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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6. 묵상글 ( 사순 제2주간 월요일. - 자비 남용, 용서 남용.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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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6. 사순 제2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자비 남용, 용서 남용
오늘 독서와 복음 모두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에 관해 얘기합니다.
그래서 저도 자비와 용서에 관해 얘기하고자 하는데
오늘은 하느님 자비와 용서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집중코자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제가 남용하고 있다는 반성 때문입니다.
자비 남용, 용서 남용, 이것이 저의 태도입니다.
자비란 죄를 지었는데 죄지은 나를 하느님께서 용서하실 때
그 용서하시는 사랑을 특별히 일컬어 자비라고 하고,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용서해 주시는 사랑을 일컬어 자비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렇게 용서하실 때 저의 태도는 어떠해야겠습니까?
하느님께는 감사하고 다시 죄를 짓지 않는 것, 다시 말해서 반복하지 않는 것이고,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하느님처럼 자비롭고 용서하는 것이어야 하겠지요.
이러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잘못된 태도들이 있습니다.
우선 하느님 자비와 용서를 우습게 여기는 가장 나쁜 태도가 있습니다.
교만한 자의 태도이거나
세상 권력자의 자비와 용서가 필요하지
하느님 자비와 용서는 필요 없다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지는 않습니다.
그 정도로 교만하지 않고,
세상 권력자들을 제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심판하거나 용서할 사람이지
그들의 자비와 용서를 구할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을 정도로 저는 도도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에 대해 다음으로 잘못된 태도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래서 그것이 감사로 이어지지 않는 태도입니다.
복음에서 열 나병환자가 같이 치유 받았지만
이방인들은 주님께 감사하고 하느님을 찬미한 것과 달리
정작 이스라엘 사람은 당연하게 여겼기에 아무 감사를 드리지 않았지요.
저의 잘못된 태도는 이런 것도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저는 감사를 드리는 사람이긴 합니다.
그러나 잘못에서 돌아서지 않는 잘못을 또 범하는 것입니다.
저의 자비 남용과 용서 남용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을 약의 남용과 비유하면 좋을 것입니다.
약이 좋다는 것을 믿습니다.
아니, 믿는 정도가 아니라 과신합니다.
그래서 약만 믿고 나쁜 짓을 계속합니다.
간에 좋은 약을 믿고 술을 계속 먹는 다시 말해서 끊지 않는 것입니다.
저도 계속 용서하실 거라고 하느님 자비를 믿습니다.
이 믿음은 철석같고 찰떡같고 확고하지만, 과신이고 잘못된 믿음입니다.
과신이고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가 그렇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는 분명 계속됩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내가 뉘우치지 않고 고치지 않는 것이 과신이고 잘못입니다.
이는 부모의 사랑을 믿고 흥청망청 돈을 쓰고 나쁜 짓을 계속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다니엘서는 이런 저와 같은 이스라엘의 잘못에 대한 반성문입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고, 주 저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저희 앞에 내놓으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자비와 용서에 대한 잘못된 또 다른 태도는 이웃에 대한 것입니다.
내가 위로부터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받았으면
옆으로 그 자비와 용서를 이웃에게 베풀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는 것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 자비를 그렇게 받았어도 아직도
하느님 자비가 부족한 것처럼 자비하지 않은 것입니다.
얼마나 하느님께서 더 자비를 베푸셔야 내가 자비로 가득 찰지!
이런 저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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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6.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바람둥이 남자가 있습니다. 워낙 여자 문제를 많이 일으킨, 어느 날 동생이 형에게 “제발 정신 차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형은 어릴 때, 동생에게 엄마의 사랑을 빼앗긴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엄마가 동생만 챙기는 바람에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었고, 결국 지금의 인간관계까지 망치고 있다는 항변이었습니다. 이 남자의 바람기가 과연 어머니 때문일까요?
어떤 형제님은 어린 자녀에게 폭력을 자주 씁니다. 그러면 안 된다고 주변에서 말리자, 어렸을 때 자기 부모님께 맞았던 이야기를 합니다. 이 많이 맞은 경험이 자기 역시도 그렇게 폭력을 쓰는 사람이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형제님의 폭력성이 과연 부모 때문일까요?
이 두 사례 말고도 ‘~탓’을 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과거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거를 탓하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로써 자기의 문제로부터 도망가는 것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났고 절대 바꿀 수가 없으니, 자신의 문제도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나의 모든 문제가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 자기는 늘 올바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지금 모습을 변화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탓’만 하면서 지금 모습을 계속하고 싶을 뿐입니다. 나는 문제 없으니 그냥 이대로 살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그 모습으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나의 문제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에도 문제를 넘기게 되어서 모두 힘들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자비로우신 아버지’라고 선포하십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따라 하게 됩니다. 따라서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받아들일 때,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하지 않는 삶, 단죄하지 않는 삶, 용서하는 삶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문제는 하느님을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앞선 예에 등장하는 사람처럼, ‘~탓’을 하는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면 자기도 그러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사랑의 삶을 그대로 되갚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삶을 그저 따를 뿐인데도, 그런 삶을 살 때 더 많은 은총과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탓’을 하는 삶에서 철저하게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비로우신 아버지’에 집중하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을 보고 또 이를 따르는데 철저한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에게 문제 되는 것들을 과거의 일로 해결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지금, 그리고 나 자신이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과거에 매이지 않고 올바르게 지금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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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인생의 목적은 우리의 자유를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을 찾는 데 있다(휘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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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6.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이는 단지 우리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말씀인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왜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지를 깨우쳐줍니다. 다시 말해서, 이는 자비로운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먼저’ 자비를 베푸셨다는 사실, 곧 우리는 아버지의 ‘먼저 베푸신 자비’를 입었다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나아가서, 우리 안에 당신의 거룩한 형상인 ‘자비의 얼굴’을 심어놓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바로 그 ‘자비의 얼굴’을 드러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비를 베풀 것인가?
이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동사로 표현하십니다.
“심판하지 말라”, “단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어라”
그러니 ‘자비의 실천’은 우선 심판과 단죄를 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악을 피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허물을 심판하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허물을 들여다보며, 타인들 앞에 자신을 앞세우기보다 자신을 다소곳이 내려놓고, 겸손하게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먼저’ 용서와 자비를 베푸셨듯이, ‘먼저’ 용서를 베푸는 것입니다. 묘한 것은 ‘먼저’ 용서하면, 저절로 단죄와 심판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곧 ‘단죄,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용서하면 단죄, 심판하지 않게 됩니다. 이는 악을 피하되 선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비록 자신이 죄에 떨어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사랑으로 나가지는 못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국, 악이 스스로 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선을 베풀면 악이 물러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선을 행하는 것이 악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됩니다. 그러니 어둠을 저주하기보다 한 개의 촛불을 켜야 하고, 평화를 보존하려하기보다 평화를 창조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0,21)
그러니 우리는 ‘용서할 수가 없다’고, 혹은 ‘용서가 안 된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나아가서 이미 용서받은 죄인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용서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아직도 용서하지 않고 있는 자신마저도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죄를 주님께 용서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용서하시니 우리도 용서하는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주님!
당신께서 자비하신 것같이 자비로운 자 되게 하소서!
제 안에 심어진 자비가 저를 다스리게 하소서.
제 안에서 자비가 흘러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자비 안에 심어 둔 당신의 거룩한 형상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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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6.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성직자의 어려운 점을 농담 삼아 얘기합니다.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면 “너무 직선적이야”하고, 지적하지 않으면“너무 타협을 하는구만!”하고 말합니다. 강론할 때 원고를 보고 하면, “너무 딱딱하고 재미없어”하고 원고 없이 하면, “왠지 깊이가 없는 것 같애”하고 말합니다. 여러 예화를 들면, “성경 말씀은 도대체 하질 않는구만!”하고 예화를 안 하면“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않아”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관심을 두면 “인기 끌려고 그러는구만!” 하며 부자와 가까이 하면 “돈 있는 사람만 좋아하고 너무 귀족적이야!”하고 말합니다. 이래저래 한 소리 들으니, 성직자가 고집스러워지나 봅니다.
누구에게 칭찬받는 것은 자기의 역할에 관계없이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꾸중을 듣는다든지 비판을 받게 된다면 아무래도 기분이 상하며 마음에 화를 쌓게 됩니다. 그러나 좀 더 넓은 마음으로 생각해 보면, 나를 부정적으로 생각한 그는 나를 바로 보게 도와준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장의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바른 인생길을 알려는 사람은 훈계를 달갑게 받고 미련한 사람은 책망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잠언12,1). 상대의 비판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자비로운 충고로 그를 구원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6,3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받기 위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얼마나 넓고 깊은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결국 그대로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주시지만, 담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으면 혜택을 입을 수 없습니다.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는 이웃을 비판하지 않는 데서 비롯됩니다. 교부 푀멘은“비판과 험담의 주제에 있어서는 그것들을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고 마음속에서 파헤칠 필요조차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마음속에서 확실하게 분별하고자 하더라도 그것이 이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판과 험담하는 입은 스스로 멸망할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비방하고 험담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누구에게 충고하려거든 자기 자신에게 먼저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충고를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피해를 주고 아프게 하였다면 그 사람이 악해서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보다 약해서 악의 세력에 이용당했다고 생각해 보면 어떨지요? 악의 세력은 인간의 연약함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모두를 선한 마음으로 바라보면 선한 능력이 크게 드러나게 되고 악의 세력은 발붙일 곳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마라. 그렇다고 선한 이라도 그를 우상처럼 섬기지는 마라.”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험담은 무엇입니까? 남의 잘못된 점이나 흉을 들추어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험담은 진실한 것도 아니고, 선한 것도 아니며,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험담은 단 하나 상처만 깊게 남길 뿐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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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6.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나무를 옮겨 심으면 몇 달은 몸살을 앓는다고 합니다.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적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뉴욕에서 댈러스로 오면서 저도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지리를 파악해야 합니다. 성당까지는 걸어서 40분이면 가기에 걸어 다니려고 합니다. 꼭 가야할 곳을 알아야 합니다. 마트, 은행, 주유소, 식당, 미장원, 병원, 차량 정비소, 산책로 등을 알아 두면 좋습니다. 두 번째는 사람입니다. 본당의 봉사자들을 파악해야 합니다. 얼굴과 이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전처럼 기억력이 좋지 않으니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직원들을 알아야 합니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쁠 때 함께 기뻐해 주고, 슬플 때 함께 마음 아파해 줄 사람을 아는 것은 복입니다. 셋째는 업무를 숙지해야 합니다. 12년 만에 본당 사목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기에 미국 교회와도 소통을 해야 합니다. 33년을 사제로 지내고 있지만 본당 사목은 늘 새롭고, 긴장이 됩니다. 본당 사목은 장기계획과 단기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댈러스 성당은 3년 후면 설립 50주년이 되기에 그에 맞는 계획을 세워야 하고, 매년 본당이 가야할 방향을 제시해야 합니다. 내년쯤에는 저도 이곳 댈러스에 뿌리를 내리고, 여유 있게 지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한국에서 오지 않고, 뉴욕에서 왔기에 좀 더 빨리 적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주민등록과 비슷한 쇼셜넘버를 이미 받았기에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운전면허증도 뉴욕에서 이미 받았기에 텍사스 면허로 바꾸기만 하면 됩니다. 은행 계좌도 이미 개설했기에 이용에 불편함이 없습니다. 그린카드를 받았기에 비자 때문에 한국에 다녀오지 않아도 됩니다. 5년 전에 동창 신부님의 초대로 2달을 지냈습니다. 그때 만났던 분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니 마치 집에 온 것처럼 낯설지 않았습니다. 뉴욕에서 자동차로 여행을 하면서 왔기 때문에 시차도 느끼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바로 옆 본당에 서울 교구에서 파견된 신부님이 있어서 서로 도움을 줄 수 있어서 좋습니다. 사순특강을 서로 바꾸어서 하기로 했습니다. 작년부터 서울 교구에서 보좌신부님을 파견해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영어도 잘 하시고, 겸손하십니다. 부모님이 미국에서 살기 때문에 부모님을 만나기도 좋다고 합니다. 뉴욕에서 함께 온 신부님들이 사제관의 불편함을 모두 해결해 주었습니다. 인터넷을 업그레이드 했습니다. 문도 열쇠 키에서 번호 키로 바꾸었습니다. 컴퓨터의 선도 모두 정리해 주었습니다. 모든 것이 감사할 일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품 안에서 잘 지낼 수 있는 방법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악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하느님께로 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첫째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벗어난 나의 허물과 잘못을 성찰하는 것입니다. 다시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벗어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 사도는 천국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초대교회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사순시기는 ‘회개의 시간’입니다.
둘째는 ‘청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셋째는 ‘선행’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이 10명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선한 사람은 어두운 밤하늘의 별과 같습니다. 세상은 선한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며,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살아간다면 어떤 악의 세력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맺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저희 구원의 하느님,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저희를 도우소서. 저희를 구하소서. 당신 이름 위하여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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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6.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의 주제는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입니다.
주님을 닮은 단어들을 나열하면 그 가운데 ‘용서’가 꼭 들어갑니다. 용서는 주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용서는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 삶의 시간을 통해서 용서가 쉽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며 지내왔을 것입니다. 어떤 상처는 짧은 시간만으로도 혹은 간단한 마음 바꿈으로 용서라는 말을 우리 입에 담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상처는 시간이 지나고 또 지나도 용서 근처에도 못 가는 상처들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용서를 권하십니다.
예전에 발간된 소설 중에 ‘오두막’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소설이 있습니다. 그 소설 속에 아빠는 유괴범에게 딸을 잃었습니다.
그는 유괴범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또한 그 자신도 용서하지 못합니다. 추운 겨울 딸의 주검이 발견된 오두막에서 그는 잠이 듭니다. 그리고 하느님과의 용서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그는 어릴 적 자기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을 학대했던 아버지를 다시 만납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용서하게 됩니다.
차츰차츰 용서의 깊이를 더해가고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과 유괴범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때 하늘의 천사가 된 딸아이가 아빠 앞에 나타납니다. 딸은 아빠를 안아줍니다. 꼭 ‘아빠 잘못이 아녜요. 난 아빠가 행복하길 바라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는 절규합니다. 하느님은 그에게 말합니다.
한 번으로 되지 않을 거야. 수백 번, 수천 번 시도해야 할지도 몰라. 그래도 네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용서는 이루어질 거야. 네 딸이 원하는 그 자유와 평화안에서….
용서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용서는 용서라는 선물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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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없이는 못살아
갑자기 라디오에서 이 노래가 들려왔습니다.
만약에 김치가 없었더라면
무슨 맛으로 밥을 먹을까
진수성찬 산해진미 날 유혹해도
김치 없으면 왠지 허전해
김치 없이는 못살아 정말 못살아
나는 나는 너를 못 잊어
맛으로 보나 향기로 보나 빠질 수 없지
입 맛을 바꿀 수 있나….
-김치 주제가, 김혜연-
설렁탕에 깍두기
칼국수에 겉절이
짜장라면에 파김치
갓김치
김치의 종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왜냐하면 모든 가정의 김치맛이 다르기 때문이다.
오늘은 뜨거운 밥에 맛난 김치 얹어서…. 저녁 먹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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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6.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닮의 여정, 예닮의 여정
평생 과제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
근래 ‘시대의 스승’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없이 장일순((1928-2010)과 신영복(1941-2016)을 꼽고 싶습니다. 두분의 글씨도 참 깊고 독특하고 향기로운 예술입니다. 두분의 평전도 감동적이라 보관중이며 가끔 읽고 있습니다. 장일순에 대한 평과 사례를 소개합니다.
“시인 김지하의 스승이었고, <녹색평론>발행인 김종철이 단 한 번 보고 홀딱 반했다는 사람, 목사 이현주가 부모없는 집안의 맏형같은 사람이라 했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유홍준은 어디를 가든 함께 가고 싶다 했던 사람, 소설가 김성동과 <아침이슬>의 김민기가 아버지로 여기고, 판화가 이철수가 진정한 뜻에서 이 시대의 단 한 분의 선생님이라고 꼽았던 사람, <사상의 은사>라는 리영희가 존경했던 분...”
무위당 장일순에게 감화를 받은 분들은 얼마나 많은지 모르며 이분에 대한 찬사글도 끝없이 많습니다. 그의 감동적인 소개글 하나 나눕니다.
“무슨 일을 하느냐보다 그 일을 어떻게 할 지를 소중하게 여기라 하며, 공무원에게는 민(民)을, 장사꾼에게는 손님을 하늘처럼 섬기며 정성을 다하라고 말했다. ‘자네 집에 밥 잡수러 오신 분들이 자네의 하느님이여. 그런줄 알고 진짜 하느님이 오신 것처럼 요리를 해서 대접해야 해. 장사 안 되면 어떻게 하나 그런 생각은 일절 할 필요가 없어요. 하느님처럼 섬기면 하느님들이 알아서 다 먹여주신다 이 말이야.
장일순은 길을 가다가도 아는 사람을 만나면 세세한 가정사를 묻고 어른들의 안부를 살폈다. 리어카를 끄는 사람이든 바구니 장사든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이것저것 여러 가지 사연도 따랐다. 김지하의 말에 따르면 봉산동 집에서 20분이면 충분한 거리를 보통 2시간씩 걸리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
정말 예수님의 제자다운 참으로 누구나에게 활짝 열려 있는 경청의 자비롭고 너그러운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생 과제를 제시합니다. 아버지처럼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에 이은 결정판 같은 말씀이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입니다.
우리의 ‘거룩함(holiness)’은 하느님의 ‘온전함(wholeness)“을 보여줘야 합니다. 거룩함이 온전함이며 영어발음도 같습니다. 참으로 자비로운 삶이 거룩한, 온전한 삶입니다. <둥근 마음, 둥근 삶> 제 책명이 가리키는 바역시 자비로움입니다. 루카복음에서 예수님은 평지설교의 결론이자 우리의 평생과제를 제시합니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하느님의 얼굴도, 이름도 한마디로 정의하면 “자비”입니다. 하느님을 닮을수록 자비로운 사람이요 이것이 바로 우리의 평생과제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 자비의 화신입니다. 그러니 하닮의 여정, 예닮의 여정의 궁극 목표는 주님을 닮은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어지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는 가르침에서 자비행의 구체적 지침을 주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바로 남을 심판하지 않는 사람이, 남을 단죄하지 않는 사람이, 끊임없이 용서하고, 주는(giving) 사람이, 섬기는(serving) 사람이, 돌보는(caring) 사람이, 나누는(sharing) 사람이 하느님을, 예수님을 닮은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자기를 모르는 무지의 교만하고 인색한 사람이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지, 정말 자기를 아는 겸손하고 관대한, 지혜로운 자비의 사람은 결코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않고, 무조건 용서하고 주고 나누고 돌보고 섬깁니다.
새삼 자비로운 삶도 영적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자비로운 삶을 선택하여 평생 훈련으로 습관화할 때 비로소 아버지를 닮은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갈 것입니다.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라 합니다. 마지막 천국문 통과시 주님께서 검사할 마음의 얼굴입니다. 얼마나 아버지를 닮은 자비로운 얼굴인지 말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에서 예언자 다니엘의 동포를 위한 기도가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의 심금을 울립니다. 자비행에 앞서 이런 진실한 기도와 회개의 실천이, 훈련이 우리를 하느님을 닮은 자비로운 사람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그러니 한결같은 자발적 자비행과 기도와 회개의 훈련 및 습관화입니다.
“아, 주님! 위대하시고 경외로우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분!...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고,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저희 앞에 내놓으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습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기 위한 훈련에 앞서 이런 철저한 기도와 회개가 우선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우러러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 우선입니다. 하느님을 우러러 회개가 없기에,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내로남불, 인면수심(人面獸心), 후안무치(厚顔無恥)의 괴물같은, 자기를 모르는 무지의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기본적 정서인 부끄러움과 두려움의 자기인식을 전제로 한 자비로운 삶, 바로 이것이 올바른 순서입니다.
하닮의 여정, 예닮의 여정중 날로 주님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 우리의 평생과제요 이런 사람이 진정 참사람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한결같은 자비의 훈련에 항구함으로 자비로운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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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6. 사순 제2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7-38)
남을 심판하지 말고 네 허물을 돌아보라
그분은 우리 마음에서 교만의 싹인 이 걷잡을 수 없는 욕정을 잘라 버리십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반성하고 하느님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의무건만, 남들 일에 참견하느라고 바쁘기만 합니다. 그리스도의 한 제자가 말했듯이, “자기 형제를 심판하는 자는 법을 헐뜯고 법을 심판하는 것입니다.”(야고 4,11). 법을 만드신 분과 심판하시는 분은 한 분입니다. 죄짓는 영혼을 심판하는 분은 그 영보다 높은 분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죄인이 오히려 심판자의 자격을 따지고 들 것입니다. 어째서 그대는 이웃을 심판합니까? 자격도 없으면서 이웃을 정죄하면, 정죄받는 것은 그대 자신입니다. 그대가 남을 심판하는 것을 율법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다른 이의 죄를 찾거나 이웃의 허물을 들추느라 바쁜 대신, 자신의 잘못을 성찰하겠지요. 하느님 앞에 엎드려, “주님, 당신께서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님,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시편 130,3)라고 고 백한 시편 저자야말로 복된 사람입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앞세우며 그는 다시 용서를 탄원합니다. “우리가 티끌임을 기억하소서"(시편 103,14).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3 피조물은 하느님이다
피조물이 하느님을 드러내는 곳에서 하느님은 하느님이 되신다
창조계는 선 그 이상이다. 하느님 안의 창조계는 하느님이기도 하다. 우리는 앞의 설교에서 이 표현을 접한 바 있다. 피조물과 창조주의 신적 관계는 창조주 쪽에서의 강렬한 사랑 - 사랑과 기쁨 - 의 관계다. 하느님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똑같은 사랑으로 모든 피조물을 사랑한다.
또한 하느님은 만물을 누리되, 만물을 피조물로 여기지 않고 하느님으로 여긴다. 피조물, 곧 하느님의 말씀은 선할 뿐 아니라 신성하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피조물을 신성한 것으로 경험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엑카르트가 지적한 사람들처럼 우리의 시야는 좁고 소심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 “어딘가에 앉아서 나의 빵을 먹고 하느님을 섬기겠다”고 말할 것이다. 가엾기 그지없다. 너무나 하찮은 것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들의 고향은 하느님과 신성이건만. 그들은 자신들의 물리적인 집을 고향으로 여길 따름인 것이다.(127)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마태 12,1-13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
또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 본 적이 없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시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자리를 옮겨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마침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어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을 잡아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니 안식일에 좋은 일은 해도 된다.”
그러고 나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다른 손처럼 성해져 건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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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6.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 그대 나>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루카 6,37)
하느님 안에
나 있듯이
내 안에
하느님 계시고
하느님 안에
그대 있듯이
그대 안에
하느님 계시어
내 안에
그대 있고
그대 안에
나 있으니
나는 그대요
그대는 나일지니
나 볼 때에
그대 보듯이
그대 볼 때에
나 보듯이
그리하여
나와 그대는
그리하여
그대와 나는
서로 믿음이요
서로 희망이요
서로 사랑이요
서로 용서요
서로 자비요
서로 살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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