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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3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
복음: 마르코 6,1-6
“너를 안다.”라는 말은 “너를 무시해.”라는 뜻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자렛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방식은 ‘안다’라는 착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유년기와 가족 등을 다 알고 있기에 예수님을 안다고 착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안다고 말할 때 이미 모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몇 명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기적을 일으키시지 못하고 그 고을을 떠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다라는 말은 “더는 믿고 희망할 수 있는 게 없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아는 것을 믿고 희망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내가 누군가를 안다고 생각하면 그 누군가를 창조했다는 뜻입니다.
스마트폰을 아는 것은 다른 스마트폰이 아니라 그 스마트폰을 만든 당사자뿐입니다.
스마트폰끼리 서로 상대를 안다고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개와 고양이가 서로 상대를 안다고 주장할 수 있다면 그것을 보는 인간으로선 얼마나 웃길까요?
우리는 결코 남을 안다고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 교만이 그 사람을 가두고 그 사람과의 더 친밀관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전에 말씀드린 예화지만 이 내용과는 너무도 잘 어울리는 것이기에 한 번 더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락 토마스(Rock Thomas)는 캐나다 농촌에 살던 촌뜨기 꼬맹이였습니다.
그는 항상 자기 자신을 ‘패배자, 노동자, 애정 결핍’으로 정의했습니다.
사실, 이 정체성은 자신이 규정한 것 같았지만 실제로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향 때문입니다.
토마스의 어머니는 도망쳤고 아버지는 돈만 가져다 쓰는 아이를 비난했습니다.
아버지는 14살 때 놀자고 말하는 토마스를 돈이 땅 파서 나오는 줄 아느냐며 심하게 비난했습니다.
이후 토마스가 노동으로 돈을 벌어 열일곱 살이 되니 독립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에게 유일한 성공의 척도는 돈이었고 돈을 버는 이유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독립한 이후에도 몸이 부서질 정도로 일을 했고 그 덕분에 어느 정도 부유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엄마로부터 아버지가 암으로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게 됩니다.
아버지는 입원비도, 세금도 내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토마스는 지금까지 자신이 모아놓은 돈으로 병원비와 세금을 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아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아는 아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그런 돈을 줄 리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지도 못하고 다시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올 때 토마스는 한없이 울었습니다.
여전히 패배자이자 노동자이며 애정 결핍에 묶여 있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부동산 회사에 취직하여 혼자 야근을 하던 중 지배인이 그를 보고 칭찬을 해 주었습니다.
“정말 성실한 친구네. 이렇게 열심히 일해주어서 고맙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칭찬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지배인은 약간 당황하면서도 다 듣고 나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혹시 자네 좋아하는 사람 있는가?”
“예? 아, 예. 한 명 있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요.”
“그렇군, 혹시 존경하는 이유가 있나?”
“터프하고 핸섬한 사람이기 때문이죠.”
“그래? 그렇다면 임무를 주겠네.
오늘부터 길을 걷거나, 일하거나, 밥을 먹을 때마다 ‘나는 터프하고 핸섬한 사람’이라는 말을 500번 반복하게.”
정말 500번이냐고 놀라며 되물었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 듣게. 인간의 뇌는 언제든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어.
자신이 되고자 하는 모습을 끝없이 반복해서 상기시킨다면 자네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다고 해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이지.
문제는 많은 사람이 자신이 되고픈 게 아니라
‘남들이 자신에게 원하는 모습’을 만들기 위해 뇌를 길들인다는 거야.”
한 번도 이런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그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터프하고 핸섬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습니다.
가슴이 북받쳐 눈물이 났습니다.
그로부터 5년 후 그는 지역 최고의 부동산 중개인이자 비즈니스맨이 되었습니다.
목표를 이룬 지금은 ‘나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을 쉼 없이 반복하며 또 한 번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출처: ‘당신의 인생을 180도 뒤집는 방법’, 체인지 그라운드, 유튜브]
락 토마스에게 “난 널 알아.”라고 말하는 아버지와,
“넌 뭐든지 될 수 있어.”라고 말하던 직장 상사 중 누가 토마스를 진정으로 안 사람일까요?
토마스를 안다고 규정하지 않은 직장 상사입니다.
안다고 할 때 모르는 것이고, 모른다고 할 때 아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우주에 관한 책을 본 기억이 납니다.
아주 어렸을 때라 광활한 우주의 흑백 사진만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 ‘우주의 끝이 있는가, 없는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답은 “모르겠다.”였습니다.
우주도 하나의 물체인데 끝이 있는지, 없는지도 인간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한 사람이 우주보다 더 신비하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주도 모르는데 한 인간을 어떻게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나도 모르는데, 어떻게 남을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안다고 할 때 그 사람에 대한 더 이상의 믿음이나 희망, 더 나아가 사랑이 커질 수 없습니다.
믿음과 희망, 사랑은 그 사람을 마치 새장에서 밖으로 새를 풀어놓는 것처럼 내가 그 사람을 규정하지 않을 때 훨훨 날아가 더 커질 수 있는 것입니다.
전에 백종원 씨하면 떠오르는 것이 ‘설탕’이었고, 음식이 맵고 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선입관이 있는 사람들은 골목 식당에서 그의 레시피와 충고를 따르지 않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다시 손님이 떨어지고 장사가 안되며 그 탓을 백종원 씨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백종원 씨는 남이 자신을 안다고 할 때 거기에 갇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규정하는 사람만 피해를 봅니다.
절대 내가 인간을 안다고 규정하여 그 인간을 안 하느님까지 안다고 규정하는 교만의 실수를 저지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다 하느님까지도 내가 만들어낸 한계에 가둬버릴 수 있습니다.
또 남이 나를 안다고 말할 때 그 말에 갇히지 맙시다. “당신이 나를 만들었습니까?”라고 반문하십시오.
나를 아시는 분은 나를 만드신 하느님뿐입니다.
나를 안다고 나를 규정하는 사람을 벗어나야 하늘 높이 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도 우리 자신을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한 존재입니다.
사람을 모른다고 할 때 그 사람을 만든 하느님도 모르게 됩니다.
그래야 그분을 믿고 희망할 수 있게 되며 그래야 사랑이 증가합니다.
인간이 무언가를 안다고 할 때 그는 자신도 자리에 멈춰 움직일 수 없게 되고 남도 그렇게 만들어버립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3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
히브리서 12,4-7.11-15
마르코 6,1-6
십자가는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입니다
십자가는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하느님의 얼굴입니다!
갑작스레 다가온 시련의 높은 파도에 힘겨워하는 오늘 우리에게 히브리서 저자는 다정한 목소리로 위로의 한 마디를 던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십니다.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 줍니다.”(히브리서 12장 7~11절)
시련의 강도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강력하다면, 신학자 클로델의 말씀을 묵상해보도록 추천해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치워버리려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고통을 설명하러 오신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분은 당신 사랑의 현존으로 우리와 함께 고통을 나누려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고통을 제거하지는 않으셨지만, 고통을 겪는 우리를 위로해주시고, 우리 삶에서 눈물을 없애지는 않으셨지만, 우리가 흘리는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심을 기억해야 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겪는 여러 유형의 고통이 모두 획일적인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겪는 다양한 고통의 원인을 찾아 나가다보면, 의외로 우리 인간 측의 과오나 악습으로 인한 고통,
즉 예방 가능한 고통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운전을 난폭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 난폭 운전은 노력하면 충분히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남의 말 절대 듣지 않습니다. 과속은 기본이고 불법 유턴은 특기입니다.
동승한 사람들이 깜짝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를 정도입니다.
그러다 대형 사고를 저질렀습니다. 겨우 목숨만 건지는 중상을 입고 투병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목숨 건진것만 해도 감지덕지하며, ‘하느님 감사합니다!’라는 말 입에 달고 살아도 부족할터인데, 한다는 말!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우리가 겪는 많은 고통은 인간 측의 과욕이나 나쁜 습성으로 인한 것입니다.
불을 보듯이 뻔히 예상되는 고통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닙니다.
어떤 십자가는 우리 인간이 아무런 잘못도 안했는데, 난데없이, 갑자기, 이유 없이 다가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됩니다.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십자가, 신비의 십자가입니다.
신앙으로 하느님 안에서 견디는 것이 상책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고통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각을 긍정적으로 바꾸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고통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불필요한 고통을 양산할 뿐입니다.
고통, 그 자체가 주는 괴로움에 집착하기보다는, 그 고통이 뜻하는 의미, 해결방안, 기능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십자가 앞에 설 때 마다 우리는 이 십자가를 보내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진리를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그 너머에 계시는 하느님을 바라봐야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일수록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너는 열심히 노력하고 네 잘못을 뉘우쳐라.”(묵시 3,19-20).
십자가는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입니다. 십자가는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하느님의 얼굴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강도 높은 애정표현입니다.
“여러분이 겪는 시련은 모두 인간이 감당해낼 수 있는 시련들입니다. 하느님은 신의가 있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힘에 겨운 시련을 겪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시련을 주시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1코린 10, 12-13)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월3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
복음: 마르 6,1-6 : 고향에서는 예언자라도 존경을 받지 못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고향 나자렛으로 가신다. 그 마을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30km 떨어진 곳으로 인물다운 인물을 내지 못한 고장이었다.(요한 1,46 참조)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을 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았는데 다섯 가지 의문을 제기하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2-3절). 예수님의 업적에 대해서 그 기적들과 가르침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즉 하느님인가 인간인가?(11,30 참조) 혹은 사탄인가?(3,22 참조).
예수님은 고향사람들 사이에 장인으로 통했다. 목수, 미장이, 석공, 대장장이 일을 두루 다 하신 기술자였을 것이다. 그리고 한 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누구의 아들인지도 알고 있다. 관례에 따르면 “요셉의 아들”(마태 13,55 참조)이어야 하는데 “마리아의 아들”(3절)로 표기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일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살아가지 않도록 이러한 상징들을 통하여 가르쳐 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5절) 나자렛에서 어떤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불신 때문이었다.(6절 참조) 치유가 되기 위해서는 환자에게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치유하는 분에게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상대방이 없으면 기적을 행할 수가 없다. 그분의 은총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막혀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 고향인 나자렛에서 고향 사람들의 불신앙을 이상히 여기신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척한 예언자들과 당신을 비교하시면서(4절) 당신 자신도 결국 백성들에게 배척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하신다. 그분이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이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적이란 신앙을 가지고 있거나 적어도 믿으려고 하는 자세가 되어있을 때,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자유로운 행위라고 하였다. 신앙이라는 배경이 없으면 기적이란 무의미하며 불가능하다. 믿음이 있어야 기적의 혜택도 있는 것이다.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주시다.”(5절)는 것은 당신을 믿지 않는 이들 가운데서도 작용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고자 하신 것이다. 은총은 당신을 믿는 이들 가운데에서 더 힘차게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그분의 능력은 그들의 불신조차 이겨 내셨다는 뜻이다.
우리도 많은 경우에 다른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하고 그 사람을 안다고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음이나, 내적인 것인데 볼 줄도 모르고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외적인 것도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멋대로 판단을 하는 것이 문제이다. 외모로만 판단하여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나자렛 사람들의 잘못을 우리도 저지르고 있다. 좀 더 이웃의 장점을, 내적인 면을 볼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도록 하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