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조던이 전설의 첫 걸음을 떼고 있던 1984년 겨울, 오하이오 주 아크론 시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16살의 글로리아 제임스. 아크론 시 외곽의 빈민촌에 살고 있던 그녀는 학교를 다니면서 아이를 낳기로 했습니다. 아이의 아빠인 앤써니 맥클랜드에게 알릴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는 부모가 되는 것에는 전혀 관심 없는 전과자였고, 글로리아는 아이를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키우기로 했습니다.
1984년 12월 30일, 연말 분위기에 들뜬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평범한 날이었습니다. 오하이오 주의 유일한 프로 농구팀인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는 전날에도 어김없이 패배를 당했고, 사람들은 그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글로리아는 건강한 사내아이를 출산했지만, 그것은 빈민가 흑인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미성년 출산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아크론 시민 누구도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LeBron Raymone James라는 멋진 이름이 붙여진 이 아이는, 전 세계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슈퍼스타가 되었습니다.
Nothing But Love
세상에 나온 르브론이 처음 상대해야 했던 도전은 가난이었습니다. 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를 함께 키워주겠다고 한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글로리아와 어린 르브론은 떠돌이 생활을 하며 연명해야 했습니다.
그 사이 글로리아는 새 남자친구를 사귀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남자 운이 없었는지, 에디 잭슨은 나중에 마약 거래로 감옥에 가는 등 범죄의 유혹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무능력한 남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잭슨이 르브론에게는 자상한 아빠였습니다. 엄마 글로리아는 르브론에게 친아버지에 대해 가르쳐주지 않았고, 자신이 8개월 되던 때부터 항상 곁에 있었던 잭슨은 르브론에게는 유일한 ‘아빠’였기 때문이죠. 그들은 제법 죽이 잘 맞는 부자지간이었고, 오하이오 주에 WWF(현 WWE) 프로레슬링 경기가 있으면 어김없이 함께 보러 가곤 했습니다. 잭슨과 르브론은 ‘마초 맨’의 열렬한 팬이었고, 그가 보여주는 쇼맨십에 열광하곤 했습니다. 어린 르브론이 경험한 최초의 프로 스포츠였던 셈이죠.
한 곳에 오래 머무를 형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던 글로리아는 의식적으로 이웃과의 거리를 두려 했지만, 붙임성이 좋았던 글로리아 모자는 어딜 가든 이웃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남다른 덩치를 자랑했던 르브론은 이웃으로부터 수많은 도움을 받아가며 성장했습니다. 나중에 NBA에 입단한 후, 그들의 도움을 잊을 수 없었던 르브론은 옛 동네를 찾아다니며 자신을 도와준 이웃들에게 보답했다고 합니다.
무엇 하나 풍족한 것이 없는 어린 시절이었지만, 단 한 가지 사랑만은 넘쳤습니다. 르브론은 세상에 절망하지 않았고, 자기가 받은 사랑만큼 베풀 줄 아는, 사랑할 줄 아는 소년으로 자라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농구가 찾아왔습니다.
농구와의 만남, 친구와의 만남
르브론이 농구공을 처음 만져본 것은 세 살 때였습니다. 잭슨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미니 농구세트를 선물했고, 변변한 장난감이 없었던 르브론은 매일 공을 끌어안고 잘 정도로 애지중지했습니다. 엄마와는 다르게 팔다리가 길쭉길쭉했던 르브론은 금세 농구공에 익숙해졌습니다.
초등학교에 진학한 르브론은 농구와 미식축구 팀에 들어갔습니다. 자주 옮겨 다니느라 친구를 사귀지 못했던 르브론에게 또래 친구들이 많은 운동부에서 뛰는 시간은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좋았는지, 르브론은 농구팀에서 자신이 득점하는 것보다 다른 아이들에게 득점을 양보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비록 자신의 우상이 NBA 득점왕 마이클 조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한편, 미식축구팀 코치인 프랭키 워커 씨는 르브론을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큰 덩치를 자랑하던 르브론은 미식축구 팀의 와이드 리시버로 뛰었고, 3학년 때 처음으로 선수로 뛴 시즌부터 6경기에서 19개의 터치다운을 잡아내며 활약했기 때문이죠. 그 이후 워커 씨에게 남다른 운동신경을 지닌 이 꼬마는 언제나 관찰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르브론이 4학년 되던 해에 법원은 글로리아가 르브론을 키울 만큼의 생활 능력이 없으며 르브론이 엄마와 헤어져 시설에 가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고, 실의에 빠진 르브론은 학교를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워커 씨가 구원의 손길을 뻗었습니다.
워커 씨는 아내 팸과 의논한 끝에 글로리아를 찾아가 자신이 르브론을 맡아 길러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비록 르브론과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 슬펐지만, 글로리아는 어린 아들이 좀 더 안정된 환경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했고 워커 씨를 믿었습니다. 나중에 워커 씨는 르브론이 글로리아와 함께 살 수 있도록 집을 구해주기까지 했습니다.
워커 씨의 집에는 샤넬, 프랭키 주니어, 타네샤의 삼남매가 있었고, 이들 남매는 르브론을 따뜻하게 맞아줬습니다. 그때까지 제대로 된 가정교육을 받지 못했던 르브론은 그날그날의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하는 워커 씨 삼남매의 태도를 배워나갔고, 5학년 때는 학교에서 개근상을 받을 정도로 모범생이 되었습니다.
농구공을 ‘장난감’ 정도로 생각하던 르브론이 처음 패배를 경험한 것은 워커씨의 마당에서였습니다. 프랭키 주니어는 시내의 농구 스쿨에 다니고 있었는데, 르브론은 자신보다 훨씬 작은 프랭키 주니어에게 1:1 시합을 걸었다가 7-21로 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워커 씨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고, 자신이 굉장히 농구를 잘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르브론은 밤새도록 울음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하루 종일 점프슛과 레이업슛 연습에 매달렸습니다.
일단 마음먹고 집중하기 시작하자, 르브론의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습니다. 워커 씨는 웃음을 거두고 르브론에게 왼손을 쓰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프랭키 주니어와 함께 농구 스쿨에 보내줬습니다.
둘은 매주 일요일에 Akron Jewish Community Center에서 센트럴 미시건 대학 전 코치인 키스 드램봇에게 농구를 배웠습니다. 거기서 르브론은 청소년기를 함께 하게 되는 친구들인 시언 코튼, 드류 조이스 3세, 윌리 맥기와 로메오 트래비스를 만났습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이 맞은 이들은 의기투합했고, 이들이 만든 팀은 아크론의 아이들 사이에서 점점 유명해졌습니다.
Fab 4
2년 후 여름, 6피트의 키로 모든 포지션에서 플레이할 수 있게 된 르브론은 친구들과 노스이스트 오하이오 슈팅스타즈라는 팀을 결성, AAU(Amateur Athletic Union) 8학년 이하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드루 조이스의 아버지인 드루 조이스 2세 코치는 르브론에게 팀의 리더를 맡겼고, 그들은 승승장구한 끝에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열린 결승전에 올랐습니다. 이 경기에서 66-68로 아깝게 패했지만, 게임을 지배하는 르브론의 압도적인 플레이는 농구 관계자들을 경악시켰습니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르브론이 과연 어느 고등학교에 들어갈 지 모든 사람들이 궁금해 했지만, 르브론은 이미 마음을 정해놓고 있었습니다. 르브론은 그때까지 자신을 따뜻하게 길러준 어머니와 워커 씨 가족, 그리고 수만 마일을 함께 돌아다닌 정든 친구들과 헤어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르브론과 친구들은 농구 인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했고, 어느 고등학교를 가든지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르브론과 친구들은 아크론 시 도심에 있는 미션 스쿨인 세인트 빈센트-세인트 메리(SVSM) 고등학교에 입학하기로 했습니다. SVSM은 공부 잘하기로 소문난 학교였지만 당시 운동 면에서는 무명이었죠. 하지만 르브론, 조이스, 코튼 그리고 맥기로 이루어진 자칭 Fab 4(크리스 웨버를 중심으로 한 90년대 초 미시건 주립대의 신입생 5인방 Fab 5에서 따온 이름)는 함께 할 수 있다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신임 코치는 자신들의 농구 스쿨 시절 스승인 드램봇이었으니까요.
오하이오 주 농구 관계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끈 첫 경기에서, 6피트 3인치로 큰 르브론은 15점을 넣었습니다. 첫 시즌에서 르브론은 팀 내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1위와 50% 이상의 야투율을 기록하며 팀을 시즌 27전 전승의 주 챔피언으로 이끌었습니다. SVSM의 운동 팀이 주 챔피언에 오른 것은 르브론이 태어났던 1984년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학교 전체가 축제분위기였고, 스포츠 관련 매니지먼트 회사들은 벌써부터 르브론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의 재능 있는 고등학생들이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득점에 치중해서 게임을 망치는 데 반해, 르브론은 고등학생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이타적인 플레이를 했습니다. 농구를 대하는 르브론의 태도는 그의 플레이를 본 수많은 농구 관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들은 르브론의 발전된 모습을 기대하며 새 시즌을 기다렸습니다.
르브론은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그의 키는 6피트 7인치로 훌쩍 자랐고, 여름 동안 집중한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프로 선수 못지않은 몸을 만들었습니다. Fab 4가 모두 주전으로 출전한 첫 경기에서 손쉬운 경기를 거둔 SVSM은 1월 토너먼트에서 저메인 오닐을 배출한 전미 1위 팀 오크힐 아카데미를 만났습니다. 오크힐 아카데미는 현 댈러스 센터인 사가나 디옵이 팀을 이끌고 있었는데, 수많은 NBA 및 대학 스카우트들이 관전한 이 경기에서 르브론은 33점을 터뜨리며 팀을 거의 승리까지 끌고 갔습니다. 하지만 그는 막판에 두 개의 자유투를 놓쳤고, 마지막에 던진 버저비터까지 림을 돌아나오며 한 점차의 아쉬운 패배를 당했습니다.
하지만 르브론과 Fab 4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SVSM은 나머지 경기를 모두 승리했으며, 그해 평균 25.3득점 7.4리바운드 5.5어시스트를 기록한 르브론은 다시 한 번 팀을 주 챔피언으로 이끌었습니다. 오하이오 주 역사상 처음으로 2학년에 주 Mr.basketball에 선정된 르브론은 에디 커리, 콰미 브라운과 함께 올 아메리칸에도 뽑혔습니다.
NBA로의 길
이제 전국이 르브론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2학년 시즌이 끝난 후, 르브론은 여기저기의 농구 캠프에 초대되었습니다. 콜로라도에서 열린 USA Basketball Development Festival과 뉴저지에서 열린 ABCD 캠프에서, 르브론은 2학년으로는 최초로 초대되어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습니다. 이 캠프에서의 활약으로 르브론은 뉴욕 타임스에 소개되었고, 농구 전문지 슬램은 르브론에게 정규 칼럼을 제의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르브론이 가장 큰 감동을 받은 것은 마이클 조던의 초청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복귀해 워싱턴 위저즈에서 뛰고 있던 조던은 르브론을 자신의 워크아웃에 초청했고, 그는 앤트완 워커, 마이클 핀리, 주완 하워드, 페니 하더웨이와 함께 훈련했습니다. 어린 시절 자신의 우상이 40이 다 된 나이에 소화하는 엄청난 훈련량을 목격한 르브론은 이후 더욱 열심히 훈련하게 됩니다.
3학년 때부터 미식축구를 접고 농구에 집중하기로 한 르브론에게 많은 농구 명문 대학들이 입학 제의를 했습니다. 하지만 르브론은 어느 쪽에도 확답을 주지 않았고, 언론은 르브론의 NBA 조기 진출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습니다. 조던의 은퇴를 눈앞에 두고 있던 미국 스포츠계는 새로운 세대의 아이콘을 찾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고, 르브론은 그들에게 좋은 소재였습니다. 르브론에 대한 무책임한 기사들이 범람했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모조리 노출되었습니다. 양대 농구화 브랜드인 나이키와 아디다스는 그와 계약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습니다.
르브론은 이런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미디어는 그의 기사를 써서 돈을 버는데, 그와 글로리아, 잭슨은 여전히 가난했던 것입니다. 결국 르브론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가지 않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3학년 시즌에도 변함없는 활약을 보여준 르브론은 2월에 다시 한 번 오크힐 아카데미와 맞붙었습니다. 오크힐에는 전학생 카멜로 앤써니가 에이스로 활약하고 있었습니다. 르브론과 앤써니는 각각 36점과 34점을 기록하며 최선을 다했지만, 경기는 오크힐의 근소한 승리로 끝났습니다. 반드시 이기고 싶었던 르브론은 패배 후 라커룸에서 한참이나 나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SVSM은 주 챔피언 3연속 등극에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르브론은 시즌 평균 29득점 거의 8.3리바운드 5.7어시스트를 올리며 만장일치로 올 아메리칸에 선정됐으며, 게토레이, USA 투데이, 퍼레이드 매거진에 의해 올해의 내셔널 플레이어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슈팅 능력에 불만이 있었던 르브론은 만족하지 않고 여름 내내 연습에 매달렸습니다.
이 무렵 르브론의 이름은 NBA를 주름잡고 있던 스타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당시 아디다스 소속이던 코비 브라이언트는 그를 아디다스에 끌어들이기 위하여 농구화를 선물했고, 리복 소속이던 샤킬 오닐은 그의 경기를 직접 관전하며 관심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가장 비상한 관심을 보인 것은 르브론의 고향 팀인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존 루카스 감독이었습니다. 약체 팀 클리블랜드 구단을 힘겹게 이끌고 있던 루카스 감독은 처음으로 르브론의 경기를 본 이후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고, 구단의 비공식 워크아웃에 르브론을 초청했습니다. 르브론은 NBA 선수인 저메인 존스와 크리스 밈을 상대로 인유어페이스 덩크를 터뜨렸고, 수차례 믿어지지 않는 패스를 찔러주었습니다. 루카스는 완전히 르브론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비록 아마추어 선수와 비공식 접촉을 했다는 이유로 벌금과 출장정지 처분을 받기는 했지만, 루카스는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루카스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르브론을 반드시 잡아야 한다고 프론트를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4학년을 맞은 르브론 개막전에서 46-10 대승을 이끌었고, 다시 한 번 오크힐 아카데미와 맞붙었습니다. 라이벌 앤써니는 이미 졸업했지만, 르브론에게 오크힐은 졸업 전에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습니다. 이 경기는 ESPN2를 통해 전국의 167만 가구가 시청했습니다. 고등학교 경기가 미 전역으로 방송된 것은 13년 만의 처음이었죠.
르브론은 달리고, 달리고, 달렸습니다. 이 경기에서 르브론은 31점 13리바운드 6어시스트를 올리며 65-45의 완승을 이끌었습니다. 전미 최강팀을 이기는 데 4년이 걸린 셈이죠. 르브론과 Fab 4가 이끄는 SVSM은 완벽한 조화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시즌 평균 31.6득점 9.6리바운드 4.6어시스트와 3.4스틸을 기록한 르브론은 팀을 2년 만에 다시 주 챔피언으로 이끌었습니다. 고등학교 4년 동안 3번의 주 챔피언을 차지한 SVSM은 르브론의 등번호 23번을 영구 결번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이 무렵 NBA 진출이 가까워 오면서 르브론에 대한 미디어의 지나친 관심은 최고조에 이르렀고, 마침내 일이 터졌습니다. 18세 생일 선물로 글로리아가 은행 대부에 담보를 제공하고 3개의 텔레비전을 갖춘 Hummer H2(기본 가격 50,000달러) 자동차를 선물했는데, 언론이 이에 대해 부정 의혹을 제기한 것입니다. 미디어는 곧바로 아마추어 선수들에 대한 선물 제공을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고, 오하이오주 고등학교 운동 협회는 르브론의 징계까지 고려한 채 조사를 벌였습니다.
조사 결과 그 차는 코비 브라이언트, 케빈 가넷, 브리트니 스피어스 등이 주로 이용하는 로스엔젤레스의 한 자동차 대리점에서 구입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글로리아는 그런 슈퍼스타들의 자동차와는 달리 무척 저렴한 가격에 구입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자동차 사건은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르브론은 아마추어 선수로서 자신의 한계를 절감했습니다.
여담이지만, 이때 르브론이 선물받은 ‘Hummer’는 나중에 발매된 르브론의 시그내쳐 슈즈, ‘에어 줌 제네레이션’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는군요.
통산 2,657득점 892리바운드 52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고등학교를 마친 르브론은 이제 NBA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친구들은 모두 대학에 진학하기로 했지만, 르브론은 더 이상 부모님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무렵 R&B가수 알리야(Aaliyah)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는데, 그녀의 팬이었던 르브론은 “뭐든 하나에 충실하고 싶다. 사람 앞날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 최선을 다해 프로무대에 들어가 부모님을 모시고 싶다”며 정든 친구들을 떠나보냈습니다.
그는 NBA의 명 에이전트인 아론 굿윈과 계약을 맺고 NBA 진출을 선언했습니다. 그동안 ‘Shoe War’로 불릴 정도로 르브론을 놓고 벌이던 나이키와 아디다스의 경쟁도 결론이 났습니다. 르브론은 어린 시절의 우상인 조던의 브랜드인 나이키를 선택하였습니다.
사랑이 키워낸 미래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르브론을 사상 8번째로 고등학생 표지 모델로 장식하며 ‘선택받은 자’라는 제목을 썼습니다. 하지만 르브론이 처음부터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는 16세의 미혼모 슬하에서 태어나 모든 것이 부족한 상태로 이곳저곳을 전전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모두 르브론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쏟아주었고, 르브론은 비뚤어지지 않고 재능이 넘치는 겸손한 청년으로 자라났습니다. 르브론은 지금도 ‘그 분들이 없었다면 난 아마 나쁜 학생이 되었을 것’이라 말합니다.
2003년 6월 26일, 역사상 가장 많은 관심을 밭은 고졸 신청자는 NBA 드래프트 1순위로 고향팀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 지명됐습니다. 아직 19살이 되지 않은 르브론이 지금까지 받아온 사랑에 보답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린 것이죠.
예전 잡지 책에서 브론이 멜로가 오크힐을 이끌때 이기지 못한게 후회스럽다고 했었는데~ 지금 둘다 너무나도 커버린... 그때부터 지금 그리고 앞으로 쭉 매직-버드에 필적하는 라이벌로 올라서길... 그래서 나중에 파이널에서 브론이 멜로를 꺾거나 꺾이는 장면이 연출되었으면...ㅋㅋ
개인적으로 이런종류의 스토리들은 별로 좋아하지않습니다 . 긍정적으로 유리한쪽으로만 과대포장되있다는 느낌이랄까요 ? 더군다나 여기는 현지가 아닌 지구반대쪽의 한국이기?문에 저런글로 인해 선수들이 더욱과대포장될 확률이 크죠 . 팬들의 마음은 이해못하는바가아니지만..그래도 좀 별로네요 .
Fab 5도 비틀즈의 별명인 Fab 4(Fabulous 4)에서 따온거였습니다. 틀린 내용도 있는데 험머 사건은 언론에서 의혹은 있었어도 큰 문제는 없었지만 집 근처 스포츠용품 주인에게서 몇십만원 어치의 농구 져지를 선물받은 것 때문에 징계위원회에 회부돼서 그 기간동안 출장정지됐었습니다. 그 바람에 마지막 해엔 주 우승 놓친걸로 아는데요. 르브론의 고등학교 마지막 해에 나이키, 아디다스, 리복의 경쟁이 심했는데 아디다스는 르브론 학교 앞에 광고판을 설치했고 리복은 학교에 무료로 운동용품을 제공했지만 결국은 가장 많은 계약금을 제시한 나이키와 계약했습니다.
참고로 2002-3 시즌에 클리블랜드와 덴버가 공동 꼴찌였지만 클리블랜드가 로터리로 1번픽 먹었습니다. 덴버도 카멜로 뽑았으니 큰 불만은 없었을겁니다. 당시 카멜로에게 자신과 르브론을 비교해달라고 하자(한마디로 누가 1번픽감이냐) 고등학교때 붙었을 때 득점은 르브론이 더 많이 했지만 경기는 자기가 이겼다...라고 하며 자기가 팀을 위해선 더 훌륭한 선수라고 했었죠. 르브론이 자기의 첫 에이전트를 해고하고 저 친구들에게 에이전트 일을 맡겼는데 그것과 관련해서 르브론이 욕 많이 먹었었습니다. 당시 르브론의 나이키, 스프라이트 계약 등을 이끌어내며 르브론의 이미지를 만든게 그 에이전트였습니다.
르브론이 받은 800달러 상당의 농구져지는 상점으로 당장 다시 돌려줘서 큰 문제 없이 한경기 출장정지로 징계가 끝났습니다. 그리고 나이키가 최대 금액을 제시한건 아니였습니다. 당시 에이전트였던 애런 굿윈이 나이키가 르브론을 잘 이끌어 줄거라고 르브론에게 설득해서 나이키랑 계약을 체결한거죠. 실제 금액은 타사에 비해 적었다고 합니다.
첫댓글 2004년인가에 나왔던 손대범기자님의 글도 눈에보이네요. 잘 읽었습니다~ㅋ
예전 잡지 책에서 브론이 멜로가 오크힐을 이끌때 이기지 못한게 후회스럽다고 했었는데~ 지금 둘다 너무나도 커버린... 그때부터 지금 그리고 앞으로 쭉 매직-버드에 필적하는 라이벌로 올라서길... 그래서 나중에 파이널에서 브론이 멜로를 꺾거나 꺾이는 장면이 연출되었으면...ㅋㅋ
한가지 잘못된 사실이 있네요. 르브론의 생부는 저사람이 아닙니다.
nba 드래프트 제도가... 꼴찌가 무조건 1픽을 갖게 되는건가요? 아니죠? 물론 가질 확률이 높지만... 암튼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고향 팀이 저렇게 앞으로 엄청날 스타가 될 선수를 픽하다니.. 왠지 정말 영웅 드라마가 만들어 질거 같습니다. 십년뒤가 기대되네요
웨이드는 현재 몇살이조??
웨이드는 아마 82년생일겁니다.ㅋ 81인가.ㅡㅡ;
앤써 스토리도 있다면 올려주세요;; 다 알고 있지만;;
웨이드 83, 브롱,멜로가 84
웨이드 82네요...
개인적으로 이런종류의 스토리들은 별로 좋아하지않습니다 . 긍정적으로 유리한쪽으로만 과대포장되있다는 느낌이랄까요 ? 더군다나 여기는 현지가 아닌 지구반대쪽의 한국이기?문에 저런글로 인해 선수들이 더욱과대포장될 확률이 크죠 . 팬들의 마음은 이해못하는바가아니지만..그래도 좀 별로네요 .
Fab 5도 비틀즈의 별명인 Fab 4(Fabulous 4)에서 따온거였습니다. 틀린 내용도 있는데 험머 사건은 언론에서 의혹은 있었어도 큰 문제는 없었지만 집 근처 스포츠용품 주인에게서 몇십만원 어치의 농구 져지를 선물받은 것 때문에 징계위원회에 회부돼서 그 기간동안 출장정지됐었습니다. 그 바람에 마지막 해엔 주 우승 놓친걸로 아는데요. 르브론의 고등학교 마지막 해에 나이키, 아디다스, 리복의 경쟁이 심했는데 아디다스는 르브론 학교 앞에 광고판을 설치했고 리복은 학교에 무료로 운동용품을 제공했지만 결국은 가장 많은 계약금을 제시한 나이키와 계약했습니다.
참고로 2002-3 시즌에 클리블랜드와 덴버가 공동 꼴찌였지만 클리블랜드가 로터리로 1번픽 먹었습니다. 덴버도 카멜로 뽑았으니 큰 불만은 없었을겁니다. 당시 카멜로에게 자신과 르브론을 비교해달라고 하자(한마디로 누가 1번픽감이냐) 고등학교때 붙었을 때 득점은 르브론이 더 많이 했지만 경기는 자기가 이겼다...라고 하며 자기가 팀을 위해선 더 훌륭한 선수라고 했었죠. 르브론이 자기의 첫 에이전트를 해고하고 저 친구들에게 에이전트 일을 맡겼는데 그것과 관련해서 르브론이 욕 많이 먹었었습니다. 당시 르브론의 나이키, 스프라이트 계약 등을 이끌어내며 르브론의 이미지를 만든게 그 에이전트였습니다.
르브론이 받은 800달러 상당의 농구져지는 상점으로 당장 다시 돌려줘서 큰 문제 없이 한경기 출장정지로 징계가 끝났습니다. 그리고 나이키가 최대 금액을 제시한건 아니였습니다. 당시 에이전트였던 애런 굿윈이 나이키가 르브론을 잘 이끌어 줄거라고 르브론에게 설득해서 나이키랑 계약을 체결한거죠. 실제 금액은 타사에 비해 적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