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수필가(20) - 김한성
김한성은 1948년에 선산에서 태어나서 군위에서 자랐다. 대구교육대학을 졸업하였고, 교육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어교육을 공부하였다.
평생을 교직에 봉사하면서 재직하는 학교마다 어린이 글짓기 교실을 만들어서 지도하였다. 2010년에 교직에서 정년퇴임하였다.
1982년에 영남수필문학회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수필작품을 만들었다. 그러나 워낙 과작이다보니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는 작가이다. 그러나 그는 독특한 수필 양식을 가진 작가이다.
수필공원(1992-오늘의 에세이문학)에서 추천을 받았다. 2007년에는 에세이21에서 추천을 받았다. 그가 발표한 지면은 거의 영남수필문학지와 수필공원지이다.
그는 평생을 초등학교 교직에서 일하였으므로 그의 작품에는 어린이가 많이 등장한다. 그의 수필을 통하여 어른과는 다른 어린이의 의식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어린이의 행동을 통하여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도 그의 독특한 기법이다. 그의 수필을 평해서 해학성이 있다고 평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의 수필은 ‘교단일기’라는 양식이 수필의 장르로 편입될 수 있는 근거 자료가 될 것 같다.
그의 수필을 평한 여러 자료를 보면 해학성, 교시성 그리고 서정성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평자는 해학성에다 중점을 두고 평하였다. 학교에서 아이를 가르치는 직업이다보니 교시성은 몸에 베여있을 것이다. 그러나 해학성으로 교시성의 거부감을 줄어들게 하였다.
그의 수필에는 인용이 많다. 액자가 되어서 독립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든다. 그러나 독립된 이야기로 생경하게 느껴지지 않고 원 수필의 일부가 되어서 수필의 의미내용을 강화하는 방법으로 썼다. 이것은 소설의 기법이기도 하다. 수필을 소설의 기법으로 표현할 수 있는 시도로 볼 수도 있다.
예술작품에는 예술가 나름의 자기 체취가 있어야 한다. 글을 읽으면 누구의 글이라는 느낌이 올수록 좋다. 남의 글을 따라서 쓰는 아류롤 좋게 평가하지 않는다. 입체파 화가라고 하면 피카소만 기억한다. 그 외에 많은 입체파 화가들을 잘 기억하지 않는다. 대구의 수필문단에도 그런 경향이 있다. 명망이 높은 수필가는 틀림 없지만 자기의 양식이 아니고, 누구의 양식이다. 라는 평을 듣는 수필가도 있다.
김한성 수필에 대한 평을 보자.
“작가 특유의 유머 구사로 해서 읽고 난 느낌이 유쾌하다.” -박연구
“수필에 풍자 해학의 선천적 소질이 있다.” - 김시헌
“ 유머스런 수필이다.” - 하길남
“ 교훈적, 도덕적, 지시적, 철학적 의미를 숨기면서 능청스럽게 재미있게 이야기를
늘어 놓는 이 수필이야말로-----” - 김태원
신재기는 김한성의 수필을 종합하여 체험을 바탕에 두고 일화로 액자화 하였다고 하였다. 또 하나는 교훈적이기는 하지만 일방적으로 가르치려 하지 않고 성찰을 유도한다. 그리고 유머를 꼽았다.
모든 평자가 김한성 수필의 특질을 ‘유머’에 두고 있다.
평론가인 원형갑 선생은 이제현의 역옹패설을 수필의 평에 많이 인용하였다. 가벼운 글이면서도 해학성이 강하다고 하였다. 김한성을 대구의 수필가로 선정하는 이유이다.
김한성은 영남수필문학회장, 대구수필가협회 부회장, 대구문협 수필분과위원장을 하였다.
수필집
1. 2009 해바라기(그루)
2. 2014 헛제사밥(수필미학)
걸어 다니는 비석
김 한 성
그의 일생을 묻고 있다. 유가족의 슬픔도 함께 묻는다. 문득 찾아올 나의 날을 생각해 본다. 영원히 살 것같이 뛰어오르던 인생의 계단에서 잠시 쉬면서 지난날을 되돌아본다. 이 계단에도 층계참은 있는 모양이다.
하관 예배 설교 말씀이 마음에 스며든다.
“우리는 아무도 죽음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모두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 여러분, 여러분은 걸어 다니는 비석입니다. 고인의 영광을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도록 움직이는 비석의 역할을 잘 해주기 바랍니다.”
고인을 생각하니 문득 양쪽 발바닥에 가벼운 아픔이 느껴진다. 신혼 시절로 세월을 거슬러 올라 본다. 낯선 가문에 사위가 되어 갔으니 모든 것이 서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중에 큰 걱정거리는 동상례(東床禮)로 행해지는 신랑 다루기였다. 무리하게 신랑 다루기를 하여 다치기도 하고, 심한 경우 목숨을 잃기까지 한다는 특집 방송을 보았다. 결혼을 앞둔 나에게는 남의 일일 수 없었다. 방송뿐 아니라 먼저 결혼한 친구들의 체험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걱정은 샘물처럼 솟아올랐다.
해가 지고 운명의 순간이 찾아왔다. 준비물만 슬쩍 봐도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마른 북어, 방망이, 포승줄, 샅바, 장작개비, 대나무 몽둥이, 빗자루 등 사극에서 죄인을 고문하기 위한 도구처럼 보였다. 문제는 지금까지 이 집안에 딸을 훔쳐가는 남자들을 그냥 보낸 적이 없다는 가장 연장자인 듯한 말라깽이 대표였다. 자신을 이 집안 먼 친척뻘로, 나에게는 손위 처남이 된다고 소개했다. 날카로운 인상이 나를 저절로 주눅 들게 만들었다.
딸을 훔쳤다는 죄목으로 손발을 묶은 후 북어로 발바닥을 내리쳤다. “네 죄를 알렸다.” ‘죄는 무슨 죄, 노총각이 노처녀 구해준 것밖에 없는데……’ 억울하기 짝이 없었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따질 수도 없었다. 네 죄를 어찌하겠느냐고 다그쳤다. 하는 수 없이 도구들을 돈으로 사면 안 되겠느냐고 흥정을 했다. 값만 적당하면 팔겠다면서 종이와 연필을 내밀었다.
대표인 처남이 북어를 들었다. 나는 북어 100500원이라고 썼다. 고개를 갸웃하면서 적은 금액이 아니므로 쉽게 통과되었다. 그리고 방망이 50001000원, 포승줄 100001000원, 샅바 1000010000원, 장작개비 500010000원, 대나무 100005000원, 빗자루 100010001000원 이렇게 값을 후하게 적어 나갔다. 파는 쪽에서는 신이 났고 장모님은 걱정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흥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신랑 다루기에 쓰일 도구가 될 만한 것은 모두 산 셈이다. 셈을 치를 차례다. 몇 가지 약속이 오고 갔다. 그리고 꼭 지키기로 다짐까지 했다. 서로 증인도 세웠다.
계산이 시작되었다. 먼저 북어 값 100500원은 단돈 600원으로 해결했다. 100원짜리 동전을 앞에 놓고 500원 짜리 동전을 뒤에 놓으니 100500원이 되었다. 사기다, 엉터리다 하면서 야단이었지만 손위 처남은 말없이 넘어갔다. 방망이는 6,000원, 포승줄은 11,000원에 샀다.
이렇게 십여만 원으로 신랑 다루기에 쓰일 물건을 모두 사 버렸다. 주위의 몇 사람들이 엉터리라면서 야단이었지만 약속은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라면서 오히려 그들을 나무랐다. 우리는 차린 상을 마주하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정한 얼굴로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정담을 나누었다. 그 후 만날 때마다 재미있게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하며 반겨 주었다.
처남을 생각하니 갖가지 추억들이 물밀 듯 밀려와서 내 가슴을 적시고 있다. 그리고 아쉬움 한 조각이 구름처럼 내 마음에 일어난다. 그때 꾀를 부리지 말고 신랑 다루기를 마음껏 즐겼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아득한 길로 떠나가는 처남의 모습이 너무나 아쉽다. 다시는 몸을 부대끼며 정을 나눌 수 없는 안타까운 순간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누가 알았으랴.
어린 시절 집 가까이에 있는 면사무소는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옛날 고을 원(員)이 살았다는 그곳에는 넓은 마당이 있었고, 뒤쪽에는 비석이 늘어서 있었다. 비석에는 고을 원이 선정을 베풀었다는 내용이 가득 적혀 있었다. 우리는 심심해서 돌을 던져 비석 맞히기 놀이를 하다가 쫓겨날 때가 잦았다. 비석의 내용이 대부분 엉터리라는 것을 어른들의 이야기를 통해 들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선정을 베푼 원은 비석을 세우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백성들은 폭정을 일삼는 원의 포악함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비석을 세웠다. 어떤 원은 자기 비석을 더 멋있게 만들기 위해 직접 진두지휘까지 했는데 그가 떠나고 나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비석을 향해 수없이 돌팔매질을 했다. 심할 경우에는 한밤중에 오물 세례를 퍼붓는 일까지 벌어졌다.
돌은 단단하다. 사람들은 세월의 강물에 지워지지 않게 하려고 비석 세우기를 좋아한다. 비석을 볼 때마다 어린 시절, 면사무소 마당에 서 있던 곰보 비석이 떠오른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진실이 담겨 있으며, 얼마나 많은 거짓이 새겨져 있을까하고 저울질 해 본다.
문득 서산대사의 말이 귓전을 때린다.
‘이름 석 자 남기려고 딱딱한 비석을 파지 말라. 네거리에 오가는 사람들 입이 그대로 비석이다. 평생 남을 향해 눈살 찌푸릴 일 하지 않으면, 세상에 나를 향해 이를 가는 사람 없다.’
우리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비석을 새기고 있다. 그 비석이 걸어 다니면서 나를 말하고 있다.
<약력> 김한성
‘수필공원’(1992년)과 ‘에세이21(2007)’로 등단, 영호남수필문학 대상, 2008년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받음, 수필집 <해바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