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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란(항구) 추천 0 조회 37 08.12.18 09: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인도네시아 생활노트
23.소년 오바마.그를 키운 인도네시아
2008/10/14 오후 1:23 | 인도네시아 생활노트

- 생활 환경이 성장기 소년에게 미치는 영향 -

소년은 성장 과정을 통하여 휴머니티의 이상을 추구하고 인격의 완성을 주제화 해 가는 것이며,인간이 유년기의 장소에 애착을 갖는 까닭은 성장기에 체험한 어머니라는 장소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여행하는 동물(Homo Viator)’이다. 한 인간의 성장 과정에서 공간이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막대하다. 그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공간 속에서 이동하고 정착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인격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은 유전적 특성과 환경적 특성이 있다. 그러나 사람은 자유와 의지(意志)를 가졌기에 이러한 유전적 특성을 바탕으로 환경적 특성의 영향을 받음에 있어 그 결과가 다양하게 나타난다. 스스로의 지적(知的) 능력과 자유의지에 따라 환경적 요인이 걸러지고 유전적 요인이 극복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지능(知能)과 자유의지 또한 환경적 요인에 따라 제한 받기 때문에 환경적 요인이 인격형성(人格形成)에 끼치는 영향은 큰 것이다.



가족도 아동의 발달에 큰 영향을 준다. 각 개인은 출생과 동시에 한 가족의 일원이 되어 성장하며 가족 구성원으로서 생활하고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사회를 떠나 살 수 없으며 인간은 사회 속에서 성장한다. 소년의 생활권(生活圈)에는 항상 사회가 밀접히 관련되어 있어 소년들은 가정환경 뿐만이 아니라 그 사회환경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는다. 사회는 소년에게 많은 것을 전수시켜 주는 생활현장으로 소년은 사회집단 내에서 소속단체의 행동양식, 가치관, 생활규범 등과 같은 문화를 습득하고 자신의 인격을 형성해 나간다.

성장기의 소년은 공기를 마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대기를 마시고 산다. 그 정신적인 대기가 깨끗하고 건전할 것 같으면 그것을 마시는 사람들의 철학적 및 심리학적 성장이 순조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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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바마의 출생 -

버럭 오바마(Barack Obama)는 1961년 8월 4일,7시 24분에 미국의 하와이주 호놀룰루의 퀸즈메디컬센터에서 태어났다.하와이는 여러면에서 가장 생각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고,피가 섞인 조상을 가진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곳이다.



그의 어머니는 2차 세계대전 기간중 1942년,군기지에서 태어났고 그녀의 아버지는 남자를 원했기 때문에 스텐리 라는 이름을 붙여줬다.그녀의 가족은 1960년 하와이 호놀룰루에 정착하기 전까지 보다 나은 돈벌이를 위해 캘리포니아, 캔자스, 텍사스, 워싱턴을 전전 하다가 고교를 졸업할 즈음 부모를 따라서 새로운 생활을 찾아 하와이로 이주 하였다.마틴 루터킹 2세의 연설을 좋아 했고,흑인가수 해리 벨라폰테가 지구에서 가장 잘 생긴 남자라고 생각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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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주의 거의 절반에서 다른 인종간 결혼이 불법이던 시절,18세 때 그녀는 버락 후세인 오바마 1세와 1961
년 하와이대학 인류학과 1학년 시절로 그해 4월 결혼 했다.당시 18세였던 더넘 씨는 임신 3개월째였다. 아무도 초청하지 않고 결혼식을 올린 그는 한 학기 만에 학교를 중퇴했다. 그리고 8월에 오바마를 낳았다.



오바마는 지난 1995년에 펴낸 회고록 <아버지가 전해준 꿈>에서아버지가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전혀 다르게 생겼다는 점, 즉 아버지는 석탄처럼 시커멓고 어머니는 우유처럼 허옇다는 점이 내 머릿속에 어렴풋이 자리를 잡았다나는 누구일까(?)"라는 자아에 대하여 생각을 많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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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오바마 1세는 아프리카 케냐의 염소 목동 출신으로,서부 빅토리아 호숫가에 자리한 응얀자의 시골 마을 출신이다.무슬림인 오바마의 할아버지는 영국인 지주의 집에서 요리사 생활을 했고, 부친은 어려서부터 염소를 몰며 가사를 도왔다. 장학생으로 선발돼 미국 땅을 밟았으니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다.

오바마가 성장하여 시카코에 있으때 케냐의 이복 누나 아우마가 그를 처음으로 찾아왔다.어머니 앤이 치켜 세우는 이야기를 통해 알고 있던 아버지가 실은 낙담 속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의 희망은 케냐 정권과의 정치적,개인적 갈등으로 사려졌고 술과 가정 불화로 엉망이 되어 버린 개인 생활 속에서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것이었다.



오바마는 성장해 청년시절에 케냐를 방문해 이복 친척들을 만나보고 아버지의 기억과 화해 하면서,아버지의 이야기가 객관적인 교훈이 되었다.그 후로는 아버지가 저지른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그리고 아버지의 일생과 자기 삶의 의미를 찾는 일에 대하여 책(내 아버지로 부터의 꿈)을 썼다. 그리고 두번째 저서"나를 기른 여인들"에서 어머니와 외할머니에 대하여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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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 아버지는 하와이대학으로 경제학을 공부 하러온 최초의 아프리카 출신 유학생이었고.하와이대에서 그는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곳곳에서 연설 초청을 받고 지역 신문들이 인터뷰를 했다. 동료들은 "오바마의 아버지 자석같이 주변을 빨아들이는 성격이었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웅변이 됐다" 회상했다.


 

어머니 앤의 고교친구들은 앤이 백인 남학생과 데이트한 것을 본 적이 없다며그녀는 인종문제 기준으로 삼아 다름을 멀리하기 보다는 다름을 수용하는 쪽이었다고 회고했다.첫 결혼과 재혼문제에 대해서도 지인들은그녀는 얼마나 깊게 사랑하는지가 문제지, 결혼이란 제도 자체가 특별히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에게 자기 이름을 물려준 아버지. 오바마가 태어난 지 1년 만에 그의 아버지는 하버드대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그러나 그의 목표는 케냐로 돌아가 조국 부흥에 헌신하는 것이었다. 케냐엔 이미 유학오기전 결혼한 부인이 있었다. 앤은 따라가지 않고,오바마가 두 살 때 1963년에 이혼했다.



'흑인과의 사이에 아들을 둔 어린 이혼녀'라는 주변의 시선, 월세를 내기도 벅찬 생활속에서도 앤은 아버지의 부재(不在)가 아들의 마음속에 분노를 심어주지 않도록 '항상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가르쳤다.그녀는 소년 오바마에게 정직함과 직설적인 언변, 독립적인 사고의 중요성을 가르쳤고, 그녀의 많은 지인들은 앤이 아들에게 남겨준유산으로 자신감, 추진력, 경계 허물기 등을 꼽았다.



오바마는 2살 이후,1971년 10살,크리스마스 때 오바마는 당시 케냐 재무부 공무원으로 일하던 아버지를 잠시 만났다. 하와이를 찾은 아버지는 농구공을 선물했다.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 농구를 했다는 게 오바마의 회고다. 농구는 지금도 그가 가장 좋아하는 운동이다.아버지와의 만남은 그때가 마지막이다. 오바마는 82년 케냐 방문 계획을 세웠으나 그해 아버지가 자동차 사고로 52세에사망했다.


- 소년 오바마.그를 키운 인도네시아 -

대학에 복학한 어머니 앤(24세)은 하와이대에 유학 중이던 인도네시아 출신 유학생인 낙천적 성격의 롤로 수또로를 만나 1967년에 재혼 하였다.



오바마는 1967년 6살 때 부모와 함께 하와이에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 이사해 이주하여 생활 했으며, 10살이 되던 1971년까지 거주하면서.자카르타의 카툴릭 계통의 아시시 초등학교를 다녔고,이슬람 계통의 국립 제1 멘뗑 초등학교로 전학해 4학년까지 다녔다.인도네시아 아버지 수에토로 역시 종교가 이슬람이었다.



지난해 초 그가 바람을 일으키자 <폭스뉴스>오바마가 인도네시아에서 이슬람 학교에 다녔다고 보도 한 것도,그의 중간 이름후세인이 주는 묘한 분위기까지 곁들여지면서 제법 논란이 커졌지만,CNN방송〉의 현지 취재 결과 평범한 초등학교인 것으로 밝혀졌다.

인도네시아 집은 자카르타 그 지역의 유일한 외국인 아이였던 오바마는 담위에 앉은채 두 팔을 날개처럼 퍼덕대며 까마귀 우는 소리를 내곤했다. 다른 아이들의 관심을 끌고 싶었고 곧 다들 친구가 됐다. 카톨릭 스쿨에서 아이들은 그를 '니그로'라고 불렀으나 오바마는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고 당시 친구들은 회상했다.오바마는 그의 자서전 '아버지로부터의 꿈'을 통해 자카르타에 살던 당시 원숭이와 앵무새, 새끼 악어 등 열대의 이국적인 동물들을 보고 깜짝 놀라곤 했었다고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오바마는 초등학교 시절 평범하지만 아주 활동적인 어린이로 그의 선생님과 급우들은  기억하고 있다.4학년 짝궁이었던 위디얀토 헨드로(48)는 오바마가 어린 시절 인도네시아어를 익히려고 매우 노력했으며 뛰어나지 않았지만 재능이 있던 학생으로 기억했다.그는 "오바마가 왼손으로 스파이더맨이나 배트맨 같은 것을 아주 잘 그렸다"고 회상했다

아버지 수또르는 점점 서양인 처럼 되어갔고,어머니 앤은 점점 인도네시아인 처럼 되어 갔다.아버지 수또르가 소중하게 여긴것은 조니워커 블랙과 앤디 윌리엄스 레코드였다."문 리버"음율을 들으면서 커피를 즐겨 마셨다.컨트리 클럽에서 테니스도 즐겼다.아버지 수또르는 정유회사에 다니다 1987년 간질환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어머니 앤은 다른 사람의 입장을 헤아리는 능력이 뛰어났으며,각양각색의 사람들 속에서 자신을 보는 능력이 있었다. 9살 아래인 여동생 마야 소에토르와 오바마에게 엄격한 교육을 하였고,판단력과 매서운 성격을 남겨 주었다.


미국대사관에서 영어 가르치는 일자리를 얻은 오바마의 어머니는 매일 오전 4에 아들을 깨워 영어를 가르쳤다. 아들이 성장과정에서 흑인들과 어울리는 경험을 하지 못한 것을 보상해주려 했던 그는 퇴근할 때 흑인민권운동 지도자들의 책을 가져와 건네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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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인들이 오바마가 어린 시절을 인도네시아에서 보냈다는 친밀감 때문에 그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기를 기원하고 있다.
멘뗑 초등학교의 꾸와디얀또 교장은 "우리 학교 출신이 미국 대통령후보가 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꾸와디얀또 교장은 "미국 대통령 후보가 개인적으로 인도네시아를 배경으로 가진 인물이라는 것은 굉장히 특별한 일이다" "오바마가 우리 학교를 다녔다는 뉴스가 보도된 뒤 많은 외국 언론들과 인터뷰했다"고 말했다.


꾸와디얀또 교장은 "오바마의 유년시절의 경험이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미국과 인도네시아 관계를 보다 돈독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가 유년시절을 보낸 멘뗑 지역은 유력인사들이 많이 거주하는 자카르타 부촌 중 하나이다. 오바마가 재학할 당시에는 버수끼 초등학교라 불렸던 멘뗑 초등학교는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인 1934년에 네덜란드 관리들과 인도네시아 귀족 자녀를 위해 설립된 학교로 중상류층 가정의 자녀가 주류를 이루며, 수하르또 전 대통령의 자녀와 손자들 가운데 일부도 이 학교에 다녔다



멘뗑 초등학교의 아흐맛 솔리친 교감은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이슬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는 "오바마가 이슬람을 믿었던 적은 없지만 적어도 인도네시아에서 이슬람에 대해 배웠다"고 말했다.멘뗑 초등학교는 국가가 정한 교과과정에 따라 학과목을 가르치며, 일반과목은 여러 종교의 학생들이 함께 수업하고, 종교학 시간에는 각 종교에 따라 분반수업을 하므로 비이슬람학생들은 각자 종교에 해당하는 수업을 개별적으로 받게 된다.


오바마의 동네 친구 에디 뿌르완또로는 그가 사원에서 사룽(인도네시아 사람들이 허리에 두르는 천)을 뒤집어 쓰고 닌자놀이를 했지만 종교활동은 하지 않았다며, 오바마의 계부는 이슬람신자이고 오바마는 기독교신자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오바마의 옛 친구와 선생님들은 유년시절의 그를 매우 영리한 소년으로 기억했다.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던 오바마의 담임교사 이스라엘라(64) "오바마가 3년간 우리 학교에 다녔다. 그는 배리 수또로라는 이름으로 등록했고, 우리는 그를 배리 수또로로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지난해 퇴직한 이스라엘라는 오바마가 키가 크고 검은 피부를 가진 고수머리 소년이었으며, 예의가 바르고 친절하며 비폭력적인 학생이었다고 회상했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이 3일 사실상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자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의 멘텡 초등학교의 짝궁이었던 위디안토 헨드로 카효노(48)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카효노는 "오바마가 평범했지만 매우 활동적인 친구였다""방과 후에는 땀을 뚝뚝 흘릴 때까지 공놀이를 하곤 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인도네시아는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자 그를 "고향의 영웅"으로 여기며 열광하고 있다.

이스라엘라는 "오사마는 키가 컸기 때문에 항상 칠판 지우는 일을 도와주었다", 또래 아이들의 대장으로 함께 놀다가 넘어지거나 우는 친구가 있으면 일으켜주거나 안아주는 등 약자를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아이였다고 전했다.
이스라엘라는 "오사마가 처음에는 다소 부끄러움을 탔으나 빠르게 인도네시아어를 배웠다", 그가 3학년 때 "나의 꿈"이라는 제목으로 글짓기를 했는데 '나의 꿈은 대통령'이라고 썼다고 회고했다.

  
3월 초에 그의 멘뗑 초등학교 시절 친구 20여명이 오바마 팬 클럽을 만들고 그에 대한 지지를 표했다. 오바마의 초등학교 시절 친구이자 현 국영 가루다항공의 사장인 에미르샤 사따르는 오바마를 운동을 잘했던 친구 특히 축구를 잘 했던 것으로 기억했다.오바마의 옛 친구들뿐만 아니라 현재 인도네시아 초등학생들도 오바마를 지지했다.
멘뗑 초등학교 4학년 학생들에게 "버락 오바마가 누구냐?"고 묻자, 한 목소리로 "미국 대통령!"이라고 외쳤다.



10~11세 사이의 어린이들이지만 텔레비전을 통해 오바마를 알고 있다며 그의 당선을 열렬히 희망했다."언젠가 오사마가 이곳을 방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전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아시시 초등학교 재학생 조이 파워(10) "우리는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이 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고 말했다.


많은 인도네시아인들이 오바마가 미국대통령에 당선되면 미국과 인도네시아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미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나, 인도네시아에서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슬람계 국민들은 조지 부시 대통령의 많은 정책 특히 중동정책에 부정적인 입장이다.'인도네시아 외교 위원회'의 드조코 수실로 위원은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면 미국과 인도네시아 양국 관계가 한층 긴밀해질 것으로 기대하는 등 인도네시아가 오바마의 미 민주당 대통령 후보 확정 소식에 열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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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는 "어머니는 피부색은 달라도 모든 사람은 동등하고 같으며 모든 사람을 각각 독특한 소중한 존재이므로 존중해야 한다고 항상 강조했으며,아시아 빈민 여성들의 삶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인류학자였다"고 그의 삶을 요약했다.
어머니 앤은 인도네시아에서 영화인 음악인 노조지도자들과 교류하면서 주변부 여성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여권이나 인종 문제를 입에 달고 사는 그런 타입은 아니었으며 항상 긍정적 자세였다고 당시 동료들은 전했다.



오바마는 자서전에서 어머니는 "이제까지 내가 알고 있는 가장 마음씨 곱고 관대했던 분"이라고 묘사했으며 교육에도 헌신적이어서 자신은 새벽 4에 일어나 공부를 해야 했다고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어머니 앤은 학부 전공이 인류학인 것에서 알 수 있듯, 박애정신이 뛰어나다는게 주변인들의 한결 같은 평가다. 그녀의 이력을 보면 이해가 쉬워진다. 그녀는 자카르타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현지의 불우안 이들을 돕는데 헌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그녀는 인도네시아 인민은행을 거친 후 자카르타 소재 포드 재단으로 옮기면서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살았다. 덕분에 그녀는 세계은행(WB)과 국제개발처(USAID)에서 컨설턴트의 경험을 살리기도 했다
.그녀는 소년 오바마에게 정직함과 직설적인 언변, 독립적인 사고의 중요성을 가르쳤고, 그녀의 많은 지인들은 앤이 아들에게 남겨준유산으로 자신감, 추진력, 경계 허물기 등을 꼽았다.

포드 재단 근무 시절 던햄의 동료였던 테란스 비갈케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매우 깊었다" "그녀는 일생을 불우한 사람들을 도우며 살아왔다"고 회상했다.하와이 대학원에 진학해 인도네시아 인류학을 공부했다



어머니 앤은 자카르타에서 평민들과 어울려 생활했으며,1992년 인도네시아 소작농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3년 뒤 자궁암으로 52세에 세상을 떠났다.오바마는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지 못했다.오바마 의원은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어머니의 유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어머니의 유해가 뿌려진 하와이 오하우 남쪽 해변의 절벽이 담겨있는 사진이라고 답했다.



- 미국에 첫 흑백의 피가 섞인 대통령’이 탄생 할 것인가(?) -

10살 되던 해인 1971년 호놀룰루로 돌아온 그는 외조부모 곁에서 보냈다.하와이의 명문 사립학교 푸나후에 5학년으로 전학한 오바마는 백인 아이들의 인종 차별적 태도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  

 

1979년 고등학교를 마친 오바마는 애초 로스앤젤레스의 옥시덴탈칼리지에 입학했다이 대학 정치학과 로저 보시 교수는오바마는 호기심이 많은 학생이었다고 말한다. 



오바마는 81년 아이비리그 소속(동부의 8개 명문 사립대학) 컬럼비아대에 편입했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되고 싶어 그랬다고 한다.정치학과 외교학을 전공한 그는수도승처럼 공부했다고 회고한다.  

 

88
9월 오바마는 하버드대 법과대학원에 입학했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권력과 기업, 은행 등의 속성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바마는 90년 흑인으론 처음으로 권위 있는 법률 학술지하버드 로 리뷰(Harvard Law Review)’의 편집장으로 뽑혔다.



 
하버드 역사 104년 만에 흑인 편집장이 된 오바마는 당시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내가 선출된 건 미국이 진보하고 있음을 뜻한다고 말했다. 이듬해 법과대학원을 우등 졸업하고,
시카고대에서 헌법 강좌를 맡았다.



오바마는 96년 지역운동가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뒤 저소득층 노동자의 조세 부담 경감과 복지 향상, 정치윤리 개혁에 초점을 맞춘 입법활동을 했다. 덕분에 98년 다시 뽑혔다. 2000년엔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도전해 실패했으나 2년 뒤엔 주 상원 3선에 성공했다.



2004 7월 그에겐 상상하지 못한 기회가 찾아왔다. 존 케리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돕던 그에게 보스턴에서 열리는 전당대회에서 기조연설을 하라는 연락이 왔다. 선거자금 모금행사장에서 오바마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은 케리가 부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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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버락이란 아프리카식 이름을 붙여준 건 그것이 미국에서 성공하는 데 장애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우스꽝스러운 이름의 야윈 소년이 미국에서 잘살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품었다. 희망의 담대함(the audacity of hope), 그것은 신이 준 가장 위대한 선물이자, 미국의 근본이다.”당시만 해도 무명이었던 오바마는 미국인의 자긍심을 치켜세운 이 연설로 스타가 됐다.
그리고 흑인으론 사상 다섯 번째로 상원 입성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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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월 그는 더담대한 희망을 품었다. 사상 첫 흑인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 그래서 워싱턴의 정치를 바꾸고 미국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대중 앞에 밝혔다. 일각에선상원 경력이 2년 조금 넘은 신출내기가 대통령이 되는 건 불가능하다. 다음을 기약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도전했다. 그리고 변화를 갈망하고 희망을 찾는 미국인 사이에서 바람을 일으켰고, 그걸 조직으로 바꿔 힐러리호를 격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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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흥분되고, 감동적이며, 행복하다. 미국은 세계를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케냐 출신 아버지를 둔 흑인으로 태어나, 인도네시아에서 학교를 다니고, 미국으로 돌아와 교육을 마친 사람이 미 합중국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고 말이다.”  미국에 과연 첫 흑백의 피가 섞인 대통령’이 탄생 할 것인가(?) 


 



2008 11 4: 본 선거 (주별 선거인단 결정)

2008 12 15: 선거인단 투표 (당선 확정 투표)

2009 1 20: 44대 미국 대통령 취임식 (그는 누구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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