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진안 마이산 용암(용바위). 이 용바위 및 주변 바위에는 "용암(龍岩)", 주필대(駐蹕臺)", 마이동천(馬耳洞天)", 비례물동(非禮勿動)", 청구일월 대한건곤(靑丘日月 大韓乾坤)" 등 글자가 암각되어 있다. 주필대(駐蹕臺)는 고려말 이성계가 남원 운봉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개선하는 길에 머물렀다는 의미이며, 그 오른쪽에는 "마이동천"과 1909년에 호남에서 결성된 "호남의병창의동맹단(湖南義兵倡義同盟團)" 702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은 1907년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에서 창의한 의병 부대로써 이석용(李錫庸)이 주도하여 진안 마이산에서 결성되었다. 이석용은 마이산에서 고천제를 거행한 후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본격적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청구일월 대한건곤"은 백범 김구 선생의 글로써 "대한민국이 해와 달처럼 오래도록 밝게 빛나라"는 뜻이다.
마이산 용암 암각서.
마이산 용암 능소화.
마이산 용암 암각서 "주필대(駐蹕臺)". 주필대는 태조 이성계가 황산대첩에서 승리한 후 임실을 거쳐 진안에 왔을때 머물렀던 곳이다. 이성계의 꿈과 천명(天命) - 고려의 무장 이성계는 신인으로부터 금척(金尺)을 하사 받는 꿈을 꾼다. 그 뒤 1380년 9월(우왕 6년) 남원 운봉에서 왜구를 상대로 황산대첩을 승리하고 회군하는 길에 임실을 거쳐 진안으로 들어와 마이산을 보는 순간 금척을 받은 꿈속의 장소와 일치하는 형상에 깜짝 놀라 말을 멈추게 한다. 금자(金尺)를 묶어 놓은 것 같은 생각에 "속금산(束金山)"이란 명명을 하고 돌아간 12년 후 조선을 개국하게 된다. 그래서 이곳은 "왕이 머물다 간 뜻"의 주필대가 있고, 이와 관련된 "몽금척수수도(夢金尺授受圖)"와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가 은수사 경내 태극전에 모셔져 있다.
마이산 용암 암각서 "마이동천(馬耳洞天)".
마이동천 옆에는 이산묘를 조성하기 위해 성금을 낸 사람들의 명단을 새겨 놓았다.
마이산 용암 암각서 "비례물동(非禮勿動)". 비례물동은 1916년 고종이 호남 유림에게 내린 친필로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라는 뜻으로 자신의 욕망을 극복하고 예절을 따르라는 뜻이다. 본 뜻은 "국권을 회복하고 민족자존을 되찾는 일은 곧 예의이니 2천만 동포는 분연히 일어나 빼앗긴 조국을 되찾자"라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