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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정치/외교/안보 스크랩 강기훈 무죄 장장 23년, 권력의 시녀는 현재형
hopesniper 추천 3 조회 993 14.02.14 18:2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강기훈 무죄, "진실은 승리했다"

- 강기훈,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함"

- 검찰은 2014년의 검찰이 아니라 23년 전의 검찰이었다.

 

 

▲사진 출처;오마이 뉴스(유성호 기자)

 

 

 

강기훈씨가 '김기설 유서대필사건'의 긴 터널을 빠져나왔다. 2014년 2월 13일, 재심을 통한 '무죄'를 받기까지 장장 23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혈기왕성했던 당시 강기훈씨는 지천명(50)이 넘은 중년인이 되어 있었다.

 

참으로 공안통치의 뿌리는 깊고도 깊었고, 권력의 시녀였던 당시의 검찰은 출세가도를 달려 승승장구했고 지금의 검찰은 재심에서 재판부에 "피고인의 항소를 기각하시되 피고인이 전대협 노트, 낙서장을 조작하는 등 관련 증거를 조작하여 국민과 언론을 호도하여 공권력을 불신케 하는 얼마나 크나큰 잘못을 하였는지, 국민과 언론이 알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라며, 사과는커녕 당시의 검찰과 똑같은 발언으로 공분을 사고 있다.

 

심지어 김기설씨의 아버지가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원위회'에서 돈을 받았기 때문에 진술을 바꿨다며 여전히 더러운 의혹만으로 자신들의 과거 행위를 정당화하려 했다.

 

이런 검찰이 구체적인 증거나 물증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책임회피성 물타기를 하는 것을 보면서, 시대는 변했지만 당시 김기춘 법무부 장관이 박근혜 비서실장을 하고 있는 현재, 검찰은 '권력의 시녀' 역할을 자처하고 있어 보인다.

 

시대가 변하고 또 변화를 거쳐 2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검찰은 "국민이 국가임을 국가가 곧 국민"임을 그들만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일언반구 사과나 반성도 없는 검찰, 이런 검찰이 존재하는 한 제2의 피해자도 재생산될 개연성도 높은 시대임을 각인시키는 검찰의 태도다.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국민의 인권을 유린했던 '유서대필사건'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여전히 과거의 권력과 정신을 승계하고 있는 현 권력과 검찰은 큰소리치고 있다. 국민에게 석고대죄해도 부족할 판에 당시 사건을 조작하고 기획하며 공작정치를 펼쳤던 자들은 권력의 그늘에서 호의호식하고 있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이들은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한다. 특히 김기춘의 사퇴는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강기훈씨는 무죄 소감에서 ""저는 필적 감정이 장난 같다. 저는 뻔히 아는데 그걸 갖고 과학이니 뭐니 하는 것 자체가 웃기다. 신뢰할 수 없다. 어쨌든 (그들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다. 다만 자기가 일하는 전문분야에서 '일만 열심히 하면 되지' 하는 생각은 접어야 한다. 이 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지 않는 전문가들은 또 하나의 악이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함'이 이거다."라며 침묵이나 방관은 또다른 피해자를 양산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당시 '전재기 검사장'은 강기훈을 "교활한 인물"이라며 "이 사회에는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고 있다, 검찰은 국가 최고 권력 집행기관의 자격으로 이런 '악마'를 응징하는 데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는 과거 기사에서, 노태우 정권의 공안정국 조성과 이에 '권력의 시녀'를 자처했던 당시의 검찰이 얼마나 정권유지에 광분했는지 독재정권의 한 단면을 그대로 투영해볼 수 있다.

 

현 시대 역시 과거의 인물들이 득세하는 세상이고 민주주의는 된서리를 맞고 있는 시대다. 검찰 역시 과거 독재정권 시대 공안정국을 주물렀던 권력의 주구이자 권력의 시녀 역할에 충실하고 있는 검찰의 섬뜩한 모습을 다시 보고 있다.

 

시대는 변했지만 낡고 병든 더러운 이들은 오늘도 국민을 감시하고 국민을 감옥에 넣으려고 혈안이다. 국민이 국가라는 헌법적 가치를 인지하지 못하는 '권력의 시녀' 검찰이 존재하는 한 어둠의 터널은 또다시 계속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 오마이 뉴스 강기훈 무죄까지 23년간의 타임라인... [일부 재구성]

- 검찰은 국민이 국가임을 천명한 헌법정신과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

- 23년간 견뎌온 강기훈과 1991년 목숨을 잃은 분들께 바친다. (정리·글: 이병한 박소희 / 디자인: 고정미 / 개발: 박준규 / 오픈소스: knightlab)

- (http://www.ohmynews.com/nws_web/event/kang23_timeline.aspx)

 

 

 

 

1991-2014

2014년 2월 13일 오후 2시 서울고등법원(형사10부. 부장판사 권기훈)이 소위 '유서대필사건'의 주인공 강기훈에게 재심 무죄를 선고했다. 1991년 사건이 발생한지 23년만이다. 이 타임라인은 그 23년에 대한 기록이다. 당시 29세 청년이었던 그는 지금 52세가 됐다. 그는 재심 최후진술문에서 "유서대필 사건이 추억에서나 존재하는 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추억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억해야한다. 이 타임라인을 23년간 견뎌온 강기훈과 1991년 목숨을 잃은 분들께 바친다. (정리·글: 이병한 박소희 / 디자인: 고정미 / 개발: 박준규 / 오픈소스: knightlab)

 

 

법정에서 제가 진술하는 기회도 오늘로서 끝입니다. 너무 오랜 기간 동안 화제의 중심에 섰습니다. 이제는 좀 놓여나고 싶습니다. 잔혹한 시간들도, 끝도 없이 지속됐던 불면도, 여러 사람들을 저주하며 보냈던 시간과도 이별하고 싶습니다. 할만큼 했구요, 잘 견뎠잖습니까. 이 정도면 과거의 잘못된 수사와 판결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준 저에게 검찰과 법원은 고마워할 만도 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재심법정에서도 여전히 과거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검찰에게 한마디 남기고 싶습니다. 진정한 용기는 잘못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국민의 자랑거리가 되어야 할 검찰이 조롱거리가 된 현실의 책임은 검찰 스스로에게 있습니다.

 

 

2014,2,13일 강기훈씨의 최후진술 전문 중에서...


 

 

 

 

1991년 봄은 뜨거웠다. 그해 4월 26일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가 시위에 참가했다가 백골단의 집단 구타로 사망했다. 뒤이어 4월 29일 전남대 박승희, 5월 1일 안동대 김영균, 5월 3일 경원대 천세용이 잇따라 분신했다.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쳤다. 일명 '분신정국'이었다.

 

 

 

 

이 시점에 시인 김지하가 등장했다. 그는 <조선일보>에 한 편의 글을 기고했다. 그는 학생운동을 "경박스럽게 목숨을 버린다", "철부지", "시체선호증", "자살특공대" 등으로 비난했다. 그는 "자살은 전염한다, 당신들은 지금 전염을 부채질하고 있다"며 "끊임없이 죽음을 유혹하는 암시를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사흘 뒤인 5월 8일 또 한 명이 죽음을 선택했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은 이날 오전 8시쯤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시너를 뿌린 몸에 불을 붙이고 투신했다. 그 역시 "폭력살인만행 자행하는 노태우 정권 퇴진하라"고 외쳤다. 그는 시민들과 부모 앞으로 각각 유서를 남겼다. 이 죽음이 당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총무부장이었던 강기훈의 '23년 투쟁'의 서곡이었다.

 

 

 

 

 

김기설이 분신한 그날 낮 박홍 서강대 총장은 기자회견을 열고 "지금 우리사회에서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는 이 세력의 실상을 반드시 폭로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김기설 투신 당시 '옥상에서 흰 옷 입은 사람을 봤다'는 한 교수의 증언이 알려지면서 배후설은 힘을 얻는 듯 보였다. 하지만 '흰 옷을 입은 사람'은 김기설의 몸에 붙은 불을 끄기 위해 달려간 서강대생들 중 하나였다.

 

당시 박홍 서강대 총장은 노태우 정권을 지키는 멘토나 다름없었다. 언론 등에 출연해 '주사파' 발언 등으로 사실상 이승만, 박정희 시대 '반공'를 주장하고 권력을 수호하는 당시의 괴벨스 역할을 톡톡히 했던 사람이다.

 

이후 김영삼 정권이 '전대협'을 '주사파'로 몰아 색깔론으로 여론을 조성하고 해산시키는데 혁혁한 전과를 세운 인물이기도 하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검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김기설이 투신한 그날, 검찰은 잇따른 학생들의 분신에 배후세력이 있다고 보고 서울지검 강력부 검사 6명으로 특별조사반을 꾸렸다. '계획된 죽음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대응은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켰다. 5월 11일 광주 전남대 대강당에서는 노동자 윤용하가 "누가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버리라고 한단 말인가"라며 몸에 불을 붙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기설의 장례식은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졌다. 당시 장례위원장은 문익환 목사였고 고문으로 백기완 선생과 이소선 여사, 김대중 전 대통령 등이 참여했다. 많은 시민사회계 사람들이 맡았던 장례위원 명단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근태 전 의원, 박원순 서울시장의 이름도 있었다.

 

 

 

약 열흘간 잠잠하던 '분신 배후설'이 '유서 대필 의혹'이란 구체적인 내용을 갖춘 채 모습을 드러냈다. 5월 18일 석간 <국민일보>는 검찰이 김기설의 유서와 자필 노트 등을 대조한 결과 '다른 필적'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누군가 대신 써줬다고 보고 수사를 진행 중이라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검찰이 김기설의 동료 7명을 용의자 선상에 올려놓고 있다고 했다. 다음날 복수의 언론은 '용의자는 20대 전민련 간부 1명'이라는 검찰 이야기를 전했다. 강기훈이었다. 한편 정권을 규탄하는 분신은 계속 이어졌다. 이날 전남 보성고등학교에서 학생 김철수가 분신했다.

 

 

 

◎전민련 간부등 「대필」여부 수사/분신방조·배후도 조사검찰은 서강대에서 분신자살한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씨(26)가 남긴 유서의 필적이 김씨 자필과 다른 사실을 찾아내는데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서울지검 강력부는 18일 유족으로부터 건네받은 김씨 자필 노트의 필적과 유서 필적을 정밀 감정한 결과 필적이 서로 다른 것으로 나타나 유서를 누가 썼는지에 대해 수사중이라고 밝혔다.


검찰은 이에 따라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27),이영미(24·여·학원강사)씨,김씨의 후배 이지혜씨(24·여·방송통신대) 등 김씨와 관련이 있는 7명 가운데 유서를 써준 사람이 있을 것으로 보고 이들을 소환조사할 방침이다.


검찰은 이에 앞서 서울시 자양동 227의 188 강씨 자택과 서울시 구의동 235의 46 이영미씨 자택등 2곳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이들의 책 노트 등을 압수했다.


검찰은 강씨와 이씨 노트의 필적에 대한 정밀감정을 의뢰,유서상의 필적과 동일한지 여부를 확인중이다.


검찰은 또 지난 14일 조사했던 김씨의 애인 홍모양(25·K여상 교사)이 김씨 건네준 것이라며 제출한 메모지 필적과 강,이씨의 필적이 같은지에 대해서도 조사중이다.


검찰은 이와 관련,유서를 대신 써준 사람이 김씨의 자살을 방조했는지 여부와 분신자살을 부추기는 등 배후조종을 했는지 여부에 대해 다각도로 수사를 벌이고 있다.


검찰은 특히 이지혜씨등 3명이 지난 5일 오후 김씨와 대학로 주변에서 만나 술을 함께 마시면서 시국상황을 얘기한 뒤 이날밤 종로5가 모여관에서 밤을 지새며 김씨로부터 『8일 분신할 생각』이라는 말을 들은 점에 비춰 이들이 일단 자살을 방조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 국민일보

 

 

 

 

검찰은 강기훈의 1985년 경찰 자술서와 김기설의 유서와 자필 메모 등을 대상으로 2차례 필적 감정을 실시한 결과 '일부 판단이 어려운 문건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동일한 필적' 결론이 나왔다고 공식 발표했다. 강기훈은 같은 날 전민련 관계자들과 함께 명동성당에서 반박 기자회견 열고 자신이 쓴 편지 등과 김기설이 평소 쓰던 전민련 수첩을 공개했다. 전민련은 이 수첩 내용을 복사한 뒤 원본은 검찰에 제출한다.

 

 

 

 

젊은이들이 분신하며 외쳤던 '정권 퇴진'은 점점 사라지고, '과연 유서를 대신 써줬는가'로 정국의 초점이 옮겨지고 있었다. <동아일보>는 유서 대필 의혹에 대해 "검찰과 전민련의 명예가 걸린 일전"이라며 "대필이라면 재야의 도덕성이 의심받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한겨레신문>은 5월 20일 자체적으로 입수한 강기훈-김기설 자료들로 사설기관인 중앙인영필적감정원에 필적 감정을 의뢰했는데, 다음날 검찰이 이곳을 압수수색했다.

 

 

 

 

 

 

젊은이들이 분신하며 외쳤던 '정권 퇴진'은 점점 사라지고, '과연 유서를 대신 써줬는가'로 정국의 초점이 옮겨지고 있었다. <동아일보>는 유서 대필 의혹에 대해 "검찰과 전민련의 명예가 걸린 일전"이라며 "대필이라면 재야의 도덕성이 의심받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한겨레신문>은 5월 20일 자체적으로 입수한 강기훈-김기설 자료들로 사설기관인 중앙인영필적감정원에 필적 감정을 의뢰했는데, 다음날 검찰이 이곳을 압수수색했다.

 

 

 

 

 

 

 

 

각종 증언과 증거들은 검찰에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는 듯 보였다. 언론은 검찰의 대필 주장이 후퇴하고 있다며 ▲ 내부적으로 강기훈의 1985년 자술서만으로는 필적을 대조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고 ▲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김기설의 전민련 수첩과 유서의 필적이 동일하다는 결론을 냈다고 전하기 시작했다. 검찰은 "김기설이 1990년에 쓴 이력서와 1987년에 쓴 편지·연하장 중 하나라도 유서와 필적이 같다는 감정 결과가 나오면 김기설이 직접 유서를 쓴 것으로 인정하겠다"고 말했다.

 

 

 

 

검찰은 물러서지 않았다. 5월 25일 검찰은 "국과수 감정 결과 김기설의 수첩이 조작됐다"며 "유서는 그가 직접 쓰지 않은 게 맞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전민련은 곧바로 김기설의 수첩 일부 내용을 목격했다는 숭의여자전문대학교 학생 3명과 함께 그의 수첩이 맞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열어 반박했다. 이날 성균관대 김귀정이 백골단에게 맞아 사망했다.

 

노태우 정권은 전국적인 시위로 발전해 '노태우 정권 퇴진운동'으로 커졌다. 큰 위기에 봉착한 노태우정권은 사실상 공안통치, 공안정국을 만들고 정권유지에 혈안인 시대였다.

 

일부 몰지각한 평론가 탈을 쓴 자들이 종편에서 노태우 정권이 '절차적 민주주의'가 확립된 시대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전두환 독재정권의 연장선상에 있는 또다른 독재정권일 뿐이었다.

 

 

 

 

 

검찰은 다음날인 5월 26일 바로 강기훈의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서울형사지법 김경종 판사는 '수사의 필요성이 인정된다'며 영장을 발부했다. 김기설의 둘째 매형은 언론 인터뷰에서 그의 죽음을 "자발적 자살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검찰은 강기훈이 은신 중인 명동성당에 수사관을 보내며 압박했다.

 

 

 

5월 29일 검찰은 "국과수로부터 김기설의 유서와 전민련 수첩, 강기훈의 1985년 경찰 자술서, 강기훈의 화학노트의 필적이 모두 동일하다는 감정결과를 통보받았다"고 발표했다. 또 전민련 수첩 찢어진 부분의 감정결과 등을 종합할 때 전민련 수첩이 변조됐다고 국과수가 최종 통보했다고 밝혔다. 치안본부는 다음날 강기훈 등 20명의 지명수배령을 내렸다.

 

 

 

 

 

달을 넘겨 6월 3일, 총리로 지명된 후 한국외대에서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나오던 정원식 총리서리에게 분노한 학생들이 계란과 밀가루를 퍼부었다. 이 모습은 다음날 신문에 사진과 함께 대서특필 됐고, '패륜아'로 묘사된 학생운동권에게 여론은 싸늘해졌다. 이날 이후 두명이 더 분신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두 달 가까이 이어지던 '분신정국'은 사실상 끝났다. 1991년 봄 목숨을 잃은 젊은이는 모두 13명이었다.

 

 

 

 

우호적이던 여론도 조금씩 강기훈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6월 12일 경갑식 명동성당 수석보좌신부는 정의평화위원회의 자진 출두 권유 결정을 발표했다. 천주교는 경찰의 명동성당 투입을 묵인한다거나 강기훈의 신변보장을 못하겠다는 뜻은 아니지만, 6월 15일 이후 그의 신변보호를 책임질 수 없고 교회는 재판의 공정성을 보장하는 쪽으로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결국 전민련측은 자진출두 의사를 밝혔다. 6월 14일 서준식 전민련 인권위원장은 "광역의회선거일인 20일 이전에는 강기훈의 자진출두가 정치적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크다"며 이후 자진출두할 뜻을 밝혔다. 천주교는 이날 정의평화위원회 명의로 정구영 검찰총장에게 '강기훈이 자진출두할 경우 공정한 수사를 해야 하며 변호사 참석 아래 실체적 진실을 밝힐 수 있도록 공개 수사 할 것을 촉구한다'는 서한을 보냈다.

 

 

 

 

 

 

 

김기설의 여자친구 홍성은이 검찰과 경찰의 철저한 보호 아래 경기도 성남의 한 가정집에 은거하고 있으며, 취재진이 만나려고 시도했으나 잠복 중이던 형사에게 연행됐다고 6월 19일 <한겨레신문>이 보도했다. 전민련은 "검찰이 그의 신병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은 불공정 수사의 증거며, 그가 억류에서 풀려나 자유로이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6월 24일 명동성당에 은신해있던 강기훈이 자진출두한다. 그는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울먹이다 못해 한동안 오열했다. 그는 "저는 결백하다, 결백하기에 자진출두한다"고 했다. 또 "모든 것은 법정에서 판명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법정에서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는 건 그의 순진한 생각이었다.

 

 

 

서울지검 전재기 검사장이 6월 중순 강기훈은 유서를 대필한 확실한 범인이며 전 검찰직원들은 동요 없이 수사에 임하라는 내용의 내부문건을 만들어 관련 검사는 물론 다른 부서 직원들에게까지 회람시킨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전 검사장은 강기훈을 "교활한 인물"이라며 "이 사회에는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고 있다, 검찰은 국가 최고 권력 집행기관의 자격으로 이런 '악마'를 응징하는 데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기훈의 변호인단은 그가 검찰로부터 강압 수사를 받고 있다고 폭로했다. 변호인단은 "검찰의 수사 방식은 피의자가 극도의 수면부족으로 심신이 황폐된 채 방어권 행사를 포기하도록 만드는 가장 혹독한 형태의 가혹 행위"라며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2007년 진실화해위도 "(당시) 밤샘조사를 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정당한 수사방법이라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강기훈은 구속됐지만 바깥에서도 진실을 위한 투쟁은 계속됐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회는 아시아기독교교회협의회에 김기설 유서 사본과 강기훈 자필 문서의 필적 감정을 의뢰했고, '두 필적이 다르다'는 결과를 통보받았다. 감정인은 일본인 오니시 요시오였다. KNCC는 7월 10일과 18일 기자회견을 통해 이 사실을 공개했다.

 

 

 

 

예정대로 검찰은 강기훈을 구속 기소했다. '유서대필'의 법률적 죄명은 '자살방조죄'였다. 그런데 공소장에는 그가 김기설의 유서를 대신 쓴 시간과 장소가 특정되지 않았고 추가 증거들도 부족했고, 강신욱 부장검사는 "수사 미진의 책임을 지고 사표를 던지고 싶은 심정"이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검찰은 범죄 일시와 장소를 특정하지 못했어도 충분히 혐의 입증이 가능하다는 태도를 보였다. 8월 5일에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추가했다.

 

 

 

1991년 7월 25일

대규모 검찰 인사

유서대필사건 수사를 지휘한 강신욱 부장검사가 서울지검 부장검사 서열 1위인 형사1부장으로 임명됐다. 당시 법무부 장관은 김기춘 현 대통령비서실장이었다.

 

1991년 8월 28일

1심 첫 공판

법정투쟁이 시작됐다. 강기훈은 첫날 모두 진술에서 "국과수가 김기설 등 3명이 함께 쓴 전민련 업무일지를 한 사람 글씨로 감정한 사실을 확인하는 등 필적 감정을 얼마나 엉터리로 하는지 똑똑히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검찰이 "업무일지 작성자 3명을 포함, 모두 5명의 글씨가 한 사람의 필적이라는 완전히 잘못된 심증을 가지고 수사를 펴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5차 공판에 나오지 않았던 홍성은이 드디어 법정에 나왔다. 검찰은 그동안 '김기설이 죽은 뒤 강기훈이 제 수첩에 그의 이름과 연락처를 썼다, 강기훈과 유서의 필적이 비슷하다'는 홍성은의 진술을 토대로 강기훈이 유서를 대필했고, 증거들을 조작했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홍성은은 이날 검찰에서 진술한 내용 일부를 번복했다. 그는 자신의 수첩에 쓰인 김기설의 이름과 연락처는 강기훈이 쓰지 않았고, 강기훈의 유서 대필여부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1991년 12월 4일

결심 공판 : "조작 사건" - "생명까지 혁명의 도구로"

최후진술에 나선 강기훈은 "이 사건은 국가 공권력이 재야의 도덕성을 훼손시키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검찰은 강기훈이 "동료의 생명까지 혁명의 도구로 사용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검찰의 구형은 자살방조죄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에 자격정지 3년이었다.

 

 

1991년 12월 20일

1심 판결 "유죄"

서울형사지법 합의25부(부장판사 노원욱)는 강기훈의 모든 혐의를 인정,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국과수 필적 감정은 김형영 실장의 경력과 감정 과정, 법정 진술 등을 종합할 때 공정하게 이뤄진 것으로 신뢰할 수 있고, 일본인 오니시 요시오의 필적 감정은 그가 한글을 전혀 모르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또 전민련에서 김기설의 것이라고 제출한 수첩은 국과수 감정대로 조작됐다고 봤고, 검찰과 법정 진술이 엇갈린 홍성은의 경우 검찰 진술이 사실에 부합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다만 유서대필 경위가 적극적이었는지 알 수 없다며 양형을 조정했다.

 

 

 

 

 

1992년 2월 11일

국과수 허위 감정 사건

국과수 직원들이 소송당사자 등으로부터 돈을 받고 거짓 감정을 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전혀 별개의 사건이었지만, 이 사건은 강기훈의 공판으로 불똥이 튀었다. 언론은 "국과수 직원들의 금품수수와 허위감정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국과수 감정 결과가 유일한 직접증거로 채택돼 유죄판결을 받은 강기훈 사건 등이 뒤집어질 수 있다"고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으로 유서 감정을 맡았던 김형영 전 국과수 문서분석실장이 구속됐기 때문이다.

 

 

 

 

1992년 3월 12일

항소심 첫 공판

해를 넘겨 다시 법정투쟁이 시작됐다. 강기훈은 항소이유서에서 "검찰이 만든 '대필 시나리오'를 법원이 진실이라고 손들어 줬다"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1992년 4월 2일

4차 공판

출석 예정이던 홍성은이 나타나지 않았다. 홍성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양심선언을 하게 된다. 김기설의 여자친구였던 홍성은은 1993년 검찰의 협박에 의해 허위진술을 했노라고 했다.

 

 

 

 

 

김기설의 유서는 빠르게 흘겨쓴 속기체였다. 항소심이 진행 중이던 1992년 4월 13일 '강기훈 무죄석방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는 검찰이 김기설의 또 다른 속기체 필적을 수사단계에서 입수하고도 은폐했다고 폭로했다. 김기설이 복무했던 부대의 정훈장교로 근무하다 1992년 2월 제대한 이찬진 변호사(당시 중위)는 "수사 초기단계인 1991년 5월 13일쯤 유서와 비슷한 김기설의 필적을 부대에 방문한 남기춘·박경순 검사에게 넘겨줬다"고 증언했다. 검찰은 처음에 부인하다가 뒤늦게 인정했지만, 그 자료를 김기설의 것으로 단정할 수 없어 중요하지 않은 자료로 분류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1992년 4월 20일

야유 속 판결... "항소 기각"

2심도 유죄였다. 무죄는 커녕 1심에서 조금도 깎이지 않았다. 서울고법 형사2부(부장판사 임대화)는 증인들의 진술과 국과수 감정 결과 등을 종합해 볼 때 강기훈이 유서를 대필한 것으로 인정된다며 그의 항소를 기각했다. 재판부가 그의 유죄를 인정하는 판결문을 읽어나가자 변호인단은 항의 표시로 퇴정했고, 방청객들은 야유를 퍼부었다. 재판부는 유죄 이유를 마저 밝히지 않은 채 서둘러 형량을 선고하고 퇴정했다. 징역 3년, 자격정지 1년6월 그대로였다.

 

 

 

 

 

1992년 7월 24일

대법원, 유죄 확정

대법원에서도 기각이었다. 대법원 형사3부(주심 박만호 대법관)는 강기훈의 상고를 기각, 그에게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년 6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모든 것은 법정에서 판명될 것"이라는 그의 희망은 이렇게 물거품이 되는 듯 했다.

 

 

 

 

 

 

 

1993년 10월 11일

2막의 시작 : 홍성은의 양심선언

2막이 시작됐다. 숨가쁘게 진행된 1막은 약 1년3개월만에 끝났지만, 2막은 그보다 훨씬 천천히 길게 진행됐다. 1993년 10월 11일 김기설의 여자친구 홍성은이 양심선언을 했다. 그는 "당시 내 수첩에 적힌 김기설의 이름과 연락처는 강기훈이 적어주지 않았지만 검사의 협박을 받아 검찰 의도대로 진술했다"며 "1심 때 이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2심 때 변호인쪽 증인으로 출석하려 했지만, 공판 전날 검찰 수사관이 찾아오는 등 자유롭지 못한 분위기 때문에 나가지 못했다"고 했다. 이날은 서울지검 국정감사일이었고 강기훈이 증인으로 출석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1993년 10월 23일

<그것이 알고싶다> 방송 취소

유서대필사건을 다룰 예정이던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이 하루 전 갑자기 취소됐다. SBS는 '외압설'을 부인하며 "객관성 유지의 어려움 때문에 방영을 일단 보류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방송 전 대법원이 SBS에 "증거 채택은 재판부의 고유 권한"이라는 입장을 전달했고, 방영 후 항의 또는 해명을 위한 대국민 성명 채택 여부를 검토하기로 하는 등 예민한 반응을 보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도 권력에 불리한 프로그램이 취재, 방송되려 하면 권력은 압력으로 무산시키는 일이 생긴다.

 

 

 

1994년 8월 17일

강기훈 출소

모든 형량을 다 마친 후였다. 재심요구에도 대법원은 받아들이지 않고 요지부동이었다.

 

 

 

1998년 2월 12일

국과수 감정인 두번째 구속

강기훈 출소 4년 뒤 국과수에서 김기설의 유서를 감정했던 핵심 인물인 김형영 전 실장이 다른 사건에서 허위 감정 혐의로 구속됐다. 그의 비리가 드러난 것은 두번째였다. 1992년 5월에도 그는 감정과정에서 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자연스럽게 강기훈 사건에 대한 재심 요구가 불거졌지만, 대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1998년 3월 14일

4년 5개월만의 방송

SBS <그것이 알고싶다>가 전파를 탔다. 1993년 10월 방송이 취소된 지 4년 5개월만이었다.

 

 

 

 

2001년 7월 3일

김기설,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

2001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김기설 등 156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이에 따라 그의 가족들은 2002년 민주화운동 보상금으로 2억 800만 원을 받았다.

 

 

 

 

 

 

2002년 4월 28일

김기설의 아버지 "유서는 아들의 글씨가 분명하다"

재판 당시 강기훈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던 김기설의 가족들이 10여년이 지난 후에야 입을 열기 시작했다. 대통령 선거가 있던 해인 2002년 4월 28일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그의 아버지는 "유서 자체는 이제야 제대로 봤다"며 "김기설의 글씨가 분명하다"고 했고, 어머니는 "누가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법정에서) 아들 글씨가 아니라 하자고 해서(그렇게 말했다)"고 털어놨다. 이제 강씨의 주요 유죄 근거는 대부분 허물어졌고 남은 것은 국과수 감정 결과 뿐이었다.

 

 

 

 

 

 

 

2004년 11월 18일

경찰 과거사위, 조사 시작

노무현 대통령 취임 후 정부차원의 과거사 정리작업이 시작됐다. 경찰은 2004년 11월 18일 외부인사가 포함된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를 발족했고, 위원회는 유서대필사건 등을 조사 대상으로 선정했다.

 

 

 

 

2005년 3월 29일

진실을 위해 다시 뭉치다

2005년 3월 시민사회가 강기훈의 명예회복과 진상 규명을 위해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렸다. 여기에는 예전 강씨의 전민련 동지들도 대거 참여했다. 뭔가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2005년 9월 20일

새로운 증거

2005년 9월 경찰 과거사위는 "김기설의 동료로부터 그의 필체가 담기 A4용지 1매를 전달받았고, 그의 친구에게서 1권짜리 '전민련 활동일지(전대협 노트)'를 입수했다"고 밝혔다. 이 자료들은 이후 유서의 필적을 밝히는데 중요한 근거로 쓰인다.

 

 

 

 

 

 

 

 

2005년 12월 16일

경찰 과거사위 "검찰은 공정하지 못했다"

2005년 12월 16일 경찰 과거사위가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들은 ▲1991년 당시 국과수 직원이 감정을 의뢰했던 검사에게 '어떤 감정 결과를 원하냐'며 전화 통화를 했고 ▲ 새로 입수한 김기설의 물건과 유서 필적이 동일하다며, "검찰이 공개 거부로 유서 원본을 감정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감정이 객관적이고 공정하지 않았다는 의문이 있다"고 밝혔다. 검찰은 즉각 반발했다. 검찰은 "경찰 과거사위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에 의한 진상규명의 권한과 자격이 있는 위원회가 아니다"라고 못박았다.

 

 

 

2006년 4월 25일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착수

검찰은 경찰 과거사위의 법적 권한을 문제삼았다. 이번에는 법적 권한이 있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나서기 시작했다. 2006년 4월 25일이었다.

 

 

 

 

 

2007년 11월 14일

국과수, 16년 만에 뒤집다

2007년 11월 14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국과수와 7개 사설감정원에 유서 원본 감정을 받은 결과 모두 김기설 필적으로 나왔다고 공식 발표했다. 1991년 국과수의 판단이 16년만에 공식적으로 뒤집어지는 순간이었다. 진실화해위는 "기소 및 재판의 기초가 된 필적 감정이 번복됐다"며 "재심 등 상응하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2008년 1월 31일

3막 : 재심

이제 공식적인 사법부의 판단만 남았다. 재심 청구는 예고된 수순이었다. 2008년 새해가 밝자마자 강기훈은 재심을 청구했다. 하지만 정권은 1991년 당시 여권에 뿌리를 둔 한나라당으로 다시 넘어간 상황이었다. 3막이 올랐다.

 

 

 

2009년 9월 16일

18년 만에 재심 결정됐지만

18년 만에 재심 결정이 났다. 2009년 9월 16일 서울고법 형사10부(부장판사 이강원)는 새로 발견된 김기설의 전대협 노트와 낙서장, 진실화해위와 경찰 과거사위 조사 결과 등을 종합할 때, 증언이 허위인 것이 드러났고 무죄로 인정할 명백한 증거가 새로 나왔다며 강기훈의 재심 청구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검찰은 법원이 '새로운 증거'로 인정한 전대협 노트 등이 조작됐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곧바로 대법원에 항고했다. 재심 청구부터 결정까지 1년8개월이 흘렀지만, 더 기다려야 했다.

 

 

 

 

 

 

 

 

 

 

2012년 7월 4일

판단 미루는 대법원... 간암

검찰 항고 이후 3년 가까이 흘렀건만 대법원은 답이 없었다. 재심 개시 여부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쥔 대법원이 결론을 내리지 않자 여러 억측이 나돌았다. 강기훈의 속은 타들어갔다. 재심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간암에 걸렸다. 변호인단은 "강기훈의 건강 상태가 나빠져 제대로 법정에 서기 어려운 상황이 올 수 있으니 재심 개시 여부를 빨리 결정해달라"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2012년 10월 9일

시민들이 나서다

미적거리는 대법원, 그리고 시간이 별로 남지 않은 강기훈을 지켜보던 시민들이 나섰다. 2012년 10월 9일 서울시립대에서 ''강기훈의 쾌유와 진실을 위한 후원콘서트'가 열렸다. 많은 시민들은 그의 쾌유를 빌며 십시일반 후원금을 모았다. 이날 박원순 서울시장은 공개적으로 "제 모든 양심을 걸고, 강기훈은 무죄다"라고 말했다.

 

 

 

 

2012년 10월 19일

재심 개시 결정

2012년 10월 19일 대법원이 드디어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2008년 1월 재심을 신청한지 4년9개월만이었다. 그러나 재심 사유로 서울고법과 달리 국과수 감정인들의 위증 부분만 인정했다. 김기설의 노트를 보관해왔다는 친구의 증언 등은 믿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대법원의 재심 결정문은 이번 재심이 다른 재심과 달리 험난한 여정이 될 것임을 예고했다.

 

 

- 1 -
? 대법원 1부는 2012. 10. 19.자 2009모1181 재항고사건(이른바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의
재심개시결정 사건)에 관한 결정(주심 대법관 양창수)에서, 재심대상판결 당시 국립과학
수사연구소 소속 문서감정인들의 공동심의에 관한 증언 내용 중 일부가 허위임이 증명되
었고, 이러한 허위의 증언에 대하여 공소시효가 완성되어 위증죄의 확정판결을 얻을 수
없는 때에 해당하므로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2호 소정의 재심사유가 있다고 본 원심의
판단은 정당하다고 판시함으로써 재심대상판결에 대해 재심을 개시한 원심을 확정하였
다.
? 다만, 대법원은, 재심청구인이 재심사유로 내세우는 새로운 증거들, 특히 ‘유서가 김기
설의 필적과 동일하고 재심청구인의 필적으로 볼 수 없다’는 진실화해위원회의 감정의뢰
결과는, 전대협노트 등의 발견 및 보관경위를 둘러싼 한송흠의 진술내용에 여러 의문점
들이 남아있고 가능한 조사?자료에 의하여 그 진술내용의 신빙성이 충분히 확인되거나
객관적으로 뒷받침되지 아니하였음에도 전대협 노트 등이 김기설의 필적이라는 예단의
영향 아래 대부분의 감정이 진행된 것으로 의심되는 이상, 그러한 예단이 감정결과에 영
향을 미쳤는지 여부나 그 정도 등을 가려보지 아니한 상태에서 섣불리 그 감정결과에 신
빙성을 부여하거나 증거가치가 객관적으로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등의 이유로, 이와 달리 위의 새로운 증거자료들이 이 사건 재심대상판결 부분에 관하여
무죄를 인정할 명백한 증거에 해당한다고 보아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5호에 정한 재심사
유가 있다고 본 원심의 판단은 잘못이라고 판시하는 한편, 다만 위와 같이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2호에 정한 재심사유가 인정된다고 한 원심의 판단이 정당한 이상, 재심을 개
시한 원심의 조치는 결과적으로 정당하다고 판단하였다.
이른바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의 재심개시결정에 관한
대법원 재항고 결정 관련 보도자료
- 2 -
? 본 결정은, 필적감정에서 감정인이 감정대상문서의 작성자를 심리적으로 미리 결정하
고 감정에 임하는 경우 그로 인하여 감정결과에 미칠 가능성을 쉽사리 배제하거나 간과
할 수 없으므로, 감정인이 위와 같은 예단을 가지고 감정을 하였음이 밝혀지거나 이에
관하여 상당한 의심이 드는 경우에는 법원으로서는 그러한 예단이 감정결과에 미친 영향
의 유무나 정도를 가려본 후 그 신빙성 유무 내지 증거가치를 판단하여야 할 것이라는
지침을 밝힘과 아울러 전대협노트 등의 필적이 김기설의 것이라고 본 예단이 감정결과에
미친 영향의 유무나 정도를 살펴보지 아니한 채 진실화해위원회의 감정의뢰결과가 종전
의 국과수(김형영) 감정결과보다 현저히 우월한 증거가치가 있다고 단정한 원심의 잘못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 이번 대법원 결정으로 재심개시결정이 확정되었고 이에 따라 향후 형사소송법 제438
조 제1항에 의하여 해당 심급의 재심소송절차가 진행됨으로써 재심청구인은 유?무죄에
관하여 새로이 본안판단을 받을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 3 -
Ⅰ. 사안과 쟁점
가. 사안의 개요
○ 재심청구대상사건 공소사실의 요지
? 김기설이 1991. 5. 8. 08:07경 서울 마포구 신수동 소재 서강대학교 본관 5층 옥
상에서 전신에 시너 1통을 뿌리고 불을 붙인 후 약 16.5m 아래 지상으로 뛰어내
려 병원으로 후송도중 사망하였는데, 재심청구인(→피고인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 2장을 대신 작성해 주어 김기설의 자살을 방조하였다.
○ 재심청구대상사건 소송의 경과
? 제1심: 자살방조죄와 국가보안법위반죄(이적단체 가입 및 이적표현물 소지)에 대
하여 징역 3년, 자격정지 1년 6월 선고{서울형사지법 1991. 12. 20. 선고
91고합1126, 1328(병합) 판결}
? 제2심: 파기자판(누범 가중 법령 적용 오류 시정) →징역 3년, 자격정지 1년 6월
선고(서울고법 1992. 4. 20. 선고 92노401 판결)
? 상고심: 상고기각(대법원 1992. 7. 24. 선고 92도1148 판결) → 1994. 8. 17. 재
심청구인에 대한 형 집행 종료
○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상규명결정
? 2006. 4. 13. 재심청구인의 진실규명신청 ? 2006. 4. 25. 조사개시 의결 ?
2007. 11. 19. 진실규명결정
○ 재심개시결정(→원심결정)
? 서울고등법원 2009. 9. 15.자 2008재노20 결정 :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2호, 제5
호의 재심사유가 있다는 이유로 재심개시결정
? 재항고 : 서울고등검찰청 검사가 재심사유의 부존재를 주장하며 재항고 제기
- 4 -
나. 쟁점
○ 이 사건의 쟁점은, ? 재심대상판결에서 유죄의 증거로 되었던 국립과학수사연
구소 문서감정인들의 ‘필적감정절차에서의 공동심의’에 관한 진술이 허위의 증
언으로서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2호에 정해진 재심사유에 해당하는지 여부, ?
그리고 김기설의 필적이라며 제출된 전대협노트와 재심청구인의 필적문서 등에
대한 새로운 감정결과가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25호에 정해진 ‘무죄를 인정하기
에 명백한 새로 발견된 증거’에 해당하는지 여부이다.
II. 결정의 요지
○ 대법원 1부는, 재심대상판결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소속 문서감정인들의 공
동심의에 관한 증언 내용 중 일부가 허위임이 증명되었고, 이러한 허위의 증언
에 대하여 공소시효가 완성되어 위증죄의 확정판결을 얻을 수 없는 때에 해당
하므로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2호 소정의 재심사유가 있다고 본 원심의 판단은
정당하다고 판시함으로써 재심대상판결에 대해 재심을 개시한 원심을 확정하였
다.
○ 다만, 대법원은, 재심청구인이 재심사유로 내세우는 새로운 증거들, 특히 ‘유서
가 김기설의 필적과 동일하고 재심청구인의 필적으로 볼 수 없다’는 진실화해위
원회의 감정의뢰결과는, 전대협노트 등의 발견 및 보관경위를 둘러싼 한송흠의
진술내용에 여러 의문점들이 남아있고 가능한 조사?자료에 의하여 그 진술내
용의 신빙성이 충분히 확인되거나 객관적으로 뒷받침되지 아니하였음에도 전대
협 노트 등이 김기설의 필적이라는 예단의 영향 아래 대부분의 감정이 진행된
것으로 의심되는 이상, 그러한 예단이 감정결과에 영향을 미쳤는지 여부나 그
정도 등을 가려보지 아니한 상태에서 섣불리 그 감정결과에 신빙성을 부여하거
나 증거가치가 객관적으로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등의
이유로, 이와 달리 위의 새로운 증거자료들이 이 사건 재심대상판결 부분에 관
하여 무죄를 인정할 명백한 증거에 해당한다고 보아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5호
에 정한 재심사유가 있다고 본 원심의 판단은 잘못이라고 판시하는 한편, 다만
위와 같이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2호에 정한 재심사유가 인정된다고 한 원심의
- 5 -
판단이 정당한 이상, 재심을 개시한 원심의 조치는 결과적으로 정당하다고 판단
하였다.
Ⅲ. 본 결정의 의의
○ 이번 대법원 결정은, 이른바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에 대하여 종전 확정판결 당
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소속 문서감정인들의 공동심의에 관한 증언 내용 중 일
부가 허위임이 증명되었다는 등의 이유로 형사소송법 제422조 제2호 소정의 재
심사유가 있다고 판단하여 재심개시결정을 내린 원심을 확정한 결정이다.
○ 대법원은, 새로 발견된 증거 및 이와 밀접하게 관련?모순되는 종전의 증거들을
함께 비교?평가한 결과는, 단순히 공소사실을 뒷받침하거나 이를 탄핵하는 증
거들이 법관의 자유심증에 따른 판단 범위 내에서 그 증명력의 우열을 다투는
정도를 넘어서서 유죄의 확정판결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는지 여부의 판단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확정판결의 정당성이 의심스러운
정도를 넘어 확정판결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실체적 진실의 발견에 의한 무
고한 사람의 구제라는 재심제도의 취지와 이를 통한 정의의 구현이라는 형사사
법의 이념에 반할 정도로 고도의 개연성이 인정될 경우라야 비로소 재심이 개
시될 수 있는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 또한 필적감정에서 감정인이 감정대상문서의 작성자를 심리적으로 미리 결정하
고 감정에 임하는 경우 그로 인하여 감정결과에 미칠 가능성을 쉽사리 배제하
거나 간과할 수 없으므로, 감정인이 위와 같은 예단을 가지고 감정을 하였음이
밝혀지거나 이에 관하여 상당한 의심이 드는 경우에는 법원으로서는 그러한 예
단이 감정결과에 미친 영향의 유무나 정도를 가려본 후 그 신빙성 유무 내지
증거가치를 판단하여야 할 것이라는 지침을 밝혔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 이번 결정으로 재심개시결정이 확정되었고 이에 따라 형사소송법 제438조 제1
항에 의하여 해당 심급의 재심소송절차가 진행됨으로써 재심청구인은 유?무죄
에 관하여 새로이 본안판단을 받을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끝>

 

 

 

 

 

 

2012년 12월 21일

20년 만에 법정에 서다

2012년 12월 21일 유서대필사건 재심 첫 공판이 시작됐다. 지난 1992년 대법원 확정 판결 후 딱 20년 만이었다. 강기훈은 모두 진술에서 "이 재판이 과거시대의 어두웠던 기억을 접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재심 재판은 준비기일 2회, 심문기일 1회, 공판기일 10회 등 총 13차례 열렸다.

 

 

 

 

 

 

 

 

2013년 12월 12일

세번째 국과수 필적 감정

2013년 12월 12일 재심 재판 막바지 강기훈의 변호인단은 '국과수 필적 감정 결과 회보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김기설의 유서와 전대협 노트 등과 강기훈의 필적을 다시 한 번 국과수가 감정한 결과물이었다. 국과수는 ▲ 김기설에게는 고유한 글씨 습관이 있는데 ▲ 그 특징이 유서와 전대협 노트 등에선 나타나지만 강기훈의 필적에선 찾아볼 수 없다고 밝혔다. 이것으로 국과수는 유서대필사건 관련 필적 감정을 1991년, 2007년, 2014년 세번 했는데, 1991년의 판단만 달랐다. 변호인단은 환호했고, 검찰은 일그러졌다. 당초 국과수에 이 감정을 의뢰했던 쪽은 검찰이었지만, 감정 결과서의 기술방식이 국과수 내부 규정에 어긋난다며 검찰은 증거로 신청하지 않았다.

 

 

2014년 1월 16일

"할만큼 했구요, 잘 견뎠잖습니까?"

"법정에서 제가 진술하는 기회도 오늘로서 끝입니다. 너무 오랜 기간 동안 화제의 중심에 섰습니다. 이제는 좀 놓여나고 싶습니다. 잔혹한 시간들도, 끝도 없이 지속됐던 불면도, 여러 사람들을 저주하며 보냈던 시간과도 이별하고 싶습니다. 할만큼 했구요, 잘 견뎠잖습니까. 이 정도면 과거의 잘못된 수사와 판결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준 저에게 검찰과 법원은 고마워할 만도 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2014년 1월 16일 강기훈 재심법정 최후진술 중)

 

 

 

 

 

 

 

14:00
2014년 2월 13일

무죄(無罪)

2014년 2월 13일 오후 2시 재심 재판부인 서울고등법원 형사10부(부장판사 권기훈)는 강기훈의 자살방조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1991년 사건이 일어난지 23년 만이다. 재판부는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했다고 보기 힘들다고 밝혔다. 또 더 나아가 "유서가 김기설이 직접 작성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까지 말했다. 그렇다면 1991년의 그 난리는 다 무엇인가. 지난 23년의 세월은 또 무엇인가. 본인이 직접 쓴 유서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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