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의 분암 성재암을 아시나요? ‘
분암(墳庵)’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용어이다. 그러나 분암은 조선시대의 각종 기록에 수없이 나타나며 지금도 사찰의 형태로 간혹 남아있다. ‘분암’의 ‘墳’은 무덤, ‘庵’은 암자를 말하니 ‘무덤가에 있는 암자’를 말한다. 다시 풀어보자면 ‘선영의 묘역 주위에 건립되어 묘소를 지키고 선조의 명복을 빌며 정기적으로 제를 올려주는 불교적인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적인 시설이므로 당연히 스님이 머물러 있고, 주로 문중에서 관리한다.
분암은 재궁(齋宮), 재암(齎庵), 능암(陵庵), 재사(齋舍) 등으로도 불렸는데 왕실에서는 조선 중기 이후까지도 왕릉과 관련한 원당(願堂)과 원찰(願刹)을 세우고 불교적 제의가 성행하였으며, 이를 따라서 사대부나 관료들의 집안과 문중에서도 분암(墳庵)을 세우거나 불교식 상장례를 행하는 일이 일반적이었다. 분암은 죽은 이를 화장하고 난 유골을 모셔두고 명복을 빌며 승려로 하여금 제를 지내게 했던 시설이었으나 한때는 유생들의 시회 또는 강학장소, 또는 문집이나 족보를 편찬하던 곳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경기도 파주의 파평 윤씨 정정공파 파보(派譜) 역시 1750년에 분암인 성재암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는데 최근 대웅전을 중건하고자 성재암 요사채를 헐어낼 때 지붕 밑 천장 위에 족보를 찍어내던 목판이 132판이 나와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성재암은 조선왕조 제7대 세조대왕의 비 정희왕후의 친정아버지 파평부원군 윤번(1384~1448)과 친정어머니 인천이씨(仁川李氏)가 죽자 이분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려고 지금 자리에 36칸의 절을 지었고 임금이 성재암이라 는 편액을 내려주었다. 그리고는 나무로 만든 부처를 내리는 한편 수호승군(스님으로 이루어진 군대) 20명을 파견하여 지킨 데서 유래한다.
그 뒤 중종 29년(1534)에 문정왕후의 친정아버지 파산부원군 윤지임(尹之任)이 사망하여 인근에 묘역을 조성하고 성재암에 승군을 늘리는 등 번창하였으나 명종 20년(1565) 문정왕후가 승하한 뒤 숭유억불책과 사화, 왜란, 호란 등을 겪으면서 성재암도 점점 쇠퇴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성재암은 완전 폐찰이 되었다가 1978년 첨파루가 있던 자리에 요사채를 짓고 그 옆에 법당으로 쓰기 위한 기와건물을 건축하였다. 그리고 1994년 5월 12일 보광사 수구암에서 목불상을 다시 모셔오고 부지 500여 평을 윤씨문중이 시주하여 지금의 터를 갖게 되었으며 조계종 종단에 사찰을 등록하고 주지스님을 본사인 봉선사로부터 추천을 받아 성재암을 운영, 관리하고 있다.
2010년엔 원래 법당자리였던 곳에 있던 요사채를 헐고 대웅전을 새로 지어 절다운 면모를 보이고 있다. 지금은 문중을 위한 제사나 기도를 위한 날을 따로 정하여 전례를 행하지는 않지만, 불교도량의 기능은 물론, 정희왕후 다례제 등 주민들을 위한 문화행사도 개최하면서 조계종 절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독자 권효숙 / 파주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