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토)
* 시작 기도
주님...
저는 선생과 아비가 된 자로서 말에 실수가 많은 자입니다.
말을 하게 하는 우리의 혀는 불이요 불의한 세계라 할 정도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를 것인데 그 혀마저 불에 의해 사라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약 3:6).
말에 실수가 없는 자이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천명하며 그런 사람은 자신의 몸 전체를 잘 제어하며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인데 이 죄인은 그러하지 못합니다.
혀에 재갈을 물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말을 한 후에 얼마나 후회를 하는지요.
샘 하나에서 단물과 쓴물을 낼 수 없는데 어찌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솟구쳐 나오는지 나의 입을 도려내고 싶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연약한 자임을 알기에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주의 은혜가 아니면 한 순간도 살아 있을 수가 없기에 주님의 긍휼을 구합니다.
이 종을 불쌍히 여기사 은혜를 베푸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오늘 아내가 이곳 베트남에 오는 날인데 몸이 심하게 아파서 너무 힘들다고 합니다.
아내에게 힘을 더하셔서 감당할 수 있는 은혜를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왕상 15:25-32
제목 : 그가 악을 행하되 그의 아버지의 길로 행하며
25 유다의 아사 왕 둘째 해에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 2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26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의 아버지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한지라.
27 이에 잇사갈 족속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가 그를 모반하여 블레셋 사람에게 속한 깁브돈에서 그를 죽였으니 이는 나답과 온 이스라엘이 깁브돈을 에워싸고 있었음이더라.
28 유다의 아사 왕 셋째 해에 바아사가 나답을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고
29 왕이 될 때에 여로보암의 온 집을 쳐서 생명 있는 자를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다 멸하였는데 여호와께서 그의 종 실로 사람 아히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으니
30 이는 여로보암이 범죄하고 또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죄로 말미암음이며 또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엽게 한 일 때문이었더라.
31 나답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32 아사와 이스라엘의 바아사 왕 사이에 일생 동안 전쟁이 있으니라.
* 나의 묵상
맨 처음 발자국을 남기는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이유는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 발자국을 밟고 지나가기 때문이다.
첫 번째 사람이 개척자 정신의 사명을 가지지 않으면 그 뒤를 따르는 사람 역시 그 자리를 벗어나기가 힘들다.
나는 어렸을 적 겨울에 눈이 정말 많이 오는 시골에서 살았다.
학교에 가려면 30분 정도를 걸어가야 했는데 간밤에 눈이 와서 많이 쌓여 있는 날이면 어린데다 작은 체구에 눈길을 걸어가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럴 때 나보다 앞서간 사람의 발자국을 밟고 가면 그래도 수월했던 기억이 난다.
그것은 어린 나에게는 또 하나의 놀이가 되기도 했다.
앞서 간 사람의 발자국을 밟으면서 노래와 함께 통통 뛰며 따라가는 것은 또 하나의 재미였다.
이와 같이 앞서 간 사람의 발자국은 뒤를 따라오는 사람의 삶의 지표가 된다.
하나님께서 우묵구덩이에서 건져낸 여로보암을 들어서 북이스라엘을 맡기셨는데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 죄 가운데 빠져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 되고 말았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쉐마하며 살았더라면 아마도 그의 뒤를 따르는 많은 왕들이 그처럼 한결같이 죄의 길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의 첫 발자국을 뗀 여로보암이 죄의 길로 향하는 발자국을 남기므로 해서 그 뒤를 따르는 모든 왕들이 여로보암의 발자국을 아무런 거리낌도 생각도 없이 밟고 지나간 것이다.
그 발자국을 따른 첫 번째 사람이 바로 나답이다.
그런데 다음 본문이 시작되는 부분에는 나답을 배반하고 왕으로 등극한 바아사 역시도 여로보암의 발자국을 따랐다고 증언하고 있다(34절).
게다가 하나님의 말씀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시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로보암의 아들이 병에 들어 죽게 되었을 때, 여로보암이 그의 아내를 변장시켜 선지자 아히야에게 보내서 아이가 어떻게 될지를 묻고 오라고 하였다.
그 아내를 향하여 아히야가 이렇게 말하였다.
(왕상 14:10-11) 그러므로 내가 여로보암의 집에 재앙을 내려 여로보암에게 속한 사내는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나 다 끊어 버리되 거름 더미를 쓸어버림 같이 여로보암의 집을 말갛게 쓸어버릴지라.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가 성읍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니라.
이런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나답을 통하여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왕상 15:29) 나답이 왕이 될 때에 여로보암의 온 집을 쳐서 생명 있는 자를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다 멸하였는데 여호와께서 그의 종 실로 사람 아히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으니
우리 아버지는 매우 엄하신 분이셨다.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 하나에도 어머니나 내가 놀라서 가슴을 쓸어내릴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나는 어려서 개구쟁이 짓을 많이 해서 아버지로부터 많이 맞았다.
내 생각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아버지는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으셨다.
나는 생각하기를 내가 커서 어른이 되어 아이들을 낳으면 절대로 아버지처럼 키우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다.
그런데 결혼 후 아이들을 낳고 키우면서 아이들 앞에 선 나의 모습을 보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들을 혼내고 때리는 그 모습은 영락없는 내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그때 깨달은 것이 있다.
어렸을 때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말이다.
나의 신앙의 모습은 어떤가?
그런 아버지 밑에서 신앙을 배워 왔다.
엄격하게 신앙 생활을 하였으며 주일을 어기는 것은 언감생심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덕분에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부모님 곁을 떠나 생활하였지만 신앙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 모태신앙이 그렇듯 나 역시 뜨뜻미지근한 그런 신앙생활의 연속이었다.
말씀을 통한 하나님과의 개인적 교제는 거의 없고 단지 종교 활동만 열심히 한 것 같다.
많은 성도들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나 역시 나름 신앙이 좋은 줄 알고 있었다.
나는 이것이 신앙 생활인 줄 알았다.
그렇게 자라서 목사가 되었건만 신앙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며 내 자신부터 시작하여 다른 성도들 역시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주일 빠지지 않고 가정이 화목하면 신앙이 좋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특히 예수 믿는 사람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취업을 하며, 하는 사업이 잘 되거나 자식이 잘 되면 예수 잘 믿는 것과 동일하게 취급 하였고, 나 역시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것이 하나님께 받은 최고의 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평신도로 섬길 때나 목사가 돼서도 이러한 땅의 것에 치심하여 성도들에게 그 복을 받게 하려고 얼마나 만물 안에 하나님을 가둬 놓고 그에게 매달렸는지 모른다.
정말 목이 터져라 부르짖었으며 응답이 없을 때는 분노가 일기까지 하였다.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을 만물 안에 가둬 놓고 그 하나님께 부르짖은 모습은 마치 바알의 선지자들이 제단을 쌓아놓고 죽은 신인 바알에게 불을 내려달라고 몸을 자해하면서까지 부르짖었던 그들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정말 그것이 신앙이요 믿음인 줄 착각했었다.
부교역자 때는 목이 성할 날이 거의 없었다.
성악을 전공했고 목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잘 알았지만 거의 매일 새벽마다 목이 터져라 부르짖는 기도는 나의 목에 쉴 틈을 주지 않았다.
나중에 복음을 알고 나서 깨달은 사실은, 나는 부르짖는 기도를 하되 하나님께 하기 보다는 성도들이 들으라고 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만큼 당신들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으니까 나를 좀 알아 달라’고 말이다.
이런 나를 따라서 성도들은 또 얼마나 많이 부르짖으며 만물 안에 있는 것, 땅의 것을 구하였는지 모른다.
이런 기도에 물론 응답을 받은 이들도 있지만, 돌아보면 그들의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신앙의 길을 떠나지 않고 여전히 신앙 생활을 하고 있으며 그래도 조금씩 주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모습을 보면 이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신앙의 첫 발자국을 잘못 남긴 자로써 정말 부끄럽기 그지없다.
나 역시 나보다 앞선 신앙의 선배들, 선배 목사님들의 발자국을 밟고 따라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좀더 빨리 이 복음을 알았더라면 이런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많이 아픈 것도 사실이다.
이제 복음을 안 이상 그런 실수로 나아가고 싶지 않다.
나를 믿음의 기준으로 삼고 따라오는 이들에게 더 이상 이상한 발자국이 아니라 복음으로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을 얻는 그런 발자국이고 싶다.
이 시간도 그 생명의 발자국을 남기기 위하여 먼저 주님과 생명의 교제를 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는 신앙생활이라고 해온 것이 생명 없는 종교생활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여기까지 참아주시며 용납하셨습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나를 지켜보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리고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생명의 복음을 알았기에 얼마나 감사한지요.
목사로서 복음도 모르고 나댔던 나의 지난날을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시고 이제는 참 생명으로 나아가는 복음을 통하여 오직 말씀으로 주님과 교제 가운데 아버지와 아들이 가졌던 그 영광을 보게 하옵소서.
이 발자국은 개척자의 사명을 가지고 남기고 있나이다.
목사들 세계에서뿐 아니라 성도들 앞에서도 결코 쉽지 않은 첫 발자국입니다.
기존의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기에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고 거부하며 부딪히는 일들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이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만물 안에 갇혀 있는 성도들의 시각을 만물 위, 창세전으로 옮기는 작업은 내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계속되어야 할 나의 참 사역이오니 중단 없이 이어지도록 힘을 더하여 주옵소서.
무엇보다 날마다 말씀 앞에서 당신의 영광을 보기 원하나이다.
저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정작 내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일이 없도록 나를 날마다 주님이 계시하신 말씀 앞으로 나아오게 하옵소서.
주님 없이 살 수 없음을 아오니 내 안에 오직 그리스도가 살아계심을 증거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