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고대철학 『니코마코스 윤리학』요약정리
200931368 철학과 조하나
『니코마코스 윤리학』1권
1권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최고 좋음’이 무엇인지 정의 내린다. 이 최고 좋음이란 모든 인간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이 된다. 학문에 있어서는 정치학이 공동체 시민들의 최고 좋음의 획득에 목적을 두기 때문에 최고의 학문이다. 사실 이러한 논의는 구체적 사실과 정합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무의미한 것도 아니다.
최고 좋음은 통상적으로 ‘행복’이라고 번역되는 ‘에우다이모니아’이다. 하지만 에우다이모니아는 상태가아니라 활동이고, 우리가 행하는 어떤 것이며, 착각이 가능하지만 일시적일 수는 없다는 점에서 행복과 다르다. 여기에는 잘 사는 것과 잘 행동하는 것이 동의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하지만 최고 좋음의 명칭에 대해 일반적으로 일치한다 하더라도 구체적인 것은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즐거움, 명예, 돈 벌기의 삶들이 최종 목적이 될 수 있는지를 살핀다. 먼저 즐거움은 육체적 욕구의 만족에 불과하다. 돈은 도구적 좋음이다. 명예, 또는 존경심은 타인에 의존적이기 때문에 에우다이모니아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아무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탁월성을 소유하기만 해서는 에우다이몬적이라고 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좋음의 형상’으로 관심을 전환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을 부정하려는 논증을 펼치지만, 좋음을 어떤 사물의 종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둘은 별반 차이가 없다.
7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다이모니아에 관한 실질적인 설명, 기능논증을 제시한다. 우선 이 둘을 염두해 두자. 에우다이모니아는 가장 완전한 목적이고 자족적인 것이다. 자족적인 것이란 결국 완전함을 말한다. 기능논증은 인간에게 어떤 기능이 주어져 있고 이것을 잘 수행하면 그것이 좋음이라는 합목적성을 말한다. 기능의 그리스어인 에르곤은 삶의 특정 방식을 의미한다. 인간에게 고유한 활동이란 영혼의 이성을 가진 부분의 활동이다. 이것을 탁월하게 활용하고 있다면 에우다이몬이 된다. 탁월성의 활용에 의해 우리의 삶이 형성되고 지시된다. 그런데 에우다이모니아는 외적인 좋음도 필요로 한다. 다만 외적인 좋음이 일차적 좋음이라면, 에우다이모니아는 이차적 좋음이다. 탁월성의 활용은 외적인 좋음들을 관리하는 것이다. 이 결론은 전제의 완전함과는 다른 의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다이모니아를 일상적인 직관적 통찰과 일치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에우다이몬적인 삶들의 원인을 고찰한다. 에우다이모니아는 배움과 습관을 통해서 획득되지만 우연도 역할이 있다. 하지만 사람은 우연적인 삶을 통해서가 아니라, 품성의 탁월성을 갖춘 상태로 평가받아야 한다. 에우다이모니아는 비교 불가능한 것이므로 칭찬의 대상이 아니다.
13장은 영혼의 3부분에 대한 설명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2권
2권은 품성의 탁월성에 대해 논의한다. 품성의 탁월성은 도덕적인 탁월성보다 넓은 영역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품성의 탁월성은 탁월성을 갖춘 행동들의 반복적인 수행을 통해서 습관화된다고 주장한다. 이 탁월성을 갖춘 행동들의 본성은 첫째, 올바른 행동은 올바른 이성과 일치하며 둘째, 실제가 일반론과 다르기 때문에 통찰력을 요구한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자라거나 지나치면 파괴된다는 것이다.
품성의 탁월성은 올바른 것들은 즐거움을 주고, 잘못된 것들은 고통을 주는 것을 통해 습관화된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탁월성이 활용될 때도 즐거움을 느껴야 탁월성을 소유한 것이라고 말한다. 즐겁지 않은 탁월성의 행위를 유쾌하게 만드는 것은 목적의 고귀함이다. 고귀함을 위해서 행동한다면 탁월하게 행동하는 것이고, 탁월하게 행동한다면 에우다이몬적인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탁월성을 갖춘 사람과 엥크라테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이것은 지붕에서 떨어지는 기와가 더 위험함에도 심술궂은 사람이 고의로 던지는 돌이 더 깊은 상처를 남기는 것과 같다.
어떤 행동이 탁월성을 갖춘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 행동은 어떤 사람의 품성의 올바른 상태의 표현이 되어야만 한다. 엥크라테스도 탁월성을 갖춘 사람이 행하는 일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에우다이모니아가 아니다.
탁월성은 품성상태이다. 품성상태란 그것에 따라 우리가 감정들에 대해 제대로 태도를 취하거나 나쁘게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품성상태는 감정이 아니라 감정의 경향이며 영혼의 비이성적인 부분에 속한다.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해지는 것, 칭찬을 듣는 것, 결정을 내리는 것은 탁월성 때문이지 감정 때문이 아니며, 감정을 소유할 때는 움직여지지만, 탁월성을 소유할 때는 움직여지지 않는다.
모든 탁월성들이 품성상태라는 주장이 사실일지라도 품성의 모든 상태가 탁월성은 아니다. 탁월성을 갖춘 품성 상태는 중용이다. 이것은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중간 상태로 마땅히 그래야 할 때, 마땅히 그래야 할 일에, 마땅히 그래야 할 사람들에게 마땅한 감정을 갖는 것이다. 이것은 합리적인 선택과 결부되어 있다. 이 상태를 가진 사람은 에우다이몬적인 삶의 구성 요소로서 어떤 좋은 것의 중요성을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의 탁월성마다 두 개의 대립적인 결함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 상이에서 탁월성을 성취하려면 먼저 그것에 두 결함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좋은 선택권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즐거움을 경계해야 한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합목적성과 에우다이모니아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합목적성이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그 역할이나 기능이 이미 결정되어 있어서, 그 가능성을 최대한 발휘한 상태이다. 목적에 맞게. 예를들자면 나한테는 악기다루는 재주가 있었는데, 정말 악기를 잘 다룬다, 뭐 이런. 그런데 탁월성이 에우다이모니아는 아니라고 한다. 탁월성만 있고 그것이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을 때, 그것은 에우다이모니아가 아니다. 에우다이모니아는 최고 좋음이니까. 탁월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품성의 탁월성도 있어야만 한다. 어쨌든 에우다이모니아에는 가능태를 현실태로 만드는 것 또한 포함이 되는 것 같다. 나는 가능태를 잠재능력쯤으로 생각했었다. 그래서 잠재능력과 현실과는 달라서 농민이 왕의 잠재력을 가지고 태어났을 경우는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 했었다. 그런데 에우다이모니아가 배움과 습관으로 얻어지는 것이라고 하니, 가능태가 잠재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면 그는 농사일을 배우고 습관화할 것이다. 그리고 농부가 되겠지.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것, 그런 환경에 놓여있다는 것 자체가 가능태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성은 딱 주어진 환경 그만큼으로 제한되어 있다. 개천에서 용 안 난다. 콩 심은 데 콩 나는 것은 진리이다. 그런데 농부의 자식이 농부가 된다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가능성을 그만큼으로 제한하는 것은 납득이 되질 않는다. 농부의 자식이 머리가 좋을 수도 있고, 손재주가 뛰어날 수도 있고, 힘이 셀 수도 있다. 머리가 좋아서, 손재주가 뛰어나서, 힘이 세서 농사를 잘 지을 수도 있지만, 그래서 농기구를 만드는 장인이 될 수도 있고, 비료를 만드는 화학자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피아니스트의 자식이 피아노를 만들지 말란 법은 없을 텐데? 그리고 습관화라는 것이 참, 예시가 부적절하지만 아버지의 폭력성을 물려받은 자식의 실례도 많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것처럼, 옳은 것을 배우고, 옳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옳은 행동을 할 것이다. 하지만 어린이는 옳고 그름을 가장 먼저 부모를 통해서 배운다. 그것을 잘못 습득한 사람은 도덕적으로 올바른 기준을 가진 사회 속에서 살고, 그 기준에 따라 칭찬과 벌을 받았다 할지라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만 따르자면 사회에 악은 없어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품성의 탁월성을 획득하는 방법은 뒤로하고, 아리스토텔레스도 진심으로 옳은 행동을 하는 것인지, 다른 사람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 옳은 행동을 하는지를 구분한다. 칸트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옳은 것이기 때문에 행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에 억지로가 아니라 즐거움을 더한다. 칸트의 의무는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즐거움을 수반하는지는 모르겠다. 칸트의 윤리학은 가장 고민되는 부분이 선의의 거짓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옳은 행동이 행복한 결말을 갖지 않을 때 어떻게 행동하라고 할지 궁금하다. 아마 아리스토텔레스라면 마땅히 그래야 할 때, 마땅히 그래야 할 일에, 마땅히 그래야 할 사람들에게 마땅한 감정을 갖는 중용을 들어, 사냥꾼이 쫓아와 토끼가 어디로 갔냐고 묻거들랑, 거짓말보다 토끼의 생명이 더 가치 있는 것이므로 거짓말을 해야 한다고 말해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