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5일 오늘의 성인♡
===============
성 필리푸스(Philippus)
성 제노(Zeno)
성 나르세오(Narseus)
축일 7월 15일
성 필리푸스(Philippus)와 성 제노(Zeno) 그리고
성 나르세우스(또는 나르세오)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서 순교하였다.
동료 순교자 중에는 10명의 어린이들도 포함되어 있다.
================================
성 에우트로피우스(Eutropius)
성녀 조시마(Zosima)
성녀 노노사(Nonosa)
축일 7월 15일
성 에우트로피우스(Eutropius) 그리고
성녀 조시마(Zosima)와 성녀 노노사는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때에 로마 근교
포르토(Porto)에서 순교하였다.
================================
성 다윗(David)
축일 7월 15일
성 다윗은 잉글랜드(England) 수도자인데,
평소에 순교함으로써 그리스도께 자신의 생명을
바치기를 간절히 기도하던 사람이다.
성 지그프리드(Sigfrid)의 세 조카들이 이방인들의
손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웨덴으로 가는
선교단의 일원으로 자원하여 성 안스칼의 유업을
계승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벡시오의 주교이던
성 지그프리드에게 가서 베스트만랜드로 파견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백성들의 회개를 위하여 큰 공적을
쌓았고, 또 수많은 수도원을 지음으로써
‘문크토르프’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전심전력으로 선교활동에 임하였으며,
또한 그는 기적을 행하는 은총을 받았고,
고귀한 눈물을 흘리는 은혜 또한 받았으나,
그가 그토록 열망하던 순교의 은혜는 받지 못하였다.
그 대신 그는 연만한 나이가 되도록 수를 누리다가
평화로이 숨을 거두니, 그의 높은 성덕은 날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다윗은 흔히 베스테라스의 초대 주교로 일컬어지며,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이 공경하는 성인이다.
================================
성 도날드(Donald)
축일 7월 15일
스코틀랜드 포퍼셔(Forfarshire)의 오길비에
살았던 성 도날드는 아내가 죽은 뒤에 아홉 명의
딸과 함께 수도원을 세우고 여생을 수덕생활에만
전념하다가 아버네티에 있는 정규 수도원으로
들어가 일생을 마쳤다.
그리고 지금도 스코틀랜드에는 그의 딸이
‘아홉 명의 시녀’들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
성 바르하드베사바(Barhadbesaba)
축일 7월 15일
340년경부터 15년 동안 페르시아 교회는 최대의
수난기를 맞이하였는데, 이때 그 지방의 총독은
사포르 탐사포르였다.
아르벨라시의 부제인 성 바르하드베사바도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받았는데, 그는 이때 다음의 말을 남겼다.
“너희들이 무슨 방법이든 다 동원하여 나를
괴롭히더라도 예수님의 사랑에서 나를 떼어 놓을 수는
없다. 그분만이 내가 어릴 때부터 공경하는
하느님이시다.” 총독은 배교자인 악가이에게 그의
처형을 맡겼는데, 그 형리는 너무나 무섭고 떨리는
마음에서 성인의 목을 일곱 번째 칼에야 겨우
벨 수 있었다고 한다.
================================
성 베르나르도(Bernard)
축일 7월 15일
헤르만 폰 제링겐의 후손인 후작 야고보 1세는
그 당시 ‘독일의 솔로몬’이란 칭호로 불리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 로렌(Lorraine)의 샤를 2세의 딸
카타리나와 결혼하여 베르나르두스(Bernardus,
또는 베르나르도)를 낳았다.
그는 문무를 겸한 유능한 청년으로 장성하였으나,
프랑스의 공주와의 결혼을 거절하여 말썽을 빚은 적이
있다. 그는 후작으로 만족하며 지내다가 터키인을
상대한 십자군에 가담했는데, 1453년에 체포되어
콘스탄티노플에 갇혔다.
그러나 교황 칼리스투스 3세(Callistus III)의
지원으로 석방된 그는 토리노(Torino)로 간 직후에
몬테칼리에리의 프란치스코 수도원에서 운명하였다.
그의 성덕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1479년부터
그의 공경이 허락되었다.
================================
성 보나벤투라(Bonaventure)
축일 7월 15일
조반니 디 피단차(Giovanni di Fidanza)라는 이름의
성 보나벤투라(Bonaventura)는 아버지 조반니 디
피단차와 어머니 마리아 디 리텔로(리텔라)의 아들로
바뇨레조에서 태어났다.
불확실한 전설이긴 하지만 보나벤투라는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로부터 받은
이름이라 한다. 그 자신의 설명에 의하면 그가
어렸을 때 중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어머니가 아시시(Assisi)의 프란치스코에게 중재
기도를 바쳐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그는 1238년에 작은 형제회 수도자가 되어 영국의
유명한 헤일스의 알렉산데르 문하에서 공부하려고
파리(Paris)로 갔으며, 그로부터 총애를 받는
제자가 되었다.
그는 1248-1255년까지 파리 대학교에서 신학과
성서를 가르쳤는데, 그의 강의는 새로운 탁발
수도자를 반대하던 교수들 때문에 중단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생 아무르의 빌리암을 비롯한 반대자들의
공격에 대항하여 탁발 수도회를 옹호하는 논쟁에
뛰어들어서, “마지막 시대의 환난”과
“그리스도의 가난에 관하여”라는 저서를 남겼다.
마침내 1256년에 교황 알렉산데르 4세가 생-아무르를
단죄하고 탁발 수도회에 대한 공격을 중단시켰다.
탁발 수도회가 파리에서 다시 부흥될 때 그는
토마스 데 아퀴노(Thomas de Aquino)와 함께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와 비슷한 초창기에 보나벤투라는 작은 형제회의
총장으로 피선되었고, 수도회의 내부 분쟁자들을
화해시키는 일을 하였으며, 온건한 정책을 추구함으로써
극단주의 그룹을 단죄하였다.
1260년 나르본(Narbonne)에서 열린 수도회의 총회에서
그는 오랫동안 수도회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되는 회칙에
대한 회헌을 선포하였다. 그는 1265년 요크의 대주교좌를
거절하였고, 1271년에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
(Gregorius X)의 선출을 적극 지지하였다.
1273년 그는 알바노(Albano)의 교구장 추기경이
되었으며, 다음 해에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로마(Rome)와
동방 교회의 일치를 토의하려는 리옹 공의회
(Council of Lyon)의 의사일정을 짜도록 그를
위촉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공의회가 열리고
있는 회기 중인 7월 15일에 리옹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보나벤투라는 중세 시대의 가장 뛰어난 철학자이자
신학자이며 사상가 중의 한 분이다.
‘세라핌 박사’로 알려진 그는 수많은 글을 썼고
또 남겼는데, “베드로 롬바르드의 금언에 대한 주석”,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전기”,
“하느님께 가는 영혼의 여정”, “세 갈래 길”,
“완덕 생활” 등의 영성 서적을 비롯하여 성서 주석,
약 5백 편의 설교 등이 유명하다. 보나벤투라는
1588년 교황 식스투스 5세(Sixtus V)로부터 교회학자로
선언되었고, 성체와 성합 그리고 추기경 모자가
그의 문장이다.
================================
성 블라디미르 1세(Vladimir I)
축일 7월 15일
키예프(Kiev)에서 스뱌토슬라프(Svyatoslav) 대공작의
서자로 출생한 성 블라디미르는 989년에 그리스도인으로
세례를 받고 비잔틴 황제의 여동생인 안나와 결혼하였다.
그의 개종은 러시아에서 그리스도교가 탄생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리스도인이 된 그는 자신의 생활을
완전히 개혁하고, 학교와 교회들을 세우는 한편
우상을 파괴하였으며, 그리스 선교사들을 영입하였다.
또한 그는 로마(Rome)와 대사를 교환하였고,
특히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6월 5일)의
선교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그는 키예프 인근의 베레스토바(Berestova)에서
서거하였다.
성 블라디미르는 러시아 가톨릭의 수호성인이다.
================================
성 아타나시오(Athanasius)
축일 7월 15일
850년에 주교로 서품된 성 아타나시우스
(또는 아타나시오)는 약관 20세에도 못 미치는
젊은이였다. 나폴리 태생인 그는 사라센의 침략으로
피폐된 성당들을 재건하고, 순례자를 위한
구호소를 세웠으며, 아랍인들에게 포로가 된
그리스도인들을 대속금으로 석방시키기도 하는 등
놀라운 과업들을 성취하여 세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863년에 라테라노(Laterano) 회의에도 참석했으나,
뜻하지 않는 정치 문제에 말려들게 되어
소렌토(Sorrento)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는 몬테카시노(Monte Cassino) 근처인
베롤리에서 운명하였다.
================================
성녀 안나 마리아 자부에이(Anne Mary Javouhey)
축일 7월 15일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Bourgogne)의
잘랑주(Jallanges)에서 태어난 안나 마리아 자부에이
(Anna Maria Javouhey)는 부유한 농사꾼의 딸로
어릴 때에는 억센 기질과 용기가 굳센 아이였다.
장성한 뒤에 그녀는 수도성소를 느끼고 브장송
(Besanion)에 있는 자비회에 들어갔으나, 자신의
성소를 찾지 못하여 다시 스위스 발-생트에 있는
시토 수녀원으로 갔다.
그곳의 지도신부인 아우구스티누스 레스트랑주는
그녀에게 새 수도원을 설립하는 성소가 있다고
일러주었다. 그녀는 브장송에 있을 때 환시를
보았는데, 소년 소녀들이 가득 찬 방을 보고 있던 중
“이들이 곧 하느님께서 너에게 맡길 아이들이다”
하는 신비스런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프랑스로 돌아온 그녀는 샹블랑에 최초의
학교를 개교함으로써
‘클뤼니(Cluny)의 성 요셉 수녀회’가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 후 그녀의 수녀회는 과달루페, 마르티니크,
생피에르, 퐁디셰리(Pondicherry) 등지에 수도원을
세워 학교와 병원 일을 하였고, 마침내는
기아나(Guiana)의 가이엔느와 뉴 앙굴렘으로
진출하였다. 성녀 안나는 프랑스 국왕으로부터
'위인'이란 칭호를 받았다.
1843년 64세가 된 그녀는 기아나를 떠났고,
자신이 세운 여러 수도원을 방문하는 일로 지내다가
선종하였다. 그녀의 수녀회는 주로 신세계로
신출하였다.
================================
성녀 안젤리나(Angelina)
축일 7월 15일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 지방
오르비에토(Orvieto)의 몬테지오베(Montegiove)에서
태어난 안젤리나는 마르시아노의 영주 안지오발리
(Angioballi)와 코르바라 백작 가문인 안나(Anna)의
딸이다. 그녀는 15세 때에 치비텔라(Civitella)의
백작인 테르니(Terni)의 요한과 결혼하였으나,
2년도 살지 못하고 과부가 되었다.
이때부터 안젤리나는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이 되어
자기 집을 3회원의 공동체로 만들어 엄격한 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영신적, 물질적 도움을
베풀기 시작하였다. 안젤리나와 동료 3회원들은
보속하는 행렬을 비롯하여 수많은 고행을 행하였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동정을 지키는 성소를 소녀들에게
일깨우는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행위들은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켰는데,
나폴리(Napoli)의 왕 라디슬라우스(Ladislaus)는
그녀를 조사하여 유죄로 판명되면 화형을 시킬
작정까지 하였다.
불과 18세의 과부이던 그녀는 주님의 인도로 아시시로
가서 그때까지 폐쇄되었던 성 프란치스코 율수 3회
수도원을 재건하여 성녀 안나에게 봉헌하고,
안젤리나는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것이 최초의 율수 3회 수도원이 되었다.
성녀 안젤리나는 폴리뇨(Foligno) 외에도
스폴레토(Spoleto), 아시시(Assisi),
비테르보(Viterbo) 등 11곳에 율수 3회 수도원을
세우고, 비록 작은 공동체이지만 엄격한 수도생활을
하다가 58세를 일기로 선종하였다.
================================
성 안티오쿠스 또는 안티오코Antiochus)
성 키리아쿠스(Cyriacus)
축일 7월 15일
로마 순교록에 의하면 세바스테(Sebaste)의 의사인
성 안티오쿠스(또는 안티오코)는 하드리아누스
총독 치하에서 참수되었는데, 그 때 그의 머리가
잘린 자리에서 피 대신에 우유가 솟아났다.
사형 집행인이었던 성 키리아쿠스(Cyriacus)는
이를 보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고 순교의 길에
동참하였다.
================================
성 야고보(James)
축일 7월 15일
시리아 사람인 성 야고보(Jacobus)는 원래 수도자였으나
308년경에 메소포타미아 니시비스의 첫 번째 주교가
되었다. 그는 그곳에 대성당을 짓고 니시비스 신학교를
개설하였다. 이 학교는 메소포타미아의 그리스도교
중심지로서 크게 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그가 성 에프렘(Ephraem)의 스승이었다는
사실과 니케아 공의회(Council of Nicaea)에 참석하여
아리우스파(Arianism)를 격렬하게 비난했다는
기록 외에는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다.
그러나 시리아 교회에서 그에 대한 공경은 최상이며,
수많은 전설들이 전해온다.
그는 성덕과 학덕을 겸비한 분이었다.
================================
성 카툴리누스(Catulinus)
성 야누아리오(Januarius)
성 플로렌티우스(Florentius),
성녀 율리아(Julia),
성녀 유스타(Justa)
축일 7월 15일
성 카툴리누스(Catulinus) 부제와
성 야누아리우스(또는 야누아리오),
성 플로렌티우스(Florentius), 성녀 율리아(Julia),
성녀 유스타(Justa)는 카르타고에서 순교했고,
그들의 유해는 카르타고에 있는 파우스타(Fausta)
성당에 안치되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성 카툴리누스
부제를 칭송하는 강론을 했는데,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 외에 그들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다.
================================
성녀 에디타(Edith)
축일 7월 15일
잉글랜드(England)의 국왕 아텔스탄(Athelstan)의
딸인 성녀 에디타(Editha)는 925년에 바이킹의 왕인
시트릭(Sihtric)과 요크(York)에서 결혼하였으나,
그 다음 해에 남편을 잃게 되자 폴스워스에 있던
베네딕토회의 수녀가 되었다.
그녀의 수도생활은 참으로 성공적이었고
성덕 또한 빛났다. 그녀는 마침내 원장으로
오랫동안 봉사하였다.
================================
성 이냐시오 아제베도(Ignatius Azevedo)
축일 7월 15일
이냐시오 아제베도(Ignatius Azevedo)는 부유한 가문
태생으로 포르투갈의 오포르토에서 태어나서 20세 때에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모범적인 수련자였고,
불과 25세의 나이에 리스본(Lisbon)의
성 안토니우스(Antonius) 대학의 학장으로 선출되었다.
1566년 그는 브라질의 시찰자가 되어 예수회원들의
활동상을 둘러보고는 자신의 선교열을 더욱 높이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산티아고(Santiago)로 갔다가
40여명의 동료들과 함께 학살당하였다.
그들은 모두 1854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
성 펠릭스(Felix)
축일 7월 15일
이탈리아 파비아의 주교 성 펠릭스 순교자에 대해
알려진 것은 없다.
일부 학자들은 그를 스폴레토(Spoleto)의 주교인
성 펠릭스(5월 18일)와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
================================
성 폼필리오 마리아 피로티(Pompilius Maria Pirrotti)
축일 7월 15일
성 폼필리우스(또는 폼필리오)는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Campania)의 몬테칼보(Montecalvo)의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훌륭한 교육을
받았는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육에 자신의
일생을 바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런 일을 하던 요셉 갈라상시오가 세운
피아리스트회(The Piarist Fathers)에 입회하여,
1728년에 서약하고 성 니콜라우스(Nicolaus)의
마리아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사제가 된 그는 풀리아(Puglia)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그의 학덕이 너무나 뛰어나서 에밀리아
(Emillia)와 베네치아(Venezia)의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나폴리(Napoli)에서 그는 뜻하지 않은 박해를
당하고 추방되었다.
그 후 그는 46세의 일기로 선종했는데,
그의 성덕을 흠모해오던 페르디난도 2세가 그의 시성을
주장하였다. 그는 1890년에 시복되었고,
1934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다.
================================
성 스위틴(swithun)
축일 : 7월 15일
스위툰이라고도 부르는 성 스위틴은
잉글랜드 웨섹스 출신으로 윈체스터의
올드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고 사제가 되었다.
그 후 그는 웨스트 삭손의 에그버트 왕의
전속사제겸 그의 아들인 에텔울프의
개인교사가 되었다. 852년, 그는 윈체스터의
주교로 임명되었는데, 국왕의 도움으로 많은
교회를 세웠으나, 항상 겸손하고 또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는 일에서 만인의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받았던 분이다. 만일 성 스위틴의
축일(7월 15일)에 비가 오면 꼭 40일간 장마가
계속된다는 믿음이 전하여 내려온다. 그러나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Catholic Cultural Center 한┃국┃가┃ 톨┃ 릭┃ 문┃ 화┃ 원┃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