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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낸 데 이어서 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을 지냅니다.
성모 성심을 공경하는 신심은 예수 성심을 공경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났습니다. 이 신심의 전통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수난을 기억하고 부활하시어 발현하신 체험까지도 겪었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해 내신 성모 마리아를 기억하는 신자들이 살고 있었던 초대 교회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신자들은 예수 성심의 주요한 고비들, 즉 강생의 신비와 십자가의 신비 그리고 부활의 신비마다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셨던 성모 마리아께 공경하는 마음을 지니고자 노력하였고, 자신들도 성모 마리아를 본받아 예수 성심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일이 신앙생활의 주요 부분이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교회의 역사가 숱한 변화를 겪으면서 흘러갔어도 신자들 사이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근세기에 성모 신심을 공경하는 마음이 가장 뜨거웠던 곳은 영국과 프랑스 교회였고, 이곳 출신 선교사들이 조선 교회에 이 신심을 전해줌으로써 한국 가톨릭교회의 신자들도 성모 성심에 대한 뜨거운 공경심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 신자들은 특히 두 가지 사실(史實)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조선에 귀국하지 못하고 길에서 선종한 브리귀에르 주교에 이어 제2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라우렌시오 앵베르(Laurent Joseph Marius Imbert. 한국명 범세형) 주교가 프랑스 남부 엑스(Aix) 교구의 마리냔(Marignane) 본당 관할 브리카르(Bricart) 출신이어서 각별한 성모 신심을 물려받아 전해주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께 대한 신심이 뜨거웠던 출신 지방 신자들의 영향으로 앵베르 주교는 자신이 박해 받던 조선교회의 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자, 조선천주교회의 주보성인으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로 정해줄 것을 교황청에 청원하였습니다. 아마도 끔찍한 조선 박해가 빨리 종식되기를 바라는 지향과 함께, 박해 속에서도 조선 신자들이 부디 배교하지 않고 치명하여 신앙을 증거하기를 바라는 지향이 간절하게 배어 있었겠지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께 작용했던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가 아니고서 사람의 힘으로는 이 박해 종식과 치명 증거라는 은총이 내려지기 어렵다는 신앙적 판단이 작용했을 것입니다.
이때가 1841년입니다. 이 신심이 믿을 교리로 정식 반포된 때는 1854년인데, 13년이나 앞서서 앵베르 주교는 이미 그 신심을 박해받던 조선 신자들에게 전해주고자 했던 겁니다. 훗날 제8대 교구장 뮈텔 주교는 박해가 종식되고 신앙의 자유를 얻고 나서 1898년에 명동성당을 축성할 때 조선천주교회의 주보성인이신 무염시태 성모께 봉헌하였습니다. 선임 교구장의 뜻을 이어 받은 것입니다. 앵베르 이후의 선교사들도 박해시기 동안 매괴회, 성모회 등의 신심단체를 조직하여 성모 신심을 육성함으로써 대표적인 공적 신심으로 자리잡게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성모 신심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활발해지게 된 계기는 레지오 마리애가 도입되면서부터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다른 사실은 이 레지오 마리애를 아일랜드 출신의 선교사 모란 신부가 1953년에 목포 산정동 성당에서 첫 회합을 가짐으로써 도입하였고, 이후 전국 교구와 본당에 확산시켰다는 것입니다.
레지오 마리애에 속한 단원 신자들은 매주 회합 때는 물론 매일의 의무 기도를 통하여 까떼나에 적혀 있는 성모 찬송을 바칩니다. 이 기도에는 예수님의 파스카 과업을 기억하고 간직하려는 지향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물론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바치는 성무일도에도 저녁기도 때마다 찬미가로서 이 성모 찬송을 바치게 되어 있습니다.
성모 찬송에서 마리아께서 하느님께 찬송을 드리는 파스카 과업은 세 가지 지향으로 되어 있습니다. “당신 팔의 큰 힘을 떨쳐 보이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도다.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끌어 올리셨도다. 주리는 이를 은혜로 채워 주시고 부요한 자를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성모 마리아를 따라서 파스카 과업을 실천하자면 그분의 믿음, 즉 성모 성심을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마리아께서는 믿음에 투철하셨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려온 아나빔의 가문 출신답게 마리아의 믿음은 얄팍하지 않고 깊고 그윽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뜻하지 않게 가브리엘 천사가 가져온 전갈에 대해서도 믿음으로 받아들이실 수 있었습니다. 처녀로서 임신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막연하고 긴장스러우며 위험하기까지 할 터이지만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시리라는 그 전갈을 태연하게 받아들이셨습니다. 믿음은 때론 모든 것을 거는 모험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둘째로, 마리아께서는 새로운 일을 겪을 때마다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며 사색과 묵상으로 그 뜻을 새겨서 놓치지 않는 집중력을 발휘하셨습니다. 그 계기가 된 사건이 오늘 복음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일을 겪으면서 천사의 방문에서 알게 되었던 바, 구세주를 기르고 있다는 자각이 당신 자신에게 생겨난 것입니다. 믿음은 필요할 때마다 집중을 요구합니다.
셋째로, 마리아께는 센스와 배짱이 보입니다. 카나 마을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아 가셨을 때, 가난한 혼주에게 난처한 일이 생겼음을 눈치있게 짐작하시고는 넌지시 예수님께 알리셨습니다. 보통 아무리 가난해도 혼주는 빚을 내서라도 잔치 음식이 떨어지게 하지는 않는 법입니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져가고 있음을 눈치채신 마리아는 센스있게 예수님을 통해 혼주를 돕고자 하셨습니다.
이는 마리아께서 혼인 잔치에 온 사람들의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막 부르셨던 제자 네 사람을 대동하셨기 때문에, 장정 다섯 사람이 마셔대는 통에 준비된 포도주가 동이 나버리는 사태가 왔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러한 성모 마리아의 요청을 들으시고도 처음에는 막무가내로 버티셨습니다. 아직 당신의 때가 오지 않았다는 말씀으로 사양을 하신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마리아의 배짱이 돋보입니다. 예수님의 사양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일꾼들에게 이르신 겁니다: “무엇이든지 저 분이 시키시는 대로 하여라.” 결자해지라는 격언처럼 원인을 제공한 쪽에서 문제를 해결하라는 투로 보입니다. 이것이 성모 마리아께서 우리의 전구자가 되어 주시는 근거가 된 배경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사람들의 처한 곤경을 눈치챌 줄 아는 센스를 발휘하기도 하고 때론 배짱있게 밀어붙이기도 해야 하는 것인 줄을 우리가 알게 되었습니다.
넷째로 마리아께서는 치마폭에 당신 아들을 감싸기보다 하느님의 뜻에 내어 맡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장성하시기 전에 남편 요셉이 먼저 세상을 떠났으므로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웠을 텐데도 다소 마음이 맞지 않는 친척 조카들에게 의탁하실지언정 때가 되어 출가하려는 아들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모든 이들을 당신 어머니요 당신 가족으로 넉넉하게 받아들이실 수 있으셨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연대입니다.
다섯째로 마리아께서는 세상에서 좋은 일을 다 하고 다니신 당신 아들이 온갖 모함과 중상을 받고 신성 모독과 성전 모독이라는 혐의에다가 유다인의 왕이 되려 했다는 터무니 없는 죄목으로 그토록 참혹하게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으며 죽어갈 때에도 비록 마음은 찢어질 듯 아프셨겠지만 처음에 가브리엘 천사가 전해준 대로, 당신 아들이 수행하는 하느님의 뜻과 일을 믿고 기다리셨습니다.
그래서 당신 아들의 제자들이 허망해 하며 믿음을 상실하고 고향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도 묵묵히 기도하며 예루살렘을 지키고 계셨습니다. 그랬기에 발현하시는 스승을 뵙고 믿음을 회복한 제자들이 마리아 주위에 모여들 수 있었고, 마침내 성령께서 강림하실 때 사도들의 교회가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의 결론은 기다림입니다.
이상 성모 마리아께서 보여주신 믿음을 모험, 센스와 배짱, 집중력, 연대 그리고 기다림으로 간추려 보았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도 예수 성심을 본받자면 필요한 성모 성심의 덕목들입니다. 요즘 우리 믿는 이들의 모습과는 아주 많이 다릅니다.
교우 여러분,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 일은 예수 성심을 본받는 일입니다.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시면 좋겠습니다. 마리아의 이 거룩한 매력이 우리 교회와 신앙인들에게서도 발산되면 참 좋겠습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