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월 13일 금요일 맑음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났다. 어제 해 놓은 밥에 참치와 계란으로 아침 식사를 했다. 주방의 그릇을 정리하고 짐을 챙겼다. 이제 출발이다. 포근한 오흐리드 호수, 머물 수 없는 것이 여행이 아닌가? 짐을 잘 정리해서 숙소를 6시30분에 나섰다. 바나나 집 안녕! 행복하게 사시길 마음속으로 빌며 조용히 숙소를 나서서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호수가 약간 멀다보니 터미널은 가깝다. 쉽게 터미널에 도착했다. 스코페에 가는 표를 샀다. 7시 30분 출발이다. 표는 500D(약 13000원)이다. 2번 홈에서 탄다고 하지만 터미널 넓은 공터에는 차가 없다. 기다리는 사람만 몇 명 있고 한가한 모습이다. 이곳을 여행 오는 사람들은 거의 개인차나 단체 버스를 이용하는 것 같다.
7시 30분에 출발했다. 커다란 산을 2개나 넘는다. 산악지대가 많다. 오르다 보면 또 골짜기를 달린다. 작은 휴게소에 차가 멈춘다. 영어 표시가 없으니 어딘지도 모르겠다. 화장실에 다녀왔다. 티코가 택시다. 작은 차들이 대부분이다. 또 출발하여 달린다. 농촌 모습이 펼쳐진다. 졸다가 눈을 떠보니 차는 휴게소에 또 들어간다. 버스 서 너 대가 서면 꽉 찰 공간이다. 식당이 있다. 화장실도 돈을 받는다. 고층아파트 1동이 낡은 모습으로 불안하게 서 있다. 높은 고원지대 인 듯한데, 완만하고 거칠다. 모스크와 교회가 함께 보이니 분쟁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그래도 마을의 지붕은 모두 주황색으로 화목해 보인다. 다리를 건넌다. 작은 강이다. 마케도니아는 국토의 많은 부분이 600~900m 높이의 고원지대다. 국토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바르다르 강은 수도 스코피예를 지나서 그리스 데살로니카 근처의 에게해로 흘러간다. 남서쪽으로 오흐리드 호수와 플레스파 호수는 알바니아를 지나 아드리아 해로 물이 빠진다. 이들은 발칸 반도에서 가장 큰 호수들이고 오흐리드는 가장 깊다. 북서쪽의 사르 플라니나 는 코소보와 국경을 이루는데, 이 지역에 있는 티토프 브르흐는 마케도니아 최고봉으로 높이 2750m이다. 비톨라의 서쪽 펠리스테, 갈리치차, 마프로보 등 3군데의 국립공원이 있다. 마케도니아의 여름은 덥고 건조하다. 겨울에는 따듯한 바람이 바르다르 계곡까지 불어오므로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를 누그러뜨린다. 기온은 북쪽에 있는 나라들 보다, 높은 편이지만 11월 2월 사이에 눈이 많이 내린다.
큰 십자가가 산위에 우뚝 솟아있다. 해발 1000m 2000년 밀레니엄을 맞아 개신교 대통령이 세웠다. 이 십자가는 전 국민이 헌금해서 세운 것 이란다. 격동의 역사를 수없이 반복해서 오다가가 구 유고연방으로부터 1991년 독립한 이후 조상 때부터 믿어왔던 하나님 이 자기들을 지켜 줄 것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십자가를 사랑하는 민족인가 보다. 보드노 산에 세워진 높이 60m 의 이 십자가를 여기서는 영혼의 십자가라고 한다. 인구 60만의 스코피예에 도착한 것이다.
버스는 스코피예 버스정류장에 섰다. 바르다르 강을 끼고 있는 마케도니아 수도 스코피예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발칸반도의 교차로 즉 이웃나라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와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다. 바르다르 강이 에게 해로 유입되는 지점인 그리스의 데살로니키는 남동쪽으로 260km에 있다. 로마인들은 오래전에 이 지역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다르다니아 주의 중심지였던 수추피라는 도시를 건설하였다. 이후 슬라브, 비잔틴, 불가리아, 노르만, 세르비아인 등을 포함한 점령자들이 터키가 들어왔던 1392년까지, 그리고 터키의 점령이 끝나고 스코피예를 1912년까지 점령했다.
1066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1963년 대지진 이후 유고슬라비아의 다른 지역에서 들어온 원조 덕택에 오늘날의 현대 도시모습이 만들어졌다. 당시 계획자들은 불필요하거나 지나치게 큰 건물을 세우는 등 잘못된 방식으로 돈을 써 버렸다. 이러한 건물들은 보수가 제대로 되지 않아 오늘날 허물어지고 있다. 우체국 건물과 그 옆의 전화국 건물은 불필요한 건축물의 문명한 실례로 알려져 있다.
스코피예 중심가는 대부분 보행자 지역이며 바르다르 강 위에는 구시가와 신시가를 연결해 주는 15세기 터키식 돌다리가 놓여있다. 다리북쪽에 있는 1466년에 지은 다우트 파샤 목욕탕은 한때 발칸 반도 최대의 터키탕으로 알려졌다. 시립미술관에는 돔 형태로 지은 6개의 방이 있다. 도시 북쪽에는 오래된 시장이 있으며, 1824년에 만들어진 정밀하게 조각된 그리스 정교회 성상이 있는 스베티 스파스 교회가 있다. 이 교회가 건축되었던 17세기에는 어떤 교회도 회교사원보다 높이 지을 수 없었기 때문에 교회의 절반은 가려져 있었단다. 재래시장 근처의 마케도니아 박물관은 이 지역의 역사를 보여주는 방대한 수집품을 소장하고 있다. 박물관은 현대식 흰 건물 안에 있으며, 터키시절 무역상들이 묵던 큰 여관 쿠루숨리 한의 뒤에 있다. 스코피예의 옛날 동방시장 지역은 유럽에 남아있는 시장들 중 가장 크고 화려하다고 신발끈 여행사 자료에 안내되어 있다.
우리는 여기서 하루를 묵지 않고 그리스의 데살로니키를 향해 가는 교통편을 알아보았다. 버스 터미널 안에는 국내를 연결하는 버스들은 많았으나 주변국들로 연결하는 버스는 없고 여행사들이 관할하고 있었다. 터미널은 깨끗하고 규모도 크다. 1층에는 매표소와 매점 그리고 여러 개의 여행사들이 있다. 2층에는 기차역이다. 기차는 이용객들이 많지 않아 활성화 되어있지 않았다. 열차 매표소 창구 직원이 한명밖에 없고 낮인데도 조명도 어둡다. 이용승객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데살로니키 행 열차를 물어보니 오후 5시에 출발하여 아침 7시 30분에 도착하는 1대의 기차가 있단다. 요금은 13유로란다.
여행사를 방문해 버스를 알아보니 새벽 2시에 출발하는 요금 20유로짜리 버스와 새벽 5시에 출발하는 25유로짜리 버스가 있단다. 20유로짜리는 대형 버스란다. 1시간동안 다른 여행사들을 알아보았지만 여기 한군데 밖에 없었다. 1시간 정도를 알아보다가 여행사로 가보니 대형버스는 좌석이 없고 미니버스를 타야한단다. 출발시간은 같은데 25유로란다. 나중에 알았지만 여행사에서 사람을 모집해서 가는 것이라 사람이 많으면 인원수에 맞춰서 차를 증편하는 것이었다. 마케도니아 수도를 그래도 여유 있게 맛보고 가려면 오후 5시 기차보다는 새벽 2시 버스가 더 나을 것 같아서 새벽 2시 표를 끊었다.
표를 결정했으니 이제 시내를 둘러보기로 했다. 새벽 1시 30분에 여행사 앞에서 주인을 만나기로 약속하고 사무실에 배낭을 맡겼다. 마케도니아 돈이 없어서 저녁에 쓸 돈 5유로를 환전했다. 이제는 새벽 1시까지 시내를 돌아다녀야 한다. 좀 여유가 있다.
버스터미널을 나서니 택시들이 많이 서있다. 방향을 알아야 움직이지......... 지도도 없으니 어디로 간단 말인가? 다시 터미널로 들어와 시내 지도를 구해보니 돈을 주고 사란다. 인심도 고약한 나라다. 돈 주고 사는 것은 좀 내키지 않아서 다시 나왔다. 오흐리드에서 이곳에 올 때 버스 안에서 봐둔 거리의 모습이 있어서 시내로 향하는 방향을 잡았다. 좀 멀리 고층의 홀리데이 인 호텔 건물이 보였다. 비록 우리의 차림새는 반바지에 티셔츠의 허술한 모습이지만 별 5개짜리 최고의 호텔 안으로 당당하게 들어섰다.
아내가 화장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카운터에 방을 물어보니 하룻밤 자는데 130유로란다. 내가 놀래니 매니저도 빙긋 웃는다. 화장실을 물어보니 친절히 안내해 준다. 매니저는 100유로까지 깎아 줄 수 있단다.약 16만원이다. 그것도 비싸다고 답하며 싼 숙소를 알려달라고 하니 시내로 들어가면 있단다. 물론 잘 계획도 이미 포기했지만........ 감사하다고 말하고 화장실에 간 아내를 기다렸다. 호텔 로비는 깨끗하고 고급스럽고 시원했다. 코너에 여행사도 있었다. 가서 지도를 구할 수 있는지 물으니, 친절하게 스코피예 지도가 들어있는 브로셔를 준다. 아내의 화장실도 해결하고 지도도 손에 넣었다.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감사드리며 기분 좋게 호텔을 나섰다.
오른쪽에는 바르다르강이 흐르고 있고 왼쪽에는 빌딩들이 이어진다. 강변에는 노천 레스토랑이 줄지어있다. 강이라고 하지만 청계천보다 훨씬 좁은 강폭이다. 일단 12시가 넘어가니 배가 출출했다. 작은 분수와 탁자와 사람을 만든 동상이 있는 작은 공터 벤치에 앉아 아침에 삶아온 계란과 사과를 먹었다. 정말 더운 날씨다. 시내 중심가인 마케도니아 광장으로 걸어간다. 마케도니아 광장은 너무 뜨거워 서 있기가 싫을 정도다. 그늘이 없다. 영웅들의 동상이 서 있고, 말 탄 기마상이 2개 서있다. 현대식 고층건물이 주변에 있고 대형 상업 선전 간판이 고개가 아프도록 크게 세워져 있다.
광장과 이어져 있는 Stone Bredge를 건넌다. 이 다리는 바르다르 강 위에 세워져 있다. 강은 생각보다 작다. 이 다리는 15세기 초에 세워졌다. 로만 브릿지 자리에 터키가 만들었는데, 중세의 문화적 역사적 기념비라고 할 수 있다. 11개의 아치로 구성되어있고 술탄 무라트 2세에 의해 보수된 각판이 다리 중앙에 있다. 다리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다리 기초 구조물 위에 만들어진 동상이다. 한 여자가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강으로 뛰어드는 폼과 이미 뛰어들어 강물위에 두 발만 올라와 있는 동상이 재미있어 한참을 쳐다보았다.
동상을 구경하고 다리를 건너니 양 옆에 두 명씩 짝을 지은 사제의 큰 동상들이 세워져 있다. 자세와 손에 든 물건들은 다리지만 풍기는 기품이 비슷하다. 1시 방향에는 1466년에 지어진 파샤 목욕탕이 보인다. 발칸반도 최대의 터키탕이었단다. 왼쪽 멀리에는 칼레성이 보인다. 길이 복잡하다. 터키풍의 거리다. 양옆에 기념품 상가와 식당들이 즐비하고 각종 가게들이 이어진다. 커다란 카페트 가게가 처음이다. 바람에 널어놓은 카페트들이 흔들린다. 멈춰버린 시계를 이고 있는 흰색의 높은 시계탑이 있다. 거리 양 옆의 가게들을 따라 죽 걸어가니 문이 하나 나오고 문을 통과하니 동방시장이다.
유럽에서 남아있는 재래시장 중 규모가 가장 크다는 시장이다. 규모가 얼마나 큰지 잘 알지 못하지만 많은 사람들과 빽빽하게 들어선 노점상들이 가득하다. 일단 들어서니 천막 아래라 그늘이 되어 좋다. 각종 채소와 과일이 많다. 구경하며 한참을 헤매다보니 가전제품, 공구 상, 그릇가게 등 규모가 점점 넓어지고 이에 따른 짐꾼들과 상인들 그리고 시민들로 복잡하고 시끄럽다. 언제 봐도 시장은 재미있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터키스타일이다. 이 곳 저 곳을 기웃거린다. 특이한 것은 관광객 외에 여자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모두 남자들이다. 그리스 아테네의 재래시장과 같은 느낌이다.
시장을 나와 골목길을 걸어 칼레 성을 향했다. 2006년에 세워진 국제발칸대학 건물을 지나니 하늘을 찌를 듯 세워진 모스크의 첨탑이 보인다. 무스타파 파샤 모스크다. 아주 깔끔한 인상을 준다. 찾아가니 공사 중이다. 다시나와 성을 가려고 길을 건넜다. 나무가 몇 그루 있고 잔디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가꾼 흔적이 없는 초록벌판에 길이 나있다. 그냥 열려있는 성문을 통과해 들어서니 아직도 발굴 공사 중이다. 그냥 방치되어있어 관리하는 사람도 없다. 새로 지어진 성벽에는 마케도니아 국기만이 펄럭인다. 폐허의 터들을 그냥 지나 계단을 올라 성벽에 서니 스코피예 시내가 한눈에 들어와 좋다. 우리가 도착한 버스터미널을 시작으로 호텔, 강, 다리, 광장 등이 보이고 강을 따라 도로와 건물들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모두 회색이라 좀 실망스럽다. 성벽을 따라 걸어보는 것도 뜨거운 태양 때문에 쉬운 것이 아니다. 아내는 양산을 쓰고 따라온다.
멀리 미국의 대사관이 보이는데, 이 성 주변의 모든땅을 개발해 주는 조건으로 미국이 샀다는 얘기도 있다. 발칸반도의 거점을 확보하기위해 마케도니아를 선택했고 또 중요한 위치인 이 부근을 찍어 넓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의 힘을 느끼게 한다. 원형의 커다란 타워는 뚜껑이 없고 돌만 쌓여있다.
이 성은 해발 250m의 보드노 산에 세워졌다. 보드노란 ‘물’이라는 뜻이란다. 물의 산이다. 1962년 대홍수로 바르다르 강이 범람해서 어려움을 겪었다. 강물 굽이가 도는 지역에 선 산 이어서 물의 산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1390년경에 세르비아 왕조시대에 두시안 왕이 이 성을 재건했다. 석회암으로 지어지고 라틴어가 새겨진 것으로 보아 518년 지진으로 무너진 고대 로마도시 스쿠파의 유적으로 추측이 되는 곳이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재건하고 10세기에서 11세기 사이에 확대 건설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1963년 지진으로 일부가 무너졌다. 대지진과 대홍수는 마케도니아의 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큰 자연재해다. 2006년 말 정부의 지원으로 발굴과 연구가 시작되어 기원전 3000년경에 사용했던 목관악기와 찰흙 장식품 등이 발견되었다. 요새 밑에선 집채가 발굴되었다고 한다.
성이 있으니 궁금해서 올라왔지만 볼 것은 별로 없는 뜨겁기만 한 성이다. 그래도 성벽을 따라 갈 수 있는 곳까지 걸어보았다. 심심치 않게 시내의 모습이 한눈에 내려다 보여 좋다. 성벽 끝자락에서는 러시아 풍의 남녀 동상을 만났다. 현대적인 동상인데 여기에 왜 세워놓았을까? 해답도 찾기 전에 너무 뜨거워 도망치듯 성을 나왔다.
커다란 나무 그늘이 있어 잠시 잔디밭에서 쉰다. 가방 속에서 쥬스를 꺼내 마시니 좀 살 것 같다. 옆에는 낡고 녹슨 대포가 자연적으로 사라지기만을 기다리며 서 있다. 길을 건너 다시 구시가지로 들어서니 분수가 있는 작은 광장이 있고 옆에는 검은색 목조 종탑이 3층으로 보이는 수도원 같은 교회가 있다. 문이 닫혀 있었는데, 단체 관광객이 오니 문을 열어준다. 묻어서 들어갔다. 단층으로 된 긴 건물이 오래되 보이고 경건해 보인다. Church of the Holy Saviour 이다. 스베티 스파스 교회라고도 한다. 1824년에 만들어진 교회다. 그리스 정교회의 성상이 정밀하게 조각된 교회다. 목조 종탑이 인상적이다. 오래된 기구들과 십자가, 성구들이 나이를 말해주는 것 같다. 마당에는 작은 잔디밭도 있어서 평안해 보인다.
이제는 구시가지를 벗어나자는 생각에 걸어 나온다. 구시가지 도로에 들어서니 봉고차에 빵을 파는 사람이 있다. 갓 구워 낸 빵이 김이 모락모락 난다. 빵이 참 싸다. 큰 빵 하나가 2디나르(60원정도)다. 아내가 하나를 사고, 하나 더 사려고 다시 차에 가니 이번에는 같은 빵을 4디나르 내란다. 팔고 싶지 않은가보다. 그냥 돌아왔다. 구시가지 입구에 커다랗고 둥근 토스트를 팔고 있는 포장마차를 발견했다. 파라솔 그늘아래 앉아서 하나를 사서 콜라와 함께 아내와 나눠먹었다. 이것이 저녁인 셈이다. 워낙 커서 둘이 먹어도 든든하다. 터스트(30) 값보다 콜라(35)값이 더 비싸다. 다시 스톤 브릿지를 건너서 광장에 선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테레사 기념관을 물으니 알려준다. 길게 이어지는 보행자 도로다. 사람들이 많다. 길가에는 식당과 쇼핑몰도 이어진다. 구두 닦기 소년의 동상이 입구에 있다. 재미있게 표현되어있다. 웃는 모습이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맞은편에는 깡마른 노인이 불편하게 앉아 도를 닦고 있는 수도사의 동상도 있다.
테레사 수녀의 기념관에 도착했다. 두 손 모으고 허리 굽은 모습으로 서있는 동상이 만들어져있다. 옆에는 특이한 3층짜리 건물이 세워져 있다. 사각형의 집인데 4면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만들어져 있다. 마더테레사 국제 협회에서 만든 건물이다. 각국언어로 써 있는 간판에 한글은 없고 중국어는 있어 좀 아쉽다.
테레사 수녀는 1910년 8월 26일 마케도니아의 (당시 유고슬라비아) 스코피예에서 태어났다. 18세에 인도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로레토 성모 수녀회에 지원하여 다음해 인도 켈커타에 파견되어 이름을 테레사로 바꾸었다. 38세에 빈민가에서 일하기 위해 로레토 수녀원을 떠나 40세에 국적을 인도로 옮기고 사랑의 수도회 를 만들고 로마교황청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이 수도회의 총장으로 취임하여 마더 테레사라고 불리게 된다. 1952년, 42세 때부터 길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수용하는 죽어가는 사람들의 집을 만들었다. 59세에는 문둥병 환자를 위한 마을을 만들었다. 79세에 심장질환이 재발하여 총장직에서 물러나고 87세에 세상을 등질 때까지 쉼 없이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여 세계사에 알려진 봉사자의 대명사로 우리 시대에 남아 있다. 노벨 평화상도 그에게는 작아 보이는 누구나 인정하는 위인이다. 한편 일부 국민들은 마케도니아를 위해서는 한 일이 없다는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고 한다.
동상과 함께 사진도 찍고, 기념관의 동서남북으로 돌아보고 내부의 모습도 살펴보니 아기자기한 것이 재미있다. 스코피예의 또 하나의 관광자원이 이 기념관이다. 계속 걸어가다가 주먹질하는 동상, 핸드폰을 들고 발랄하게 걸어가는 아가씨 동상, 황소 동상 등 도시를 아름답고 생동감 있게 장식하고 있는 작품들이 있어 심심하지 않다. 황소 동상의 꼬리는 유난히 길고 힘이 있어 보여 소꼬리 곰탕이 생각난다. 보행자 거리 끝에는 스코피예 시 박물관이 있다. 무너진 건물 벽에 멈춰선 커다란 시계가 특이하다. 2000여명의 사상자를 낸 1963년의 대지진에 의해 파괴된 그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현재 시각이 5시 35분인데, 고장 난 시계는 6시 15분에 멈춰있다. 하루에 두 번 맞는 시계가 되 버렸다. 당시의 지진 흔적을 그대로 유지하며 박물관으로 변한 이 건물도 중요 관광자원이 되고 말았다.
박물관 앞의 숲속에는 찌어지는 가슴을 표현한 여인의 조각상이 만들어져 있다. 건너편 작은 쉼터에는 분수가 하나있다. 부근에 있는 벤치에 앉아 피곤한 다리와 더위를 달래고 있다. 분수 급수대 에는 물이 계속 솟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갈한 목을 시원하게 적셔준다. 이 물에 세수도 하고 과일도 씻고 손수건도 적셔서 더위와 끈적거림을 닦아내본다.
분수 급수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들렸다 간다. 유모차를 몰고 온 젊은 부부, 영감님, 중고생들, 연인들, 사람이 많아지면 줄도 만들어진다 한가할 때는 지나가던 개도 앞발을 올리고 물을 마신다. 갑자기 아가씨 4명이 와서 사진을 찍자고 한다. 동양인을 찾아보기 힘들어서 귀하게 만난 우리와 사진을 찍고 싶단다. 두 명은 알바니아인이고 하나는 체코, 하나는 프랑스에서 왔단다. 여기서 친구가 되어 함께 여행하는 중이란다. 모두 예쁘고 발랄하다.
앉아 있다가 힘을 재충전해서 또 걸어간다. 길 건너편에 대형 현대식 쇼핑 몰이 있는데, 젊은이들이 많이 들락거린다. 심심해서 따라가 보니 큰 극장이 2층에 있고, 식당과 옷가게 등 젊은이들 구미에 맞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원색의 칼라로 인테리어도 되어있어 젊음의 기운이 느껴지는 분위기다. 이런 곳도 있다니 의외다. 극장 앞에는 젊은이들이 줄을 서서 표를 사려고 한다. 여기가 Ram store 다.
여기서 나와 큰 도로를 따라 걸어간다. 배꼽이 보이도록 배가 나온 아저씨의 동상이 우리를 반겨준다. 이제는 차들이 라이트를 하나 둘 켜고 달린다. 쌍룡 자동차 판매장이 보여 놀랬다. 전시장에는 무쏘차가 한 대 전시되어있다. 날이 어둑해 지는데 멋진 교회를 하나 발견했다. 둥근 원 지붕이 땅까지 이어진 교회건물이다. 교회 옆에는 시계탑이 우뚝 세워져 있다. 규모도 크다. 마당에는 분수도 있고, 수도사(사제)의 동상도 하나 있다. 마당 주변에는 빙 둘러 나무가 심어져 있고 그 아래 벤치가 교회를 보며 둥글게 놓여있다. 저녁 시원한 날씨에 쉬려고 주민들이 많이 와서 앉아있다. 아이들은 마당에서 놀고 있다. 교회 안으로 들어서니 이콘이 많이 그려져 있고 황금빛으로 칠한 십자가도 보인다. 촛불에 의한 그을음으로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둡고 무겁고 경건하다. 교회이름은 잘 모르겠다.
우리는 남은 시간이 많다. 새벽 2시까지 놀아야한다. 교회를 나와 빈 벤치에 앉아서 시간을 보낸다. 아내와 함께 주머니를 뒤져 남은 돈을 꺼내보았다. 오늘밤 버스를 타고 이곳을 떠나야하기에 마케도니아 돈은 모두 써야한다. 가게 문을 닫기 전에 돈을 쓰기로 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작은 과일가게에 들어가 사과 4개를 샀다. 과자 등을 사면서 돈을 모두 써버렸다. 저울에 달아서 파는 과일가게에는 사람들이 많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마땅히 갈 곳이 없다. 큰 도로에는 사람이 드물고 차만 씽씽 달린다.
천천히 걸어 Hotel Jodran 앞을 지나 우체국 건물을 만났다. 바르다르 강을 따라 내려와 광장으로 왔다. 광장의 기마상과 스톤 브릿지에도 조명이 들어왔다. 깔레 성에도 조명을 비춰서 은은한 모습이다. 다시 테레사 기념관이 있는 보행자 도로로 왔다. 여기가 사람들이 많아 시간 보내기가 좋다. 밤거리가 활기차고 앉아 쉬는 사람도 많다. 한 여름 밤, 더위를 피해 주민들도 많이 나온 것 같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는 것이 내 취미다. 다시 급수대에 가서 수건으로 물에 적셔 얼굴도 닦고, 팔도 다리도 닦았다. 차에서 잘 준비를 했다. 물 갖고 놀다가 테레사 기념관으로 다시 왔다. 조명이 들어오니 기념관이 예쁘다. 아내는 의자에 누워서 잔다.
밤 11시 30분까지 벤치에 앉아 쉬다가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마케도니아 광장의 TV는 아직도 틀어져 있다. 보는 이는 광장의 기마상과 약간의 사람들이다. 강물은 다리를 통과해서 계속 시간처럼 흘러간다. 내일 아침 그리스의 데살로니키에서 다시 만날 것 같다. 강변에 있는 카페에는 아직도 남은 음료를 탁자에 놓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약속한 새벽 1시 30분이 되어서야 불 꺼져 있던 여행사에 사장이 나타났다. 가방을 꺼내 메고 몇 명과 함께 사장을 따라 간다. Holly day inn 앞의 도로에 대형버스와 미니버스가 정차해 있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우리는 작은 버스에 탔다. 사장은 큰 버스를 운전한다. 어둠속을 향해 달려간다. 이렇게 오늘은 어둠속을 달려 내일로 가고 차는 그리스를 향해 마케도니아 어둠속을 달린다. 여행이 사람과 삶을 깊숙이 들여다보게 하는 것 같다. 단순한 여행이라고 하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복잡하고 깊이가 느껴지는 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