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의 나라 스페인, 그곳에는 ‘세르반테스의 땅에서 태어난 셰익스피어’라는 말로 주목받는 작가가 있다. 해마다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었던 국제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하비에르 마리아스의 이야기다.
2022년 향년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새하얀 마음》외 수많은 명작을 남기며 국제 임팩 더블린 문학상, 로물로 가예고스 문학상 외 스페인 출신 작가가 받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상을 휩쓴 스페인 현대문학의 거장 하비에르 마리아스. 그가 집필한 장편소설 《베르타 이슬라》가 출간되었다. 《베르타 이슬라》는 2018년 스페인 비평상(Spanish National Critic Award)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다.
《베르타 이슬라》에는 떠난 자와 기다리는 자가 등장한다. 어릴 적부터 서로 간에 느낀 운명적 확신으로 결혼했으나 어느 날 일련의 사건을 통해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 비밀정보부의 스파이로 활동하게 된 남편 토마스 네빈슨, 떠남과 돌아옴을 반복하는 남편의 삶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려 애쓰면서도 “남편에 대한 갈망, 또다른 삶에 대한 기대 사이에서 벌어지는 긴장과 갈등”으로 혼란스러워 하는 아내 베르타 이슬라. 《베르타 이슬라》는 그들을 통해 관계의 본질과 인간 존재의 이면을 들여다본다.
하비에르 마리아스는 작품 속에서 ‘결혼’이라는 제도와 ‘스파이’라는 특수한 인물 설정으로 인간 영혼의 가장 그늘진 구석을 조명하고, 치밀하게 탐구하고 있다. 문학계의 철학자라는 별명처럼 집요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베르타와 토마스가 선택한, 혹은 선택하지 않은 스스로의 운명에 소용돌이처럼 휘말려가는 심연의 과정 속으로 독자를 이끈다. 《베르타 이슬라》는 사랑과 진실, 두려움과 비밀, 존재의 불확실성을 다룬 작품이자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가져오는 운명의 소설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약속할 수 없는 것까지도 약속한다.”
결혼을 해부하는 장황한 탐구와 도발적인 질문
거미줄처럼 퍼지는 불확실성, 자기기만
1960년대 프랑코 독재 시절. 마드리드의 학교에서 만난 토박이 소녀 베르타와 스페인과 영국의 피를 반반씩 물려받은 소년 토마스는 기묘하게 다가온 운명적 확신으로 서로를 삶의 동반자로 선택한다. 하지만 베르타의 곁을 떠나 영국에서 공부하던 중 토마스는 일련의 사건으로 영국의 비밀정보부 요원으로 일할 것을 강요받게 된다. 이후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유령’ 같은 삶을 살게 된다.
한편 그가 옥스퍼드에서 공부를 마치고 마드리드로 돌아왔을 때 베르타는 자신이 모르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린 남편의 모습을 마주한다. 속임수와 배신, 은폐 등으로 가득한 세계. 토마스가 스파이라는 역할에 충실할수록 베르타는 그와 그렸던 삶의 풍경이 빠른 속도로 바래져감을 느낀다. 베르타는 토마스에게 범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감지하고 그에게 진실을 요구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모호한 태도와 애매한 대답뿐이다. 토마스의 부재가 길어지고 잦아질수록 믿음과 오해 사이에서 갈등은 깊어진다. 점점 커지는 균열은 이들 부부의 운명을 돌이킬 수 없는 심연 속으로 몰아넣는데……
“토마스는 더 심한 유령이 될 것이다.
살아 있지도 죽지도 않은 유령.
자식들조차 기억하지 못할 유령.”
독재자 프랑코 치하에서 엄혹한 지배를 받던 스페인과 자유와 풍요를 구가하던 미국 사이를 오가며 자란 하비에르 마리아스. 그의 직간접적인 경험과 인간 존재에 대한 고민이 어우러져 탄생한 《베르타 이슬라》는 비밀정보부의 덫에 걸려 인생이 바뀌어버린 영국-스페인 혼혈 토마스의 반세기에 걸친 개인사를 아내 베르타의 관점에서 본 이야기이다. 작품 안에서 때로 3인칭 화자의 목소리가 등장해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을 전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베르타의 심리 묘사를 통한 내면의 목소리를 부각시켰다. 이 독특한 이야기는 스파이라는 소재를 다루면서도 존 르 카레의 작품이나 〈007〉 시리즈처럼 첩보 활동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하비에르 마리아스는 주인공을 ‘베르타 이슬라’로 설정함으로써 ‘스파이 스릴러’라는 장르를 ‘스파이 활동’으로 인해 집에 남겨진 사람들의 목소리를 웅변적으로 묘사하는 이야기로 훌륭하게 변형시켰다.
교묘하게 짜인 조직에서 심리적으로 지배된 토마스의 정신적 희생을 바라보는 베르타는 그의 상황을 나름대로 이해하려 노력한다. 그녀가 묘사하는 토마스는 ‘유령’이다.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않고 “노인의 소매에 내려앉은 재”처럼 언젠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유령’. 급기야 토마스는 ‘국가의 대의를 위한 일’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더욱 불확실한 삶 속으로 자신을 몰아넣고, 토마스를 한없이 기다리던 베르타는 무너져내린다. 그녀가 느끼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 그러면서도 고개를 내미는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 사이에서 오는 무한한 불안과 혼란을 통해 작가는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와 관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아무리 가깝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타인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 자신 스스로도 보이지 않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상대방을 완전히 알고 있다는 생각은 오만이며, 이러한 시도 또한 불가능하다는 것을 베르타라는 인물을 통해 깨닫는다.
“삶은 전혀 개의치 않고 당신에게 두려움을 안길 거라고.
물론 당신은 무엇이 옳거나 그릇된 것인지, 균형이 잡힌 생각인지 아닌지,
저지르는 행동이 범죄인지,
그 결과가 어떨 것인지 시간을 가지고 살피지 않을 거야.
한마디로 정의가 뭔지 전혀 고려하지 않을 거라는 거지.”
하비에르 마리아스는 두 인물이 처한 상황과 그들 각각의 심리를 다양한 시점을 통해 묘사해낸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작품 안에서 시간의 흐름이 자아내는 분위기와 심리적 변화 및 매혹적인 이야기의 리듬을 자유자재로 변용하고 있다. 《베르타 이슬라》는 서사를 구성하는 데 필요한 외적인 장치들보다 이로 인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인물의 내적인 탐구에 초점을 맞춘다. 특히 ‘베르타 이슬라’라는 인물을 통해 작가는 “인간의 존재와 불안에 대한 인식론적인 질문에 매달리는 그녀의 입장에 침잠할 기회”를 부여한다.
끝없이 반복될 것만 같은 이 탐구는 사회에 내재된 다양한 문제가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비밀로 귀결된다는 걸 보여준다. ‘베르타 이슬라(Berta Isla)’의 ‘이슬라’는 스페인어로 섬을 의미한다. 30년이 넘는 세월을 지나옴에도 베르타와 토마스는 마치 세계와 단절되어 현실과 유리된 사람들처럼 보인다. 각자의 세계가 붕괴될 정도로 두 사람을 몰아넣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 ‘비밀’을 지키는 것이 세계와 일상을 지키는 것이라고 반복해서 말하지만 결국 자신을 기다리는, 남겨진 사람들의 세계까지 무너뜨리고 만 토마스. 하비에르 마리아스는 이 이야기를 단순히 개인의 이야기로 남겨두지 않고 대의라는 명분으로 죄책감 없이 움직이는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만들어낸 현실이 과연 옳은 것인지 묻는다.
마침내 두 사람이 도착한 운명의 끝을 바라보며 독자들은 치밀하게 직조해낸 마리아스의 세계관에 감탄하게 된다. ‘우주에서 추방된 사람들’의 이야기. 작가는 “우리가 모르는 세계,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만들어낸 현실에 대해, 이로 인해 밀려난 삶에 대힌 질문”으로 독자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볼 기회를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