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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7. 묵상글 ( 사순 제2주간 화요일. - 성찰과 반성.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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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7. 사순 제2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성찰과 반성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오늘 주님의 이 말씀은 저를 두고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김찬선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자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제 여기 밥상을 하면서 얘기를 나누다가
제가 말씀 나누기를 얼마나 했는지 얘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이 한 5년 정도 한 것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아서
2008년부터 했다고 정정해서 말씀드렸는데 이때 저의 마음 안에
제법 긴 기간 꾸준히 했다고 약간 자랑하고픈 마음이 있었고
그래서 이내 그런 저의 자세가 잘못된 자세라는 반성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제 저의 육신의 누이가 요즘 강론이 영적으로 옛날만 못하니
더 깊이 묵상하고 나누기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고
오늘 마침 주님께서도 이런 제가 들으라고 말씀하시어 다시 찔끔했습니다.
사실 16년 넘게 거의 매일 말씀을 나눴으니 그 기간과 말의 양이 엄청난데
그 성찰과 반성과 나눔이 10분의 1만 실천으로 갔어도 저는 성인이 되었을 겁니다.
전기 작가 첼라노는 프란치스코가 이런 저와 달랐음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의 마음에 가득 찬 것이 입으로 나왔고 그의 온 존재를 채우고 있는 빛을 받은
사랑의 샘이 밖으로 넘쳐흘렀다. 어디에서나 그는 늘 예수께 사로잡혀 있었다.
마음에 예수를 품고 있었고, 입에도 예수, 귀에도 예수, 눈에도 예수, 손에도 예수,
나머지 다른 지체에도 늘 예수를 모시고 다녔다.”
그러고 보니 주님의 말씀이 머리에 머물지 않고 가슴으로 가고,
가슴으로 그치지 않고 손과 발까지 전 존재적으로 가 실천에 이르는 것은
기간과 횟수와 같이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문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분명합니다.
제가 여러분과 나누는 것은 제가 실천한 것이 아니라
제가 그렇게 살고 싶은 것이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 말씀대로
여러분도 제 말을 실천의 말이라고 믿었다가 실망하지 마시고,
여러분이나 저나 같이 살아야 하고 살고 싶은 것을 나눈 것으로 받아들이시면,
더 나아가 여러분이 저보다 훨씬 더 잘 실천하시는 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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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7.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미래를 긍정적으로 예측하는 것은 행복 수준을 높여 줍니다. 실제로 이들은 자기 계획에 대한 성취도가 높고, 꾸준함도 갖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범죄를 저질러서 돈을 번 사람들은 부자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언제 잡혀 들어갈지 모른다’라는 불안감을 늘 간직하고 있기에, 돈을 모으지 못하고 대신 도박과 유흥, 방탕한 생활 안에서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안의 불안감을 없애고 행복감을 높이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하면 무의식적으로 실패를 바라보게 됩니다. 다른 이의 말이 내 안에서 실재가 되어 나를 좌지우지 하게 됩니다.
지난겨울 중고등부 캠프 프로그램 중에 제주도 한라산 등반이 있었습니다. 힘들게 등반하는데, 한 친구가 허겁지겁 아래로 내려갑니다. 방금 지나갔던 등산객 중 한 명이 무엇인가를 떨어트렸다는 것입니다. 이 친구는 등산객이 놓고 간 검은색 봉지에 담긴 무언가를 들고 뛰어 내려가서 주고 왔습니다. 제가 “그 안에 뭐가 들었는데?”라고 물으니, “쓰레기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 쓰레기는 자기가 버려야죠. 그래서 주고 왔어요.”
누가 내게 쓰레기를 넘겼습니다. 그 쓰레기를 받으면 어떨까요?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이 쓰레기를 계속 손에 들고 있으면 계속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얼른 그 쓰레기를 다시 넘겨야 합니다. 말과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감정적인 쓰레기들도 넘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긍정적인 힘을 가지고 지금을 힘차게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렇게 사람들에게 감정적인 쓰레기들을 넘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말만 하지 실제로 행동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옳고 자기들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은 모두 틀렸다면서 단죄하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 단죄를 받는 사람은 결국 죄인이 되어서 제대로 살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쓰레기를 넘기는 위선자를 따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그런 사람이 되지 않도록 겸손의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쓰레기를 넘기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이라는 귀한 선물을 건넬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통해서 높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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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명확한 목적이 있는 사람은 가장 험난한 길에서 조차도 앞으로 나아가고, 아무런 목적이 없는 사람은 가장 순탄한 길에서 조차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토머스 칼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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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7.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하지 마라.”(마태 23,3)
오늘 <복음>은 “자리”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의 자리를 차지하고 살아갑니다. ‘누울 자리’, ‘일자리’, ‘아버지 자리’, ‘앞자리’, ‘윗자리’ 높이와 위치와 순서와 역할 등등~.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음을 지적하면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하지 마라.”(마태 23,3) 하시면서, 그들의 죄상을 세 가지를 고발하십니다.
먼저,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라고 언행의 불일치와 남에게 짐 지움을 질타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일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라고 표리부동과 위선을 질타하십니다. 또 “그들은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란다.”라고 자만과 허영을 질타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참된 스승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진정으로 스승을 찾고 있는지를 물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자기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위대한 스승을 찾지만, 스승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방천지에서 만나는 우리 인생의 동반자들을 스승으로 모시지 않으려하기 때문에, 스승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솔직히 말한다면, 그들에게 머리 굽히지를 못하기 때문에, 오늘도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란다기보다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무지가 들추어지면 감사하기보다 오히려 상처를 받으니 말입니다.
참으로, 길이요 진리이신 참된 스승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오히려 고개를 쳐들어 먼 데서 스승을 찾고 있다면, 진정 우리가 눈멀어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참된 스승이 있는가?” 하고 묻기에 앞서, 진정, 나는 참된 제자인지? 물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시작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하신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하지 마라.”(마태 23,3)는 말씀을 되새겨보게 합니다. 사실, 이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를 비판하기 위해서라기보다 군중과 제자들에게 ‘배움의 자세’를 가르쳐줍니다. 곧 그들의 말과 행실이 모순되고 언행이 불일치한다하더라도, 혹은 행실이 비록 모범이 되지 못하다할지라도, ‘그들의 말은 실행하고 지키는’ 겸손함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않는’ 분별과 지혜를 군중과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자리’의 문제로 돌아와 봅시다. 나는 지금 누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또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하고 있는가? 진정, ‘배우는 자의 자리’는 어디인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
주님!
머리를 숙이고 겸손할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먼 데서 당신을 찾지 않게 하소서.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보다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게 하소서.
무지가 드러나면 상처받기보다 감사하게 하소서.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제 머리 위에 두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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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7. 사순 제2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말씀대로 살아갑시다.
살아가면서 더 나은 것을 추구하고 더 높아지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구입니다. 그런데 높아지려고 하다가 하루아침에 낭패를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욕심은 끝이 없어서 만족시켜 주면 줄수록 그 요구가 더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높아지려다가 오히려 푹 떨어지게 됩니다. 그들이 ‘높’자를 거꾸로 하면 ‘푹’자가 된다는 것을 생각했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공자께서도 “남의 선생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 탈”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망친다고 합니다.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백성을 위한 봉사자를 뽑는 것이 맞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의대 정원 문제를 두고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의료진은 환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요? 기득권을 유지하고 높아지려고 애쓰며 남을 가르치려 하기보다 삶으로 말해야 하겠습니다.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들은 당시 사회에서 스승이요, 지도자로 행세하고 남들이 그렇게 인정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사실 권위는 자기가 내세우기보다 남들이 인정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2-3).고 하셨습니다.
높이 오르면 더 멀리, 더 많이 볼 수 있고 그렇다면 더 많은 사람을 채워줄 수 있으련만,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넉넉해지고 자상한 어른이 되어야 하거늘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부끄러움만 더해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지만 나와는 무관한 말씀으로 듣고 살아갑니다. 대접받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 길을 서슴없이 가는지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스승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20,28). 고 말씀 하신 대로 사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삶으로 사랑을 증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하신 대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누가 먼저 인사하기를 바라지 말고 먼저 인사할 수 있는 날, 누구에게 무엇을 시키기보다는 솔선수범하는 날, 무엇을 기대하기보다 먼저 베푸는 은총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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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7.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2월 2일 서울대교구 사제서품식이 있었습니다. 저는 외국에 있어서 가지는 못했지만 새 사제들을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서품식 직후에 교구장님은 새 사제들에게 첫 임지를 발표합니다. 제가 아는 새 사제의 첫 임지를 보았습니다. 새 사제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장소도 중요할 수 있습니다. 본당의 규모도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새 사제가 함께 살아야 할 본당 주임 신부입니다. 신학교에서 신학과 철학을 배우지만 본당사목의 대부분은 첫 본당의 주임 신부에게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새 사제가 부임하는 첫 본당의 주임신부님은 잘 아는 후배 신부님입니다. 사목자로서 모범을 보이는 분입니다. 열정과 헌신을 보여주는 분입니다. 합리적인 결정을 하는 분입니다. 앞으로 2년 동안 새 사제가 많은 것을 보고 배우면 좋겠습니다. 첫 시작이 잘 되었으니, 새 사제의 앞날에도 하느님의 축복이 늘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33년 전에 저도 서품을 받고 새 사제로 첫 본당으로 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많이 부족한 저를 위해서 좋으신 본당 신부님을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신부님은 제게 긍정의 마인드를 보여주었습니다. 컵에 물이 반밖에 안 남았다고 생각하는 대신에 아직 컵에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빈말이라도 남의 허물을 탓하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작은 것이라도 남의 장점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형식과 율법에 억매이지 않았습니다. 매일 동네 한 바퀴를 돌면서 교우들의 가게를 찾아보았고, 길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제게 한번도 ‘무엇을 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신부님은 늘 먼저 저의 의사를 물어보았습니다. 제가 결정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젊은 사제가 더 필요하다면서 넉넉하게 예물을 주었습니다. 잘 먹어야 한다며 가끔 고기도 구워주었습니다. 신부님 사목의 모든 힘은 기도에서 나왔습니다. 신부님 방에 있는 기도 초는 눈물을 흘려서 작아졌습니다. 제 방에 있는 기도 초는 눈물 흘릴 시간이 거의 없었습니다. 제게 사목의 모범을 보여 주신 첫 본당의 주임신부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목자가 하지 말아야 할 것과 사목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말씀하십니다.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청개구리처럼 예수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을 골라하는 사목자가 있다면 공동체는 갈등과 아픔을 겪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제자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죽기까지 실천하는 사목자가 있다면 공동체는 믿음의 줄기에서 사랑이 꽃피게 될 것입니다.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목자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교만하고, 게으르고, 대접받기만 바라는 사목자가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목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사제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겸손한 사제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독서는 늘 부족한 제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기꺼이 순종하면 이 땅의 좋은 소출을 먹게 되리라.”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니 비록 나의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비록 나의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며 걸어온 길을 돌아봅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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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7. 사순 제2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그들의 말은 모두 실행하고 지켜라.”
화장실에서 이런 문구 보셨습니까? ‘아름다운 사람은 그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라는 문구 말입니다. 이런 문구를 여러 가지로 활용할 수 있겠지요? ‘향기로운 사람은 발걸음마다 향기가 묻어나옵니다.’ 이렇게 말이죠.
이 말의 의미를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내면이 곧 외면으로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또한 외면이 곧 그 사람의 내면이란 소리입니다.
말이나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되지요. 여기 있는 우리는 모두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성당에서 열심히 기도합니다. 가족을 위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말입니다. 활동도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간혹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 가정에 바람 잘 날이 없다고 말하거나, 집은 정리되어 있지 않고 구석구석이 먼지투성이 이거나, 직장에서 동료들과의 사이가 썩 좋지 않다거나 말입니다.
기도는, 신앙의 향기는 내면뿐만 아니라 외면에서도 향기를 내야 하는데 말입니다. 잠시 자신을 돌아봅시다. 혹시 내가 바리사이 같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온갖 좋은 말을 들어서 잘 알고 있고, 또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내 삶은 그것이 합당히 살고 있는지 말입니다.
물론 저 자신도 반성합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희망을 품어 봅니다. 자신을 제가 볼 수 있도록 제 마음을 열어 주신 예수님께 감사하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자신을 그렇게 보지 않더라도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보아서 우리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니 아름다운 사람은 그 내면뿐만 아니라 나타나는 말과 행동도 그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아름다움은 가려진 것이고, 더럽혀져 있는 것입니다.
‘내 주위의 사람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실제로 사랑하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기도를 이루려고 스스로 움직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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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 제면기
제게는 수동 제면기가 있습니다.
반죽을 만들고
그 반죽을 제면기에 넣으면
우동이 나오기도 하고
국수가 나오기도 하고
칼국수가 나오기도 합니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반죽이 제면기에 엉길 때도 있고
나오는 면을 잘못 잡아서 다시 엉켜버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면을 뽑아 끓여낸 국수 한 그릇은
여느 황제의 밥상 부럽지 않습니다.
단아하지만 가장 아름답습니다.
왜냐하면 제 손때가 묻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요?
단아하지만 가장 아름답지 않을까요?
하느님의 손때가 묻어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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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7.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좋은 삶
-참으로 잘 살았을 때, 잘 떠난다-
“죽음의 잠에 빠지지 않게 제 눈을 비추소서.
제 원수가 ‘내가 이겼다,’하지 못하게 하소서.”(시편13,4-5)
국내 사정이 4월10일을 총선을 앞두고 여야가 공천으로 참 시끄럽고 혼란스럽습니다. 공천 결과에 따른 반응에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환히 드러납니다. 국민들에게는 반면교사가 됩니다. 참 아름답게 잘 떠나는 분들이 많지 않습니다. 온갖 추태를 부림으로 배은망덕(背恩忘德)과 더불어 그동안 내적 삶이 어떠했는지 환히 드러납니다. 가장 고약한 것이 배은(背恩), 배신(背信), 배반(背叛)입니다. 문득 오늘 다산의 어록과 중국의 사마천이 쓴 사기에 나오는 예화도 좋아 나눕니다.
“나무가 열매로 사람을 모으듯 어른은 성품으로 사람을 따르게 한다.”-다산
“복숭아와 오얏나무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나무밑에 저절로 길이 생긴다”-사기
사람이 진실, 고결(高潔)하고 겸손하면 저절로 사람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잘 살았을 때, 잘 떠납니다. 삶과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떠남을 준비하며 살아갈 때 하루하루 충실할 수 있을 것이며 떠날 때도 아름답게 향기처럼 떠날 수 있을 것이며 참으로 진실을 추구하는 누구나의 소망일 것입니다. 19년전, 2005년 참으로 수도원이 어려운 일을 겪던 해 써놨던 “떠날 때는 이렇게” 라는 시(詩)를 주일에 이어 최초로 공개합니다.
“떠날 때는 이렇게
자연이 또 참 좋은 스승이다
잘 떠남이
아름다움의 극치다
얼마나
힘들고도 중요한 잘 떠남이냐
향기로 남는 떠남도 있고
악취를 풍기며 상처나 짐을 남기는 떠남도 있다
떠나기가 마냥 서운해
봄에다
흰 눈 가득 순결한 사랑 안겨 주고
말없이 떠나는 겨울
얼마나 아름다운 떠남이냐!”-2005.2.
얼마전 입춘(立春)과 우수(雨水)를 지나 내린 봄눈 내린 나무마다 설화(雪花)들 가득한 날에도 잘 어울리는 시입니다. 마침 주일 강론후 강론중 “봄이 되었다!”라는 시(詩)중에 나오는 “봄의 맑음”이라는 말마디가 자기 이름과 같다고 반색하던 ‘춘숙(春淑;봄춘, 맑을 숙) 도미니카’ 자매가 생각납니다. 이 말마디를 놓치지 않고 들은 경청의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어떻게 잘 떠날 수 있을까요? 마지막 떠남인 죽음 역시 언젠가의 갑작스런 선종은 없습니다. 하루하루 잘 살다 잘 떠날 때, 잘 떠나는 선종의 죽음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사순1주간 화요일 마태복음과 제1독서 이사야서가 잘 떠남을 위한 답을 줍니다.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한 가르침인데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의 교회지도자들은 물론이고 교회밖 각계 각층의 지도자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귀한 깨우침을 주는 가르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지탄을 받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우리의 참 좋은 반면교사가 됩니다. 전반부는 이들의 언행이 불일치 함을 지적하며 이들의 허영을 단연히 배격하라 하십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되 그들의 행실을 따라하지 말며, 남에게 보이고 싶어하는, 드러내기 좋아하는 허영을 말끔히 일소하고 진실하라는 충고입니다. 진실이 힘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생략이 불가하여 그대로 인용합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분 뿐이시다.”
“너희는 모두 형제다”라는 말마디가 큰 울림을 줍니다. 이런 자각에 투철한 이들이 정말 겸손한 이들입니다. 만민평등에 일체의 우상을 배격하라는 것입니다. 스승님이자 선생님은 그리스도 예수님 한 분 뿐이시고,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하느님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의 겸손한 삶에 저절로 따라오는 내적자유와 내적평화임을 깨닫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아버지는 하느님이고, 어머니는 교회이고, 모두는 형제다” 라는 말씀에 새삼 공감하게 됩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효성스런 “자녀답게”, 형제들간에는 우애좋은 “형제답게” 살아갈 때 참 아름답고 품위있고 격조있는 삶이겠습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상호존중과 상호섬김의 겸손한 자세가 나오고 이런 이들이 주님의 참제자라 할 수 있겠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거듭 강조되는 섬김과 겸손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라 명명되는 우리 수도공동체이고 우리에게 직분이 있다면 ‘섬김의 직분’, 권위가 있다면 ‘섬김의 권위’, 우리의 여정이 있다면 ‘섬김의 여정’, 영성이 있다면 ‘섬김의 영성’ 하나뿐일 것입니다. 역시 섬김의 여정에서 여전히 초보자임에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는 거짓경신례와 참된경신례의 대조입니다.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우리들에게도 귀한 가르침이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경청의 강조에 이어지는 거짓경신례를 얼마나 혐오하는 하느님인지 실감있게 표현되는 다음 내용은 오늘 독서에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싫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그것들은 나에게 짐이 되어 짊어지기에도 지쳤다. 너희가 팔을 벌려 기도할지라도 나는 눈을 가려버리라.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들어주지 않으리라.”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이라면 빈손으로 와도 주님은 반기실 것입니다. 경신례의, 전례의 거부가 아니라 선행과 사랑, 정의가 통째로 사라진 헛된 경신례의 거부요, 이어 주님은 참된 경신례를 위해 필히 실천해야할 지침을 주십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다음 다섯 가지 명령은 모두가 실천을 명하는 “하라”는 동사들입니다.
“1.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2.너희 악한 행실들을 치워버려라.
3.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4.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5.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사순시기는 회개의 시기입니다. 결국 오늘 말씀도 “내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에로의 방향전환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이요, 회개는 실천의 열매로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회개의 진정성을 보장하는 회개의 참 좋은 열매들이 경청, 진실, 겸손, 섬김, 선행, 사랑과 정의, 공정의 실천입니다. 이렇게 회개의 여정에 충실하여 잘 살 때, 비로소 잘 떠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매일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하느님 중심의 참된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옳은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시편50,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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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7.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마태 23,5)
나 아닌
나로
보이려는
나는
나마저
버린
나를
미워하는
나 없는
나입니다
나인
나로
있으려는
나는
나만은
품은
나를
사랑하는
나 있는
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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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7. 사순 제2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마태 23,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주님께서는 외모에 관심이 지나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든 것을 오직 하느님께만 보이기 위해 행했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손에 묶은 유일한 장식은 선행이었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가르침을 묵상하며 무슨 일을 하든지 영혼의 눈으로 볼 때 옳은가를 생각하며 하느님의 계명을 지켰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옷자락 술은 그들이 본받던 예수님의 덕이었습니다.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3 피조물은 하느님이다
피조물이 하느님을 드러내는 곳에서 하느님은 하느님이 되신다
신의 힘이 도처에 스며들어 있건만, 그들이 그토록 하찮은 것에 매달리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는 그들이 겉사람의 즐거움을 위해서만 살고, 속사람과 가장 깊은 속사람을 탐구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곁사람은 한 덩이의 빵, 한 잔의 포도주, 한 조각의 쇠고기를 그저 빵과 포도주와 쇠고기로서만 즐길 뿐이다. 이러한 생활 방식에는 지루함과 비만이 자리하게 마련이다. 속사람 역시 빵과 포도주와 쇠고기를 즐기되, 그것들을 단지 음식으로서가 아니라 선물로서 즐기는 것이다. 이와 같이 속사람은 감사의 마음을 돋우고, 창조계의 기쁨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는 선물에 깜짝 놀란다. 하지만 창조계의 선물을 음미하는 데에는 제 3의 길이 있다. 그것은 영원한 것을 맛보는 길이다. 이것을 맛봄으로써 사람은 자신의 유한한 기쁨을 넘어서서, 은혜가 넘치는 신적인 아름다움을 흡수하게 된다. 맛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아름다움이 절대로 시들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그것은 길이길이 오래가고, 끊임없이 좋은 맛을 내기 때문이다.(127)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 이 지상에서 일하실 때 함께한 성령의 능력으로 당신의 구원사업을 계속 이어가도록 이 세상에 남겨주신 교회 안에서 당신께 찬미드리나이다. 모든 교회는 당신이 목숨을 바친 하느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세워졌나이다.
오늘 지극히 높은 왕이신 당신을 찬미히는 모든 이와 함께 당신을 흠숭합니다. 그들은 당신께 당신은 그들에게 속해 있음을 깨닫게 하시어 신양을 굳건하게 다져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들이 자신을 당신께 온전히 내맡김으로써 하느님 나라가 승리하게하시니 감사합니다.
교회에 몸을 두고 있지만 영적으로 죽어 있는 모든 이 안에서 찬미받으소서. 당신은 그들에게 당신 다스리심의 아름다움과 당신께 속한 행복을 주시나이다. 그들한테서 모든 악의 영향력을 없애주시고 그들이 오직 당신만이 주실 수 있는 하느님 자녀됨의 자유를 누리며 살게 하소서.
사도들을 통하여 교회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히는 이들 가운데 찬미받으소서. 교황과 주교, 사제와 수도자,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모든 이의 마음·생각·말·행동을 각별히 다스리소서. 교회가 흠이나 결점 없이 사랑으로 하나 되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충실하게 하소서.
예수님, 당신의 교회를 정화하여 오늘 당신께 복된 찬미가를 부르게 하소서.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 독생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기쁨의 기름을 바르시어 영원한 사제와 만민의 임금으로 세우셨으며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십자가 제단 위에서 티없는 평화의 제물로 자신을 봉헌하시어 인류구원을 이룩하시고, 만물을 아버지 친히 다스리게 하시어 그 영원하고 보편된 나라를 지존하신 성부께 바치셨나이다. 그 나라는 진리와 생명의 나라요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이며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로소이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 감사송)(240)
-성시간,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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