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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평생학습진흥원 주최 고산도서관 1인1책 쓰기 수강 결과 본선에 올랐습니다. 10월 30일 현재 아직 미발표 상태입니다.
본선에 오르지 못한 회원들은 5~6편 제출, 본선에 오른 사람은 2편씩 제출해 수료문집을 냈습니다.
비매품으로 기본 5권씩 밖에 배부하지 않아 기념으로 나눠드리기 어렵습니다.
부득이 다른 분 작품을 제외한 책표지와 저와 관련된 부분만 발췌해 hwp 파일로 선후배 문우님들께 선보입니다.
백병전白兵戰, 백병전百病展 외 1편
아내의 가방을 든다. 뭣이든 넣고 다니기 편한 그 안에는 핸드폰, 지갑, 보온병, 약과 양치도구가 들었다. 별도의 옷 보퉁이에 외투와 목도리, 스웨터, 실내화까지 챙겼다. 칼과 창, 총 따위의 무기는 아니지만 아내가 병원에서 며칠 견뎌내려면 필요한 장비다. 백병전白兵戰에 임하는 것 못지않은 결의와 굳센 마음가짐을 가졌다.
아내는 무릎 관절 수술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 건물 뒤편에 어렵사리 주차해 놓고 입원수순을 밟았다. 입원실은 숨이 막히도록 병상들이 꽉 찼다. 대략 일흔은 됨직하고 여든 넘은 노파도 보였다.
우리를 반가이 맞은 사람은 인공관절을 해 넣었다는 옆 침대의 환자였다. 이번에 두 번째라는 분도 자신의 병증을 소개했다. 그때 주사를 맞고 들어서던 한 분이 통증을 못 이겨 찡그리며 울음을 삼킨 채 쓰러졌다. 병실이 금세 적막강산이 되었다. 환자도 병문하는 이도 우연인지 바깥노인은 별반 보이지 않았다. 피붙이로 보이는 젊은이들만 가끔 다녀갈 뿐이었다.
신神은 여성들 무릎에 참지 못할 형벌을 내려야 꼭 속이 시원한가. 이것은 심히 불공정한 창조행위가 아닌가! 여성들은 예로부터 편할 날이 드물었다. 주위의 친척이나 이웃, 어디를 둘러봐도 그랬다. 밥 짓기와 쓸고 닦는 청소며 자식들 씻기고 입혀 학교 보내랴 가족 뒷바라지에 숨이 턱까지 찼다.
어디 그런 일 뿐인가? 소가 있으면 있는 대로, 경운기나 탈곡기 같은 기계 힘을 빌리면 빌리는 대로 농사는 한도 끝도 없는 관절운동이 아니던가. 어촌은 어촌대로, 상업에 종사하는 집은 그들대로, 바쁠 때는 잠시 눈 붙일 틈 없지 않았던가. 장보기, 장 담그기와 김장에 제사, 어른 모시기까지가 다 여자들 몫이었다. 꼭두새벽이나 늦은 밤까지도, 달마다 해마다 수 천, 수만 번 아니 무한대로 팔꿈치와 무릎을 폈다 굽히기를 거듭해야 하는 것이 여성의 숙명이었다.
지금은 하루가 다르게 신기한 가전제품들이 쏟아져 나와 청소와 세탁, 요리의 일손을 덜고 힘든 주부의 육체활동을 줄여준다. 애처롭게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삼시 끼니에 중참까지 주방장과 배달꾼을 겸하느라 허리 한번 펼 새 없었던 게 여인의 삶이었다. 누가 아프면 의사, 약사, 물리치료사가 따로 없었다. 미장이나 도배사 일에, 차력사, 마술사 노릇도 해야 안주인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총무, 회계, 지배인 역할은 다 그녀들의 몫이었다.
아내가 아파 거동이 불편해지니 어린애가 따로 없다. 주름진 얼굴에 맥이 빠진 듯 병상에 누운 아내를 보자니 애잔한 마음이 들어 괜스레 미안해진다. 아내는 젖먹이처럼 나의 보살핌을 간곡히 기다리는 눈길을 보내고 있다. 아니, 아내는 임산부나 다름없다. 평소에 담백하게 먹는데 며칠 전부터 찾지 않던 낯선 음식을 원한다. 입원 며칠 전에 갈치를 찾더니 느닷없이 소 불고기감을 사오라고 했다. 짭조름한 반찬, 입에 짝 달라붙는 음식, 입맛 확 당기는 요리 등 별스런 요청에 신경이 곤두선다.
아내의 입장에서는 성치 않은 몸을 아끼려하다 보니 내게 기대려는 생각이 간절한가 보다. 남자가 대신 시장을 봐 반찬을 만들다보면 꿩 대신 닭이 되고 냉장고 안에 묵은 식재료가 잠자기도 한다. 식성 까다로운 임산부 비위를 맞추기 힘든 것처럼 아픈 아내의 입맛을 챙기려 애써보지만 갈수록 신경 쓰임은 어쩔 수 없다.
잠시 밖에 나온 사이 또 아내로부터 연락이 온다. 이번에는 길거리의 붕어빵이 먹고 싶단다. 며칠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지냈건만 잠시 떨어지면 칼처럼 찾으니 운신이 힘들다. 줄을 얽어놓고 망보는 거미처럼 구는 통에 내 행동반경이 턱없이 좁아진다.
아내가 아프면 아플수록 제대로 돌봐야할 텐데 하며 완쾌할 때까지 어린애처럼 대해주려고 다짐한다. 힘들어하는 아내를 보면 그저 안쓰러운 마음에 내가 못 할 게 무어냐 싶다. 그러다가 몸이 좀 수월해져서 그녀가 잠시 나다니면 금방 미운 일곱 살 개구쟁이로 보일 것이 아닌가. 머리를 조아려도, 허리를 직각으로 굽혀도 내 몫이니 남세스러움이나 체면 깎임이 없다. 그런데 묘하게도 몸이 좀 나아진다 싶게 환자가 나다니면 금방 조건반사가 온다. 미운 일곱 살 개구쟁이로 보인다.
아픈 아내 때문에 며칠 주도적으로 주방 살림을 해보니 집안일의 대강은 파악이 되었다. 다시마와 다진 마늘의 위치도 알고 무릎 통증에 쓰는 냉찜질 팩은 몇 분 만에 냉동실에서 꺼내야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뿐인가, 반찬 조릴 때 환풍기 가동시키는 일이며, 수세미도 제마다 쓰임새가 다르다는 것까지 알게 됐다. 또 밥이 끓는 사이 숭늉을 끓여 바로 보온병에 채워 둔다. 물 끓일 때 넣는 무말랭이, 돼지감자, 수수가 든 비닐봉투의 행방도 알았다. 물 국수는 비닐 포장 속 밀가루를 털어내고 삶으라는 훈수 역시 잊지 않는다.
그러나 아내는 내 의중이나 결과물에 답답해하며 흠결을 찾아 참견한다. 습관이 배지 않아 돌아서면 잊는 나의 실수 탓이다. 그러면 내 태도와 관점이 바뀌곤 한다. 개구쟁이가 다 뭔가? 아내는 손녀에서 성난 노파로, 임산부에서 마귀로 돌변해 보인다. 계속 병든 아내의 즐거운 간병인으로 지낼지, 덜 아픈 마누라의 불편한 남편으로 살아갈지 택일을 강요받는 기분이다.
아내의 치과 진료가 이번 일보다 먼저 약정돼 있었다. 달포 전 바쁘게 수술한 무릎의 실밥을 뺴기도 전에 탈난 어금니의 재진료 날짜가 눈앞에 닥쳤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의 치과인데도 다리 아픈 아내를 위해 차를 대기시킨다. 주차할 곳이 마땅찮아 다른 건물 앞에 세워놓고 들어가니 괜히 신경이 곤두선다. 며칠 후 다시 올 치과인데 그날 다른 일이 있어 진료 날짜를 바꿔야겠고 주차마저 우려된다. 아내 때문에 은근히 부담이 되는 것 같다.
건강한 간병인인 나 자신이 영웅처럼 자랑스럽게 여긴다. 아픈 데가 숱한 아내의 행복지수 늘여줄 보호자가 나 말고는 없어서이다. 가사와 자녀교육에 수십 년 반복된 백병전白兵戰을 치열하게 이겨낸 그녀가 변함없이 내게는 소중하다. 하지만 요절할 천재는 아닌 그녀가 이러다가 혹여 백병전百病展을 펼치는 것은 아닐까. 가슴 조마조마한 보호자로서 요즘의 황폐한 심정을 숨길 수 없다.
마스크 아닌 참 얼굴
운무 자욱한 새벽처럼 사방이 희뿌옇다. 코로나19로 숨죽인 그때처럼 예측이 힘든 시절이 있었던가. 제2차 대전의 도화선이 된 1930년대 대공황이 그랬을 것이다. 현실을 옥죄는 목마름을 추겨줄 샘물처럼 투명인간영화가 등장했던 때이다. 60년대 이후 국산도 선보였는데 권세에 맞서는 홍길동, 외계인으로부터 지구를 구하는 슈퍼맨 같았다.
문제는 마스크 없이 맨 얼굴인데도 상대를 믿을 수 없어 멀리하는 현실이다. 오늘 아침에 본 낯선 노파는 내가 어린애로 보였는지 물었다. '집에 엄마 계시냐? 이 물건 그 집 것이 아니냐?'고. 그건 시작일 뿐이었다. 사람 속이란 지극히 오리무중이어서 투명인간인가 싶은 이들을 며칠 사이 거푸 만난 것이다.
세입자가 떠난 아래층에 새로 중늙은이 혼자 전입해왔다. 버스기사였다는 대답만 들었을 뿐 가족도 직업도 묻기 곤란했다. 별 탈 없이 지냈다는 그전 집주인 말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정작 그는 전 주인과 언짢은 일이 있었다며 문 앞에 CCTV를 장치하겠단다. 마당에 쌓이는 잡동사니로 봐서 고물수집자임을 알았고 의혹만 더해갔다.
아래층 점포도 그랬다. 몇 달 살던 이삿짐업자가 떠난 게 불과 며칠 전이다. 짐만 들여 놓았던 점포를 꾸미고 소독하더니 바퀴벌레 출몰을 이유로 다시 떠나겠다는 거였다. 우리도 집을 내놓을 처지라 비워둘 수 있지만 에멜무지로 세놓는다 광고했더니 이내 성사되어 한 지붕 세 가구가 된 것이다.
우연치고 묘하게 전과 같은 이삿짐업자가 들어왔다. 인상이 좋다싶더니 입주 날짜를 너끈히 넘겨서야 나타났다. 반가운 나머지 코로나라도 걸렸나 걱정했다는 말을 뱉을 뻔했다. 사정이 생겨 준비가 늦었다하니 인심 좋은 투명인간 정도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도 한참을 개업했다는 훈기를 느낄 수 없어 안쓰러웠던 세입자였다.
중국 발 황사 경보나 초미세먼지가 극성을 부려도 마스크란 녀석이 사회를 그토록 불투명하게 만들지 않았다. 등산을 가도 초면에 인사 나누면 반갑고 들에서도 안면 있으면 안부 묻는 것이 정이었다. 서로 드러내놓고 대화하며 지내기에 살만한 세상이 아니던가.
지하철이나 버스 속에서도 꾸밈없고 믿을만해 보이는 여성이면 말을 걸고 싶어진다. 인상 좋은 이성에 마음 끌리거나 연배 어르신의 고아한 품격에 자신을 되돌아볼 때도 코로나와는 별개의 세상에서이다. 마흔 이후 자기 얼굴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지만 샘나는 상큼한 표정이 있고 거저 덤덤한 인상도 널려있다. 이 모두 마스크 없는 세상에서 비춰지는 모습들이다.
같은 얼굴도 정들면 마음이 통한다. 정분이 쌓이거나 사귐이 변하면 미추의 저울질도 달라진다. 그런데 마스크로 가려진 모습은 실체를 알 수 없어 깎고 붙여 다듬은 성형미인인지 알 수 없다. 하여 산뜻하게 차려입은들 순수한 아름다움이 아니다 싶을 때 호기심은 떨어지지 않을까. 이름 모를 초목도 하찮은 미물도 그만의 매력이 있다. 모양과 크기, 색과 향기는 달라도 꾸밈없이 생긴 대로일 때 예쁘지 않은가.
우리는 정보량의 대부분을 눈으로 받아들인다. 냄새와 소리, 감촉으로도 모양이나 색, 매끄럽고 까칠함을 느끼지만 눈으로 본 기억이 살아있어 가능한 게 아닐까. 마스크 속 맨얼굴은 인식 가능한 기억의 증거요 예측 가능한 참모습이라 그립고 보고 싶은 얼굴로 기억된다.
진실로 투명인간이라면 낌새도 차릴 수 없고 그림자조차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 속 투명인간은 눈에 띄게 마스크를 쓴 인간으로 표현된다. 낯설도록 위장하려고 손끝 발끝까지 붕대로 감싸고 동여매어 비인간적 공포감만을 한껏 연출했었다.
국내외 투명인간 영화들은 약물제조와 비밀 사용, 초인간적 능력 발휘로 세상을 놀라게 한 얘기가 많았다. 인간 증발주사약, 환원주사약도 등장한다. 살인누명을 벗기 위해 또는 범죄를 소탕하고 발명 사실을 숨기다가 더러는 일이 꼬이게 된다. 엉성한 특수효과기술과 세련미 부족한 주인공이 우습기도 했다. 은행이나 보석상 털이범이 악용한 사건들이 옛 투명인간 영화의 부작용은 아닌지.
인간이 만든 투명인간은 되레 불투명하고 불완전한 인간상이었다. 표정과 성격도, 얼굴윤곽도 생각과 행위의 목적도 상상만을 부추겼다. 그래서 흥미롭지만 의혹만 키우는 비밀의 존재, 믿음이 덜 가는 인간상이었다.
마스크란 원래 얼굴 생김새를 말한다. 탈처럼 덮어 쓰거나 방독면처럼 얼굴을 가리는, 요즘 방역마스크 같은 게 또 다른 뜻이다. 개성적인 내면의 장점을 돋보이게 할 수도 있지만 타고난 모습을 극적으로 반전시키기도 하니 마스크야말로 선악의 양면성을 지닌 존재가 아닐까.
사회가 불투명할수록 역설적이게도 투명인간이 늘어나는 듯하다. 참 일꾼인지 사기꾼인지 의혹에 싸인 불투명 인간이 출몰한다. 자신의 단점을 가리는 안전장치가 된들, 속셈과 달리 꾸며진 언행이 칭찬 받고 인기를 누린들 얼마나 오래갈 것인가.
마스크를 둘러써야 생존하는 ‘코로나19 세상’은 가늠하기 어려운 불투명천지였다. 얼굴을 눈앞에서 보아도 진정과 가식을 가리기 힘든 데 마스크 쓴 사람의 속을 어찌 알고 정을 나누겠는가. 악성댓글과 보이스 피싱, 인터넷해킹이 정신을 홀려놓는 불편하고 불안한 시대도 하루 속히 사라졌으면 한다.
마스크가 얼굴 생김새로 대변되는 투명세상이여 어서 오라. 꾸미고 위장한 영화 속 투명인간 같은 의혹의 세상은 가라. 마스크를 벗은 얼굴이 예전처럼 친근하고 믿을만한 대상으로 인식될 화창한 날들이 하루 빨리 다가올 날을 기다려 본다.
첫댓글 11월19일 받은 홍교수님 문자입니다.--
"대구평생학습진흥원과 고산도서관에서 연락왔습니다.
1인1책 선정작품집은 12월 2일 책 출판 예정이고 12월 6일 오후 2시 출판기념회(대구 그랜드호텔)가 예정돼 있습니다.
추후 세부일정 통지합니다. 12월6일 일정
잡아두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