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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사랑과 자비의 루카 복음서!
저도 젊은 수도자 시절 해외 선교 열망으로 활활 불타오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 학부를 졸업하고, 사목 실습을 시작할 때, 장상들에게 제발 좀 선교지에서 실습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장상들 눈에는 제가 선교사로서의 자질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였나 봅니다. 답은 언제나 묵묵부답, 너무 답답해서 부르짖으면 겨우 오는 답장은 먼저 한국에서나 잘 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아닌가 보다, 하고 포기를 했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늘 그런 열망이 남아있기에, 선교지로 훌훌 떠나는 후배 형제들을 보면 얼마나 부럽고 대견스러운지 모릅니다.
한번은 오지 중의 오지, 도착하려면 비행기를 몇 번이나 갈아타야 하고, 언제나 수하물이 제대로 인수되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나라로 선교를 떠났던 한 형제가 휴가차 귀국했었습니다.
공항 입국장을 걸어 나오는 그의 모습을 보고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불과 일 년 반전의 그 당당하다 못해 풍성했던 풍채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바짝 마르고 노쇠한 중늙은이가 한명 꾸부정하게 걸어 나오는 것입니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일 년 반 만에 체중이 30킬로나 빠졌답니다. 그러면서 장난삼아 돈 한푼 안 들이고 자연 다이어트에 성공했으니 꽤 돈 번거라며 자랑합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 과도비만으로 고생하시는 분들 선교지로 초대하겠답니다.
너무 갑작스레 왜소해지고 노쇠해져 적응이 잘 안 되는 형제를 바라보면서 든 생각입니다. ‘그래 해외선교사들이야말로 이 시대 순교자들이로구나!’
그와 함께 여기저기 같이 다니면서 전해 들은 더위와의 싸움은 정말이지 눈물겨운 것이었습니다. 낮이고 밤이고 항상 더우니 잠자는 것이 그렇게 힘들더랍니다.
그나마 쪽잠이라도 자기 위해서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서둘러야 된답니다. 한낮의 뜨거운 열기로 잔뜩 뜨거워진 매트리스에 미리 물을 한 사발 부어놓는답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열기가 사라져 머리를 눕힐만하다네요. 자다가 몇 번이고 일어나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해야만 잠깐이라도 눈을 붙일 수 있답니다.
철저하게도 문명 세계와 단절된 곳, 흙바닥에 양철 지붕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곳, 정부군과 반군 사이의 국지전이 끊이지 않는 곳으로 다시 떠나는 형제의 환한 얼굴이 참으로 고맙고 대견스러웠습니다.
초대 교회 선교사였던 바오로 사도와 루카 복음 사가의 삶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티모테오 2서에 그들이 복음 선포 과정에서 겪은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었는지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굳게 믿었던 동료들로부터의 배신과 따돌림으로 인한 상처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그 와중에 주님, 그리고 루카 복음사가만이 끝까지 등을 돌리지 않고 큰 힘이 되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데마스는 현세를 사랑한 나머지 나를 버리고 테살로니카로 가고, 크레스켄스는 갈라티아로, 티토는 달마티아로 갔습니다.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구리 세공장이 알렉산드로스가 나에게 해를 많이 입혔습니다. 나의 첫 변론 때에 아무도 나를 거들어 주지 않고, 모두 나를 저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2 티모 4,10~17 참조)
루카 복음사가는 이방계 그리스도인이었으며 상당한 학식을 갖추고 있었던 인물로 추정됩니다.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예수 그리스도 육화 사건을 다양하고 풍성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시각적 효과를 활용하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그는 여러 상황들을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함을 통해 독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에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51년경에 있었던 바오로 사도의 제2차 전도여행 때 그를 수행하였으며, 57년까지 필리피 교회 공동체에 머물면서 사목활동을 수행했고, 바오로 사도의 제3차 전도여행 때에도 수행했습니다. 그는 바오로 사도가 투옥 중이던 61~63년까지 로마에 머물면서 큰 의지요 힘이 되어 드렸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세 번째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저자로 추정됩니다. 그는 사도행전을 통해 초대교회 공동체 생활상과 복음전파 과정을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그가 집필한 루카 복음은 사랑과 자비의 복음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를 따뜻한 시선으로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인간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대표적인 에피소드가 죄 많은 여인 이야기, 돌아온 탕자의 비유, 우도 직천당 사건 등입니다.
고통받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던 사람들을 향한 연민의 마음으로 가득했던 루카 복음사가의 복음서는 2천 년 세월이 지나온 오늘 우리에게도 한없는 하느님의 자비를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가 지녔던 고통 받는 한 인간을 향한 한없는 측은지심과 따뜻한 동료애가 오늘 이 시대 다시 한번 메아리쳐지길 바랍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선교의 방법?: 매력적인 공동체를 먼저 만들라!
오늘은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성 루카는 바오로 사도 공동체의 일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에 대해 어떤 복음보다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였고 가난한 이들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철저한 자료수집을 통해 복음서를 쓰고 또 바오로 사도와 베드로 등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을 사도행전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이렇듯이 사도단 안에 머무르며 자신이 배우고 익힌 것을 선교를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선교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선교만큼 큰 사랑실천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선교의 열정이 이전보다 많이 떨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선교의 열정이 떨어지자 선교의 ‘방법’에 대한 논의가 새롭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고해성사가 어려워서 성당에 나오지 않는 것 같으니 SNS나 인터넷을 통해 편하게 성사를
볼 수 있게 해야 하고, 코로나 시대에 TV로 인사하여 성당에 와서는 자판기 같은 것으로
성체를 영하게 하자는 식의 의견도 제시됩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의견들이지만 설사 그렇게 한다고 해서 더 많은 신앙인이 성당에 나올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우리는 무언가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선교의 목적이 세례를 받고 성사에 참여하게 하기 위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사는 공동체 형성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아이가 엄마를 통해 아빠를 만나게 되는 것처럼 우선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만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 공동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일흔두 명의 제자들을 모으시고 그들을 둘씩 파견하셨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이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공동체입니다.
파견된 것을 먼저 만나지 못하면 파견하신 분은 너무 멀리 계십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시행되는 성사는 선교의 목적이 아닌 공동체 형성에 있습니다.
그 공동체가 온전히 형성되었을 때 선교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허성 야고보 신부님은 한 때 가정법원 옆에 있는 부산의 모 성당에서 본당 신부를 하고 계셨습니다.
한 번은 이혼하려는 부부가 성당에서 서성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정을 물으니 이혼하려고 법원에 왔는데 점심시간이라 2시간을 기다려야 하는데 갈 데가 없어서 성당으로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성당에 잠깐 앉아 있었지만, 기도가 되지 않아서 다시 나왔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무엇 때문에 이혼하려고 하느냐고 물었는데, 남편이 먼저 “이 사람은 제가 무슨 일만 하려고 하면 반대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자매가 “당신이 잘했어 봐라. 내가 반대하나?”라고 하며 언성이 높아지고 마구 싸우더라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화를 내시며 “아니, 싸우다가도 어른이 오시면 싸움을 멈추는 법인데 신부 앞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잘못했다고 용서를 청했고 신부님은 그러면 보속으로 2시간 동안 성체조배를 하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2시간 뒤 사제관에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울면서 들어왔습니다.
2시간 동안 있다 보니 서로의 잘못이 자기에게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신부님이 보는 앞에서 이혼서류를 찢어버렸고, 신부님은 바로 혼인 갱신 예식을
해 주었습니다.
둘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사를 영하는 목적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만남의 목적은 공동체 형성에 있습니다.
공동체가 형성되면 비로소 자녀가 탄생하게 됩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우리가 선교를 위해 먼저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소공동체 시스템의 재정립입니다.
문제는 아직도 3년에 한 번 고해성사만 하면 냉담자가 아니라는 정책을 쓰고 있는 것에 있는 것 같습니다.
성사의 목적은 공동체의 형성을 위한 힘을 주는 데 있는데도 그냥 오랜만에 나와서 잠깐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만 하면 신자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성사의 참례 여부로 냉담자를 가려내는 것은 공동체 친교의 중요성을 감소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면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당신 제자로
알아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공동체를 형성하시고
그 형성된 공동체가 선교하게 만드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은 특별한 것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합니다.
1973년 할리데이비슨은 미국 오토바이 시장의
77.5%라는 거의 독보적인 시장점유율을 차지했습니다.
1969년 잭 니컬슨과 대니스 호퍼의 ‘이지라이더’가 상영된 이후 할리데이비슨은
미국 남성들의 로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모터사이클은 말론 브란도의 ‘위험한 질주’(1953)에서처럼 ‘반항의 아이콘’이란 이미지도 새겨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1948년 구성된 헬스 엔젤스(지옥의 천사들)는 수십 대의 모터사이클을 타고 다니며
폭동을 일으키기도 해서 할리데이비슨을 타는 사람들이 폭력조직과 비슷하게 여겨졌습니다.
엔젤스 단원들은 한때 유명 가수들의 공연 안전요원을 맡기도 했는데 폭력과 살인 사건까지 발생하였습니다.
이때 저렴하고 가볍고 고성능인 오토바이들이 미국을 침략했습니다.
바로 일본의 야마하, 혼다, 스즈키 오토바이들이었습니다.
할리 데이비드슨을 타면 갱스터라는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 많은 이들이 일본 모터사이클을 선호했습니다.
이때 혼다의 로고는 이랬습니다.
“혼다를 탄 가장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세요.”(You meet the nicest people on Honda)
이렇게 80년대 들어와서는 미국에서 반 이상이 일본 모터사이클을 탔고 할리 데이비드슨은 25% 수준까지 떨어졌습니다.
그렇다고 할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1983년 할리 마케팅팀은 ‘우리가 직접 새로운 오토바이 갱을 만들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를 내고 할리의 본질적인 무게감은 유지하면서 범죄집단이라는 오명을 벗어버리는 ‘호그’(Harley Owner’s Group)을 만들었습니다.
처음 4년 동안 7만 3,000명의 멤버들이 등록했고, 오늘날 그 숫자는 거의 50만 명에 육박합니다.
할리데이비슨 회사에서는 그저 그들의 모임과 경주 등의 이벤트를 제공하며 자랑스러움을
주는 일을 하면 모든 홍보는 그들 자체가 수행하고 고정적인 매출원이 되는 것입니다.
현재 방탄소년단이 안정적일 수 있는 이유도 엄청난 숫자의 아미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방탄소년단이 일일이 다 이름을 알 수도 없고 친분을 가질 수도 없지만, 그저 방탄소년단의 가장 강력한 지지층이라는 것에 만족감을 얻고 충성을 다합니다.
결국, 자신을 홍보하는 것은 자신을 지지해주는 공동체를 만들고 그들이 행복하고 자랑스럽게 만들어주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교회 소공동체나 단체에서 행복하기만 하면
사람들이 안 모일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이 시스템을 만들어주고 자랑스러움을 넣어주는 일만 하면 됩니다.
호그의 웹사이트 제작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간에겐 자기 자신보다 더 위대한 뭔가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하는 기본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최고경영자에서부터 새로 할리를 구입한 오너와 라이더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할리데이비슨을 하나의 크고 행복한 가족으로 여깁니다.
당신이 속하고 싶은 곳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당장 H.O.G에 가입하십시오.”
우리 선교의 마인드도 “할리 데이비드슨을 타보세요. 얼마나 좋은데요?”라는 다소 황망한
방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성체를 영해 보세요. 안 그러면 구원 못 받아요.”라는 식의 마인드는 벗어버려야 합니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구는 ‘소속감을 느끼고 싶은 욕구’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사실 젖보다는 엄마의 따듯한 품을 더 찾습니다.
소속은 근원적인 존재의 불안함을 달래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당 가족 공동체는 너무 행복합니다.
그 공동체어 머무는 것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라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선교의 방법? 방법은 이것입니다.
모든 성당 가족 구성원들이 공동체에 속하여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여 우리 공동체가 자랑스럽게 만들기.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10,1-9: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루카 복음사가는 바오로 사도의 동반자로서 복음서를 썼고 사도행전에서 교회 초기부터 바오로가 로마에 체류하기까지의 복음 선포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루카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복음의 내용의 목격자도 아니었다. 바오로와 같이 2~3차 여행에 수행하였고, 바오로 사도가 순교한 후에 그리스로 건너갔다. 루카는 전승에 의하면 장가가지 않고 살았으며 84세에 하늘나라에 가셨다고 한다. 루카 복음은 소로 표상되는데 그것은 복음의 시작이 성전에서의 예절로 시작되기 때문에 제사 때 쓰인 소를 의미하는 것 같다. 성인은 화가와 의사의 수호성인이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시고 복음을 전파하면서 그들이 지켜야 할 바를 말씀하신다. 우선 무엇보다도 물질적인 것들로 마음을 어지럽혀서는 안 되기 때문에 여장도 가볍게 차리라고 하신다. 물품도 갖지 말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라고 하신다. 또한, 대접을 받으려 하지 말고 주기 위해서 떠나라는 것이다.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은 자기 일에 충실해야지 사소한 일에 관심과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4절) 하신다. 또 수입을 바라고 그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아무 음식이나 잘 먹고, 더 좋은 음식, 더 나은 숙소를 바라거나 찾아다녀서도 안 된다. 손님 접대는 당시에는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거룩한 의무였다. 낯선 여행자가 마을에 들어왔을 때 손님 접대는 의무였고 풍습이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현세적인 어떤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복음의 전파만을 위하여 주님께 의지하며 헌신하는 것임을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신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기 위한 일꾼이 적다는 것이 예수님의 아쉬움으로 보인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2절) 그러면 우리는 오늘 똑같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어떠한 일꾼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 지금 상황으로는 성직자들도 부족하지만, 우리 신자들로서도 일꾼이 너무나 부족하다. 일꾼이 부족하면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며, 일꾼도 어떤 질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여기서 말하는 일꾼은 누구를 위해 일하는 것이며, 무엇을 위해서 일하는 것인가? 어떤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서로의 축복과 구원을 위해 일을 할 사람이고, 그런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으니, 현세적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전파되도록 그래서 하늘나라를 이 땅 위에 이루도록 일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가운데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 더 많은 훌륭한 일꾼이 나오도록 우리 자신부터 먼저 투신하도록 하고 현재와 미래의 일꾼들을 위해 기도하여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2021년 영국에서 ‘아서’라는 여섯 살 난 아이가 친부와 계모에게 아동학대로 목숨을 잃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아이의 몸에는 수백 개의 멍이 있었고, 영양실조로 사망한 것입니다. 아이의 집에는 가정용 CCTV가 있었고, 여기에 아이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배고픔에 잠을 이루지 못한 아이는 서럽게 도와달라고 외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는 이렇게 외치는 동안 그 어떤 위로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아무도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아.”
다른 이의 위로 없이도 충분히 살 수 있다는 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뿐입니다. 저 역시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가장 큰 분이신 하느님께서 지켜주시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위로도 필요했습니다. 나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말은 분명히 필요했습니다. 이 듣고 싶은 말을 듣지 못할 때는 하느님의 소리도 잘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위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남들이 모두 비판하고 있을 때, 그래도 위로할 수 있는 ‘나’가 되어 상대방이 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아무도 없다며 절망에 빠지고 그 결과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람이 더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자기보다 높은 곳을 향해 고개를 들 힘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위로하기 위해 우리도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서 눈높이를 맞춰야 합니다. 진정한 위로는 이렇게 높이를 맞출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명을 뽑아서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둘씩 보내십니다. 단순히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한 것일까요? 그것보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하느님의 위로를 받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아무것도 주지 않으십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않게 하십니다. 왜일까요? 시선을 맞춰서 진정한 위로를 하기 위해서는 눈높이를 맞춰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는 성 루카 복음사가 역시 이렇게 세상에 위로를 주기 위해 온 힘을 전한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그림자라고 불릴 정도로 함께하였고, 또 전교 활동을 하며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느님의 위로를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단순히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의 위로를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위로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나는 행복에 이르는 길이 우리를 얽매는 ‘채움’이 아니라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비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미하엘 코르트).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우리의 가슴 속에
저마다
말씀을 한 가득씩
품고 있으면
이리떼가 득실거리는
세상의 들판으로 나간다 해도
두려울 것이 없다네.
우리를 보내신 분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돌보시려고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신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저는 사목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사목이 어렵다거나
귀찮고 하기 싫은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습니다.
내가 왜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고
그 일을 통해서 교회와 공동체 안에서
꽃피울 수 있는 열매가
무엇인지를 보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내가 어떻게 성장하고
공동체 구성원 하나 하나가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보고
우리 교회 공동체가
성숙한 공동체가 되어가는 걸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힘들고 어려운 것들을 이겨낼 수 있고
그 안에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며
보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자존감도 높아질 수 있는 겁니다.
오늘도 제가 수확해야 할 것은
졍신적으로 영적으로 지친 교우들이
쉬어갈 수 있는 아름드리 나무가 되어
한마음을 방문하시는 피정객들이
환하게 웃고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적 여행의 가이드인 제 마음부터
모든 분에게 따뜻하고 친절해야 될 겁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말씀입니다.4,10-17ㄴ
사랑하는 그대여,
10 데마스는 현세를 사랑한 나머지 나를 버리고 테살로니카로 가고,
크레스켄스는 갈라티아로, 티토는 달마티아로 갔습니다.
11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마르코는 내 직무에 요긴한 사람이니 함께 데리고 오십시오.
12 티키코스는 내가 에페소로 보냈습니다.
13 올 때, 내가 트로아스에 있는 카르포스의 집에 두고 온 외투와 책들,
특히 양피지 책들을 가져오십시오.
14 구리 세공장이 알렉산드로스가 나에게 해를 많이 입혔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행실대로 그에게 갚으실 것입니다.
15 그대도 그를 조심하십시오. 그는 우리의 말에 몹시 반대하였습니다.
16 나의 첫 변론 때에 아무도 나를 거들어 주지 않고, 모두 나를 저버렸습니다.
그들에게 이것이 불리하게 셈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17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1-9
그때에 1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5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6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7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8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9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