕의 딸이 왕건에게 시집가 낳은 그 자손입니다. 그런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천은 두고두고 남방 불교와 연관된 곳이기도 하며, 가야의 허황후가 가져온 차나무 있는 대방사 절터 등 남방불교(가야불교)의 근원지가 되는 곳입니다. 이 가야 향차가 있는 곳이 바로 현종이 어렸을 때 있었던 절터예요. 천 년 전에 이미 그런 왕명이 내려졌으니까 우리 지방에는 민간요가 성립될 수 있었던 거죠. 그래서 제가 발견한 사천 구룡요지는 이러한 엄청난 제도적인 보살핌 속에서 민간요가 계속 내려져 왔으며, 사찰 중심으로 계속 토호세력이 양성시켰기 때문에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다고 해도 400여 년간 유지했던 그런 뿌리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고 봅니다. 일본은 그러한 민간요를 탐을 내었던 거죠. 왜냐하면 민간요가 아닌 관요에서 만든 사기는 정부에서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삼포 왜관에서 일본으로 나가는 자기는 다 물품기록에 남아 있죠. 거기서 막사발 같은 것은 가져갈 수가 없었어요. 따라서 일본으로 나간 막사발은 모두 비밀스럽게 민간요 등에서 가져간 게 아닌가 해요. 그리고 막사발은 ‘비파’라는 흙 자체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부분에서 이 지역은 독창적인 민요 가마터라는 뿌리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인 의미가 있고 교통이 불편한 그때 이 지역에 비파라는 특징적인 흙이 있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천 년 전부터 존재 했던 가마터라는 역사적이라는 사실에 근거해서 학술적으로 인정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결론을 얻었죠. 그런 과정에서 일본의 역사를 추적해 보니까, 아니라 다를까 사천 선지터에 살고 있던 존계라는 사람이 사천 십장에서 살았어요. 그런데 임진왜란 때 끌려가서 호소가와 번주 밑에서 오늘의 아가노야키를 개요한 시조가 되었습니다. 작년(2002년)이 바로 존계 선생이 호소가와 영지에 정착해서 도자기를 만든 지 400년 된 것을 성대하게 기념하는 해였어요. 그러면 일본이 아가노야키를 개요한 시조를 무시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내가 찾아가서 이것을 인정해라 요구했죠. 내가 2000년에 일본에 들어갔는데 2년 동안 조사에 들어갔어요. 후손들이 미리 와서 가마터를 보고, 실행위원이 와서 보고, 파편조사를 하고 해서 역사적으로나 기록적으로 맞고, 일치하니까 인정 할 수밖에 없었어요. 일본민족이 어떤 민족입니까? 내 지독한 집념으로 그것에 대한 인정을 받아내었어요. 그 과정이 7년이 걸렸어요. 그래서 저는 아가노야키의 원류를 찾아준 것에 대한 요구를 했어요. 감사장을 주고 기념비도 세워달라고 요구 했어요. 당신들의 조상의 혼이 담긴 흙과 파편을 공식적으로 전달하는 전달식을 하게 해 달라고 요구 했어요. 아가노야키 400년 기념식 단상에서 당당하게 전달식을 하도록 만들었어요. 그리고 공식행사 안내 팜플렛에도 정식으로 넣어 달라고 요구 했어요. 그게 우리나라 역사에 어떤 역할을 할 것입니다. 광개토대왕비가 왜 문제가 되고 있는지 알아요? 광개토대왕비가 일본군 장교에 의해 발견되었기 때문에 식민지화 하려고 합리화 시키려고 족쇄로 삼고 있잖아요. 그리고 또 고구려를 왜 중국 지방 정권의 하나로 몰아붙이는지 압니까? 지금 작업하고 있잖아요. 그것에 대한 음모를 분쇄 못해요. 이런 게 구체적으로 알려지고 해서 하나의 힘이 뭉치면 작은 것 같지만 이런 것 하나 때문에 우리의 얼과 넋이 살아나서 외국 지도자들도 우리를 인정하게 되요. 작은 것이 큰 뚝을 무너뜨리는 게 개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것 같지만, 하나하나를 소중히 다루어야 되요. 그게 우리의 뿌리고 전통인데 왜 그것을 우리 스스로 버립니까? 여기에 있는 흙과 그릇을 가져가서 파편전달식을 하고 내가 그릇을 만들 줄 모른다면 문화수출을 할 수 없잖아요. 역사에만 치중하는 사람은 또 거기에 머물게 되요. 그 전통을 담아서 문화 수출을 해서 우리가 옳은 모습으로 가야해요. 증거보강 하는 가운데 파편만 찾고 역사 찾는 것을 하는 가운데 내 스스로 물레를 돌리는 일을 계속 했습니다. 계속 물레를 돌리고 여기에 나오는 흙을 가지고 여기에 나오는 모습을 가지고 특이한 것을 보여줘야 해요. 역사를 밝히면 이도 다완 밝히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호소가와를 밝히면 이도 다완도 밝힐 수 있습니다. 그럼 호소가와가 존계선생을 데려다가 그릇을 빚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일본은 종교가 없는 대신 다도가 유일한 종교입니다. 그 다도의 대가 센리큐(千利休)의 제자가 바로 호소가와예요. 임진왜란 중 일본은 우리나라의 도공 1000여 명을 납치해 갔습니다. 그 도공들은 7군데의 번주에게 나뉘어 배치되어 개요하게 됩니다. 그 중 호소가와 번주에게 배치된 것이 존계 선생이고, 개요한 것이 아가노야키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일본을 있게 한 천하의 7대요가 되죠. 일본의 국보 중에 이도 다완(비파로 만들어짐)이 호소가와 이도가 많지요. 이것은 센리큐와 호소가와의 뗄 수 없는 관계 때문입니다. 센리큐의 인품과 다도를 모두 전수받은 것이 바로 호소가와 가문인 것이죠. 그리고 현재 일본 차문화를 일으킨 양대 가문 중 한 파의 근간이 되는 것이 바로 호소가와 가문입니다. 그러니까 호소가와 가문은 지금 현재 일본의 차문화를 이룩한 근간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이 가문은 일찍부터 다완에 관심이 많았던 것이죠.저는 호소가와 전 수상이 왜 도공이 되었으며, 왜 이런 역사가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호소가와가 400년 만에 우리 집에 와서 그릇을 빚는 것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저는 이도 다완을 가지고 호소가와가 온다는 것을 기념비를 천 개 세우는 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를 인정해 주는 것예요. 그 분은 문화운동을 계속하시는 분이예요. 호소가와의 입지하나가 역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역사가 뭡니까? 역사는 사람이 살아 온 흔적입니다. 문화는 인류가 살아 온 흔적이고, 역사는 사람이 살아온 기록입니다. 호소가와 전 수상이 온다는 것은 그 2가지를 통합한 것입니다. 21C는 문화 전쟁시대입니다. 왜 제가 흙에만 집착하고 있느냐? 곧 일본 다인들 세계에서 한국에서 그런 깊이 있는 전통을 호소가와가 직접 인정했고 호소가와 수상이 우리 가마에서 불을 뗀 것이 보도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기서 나온 찻잔하나를 갖기 위해 혈안이 될 것입니다.’ 안 봐도 알 수 있겠죠? 이도 다완 논쟁 이라는 소리를 왜 듣습니까? 그 역사를 얘기해 버리면 그만 인걸요. 저는 ‘이도 다완 보다 더 좋습니다.’ 라는 소릴 들을 자신 있습니다. 단순히 400년전의 이도 다완을 얘기해서 뭐하겠습니까? 그런데 호소가와는 인정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호소가와가 나를 초청해서 만났고, 흙을 만져보고, 다완을 만지고 나서 제게 한말이 ‘제가 꼭 이런 그릇을 빚고 싶었습니다. 저에게 가르쳐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제가 말을 더듬더라고요. 너무 갑작스럽게 그 말을 들었기 때문에. 내가 호소가와를 만나러 일본에 간 최종목적이 그 말을 듣기 위해서였거든요. 이일은 내 개인적인 명예를 떠난 일이었어요. 그분이 우리 구룡요에 와서 도자기를 굽겠다는 것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안되는 일인 줄 알았어요. 그러나 이 흙 때문에 온다고 했죠. 이 흙 때문에 체면도 버렸어요. 왜? 그 사람은 그릇을 빚는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나는 흙에 치중했고 역사와 상관없이 인간의 순수한 모습으로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핵을 만들어서 사람을 제압하려고 하면 안 되죠. 상대방을 마음으로 우러나게 했을 때 거기에 진정한 문화의 힘이 있게 되는 거죠. 내가 보기에는 지금 일본을 따라 잡긴 힘듭니다. 일본은 벌써 체계적으로 모든 문화 하나하나를 체계화시켜 정통성을 부여해 버렸어요. 그러면서 35년 일제를 들먹이며 몰아 부치면서 모든 것을 예속 당해 있죠. 우리나라 못하나 톱날 하나가 일본을 못 따라 가요. 기본적인 기술을 습득하지 못한 이상 따라 가질 못해요. 이런 점들은 우리가 전통을 무시한데서 나온 우리의 모습 자화상이예요. 전통이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그 전통을 살리는 것도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조그만 부분적인 모습이라도 우리 것을 찾았을 때야 만이 우리는 세계화 속에 찬란한 반만년 역사를 가진 얘길 할 수 있어요. ‘내 육신과 정신이 편안해지면 나는 죽은 인간이예요. 끝입니다.’ 어려웠던 점은 옛날부터 있었고 또 어려워야 되고 사람은 어렵지 않으면 어떻게 힘을 갖고 일을 하겠어요? 지금부터 나는 더 어려운 투쟁을 할 것입니다. 계속 나는 어려움을 겪어야 돼요. 나는 어려움을 겪지 않은 사람은 썩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내 육신과 정신이 편안해지면 나는 죽은 인간이예요. 끝입니다.. 나 스스로 물레를 돌리게 된 계기 첫째 내 흙을 가지고 다른 전문가를 찾아가서 구룡도요의 400년 전의 역사를 재연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이 흙만 가지고 빚어야 하는데 좀 해 주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나도 신문사를 할 때니까 그때는 가면 반갑게 맞아주고 고생한다고 작업도 같이 하고 했어요. 그런데 이 한 가지 흙만 가지고 그 분들이 만지기에는 투박하고 본인들이 아직 만지지 않았던 흙이다 보니 어려움을 겪게 되었어요. 그래서 자기들이 쓰던 흙을 혼합하여 재연해 보고 하더라고요. 그래가지고는 400년 역사와 일본 속에 뿌리를 바로 밝힐 수가 없겠다. 라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나 스스로 물레를 돌리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 스스로가 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남에게 맡겨서는 영원히 잘못될 수가 있겠구나. 그래서 오로지 이 흙으로만 그릇을 만들었고 다른 흙에 대한 실험도 계속 해 봤지만 이 흙이 주는 독특한 질감과 역사속의 뿌리를 바로 잡으려면 이 흙만 가지고 계속 공부해야겠다는 생각하고 7~8년을 했어요. 그래서 내가 가장 어려움을 겪는 것은 지금도 주위의 많은 분들이 내 얘기를 듣고 말씀하시기를 이 사기장이란 길은 수십 년을 해도 부족한데 특히 사발을 만드는 일을 이제 물레를 네가 몇 년 돌렸다고 사발을 만드느냐, 한편으로 보면 격려가 될 것이고 한편으로 보면 매도가 될 것이고 받아드리기 나름인데 그때 마다 내가 마음을 먹은 것은 딱 하나예요. 흙을 진짜 알고 내가 그 동안 투자한 정열을 알고 내가 왜 이 일을 한다는 것을 안다면 그런 얘기를 할 수가 없죠. 피눈물 나는 고행보다 더한 이 흙에 대한 사랑이 묻었거든요. 나는 일본에 향한 족보 찾기 과정 내가 기능으로 승부하고 일을 경쟁을 해서 승부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제가 백상 기념관에 전시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호소가와 전 수상이 저를 초청도 안 했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입니다. 정신세계를 가지고 혼으로써 뭔가 해 보겠다고 맥을 이어오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래서 주위의 그런 말을 듣더라도 나는 참아 낼 수 있습니다. 국제적인 유네스코에 등록하여 우리나라 국가문화재 정도가 아니라.... 시굴하니까 내가 말한 것이 학술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는 400년 전의 역사를 찾아서 민요의 가마터에 대한 학술적으로 자리 매김을 받지 못한 것을 인정받게 하려고 했어요. 민요의 가마터에서 찾아서 사천 도요지는 역사속으로 부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발굴 현장에 이화여대 나교수님이 오셔서 보시고 하시는 말씀이 우리나라 최초의 녹유가마터라고 하시더라고요. 가야시대를 거치면서 중국의 자기 제작 기술을 편입 받지 않은 독자적인 자기 국가로 편입되는 과정의 가마터가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일본이 최초로 수입해 갔죠. 어떤 수입을 했느냐? 소주병을 만들어서 그 가마터에서 수입해간 적이 있는데 일본은 그 기록이 있어요. 그래서 일본은 그 가마터를 한 번 찾아봐라. 그런 거예요. 그런데 우리나라 에서는 그 가마터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가마터에 대한 기록 자체가 없어서 찾지를 못했어요. 무덤 속에서만 나오고 기록 속에서만 나오던 사실을 가마터 하나를 발견하지 못함으로써 우리는 국제적으로 중국으로부터 청자를 도입할 때 자기기술을 수입한 국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독자적인 기술로 생산하지 않은 기술을 가진 조선이 우리(일본)가 뺏어간 사기장에 의해서 우리(일본)가 또 백자 굽는 기술과 자기 굽는 기술을 가진 나라니까 조선 너희들은 할 말이 없지 않느냐? 라고 말합니다. 독창적인 기술을 가진 것은 원조라는 이름으로 지금은 특허가 됩니다. 그래서 식물학적으로 유전자가 중요해요. 원종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흙이 중요합니다. 왜 다른 흙을 섞으면 안 되는가? 나교수님이 우리 가마터를 보고 이제야 찾았다. 내가 평생을 찾아 헤맸던 가마터를 찾았다. 한국 도자기 역사속의 할아버지뻘이 되는 가마터를 이제 찾았으니까, 이제야 자리 매김이 가능하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우리는 이도 다완 하나에 매몰되어 모든 것을 거기에 걸고 논쟁을 벌일 때 우리의 흔적은 잊혀져 갔는데 이제 가마터 하나가 발견됨으로써 자리매김이 가능해졌어요. 역사학적으로 공식 발언을 통해서 증명이 된 거예요. 그리고 나서 내가 해야 할 일이 그 가마터를 지켜내고 국제적인 유네스코에 등록하여 우리나라 국가문화재 정도가 아니고 우리는 이런 독창적인 기술을 가진 나라요. 가야시대에 역사 속에 중국보다 더 나은 1200°C가 넘는 불을 다루던 나라였다는 겁니다. 고구려가 왜 중국의 부속국가예요? 그것을 풀 수 있는 열쇠도 여기에 있어요. 독창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는데 일본만 제압하는게 아니라 모든 것이 한곳으로 통했어요. ‘도를 통하면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하듯이 길은 하나예요.’ 그렇게 만들어 나가야 되요. 이 길은 여기에 있어요. 이 작은 파편하나가 그런 의미를 지닙니다. 국가적인 유적지로 만들어서 세계적으로 공인을 받아서 그렇게 하면 이 땅의 역사는 다시 쓸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마에 들어가서 요변을 일으키는데 공기와 불의 조화 속에서 저절로... 사천사발이 라고 통칭해서 부릅니다.. 분류를 3가지로 했는데 비파, 구룡, 가야라고 해요.. 대표적인 흙이 2가지 있는데 가야시대에 토기부터 시작한 원류적인 흙인데 일본에서는 덴모꾸라고 불리는데 철 성분이 많아요. 이 흙으로 만든 사발이 가야사발이라하고 노랗게 익어가는 탱자 색깔처럼 누르스름한 살색의 원료가 드러나는 색인데 그 흙으로 만든 사발이 비파사발, 비파와 흙은 똑같은데 그런데 이것이 가마에 들어가서 요변을 일으키는데 공기와 불의 조화 속에서 저절로 이런 색깔이 나옵니다. 색깔을 유도한게 아니고 인간이 생각지 못한 색채가 나오는 데 이 흙이 주는 질감이 이렇게 나오고 하니까 조화를 부린다고 구룡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건강은 옳은 식생활과 바른 마음에 있는데 옳은 길을 개도 해주는 옳은 정신적인 사상이 중요해요.’ 이 땅에 물질문화가 외세에 의해서 잘못 전달되었는데 석문호흡을 통해서 인체치료를 하고 그 과정들이 하나의 우주의 원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인체라는게 단식을 하고 자연치유를 즐기는 사람인데 인체라는게 외부에서 주사를 놓거나 약을 먹는다고 치유 되는게 아닙니다. 인체가 가진 본래 면역성이 있어요. 감기가 걸리면 기침이 나와요. 기침을 해서 독성을 빼내라 이건데, 약을 투여해서 기침을 멈추게 하죠. 병원에서 아가가 태어나면 모유를 버리고 분유를 먹어요. 그때부터 그 아이가 평생을 병원에 매달려야 되요. 젖소는 생명이 30년이고 사람은 120년을 살아요. 사람이 최초로 태어났을 때 그 모든 영양소가 초유에 다 있는데, 그 분유를 타먹임과 동시에 엄마 젖은 입에도 못대요. 그 병원에 단골고객이 되어 버려요. 주사와 항생제에 매달리게 그래서 지금 암 환자가 늘어나고 생각지도 못한 병이 생겨나는 거예요. 춥고 배고프면 암에 안 걸려요. 피부를 통해서 산소 공급을 해 줘야 되요. 인체의 근본 흐름이에요. 칼을 대지 않는 수술은 단식 밖에 없어요. 인체를 자기 스스로 면역을 갖추게 해야 합니다. 감기 걸려서 열이 나면 열이 발산되도록 해 줘야 하는데 약을 먹으면 그 독성이 몸 안에 갇히게 되요. 결국은 성인병에 시달리게 되고 암은 병원에서 치료 하지 못하게 되요. 자연적으로 정신력을 강조하고 키움으로써 인류의 병도 치료해야 되고 우리 스스로 자연 속으로 돌아가는 질서를 만들어주는 것이 좋죠.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데는 황토방이 좋죠. 이렇게 서서히 대두되고 있죠. 우리의 건강은 옳은 식생활과 바른 마음에 있는데 옳은 길을 개도 해주는 옳은 정신적인 사상이 중요해요. 그러면 인체의 모든 것이 활성화 되어서 문화도 이해 할 수 있고 보는 눈도 있는데, 그것을 잃어버렸단 말이죠. 그 잃어버림을 찾게 길을 가르쳐주려고 노력하는 분들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일들이 도움이 된다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좋은 인연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런 것을 보는 눈은 지식으로 배우는게 아니라 몸으로 부딪혀서 체득하는 것이죠. 나는 더 어려워야 되고, 투쟁해야 되고 더 고생해서 혼을 태워야 되요. 그래야 더 좋은 것을 만들고 끊임없이 재탄생해야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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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문향님 좋은자료 감사해요,
감사합니다,,,,,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