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보 鄭寅普(1893-1950)】 「 말 한마디, 일 하나, 행동 하나, 움직임 하나까지 '얼'이어야」
헌종 때 영의정을 지낸 정원용(鄭元容)의 증손이며, 1893년 5월 6일 한성부 남부 명례방 종현계 종현동(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2가)에서 정3품 이조참의를 지낸 아버지 정은조(鄭誾朝)와 어머니 달성 서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나, 후손이 없던 큰아버지 정묵조(鄭默朝)에 입양되었다. 이후 경기도 경성부 수창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내수동)으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충청도 일대에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이때 정인보의 스승이 된 사람이 이건방인데, 그의 집안은 양명학을 대대로 연구한 가문이었다. 그로부터 정인보는 한학뿐 아니라 양명학적 사상까지 함께 받아들인다.
1910년 한일합방 후 독립운동을 하러 중국 상하이와 한반도를 오가다가 상하이에서 신채호, 박은식, 신규식, 김규식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교포에 대한 계몽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부인이 산후병으로 사망하자 귀국하여 국내에서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경성부 연희전문학교 등에서 한학, 역사학 등을 가르쳤다. 1930년대 안재홍 등과 '조선학운동'을 전개하는데 식민사학에 맞서 조선 내에도 근대적인 흐름이 있었음을 증명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민족사학운동 중에 일본의 광개토대왕릉비 왜곡에 대해 반박을 하기도 했다. 그는 실학사상에서 근대적인 사고를 발견하려 했는데, 1935년 정약용 사후 100주년을 맞아 펴낸 <여유당전서>는 그 성과였다. 1935~1936년 동안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있으면서 "오천년간 조선의 얼"을 연재했다. 1936년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어 한문, 국사학, 국문학 등 국학 전반에 걸쳐 강의를 하였으며, 이때 발음의 유사성을 들어 숙신이 고조선의 일부라는 학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고 국학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탄압이 거세지자 1943년 가족들과 전라북도 익산군으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1945년 8.15 광복이 되자 서울로 상경하여 국학 공부를 계속하였으며, 1946년 국학대학이 설립되자 학장에 취임한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감찰위원장(오늘날 감사원장)에 임명되었으나, 초대 상공부장관인 임영신이 선거 중 저지른 비리를 적발해 파면을 요구하였다가 도리어 경질되었다. 1950년 6.25 전쟁 때 서울에 고립되었다. 당시엔 등창으로 투병중이었는데 인민군 3명이 자택으로 찾아와 현재의 롯데백화점 본점 주차장 부지인 국립중앙도서관 지하실로 연행했다고 한다. 연행 직후인 그 해 7월 경 납북되었다. 납북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한동안 밝혀지지 않다가, 1991년 10월 1일 전 북한 정무원 부부장(차관급)을 지내다가 1980년대 중반 망명한 박병엽(朴炳燁)의 구술기록이 공개되었는데 이때 밝혀진 바에 의하면, 1950년 8월 중순 서울을 출발한 그는 당초 평양에 수용되었다가 10월 국군의 평양 입성 직전 적유령산맥을 넘다 대열에서 낙오되었고, 아사 직전에 가까스로 구출되었다. 그 뒤 뒤늦게 입원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그 해 11월 말 경에 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북한 내에 조성된 재북인사릉의 묘비에는 그가 1950년 9월 7일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폭사했다고 새겨져 있는데, 이는 납북자들의 죽음을 미국 탓으로 돌리려 북한 측에서 조작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으므로 앞선 기록이 좀 더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1905년 강제 을사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외교권을 박탈당하자, 벼슬에 대한 뜻을 버리고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당시 절친한 사이였던 최남선이 변절하여 친일행위를 일삼자 “내 절친한 친구 육당은 죽었다.”라 말하며 상복을 차려입고 그의 집에 찾아가 통곡을 했다고 한다. 이를 본 최남선은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며 애국으로 돌아섰으나, 결국 다시 변절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자신을 찾아온 최남선을 향해 문도 열어주지 않으며 모질게 대하였다고 한다(하지만 훗날 최남선의 변호를 맡아해주며 남은 우정을 지키려했다고 한다).
국권을 회복하게되면서 선생은 좋은 기회로 국학 대학 학장으로 국어와 역사를 가르칠 수 있었다. 하지만 지위에 걸맞은 모든 혜택을 뿌리치고, 승용차 대신 전철로 출근하며 타의 모범이 되는 수수한 생활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혼을 판 학자에게는 냉수 한 그릇도 아까운 법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청백한 학자로서의 모범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