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는 ‘사랑은 없다’라는 책을 통해 말했다. “두 남녀가 뜨거운 사랑으로 사로잡혀 있을 때에는 그 둘 사이에 놓인 장애물이 무엇이거나 그들은 이미 신이나 자연의 이름으로 결합되어 있으므로 법과 관습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에 놓여 있는 것이며 둘은 하나의 신성한 권리를 공유하고 있다고 나는 늘 생각해 왔다.”
물론 아무리 대단한 성현의 말일지라도 진리가 아닐 수 있고 누구나 이의가 있을 수 있다. 어쨌거나 쇼펜하우어의 생각일 뿐이므로.
필자는 ‘남자와 성’이란 주제로 여러 차례 인터뷰와 설문작업을 하면서 한 중년남자의 이야기에 마음이 실렸다. 일반적인 경험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것 또한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도 있는 인생의 한 순간일 수 있을테니까. 돌을 들 것인지 손을 내밀 것인지 역시 각자의 판단일 것이다.
한 남자에게 찾아 온 때 늦은 사랑이야기
정태에겐 아내가 있다. 정태에게 결혼은 사고와 같았다. 아내의 적극적인 구애가 아니었다면 정태는 결혼을 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아내가 싫었다거나 결혼이 하기 싫었다는 것은 아니다. 불같은 사랑의 감정은 없었지만 그때 정태에게는 여자나 사랑보다 일이 더 재미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정태는 몰랐다. 정태의 아버지가 아내에게 정태 몫의 집이 있으니 들어와 살라고 했다는 것을.
아버지의 태도는 결혼 후 바뀌었다. 그게 화근이었다. 정태와 아내는 아파트에 들어가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정태의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 아내는 그런 아버지에 대한 섭섭함을 표현했고 서서히 서로를 미워하게 됐다. 정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계속해서 어긋나기만 하는 아내와 부모님과의 관계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맨 몸으로 집을 빠져나온 정태와 가족들은
치열한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첫째 지은이가 태어났다. 지은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많이 아팠다. 시간은 돈이었고 지은이의 생명이었다. 아직까지 제대로 된 직장을 다니지 못했던 정태는 수입이 일정치 않았다. 이대로는 길이 없어 보였다. 정태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돈을 벌 수 있는 곳으로 옮겼다. 벌어서 빚을 갚고 또 빚을 내서 지은이를 치료하고 반복되는 시간이었다.
정태에게 하루하루는 지은이의 더딘 치료의 시간보다 더 길었다. 끝이 없었다. 아내와 부모님의 대립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정태는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정태는 아내와 갓난아기를 데리고 집을 나왔다. 부모님은 매정하게 아무런 경제적인 도움을 주지 않았다. 정태에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맨 몸으로 집을 빠져나온 정태와 가족들은 치열한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정태에게 그녀가 나타난 것도 그 즈음이었다. 그녀는 회사의 막내직원으로 들어왔다. 작고 차분했던 그녀는 약간 냉정해 보였지만 예뻤다. 정태는 예쁜 직원이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이십대 중반의 그녀는 정태에게 딱 거기까지였다. 정태에겐 해결해야할 문제가 많았다. 일로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지만 그것으로 다였다. 정태는 얼마 후 그 회사를 나왔다. 좀 더 조건이 좋은 회사로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정태에게 그녀를 만나는 것은 왠지 모를 기쁨이었다
“선배님 잘 지내시죠? 저 밥 좀 사주세요.”
“선배님 요즘 뭐하세요? 저 술 좀 사주세요.”
그녀는 정태에게 자주 연락을 해왔다. 정태도 자신에게 유독 살가웠던 그녀를 거부하지 않았다. 밖에서 그녀를 만나는 횟수가 늘어났다. 그리고 횟수에 비례해 시간도 늘어갔다. 외근과 출장 야근을 밥 먹듯이 했던 정태에게 그녀를 만나는 것은 왠지 모를 기쁨이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를 같이 보러가자는 것이었다. 그 순간 문득 정태는 생각했다. 밀려가는 썰물처럼 자꾸 그녀에게 가는 마음을 어쩌지 못하는 자신을 멈춰야겠다고. 더 이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못 갈 것 같습니나. 더 이상 연락하지 마세요.
또박또박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제 이것으로 됐다. 그게 맞다.’
정태는 자신에게 수차례 주문처럼 얘기했다.
그녀는 정태에게 매일 전화를 했다. 정태는 받지 않았다. 또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받지 않는 것보다 차라리 받는 것이 쉬운 일이었다. 그랬던 정태는 자다가 엉겹결에 그녀의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울고 있었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좋았노라고. 다 알겠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한다고. 정태는 자신과 같은 그녀의 마음 앞에 무너졌다. 그렇게 둘의 만남은 시작됐다.
화도 안났다
다행이란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이 상황이 너무 슬펐다
그녀는 정태를 존경해주었다. 늘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해줬다. 집에서는 인간취급도 못 받는 자신에게 늘 훌륭하다고 말해주는 그녀에게 정태는 하루하루 무너져갔다. 그녀는 늘 정태를 배려해 주었다. 그녀는 정태가 쓸데없이 돈을 쓰는 것조차 싫어했다.
정태는 그녀와 함께 있을 때 비로소 편안함을 느꼈다. 함께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정태는 힘겨운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정태는 그녀와 함께 있는 순간만큼은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녀는 정태에게 위로이자 안식처였다.
그날도 변함없는 하루였다. 정태는 그렇게 느꼈다. 평소와 같은 그런 날이었다고. 그녀는 정태에게 할 얘기가 있다고 했다. 정태는 변함없는 그런 날의 변함없는 이야기를 주고 받을 예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아기가 생겼었노라고. 그리고 자신이 지웠노라고. 분명 평소와 같은 날일거라 확신했던 그 날 정태는 그녀에게 그랬었노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화도 안 났다. 다행이란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이 상황이 너무 슬펐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게 얘기해 줬다면 내가 용기를 내지 않았을까? 정태는 그런 생각도 했었음에 틀림없다. 아니 그런 생각을 했다. 그녀는 상처를 입었고 정태 역시 아팠다. 서로 어쩌지 못하는 현실 앞에 자신이 자신에게 상처를 내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1년이 지났고 2년이 지났고 또 시간이 지났다. 정태는 그럼에도 불구한 사랑을 놓지 못했다. 그 오랜 시간을 만나면서 단 한번도 가슴 설레지 않은 날이 없었다. 단 한 순간도 그녀가 그립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녀는 정태에게 축복이라 여겼다. 현실에서의 모든 고통도 그녀와 함께 하는 순간만큼은 잊고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정태에게 위로의 순간이었던만큼 그녀는 아팠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서른도 되지 않은 그녀가 지고 가기에 얼마나 무거운 짐이었을까. 정태와 그녀는 더 이상 서로 볼 수가 없어 헤어졌다. 그리고 서로 못보면 미치겠어서 다시 만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또 시간이 갔다. 정태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서서히 시간이 다하고 있다는 것을.
그 오랜 시간을 만나면서 단 한 번도 가슴 설레지 않은 날이 없었다
매정하게 돌아선 건 그녀였다. 싸운 적도 없었고 여전히 서로를 사랑했지만 그녀는 마지막임을 알고 있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서는 그녀를 정태는 잡지 않았다. 아니 잡지 못했다. 잡을 수가 없었다. 정태는 용기가 없었다. 나 하나 좋자고 모든 걸 버리고 돌아설 용기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갈 수도 없었다. 서너번의 이혼서류를 썼지만 정태는 그녀에게 갈 수 없었다. 정태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가지만은 확실했다. 누군가를 절실하게 사랑한단 감정을 느낀 건 그녀가 처음이었다. 정태는 그렇게 휘몰아치는 사랑의 감정을 앞으로도 가질 수 없을거라 믿었다.
그렇게 정태는 5년의 사랑을 마무리했다. 그녀는 정태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줬다. 여자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옆에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해주어야 하는지 정태는 몰랐었다. 그녀는 그런 정태에게 사람에 대한 배려를 가르쳐줬다.
정태는 그녀가 자기에게 해주었던 대로 아내에게 했다. 아내와의 싸움도 그쳤다. 이해할 수 없었던 아내의 말과 행동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정태는 속된 표현으로 일상생활로 돌아왔다.
그렇게 다시 5년의 시간이 흘렀다. 정태는 생각했다. 신이 있다면 왜 인생을 순차적으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지 않는걸까? 왜 이렇게 뒤죽박죽 헝클어 놓고야 마는 건지 궁금했다. 그녀를 좀더 일찍 만났더라면 정태는 행복했을까? 그녀를 먼저 만나서 사랑했다면 정태의 인생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을까? 아무도 대답해 줄 수 없는, 정태조차도 그랬을 거라 확신할 수 없는 미래의 현실이다.
정태는 새벽 4시가 지난 늦은 시간 차를 몰고 집을 나선다. 친구들과 만나러 나간 아내를 데리러 가기 위해서이다. 아내는 새벽에도 어김없이 정태에게 자기를 데리러 오라고 전화를 한다. 정태도 별다른 것 없이 당연하게 집을 나선다. 일상의 시간은 그렇게 가고 있었다. 정태에게 사랑은 그저 꿈속의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숙정 객원기자
첫댓글 소설인가요? 사랑의 감정은 숨긴다고 되는것은 아니징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