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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초44회모임방 원문보기 글쓴이: 도토리
위인들의 이야기를 보면 참 놀라운 삶에 찬탄이 나오고 잠시 후 위인의 노년을 읽어 내려가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출생과 유년시절 청년시절까지의 삶은 참으로 밝고 활기차지만 중년을 지나 장년에 이르르는 과정을 보면 온갖 세파와 힘겹게 싸우는 모습이 우리의 마음이 밝지만은 않다 왜 인생은 싸워야만 하는가 부조리와 싸우고 탄압과 싸우고 독립을 얻기 위해 싸우고 자유를 얻기 위하여 싸운다 우리나라는 참 싸움도 많이 한다 어느나라든지 다 그렇겠지만 이 조그만 나라에서 왜 그리 서로 싸우고 죽이는지 모른다 참 인간의 본성은 선한 것이 아니다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면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한 것인가? 다들 자신들이 선하다고 하는데. 의인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망한다고 하였다 오늘 이승훈 선생님의 일생을 보면서 한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승훈의 유년시절
이승훈은 1864년 3월 25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인환(寅煥), 보통 쓰는 이름은 승훈, 어려서는 승일이었다.
집안은 끼니조차 잇기 어려웠다. 아버지 이석주는 지독한 가난에 찌들어 있으면서도 도무지 일하려 들지 않았다. 무능력한 남편 대신 손발이 부르트도록 일해야 했던 어머니는 이승훈을 낳은 지 겨우 여덟 달 만에 영양실조와 산후더침이 겹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할머니는 이따금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고단했던 우리 선조들의 모습들
어머니를 여읜 이승훈은 할머니가 얻어다 주는 동냥젖으로 겨우겨우 자랐다. 여섯 살 되던 해에는 정주읍에서 동쪽인 납청정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이곳에서 이승훈의 아버지는 유기노점을 벌였지만 별반 신통치 못했다. 할머니는 이승훈을 데리고 산으로 나무를 하러 다니거나 남의 집 품을 팔거나 밭을 매러 다녔다. 그즈음 이승훈은 서당에서 글공부를 시작했으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만두어야 했다. 뒤이어 아버지마저 세상을 뜨고 말았다. 고아가 된 이승훈과 형 이승무는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 했다.
형 승모는 유기 공장의 머슴이 되었고, 승일은 글방훈장의 소개로 임일권이라는 사람의 ‘방사환’이 되었다. 방사환은 주인의 잔심부름을 해 주는 소년을 말한다. 훈장은 승일을 불러다 놓고 말했다.
신식교육이 있기전 동네 서당에서의 아이들 교육
유기상인 임권일은 유기 제조공장을 여럿 운영하는 이름난 부자였다. 승일은 글방에 다닐 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이승훈은 장사에 타고난 재주가 있었다. 그가 열다섯 살 때 하루는 황해도 안악의 아무개가 와서 놋그릇 수천 냥어치를 주문하고는 값 일부를 치르고 나머지는 그릇을 가져간 뒤 보내겠다고 했다. 주인은 허락했으나 이승훈이 한두 푼도 아닌데 믿을 수 없다며 말렸다. 그제야 주인도 깨닫고 이승훈을 딸려 보냈다.
배에다 짐을 싣고 안악 해창나루에 닿자, 그 장사꾼은 승훈에게 마차를 가지고 오겠다며 사라졌다. 승훈은 물건을 모두 나루터 창고에 들이고는, 주인더러 자기 허락 없이는 어떤 사람이 오더라도 내주지 말라고 일렀다. 얼마 뒤 장사꾼이 마차를 끌고 왔으나, 승훈은 잔금을 치르기 전에는 물건을 내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장사꾼은 어린 승훈을 으르고 달랬으나 승훈은 완강하게 나갔다
어린 이승훈을 얕잡아본 그는 으르고 달랬으나 아무 소용없었다. 뒷날 알고 보니 그는 처음부터 속일 작정이었던 것이다. 이 소년 장사꾼이 그곳에서 몇 달을 머물며 마침내 한 푼 손해 없이 받아 가지고 돌아오자 임권일은 탄복을 금치 못했다.
이처럼 근면성과 성실성이 알려져 사위 삼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승훈은 1878년 이도제의 딸 경선을 아내로 맞이했다. 이어서 그는 푼푼이 저축한 돈 30냥을 들고 독립했다.
유기장사군으로 독립함
임 박천은 남강을 신임하여 유기 공장의 서기 일을 맡겼다. 공장에서 쓰는 원료나 제품의 출납 장부와 수금을 맡는 중요한 자리였다. 주인의 신임이 없고선 맡을 수 없는 직책이었다. 어느 날, 남강은 선천으로 놋그릇 값을 받으로 갔다. 돈을 받아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같은 마을에 사는 한 노인과 동행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부지런히 길을 재촉하여 평지원이란 곳에 이르렀다.
장돌뱅이들의 일터
잠시 쉬어가는 보부상
남강은 임 박천이 물건을 대 주어 외상으로 놋그릇을 많이 팔 수 있었다. 신용이 있어 물건은 얼마든지 끌어 댈 수 있었다. 이런 신용은 일이 년에 얻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몇 년이고 꾸준히 노력해야 되는 일이었다. 남강은 이렇게 10년 가까이 행상을 하면서 많은 돈을 모았다. 어느 날, 부인이 말했다.
은은한 금빛의 방짜유기(놋그릇)
첫번째 시련
1894년의 청일전쟁
1894년 청일전쟁으로 이승훈은 큰 위기를 맞는다. 길거리는 황폐했으며 상점과 공장은 모두 부서져 버렸다. 일본군에 패하여 달아나던 청나라 병사들이 유기제품을 죄다 쓸어가는 바람에 남은 게 없었다. 다른 기업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남의 빚을 얻어 사업을 하던 중에 공장이 불에 타 버린 것이다. 오희순의 돈을 빌렸던 사람들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남강의 생각은 달랐다.
오희순의 돈을 얼마든지 끌어다 쓸 수 있었던 덕분에 이승훈은 매우 빠르게 재기할 수 있었다. 납청정 유기공업을 독점한 이승훈은 또다시 판매 지점망을 확장해 평양에 점포를 내고, 개항기 뒤 외국 문물이 들어오는 진남포에도 점포를 세웠다. 청일전쟁 뒤 7년여 만에 그는 70만냥을 움직이는 거상이 되어 있었다.
소 70만 마리 값인 거액을 손에 쥔 그는 무역계를 석권했을 뿐만 아니라 항상 새로운 사업 기획, 새로운 물품의 수입과 공급에 힘을 썼다. 석유나 양약·지물, 나중에는 성냥에 이르기까지 과감한 수입을 통해 조선 상업계를 지배했던 것이다. 그러나 1901년 그가 시작했던 엽전장사는 이승훈에게 대패의 쓴맛을 안겨 주었다. 당시 돈 약 3만여 원 거액으로 엽전을 사들여 배에다 싣고 인천을 출발, 부산으로 향하던 중 목포에서 일본 영사관 배와 충돌, 엽전을 모두 바다 속에 수장시켜 버리는 액운을 당해야만 했다
1904 - 1905년의 일로전쟁
두번째 시련
엽전으로 큰 손해를 본 이승훈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잡곡, 명태 등을 무리하게 사모았지만, 당시의 기상 이변이 그의 이런 바람을 처참하게 짓밟아 놓았다. 맨손에서 평안도 제일의 무역상으로 등장했던 70만 냥 거부 남강이 아니었던가. 그러던 그에게 엄청난 시련만이 연속되고 있었다. 이승훈은 초조해졌다. 하루에 몇 갑씩이나 되는 궐련을 빨아댔고, 몸조차 주색에 곯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람은 궁지에 몰릴수록 더욱 분발하는 분기가 솟아 올라오는 법. 남강은 드디어, 내리 몇 해 동안 계속되던 손해를 한꺼번에 복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잡았다. 러·일 전쟁의 발발이었다. 남강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 모두 러·일 전쟁이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름 아닌 악착같은 일본과 음흉한 러시아가 맞붙었으니 쉽게 떨어질 리가 없지 않은가. 이승훈은 전쟁 난리통에 천정부지로 값이 치솟을 쇠가죽을 사들이기로 했다. 왜냐하면 쇠가죽은 군수품으로 군인들의 배낭이나 구두 등을 만드는 데 막대하게 소요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모든 자본력을 총동원하여 전국에 있는 쇠가죽을 끌어 모을 수 있는 한 한껏 끌어 모았다. 그러나 남강의 이러한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그 이듬해 러·일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쉽게 끝나 버리고 만 것이다. 남강은 모든 피가 한꺼번에 온몸에서 빠져나가는 듯한 허탈감을 맛보았다. 참담한 실패 앞에 자기의 인생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황해도 안악 연등사(燃燈寺)로 들어갔다 연등사에 기거하는 어느날 남강이 기거하는 옆방에 새로이 한 사람이 들어왔다. 인사를 하고 보니, 안중근의 사촌 동생 안명근이었다.
남강 이승훈이 두 번이나 쌓아올린 큰 재물은 모두 전쟁이 휩쓸어가 버렸다. 그러나 다행히 남강은 그가 한창 때인 1890년 정주에서 이십여 리 떨어진 오산 용동 본집에다 여재를 축척해 놓은 것이 있었다. 그는 오산 용동에 터를 잡고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여주 이씨 가난한 집안 사람들을 데려다 큰 마을을 이루어 살게 했다. 그들에게 땅을 주어 농사를 짓게 하고는 행상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교육가로서의 남강
어느 날, 남강은 도산 안창호가 평양 모란봉에서 연설을 한다는 소문을 듣고 달려갔다. 도산은 이미 청년 애국지사로, 웅변가로 이름이 드높았다. 도산의 연설은 과연 남강의 가슴에 불을 지르기에 충분했다.
남강은 중학교를 세우기로 결심했다. 용동에서 서북쪽으로 3마장쯤 떨어진 곳에 ‘승천재’라 불리는 건물이 있었다. 이것은 고려 때 향청 자리에 평안 감사 민병석이 세운 건물이었다. 여기서는 한학을 가르쳤었으나, 러일전쟁 을 거치면서 황폐화되어 뜰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남강은 승천재 자리에 중학교를 세우기로 하고, 건물을 수리하여 교장으로는 백이행이란 분을 모셨다. 그리고 학생을 모집하는 한편, 서울로 가서 여준과 서진순이라는 두 선생을 모셔 왔다. 1907년 12월 24일, 마침내 오산 학교가 개교되었다. 모인 학생은 모두 7명으로, 이윤영·이찬제 ·이중호·이업·김자열·이인수·김도태 등이었다. 개교식에서 남강은 말했다.
초창기 오산학교의 체조시간
독립운동가로서의 남강
1907년 9월 신민회가 조직되었다. 남강의 성격은 불같았다. 한 번 ‘옳다’, ‘할 일이다’ 생각한 다음에는 곧바로 실행했고, 전력을 다해 밀고 나갔다. 신민회는 먼저 민족의 힘을 기르기 위해 두 가지 일을 하기로 했다. 하나는 ‘교육’이요, 또 하나는 ‘실업’이었다. 따라서 이승훈은 대성학교, 오산학교 등 여러 학교를 설립해 나갔으며, 또한 평양과 대구에 태극서관, 평양 마산동에 자기회사(磁器會社)
등을 세웠다
1911년 2울, 남강은 서울의 태극 서관에 볼일이 있어 평양에서 기차를 탔다. 기차가 수색역에닿자, 일본헌병이 승객들을 검문하기 시작하였다.
105인 사건으로 압송되는 애국자들
105인 사건은 기독교 대박해 사건이기도 하다 105인중 92명이 기독교인이었다
3.1운동과 남강
1919년 3.1운동 때였다. 서울에 있는 육당(六堂) 최남선씨로부터 연락이 와 올라가 보니 독립운동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강선생은 즉석에서 이에 찬성하고 곧 친우 산농(汕農) 선생 집에서 월남선생 등과 함께 의논을 했다. 이때부터 산농 선생의 집은 비밀 집회장소가 되었던 것이다. 남강 선생의 뛰어난 지도력은 3.1운동을 성공으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첫째로, 육당선생이 기초한 독립선언문을 수정, 결정하는 일이었다. 즉 위창(葦創) 오세창(吳世昌), 월남 이상재, 산농 박승봉, 남강 이승훈 등 네 사람이 산농선생 집에서 이 기초안을 최종적으로 수정, 결정했던 것이다.
둘째로, 3.1운동을 천도교와 기독교 합동으로 하는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즉 3.1운동은 천도교와 기독교의 합동으로 해야만 성공할 것을 확신하고 추진하고 있었으나 기독교측 대표들의 반대에 부딪쳤던 것이다. 합동문제를 논의하는 비밀회의에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양전백, 이명룡 등 평북지방 대표들은 거리상 관계로 전권을 남강선생에게 도장까지 맡긴 채 참석하지 못하고 다만 오화영, 박희도, 정춘수, 이필주, 이갑성, 김창준, 최성모 그밖에 33인 대표가 아닌 함태영, 현순, 오기선 등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정춘수 같은 사람은 「천도교와 합동하는 것은 불가하다’…우리는 기독교 목사의 신분이므로 감정으로써 일을 하면 안된다…」하고 반대했으나 오화영 목사와의 적극적인 뒷받침으로 이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
그는 민족대표 서명을 앞두고 자기 종교인을 먼저 써야 한다며 좌충우돌하자
“이거 죽는 순서야. 아무를 먼저 쓰면 어때. 의암(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이름을 먼저 써.”
라며 천도교에 첫 자리를 양보했고 장로교 대표 자리마저 길선주에게 내주었다. 그는 내 종교, 종파에만 빠져 정의와 평화와 자유를 도외시한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신앙을 경계했다
33인의 사진
천도교
손병희 징역3년 권동진 오세창 임예환 징역2년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재판중 사망 권병덕 징역2년 김완규 나용환 이종훈 홍병기 이종일 징역3년 최린 징역3년 15명
기독교
이승훈 징역3년 박희도 징역2년 이갑성 징역2년 6개월 오화영 최성모 징역2년 이필주 김창준 징역2년 6개월 신석구 징역2년
박동완 신홍식 양전백 이명룡 길선주 무죄 유여대 징역2년 김병조 체포되지 않음 정춘수 징역 1년 6개월 16명
불교
한용운 징역3년 백용성 징역1년 6개월 2명
1919년 3월 1일 정오에 마침내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고, 이어 삼천리 방방곡곡에 울분의 함성인 '대한독립 만세'가 퍼져나갔다.
독립선언식이 끝나자마자 달려온 일본 헌병들에 의해 검거된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남강의 세번째 옥살이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 이듬해에 열린 1차공판에서 남강은 다찌가와 주석 판사와 사카이 검사를 향해 이렇게 진술하였다.
"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이 땅 위에 인류를 창조하실 때 각 사람들에게 각각 자유를 누릴 권리를 주셨는데 우리 민족은 너희에게 이런 고귀한 자유를 다 빼앗겨 버렸다. 생각해 보라. 이런 굴욕은 곧 절망이요, 죽음인 것이다. 오랜 옛날부터 너희 일본은 우리 한국의 은의를 크게 입었던 나라이다. 그런데 그런 은의를 이처럼 원수로 갚다니 이보다 더 천벌을 받을 짓이 어디 또 있겠느냐. 우리는 최후의 한 사람까지 너희 칼날에 목이 잘리운다 할지라도 절대로 노예와 짐승이 되어 살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의 이번 만세운동은 하늘의 뜻이다. 그러니 우리 한국의 독립이야말로 곧 일본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점도 이 기회에 깨닫기 바란다."
남강의 3번째 감옥생활
무엇보다도 남강이 감옥생활 중에 얻을 수 있었던 위로는 성경을 통해서였다. 그는 그곳에 갇혀있는 동안 구약성경은 10번 신약성경은 40번 읽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감옥 실내청소와 변소청소를 자진하여 도맡아 했다. 그의 그런 모습은 오산학교에서와 다를 바가 없었다.
남강은 1911년 2월 ‘안악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끌려가 유배생활을 했다. 그 해 가을에는 105인 사건이 일어나고, 남강은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서울로 압송, 1912년 10월 윤치호 등과 징역 10년을 선고받는다. 그는 1915년 가출옥해 오산학교로 돌아가 학교와 교회일에 정성을 다했다. 1919년 3·1 운동 때에는 이 운동의 기독교 대표로 참가해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 일로 남강은 다시 종로 경찰서에 구속되고, 또 3년여의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일제의 그에 대한 감시는 끈질기고도 매서웠다. 그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일본 형사들이 따라다녔다. 그러나 남강은 기개를 조금도 굽히지 않고 오산학교 조회시간 때마다 연단에 올라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에게 쩌렁쩌렁 울리는 쇳소리로 단 한마디만 크게 외치고는 내려왔다.
“이놈들아, 정신 차려!”
그러면 일본 형사들은 자기들한테 떨어지는 호통인줄 알고 찔끔했다. 이는 그들에게 내리치는 질타이기도 했지만, 또한 학생들에게
못난 조국 못난 조상, 못난 과거사만 탓하지 말고 네 자신을 일깨워 새 조국의 역군이 되라는 준엄한 경책이었다.
오산학교 시절 이승훈장로의 별명은 호랑이였습니다. 그가 나타나면 ‘범이 온다’고 학생들은 숨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서 교육받은 수많은 학생들은 그 이후 이 민족을 깨우는 살아있는 호랑이들이 되었습니다.
1930년 남강은 67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타적인 삶을 살았고, 마지막 유언이 "낙심하지 말고 겨레의 광복을 위하여 힘쓰라, 내 유해는 땅에 묻지 말고 생리학 표본을 만들어 학생들을 위해 쓰게 하라"였다고 하니 그의 민족사랑과 교육열이 얼마나 투철하였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남강의 애족애민정신
나라 없는 놈이 어떻게 천당에 가? 이 백성이 모두 지옥에 있는데 당신들은 천당에서 내려다보면서 편히 앉아 있을 것인가?
공을 다투지 않는 남강
순서가 무슨 순서야. 이건 죽는 순서야. 죽는 순서. 아무를 먼저 쓰면 어때. 의암의 이름을 먼저 써.
자립심을 강조하는 남강
우리가 할 일은 민족의 역량을 기르는 일이지 남과 연결하여 남의 힘을 불러들이는 일이 아니다. 나는 씨앗이 땅 속에 들어가 무거운 흙을 들추고 올라올 때 제 힘으로 들추지 남의 힘으로 올라오는 것을 본 일이 없다.
요즘 이순신 장군의 말이 자주 방송에 나온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우리 대한민국의 국민이 이러한 각오를 갖는다면 무엇이 두렵겠나? 나라를 빼앗기면 자유도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