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바로크(17세기 프랑스)
17세기 프랑스는 인구가 증가하였고, 중앙집권화된 군주제를 갖춘 유럽 최고의 강대국이었다. 스페인으로부터 유럽의 패권을 완전히 이어 받았다.
16세기의 프랑스는 이태리로부터 르네상스 정신을 성공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종교 전쟁(위그노 전쟁)에 휘말리어 국력은 고갈하고, 예술은 메말라진 상태에서 1600년을 맞이 하였다.
루이 14세는 건축분야에는 활기를 불어 넣었으나 회화는 1640년대가 되도록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이 프랑스 출신이면서 이름이 쟁쟁한 화가인 모이스 발량탱, 푸생.클로드 로랭 등은 로마에서 활동하였다.
궁정미술은 루이 13세의 왕권이 강화되면서 처음으로 나타났고, 루이 14세는 예술의 총량을 궁전 예술에 쏟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루이 14세는 베르사이유 궁전을 짓고, 장식하는데 모든 예술적 역량을 집중하였다. 베르사이유 건설은 1661년에 시작하여 거의 30년이나 계속하였다. 17세기 말에는 다양한 장식물로 치장한 베르사이유 궁전이 절대군주 시대 미술의 최고 형태로 등장하였다. 18세기의 유럽은 이 궁전을 본받아서 궁전 건축을 하였다. 이로 인해 프랑스 미술이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루이 14세 때의 재상 콜베르는 국가 정책으로 많은 아카데미를 세우면서 예술의 중흥에 국가가 한 몫을 담당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아카데미 활동이 예술적 취향과 지적인 발전을 주도하였다. 콜베르는 예술분야 뿐 아니라 직물이나, 공예, 기술 등 모든 분야에 아카데미를 세워서 육성하므로 국가가 필요로하는 공산품을 다량 생산하여 수입에서 수출로 발전시켰다.
다른 나라도 프랑스를 본 받아서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자국의 미술과 산업을 진흥하였다.
1. 시몽 부에(Simon Vouet 1590-1649)
회화에서 프랑스 화파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미술의 탄생은 시몽 부에가 파리로 돌아온 1627으로 본다. 시몽 부에는 로마에 15년간 머물면서 그림을 그렸으나 프랑스 미술을 재건하려는 앙리 4세의 부름을 받고 파리에 돌아왔다.
이태리에서 티티아노, 베로네세, 틴토레토, 카라바지오 등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파리로 돌아와서는 밝고, 명랑한 색채를 사용한 장식적 회화로 화풍을 바꾸었다. 그러나 궁정미술에 부응하지 못하여 루벤스를 불러서 궁전 장식을 하였다. 또 시몽 부에에 실망한 리쉴리에는 역시 로마에서 활동하고 있던 푸생을 불렀다.
68. 최후의 만찬 1620
69. 십자가 형 1622
2. 발렌틴 드 볼로뉴(1591-1632)
로마로 가서 시몽 부에와도 같이 활동했고, 카라바지오의 영향을 받았다.
70. 최후의 만찬 1626
71. 유디트 1626
3. Georges de la Tour(죠르주 드 투르 1593-1652)
오래 동안을 미술사에서 이름이 없는 화가로 지내왔다. 카라바지오의 화풍으로 그리는 무명화가의 작품으로 치부하였으나 최근에 와서 재조명을 받았다. 1972년 파리 전시회에서는 그의 작품이 발견되면서 평가도 새로워 졌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그가 이태리로 여행해서 카라바지오의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추측하고 있다. 젊었을 적에는 카라바지오 회화를 충실히 따랐다.
최근에 와서 평가를 받는 이유도 당시에 유행하던 그림 양식에서 단순화하므로 근대 그림의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는 낮과 밤의 표현을 촛불을 밝히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년륜이 쌓이면서 사실적 그림(realism)을 그렸다. 그의 그림은 프랑스 고전주의 화파로 이어지는 흐름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는 구도와 인체 표현을 대체로 단순화 시켰다. 아내의 고향인 루네빌레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1620년 이후에)
그러나 곧 페스트의 유행과 전쟁으로 도시는 황폐화되고, 그의 초기 작품들도 많이 유실하였다. 세상이 조금 조용해지자 다시 고향인 루네빌레로 돌아와서 1652년에 죽을 때까지 보냇다.
72. 점쟁이 1635
73. 막달라 마리아 1643
74. 성 제롬 1630
75. 신생아 1648
성 제롬(347-420)
수도에만 전념한 성실한 기독교인으로, 유명한 신학자이다.
4. Nicolas Poussin(1594-1665)
푸생은 세느강 하류인 노르망디 지역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판사가 되기를 바라Tdmsjk 18세 때인 1612년에 아버지 몰래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 라파엘의 판화를 보고 이태리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베네치아를 거쳐서 1624년에 로마에 도착했다.
17세기의 로마는 푸생의 화풍과는 다른 바라크 미술이 유행하였다. 푸생은 거의 독학으로 뎃생에서는 라파엘을, 색채에서는 티치아노를 배웠다. 또 로마의 조각을 공부하므로 그의 그림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또 카라바지오도 배웠고, 볼로뉴 미술학교(카라치가 세운)에서 귀도 레니의 화풍을 배웠다.
그는 대형 종교화를 주문받기에 어려움을 겪자 가정집에 걸 수 있는 소품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은 특히 프랑스에서 부자들에게 인기를 얻으면서 그의 이름은 프랑스에 널리 알려졌다.
그의 회화에 나타난 인물 묘사는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을 따랐다. 감정 표현은 풍부하지만 자연스러움이 모자란다는 평을 들었다. 그래서 감상자에게 감동을 적게 준다는 평을 들었다. 그는 외양보다는 정신의 표현이 중요하다면서 시각적인 색채보다는 형태의 구성에 더 역점을 두었다. (즉 연극적인 구성을 하였다.)
이런 이유로 그의 그림은 문학적으로 표현하였다는 말을 듣는다. 말하자면 그림 속에서 이야기를 엮어가는 능력이 뛰어난 위대한 화가라고 하였다. 그는 이야기를 엮는 위대한 화가인 동시에 위대한 신화의 창조자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귀족 가문에서 자라면서 인문학 공부를 하였고, 화가 생활을 하면서도 독서량이 무지하게 많았다고 한다. 그는 대화에서도 남을 가르치려 하지 않았지만 대화 속에 풍부한 지식이 있어서 사람들이 많은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그의 그림은 마치 무대 예술의 연출처럼 구도, 배치, 구성, 심지어는 인물의 자세까지도 세심하게 배려하였다. 그래서 머리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믄 말도 들었다.
1640년이 되면 프랑스에서 궁정화가로 초대하였다. 그러나 2년을 머문 후에 다시 로마로 돌아갔다. (프랑스 화가의 질투와 궁전 생활의 부적응이 이유라고 한다.)
로마에서 죽을 때까지 화가의 보편적인 생활을 하면서 행복하게 보냈다. 그러나 말년에 나타난 그의 그림의 특징은 ‘풍경화’를 그렸다는 것이다. 그의 풍경화는 자연 그대로가 아니고, 정신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변형하고, 연출한 풍경이었다.
이후 프랑스가 유럽의 예술에 중심 역할을 하면서 푸생의 고전주의가 큰 영향을 미친다. 특히 아카데미즘에 흡수되므로, 푸생은 유럽 미술에 공적을 세운 만큼 규범화하는 잘못도 초래했다고 하지만, 그것이야 푸생이 저지른 죄과가 아니지 않는가.
77. 박카스 축제를 즐기다. 1633
78. 아폴론과 디프네 1625
79. 미다스와 박카스 1630
80. 게르마니쿠스의 죽음 1627
81. 에라스무스의 순교 1628
82. 동방박사의 경배 1633
83. 아르카디아의 목자들 1640
84. 홍행 건너기 1634
85. 연주와 춤추기 1640
86. 포시온 시신을 아테네로 옮기는 풍경 1648
87. 오르페우스와 유디시스 1648
88. 풍경(호머 서사시의 한 장면) 1649
5.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 1600-1682)
17세기를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풍경화가라고 한다.
1613년에 로마에 가서 1619-21년 사이에 나폴리에 머문 일이 있다. 그 이외는 사뭇 로마에서 살았다. 로마의 Tassi 아카데미에서 로마의 풍경화를 배웠다. 그는 근대 회화에서 풍경화라고 부를 수 있는 첫 번 째 화가로 꼽는다.
그는 자연을 면밀히 관찰하고, 야외에서 직접 스케치 했다. 초상화에는 재능이 떨어진다는 평도 듣는다. 또 그림의 마무리는 그의 제자에게 맡긴다는 말도 있다. 그의 그림은 시적 분위기를 자아내므로 푸생처럼 엄격하지 않다고 한다.( *푸생도 말년에는 풍경화를 많이 그렸지만 고전주의 양식이 강하여 딱딱한 느낌을 준다고 한다. ) 고대 로마의 한 장면이 아니고 향수를 자아내는 고대의 풍경으로 표현하였다.
로마의 시골 풍경을 정서적으로 그렸다.
그러나 푸생과 클로드 로랭을 17세기 프랑스 고전주의 풍경화의 두 거장이라고 말한다.
클로드 로랭은 영국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090. 풍경 1 이삭과 레베카 결혼 1648
091. 풍경 2 이집트로 피난 가는 중의 휴식 1647
092. 풍경 3 아폴론과 --- 1645
093. 풍경 4 트로이 전쟁 장면, 1643
094. 풍경 5 항구(갈라테아와 --) 1657
095. 풍경 6 항구 1674
6. 루이스 르 낭 (Louis Le Nain 1593-1648)
프랑스 아카데미의 고전주의는 푸생과 르낭이 이끌었다고 한다. 그는 애조 띈 시골 생활을 전문적으로 그렸다. 그의 인생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어린 시절을 북부 도시인 리옹의 인근에서 농민들과 생활하였다.
그는 플랑드로의 화실에서 일한 뒤에 1629-30년에 로마로 여행한 후에 파리에 정착했다.
그의 형제들도 화가로서 같이 일을 했다.
096. 농부의 가족 1642
097. 농부의 식사 1642
7. 펠리페 드 샹파뉴(Phillipe de Champaigne 1602-1678)
1621년에 파리로 가서 푸생을 만나 같이 작업을 하였다. 마리 드 메디치에 의해서 궁정화가로 임명되어 루이 13세 궁전에서 일했다. 그는 루이 13세와 리쉴레위의 초상화를 그렸다.
초상화에는 내면의 정신도 잘 드러낸다는 평을 듣는다. 그의 그림은 프랑스의 우아함과 플랑드로의 정신 표현이 잘 어우러져 있다고 한다.
1648년에 데브론과 프랑스 아카데미의 핵심 멤버가 되었다.
098. 리키리우스의 초상화(3시점)
8. 찰스 레브룬 (Charles Lebrun 1619 -1690)
프랑스 아카데미 창설자로서 루이 14세의 궁정화가 책임자 역을 맡았다.
15세 때 시몽 부에에게 배웠다. 1642년(이때는 프랑스 궁전화가로 일할 때이다.) 로마로 갔다. 로마의 화풍과 푸생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는 그림의 구도와 인체의 자세를 면밀하게 관찰한 후에 연출에 의하여 구성하였다. 프랑스로 돌아와서 궁중화와 종교화를 많이 그렸다.
099. 성 가족(잠) 1655
9. 리가드
100. 리가드의 루이 14세 1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