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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 !
弁韓(변한) 12小國(소국) 中(중)의 하나이다. 3세기 후반에 저술된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에는 삼한(三韓) 소국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 당시의 중국 상고음(上古音)에 따라 표기한 이들 소국들의 이름은 대체로 우리 나라의 한자음에 가깝다. 미리미동국의 미리(彌離)는 우리말 ‘미리’·‘밀’의 한자 표기이다.《삼국사기》의 지리지에 따르면 “밀성군(密城郡)은 본시 추화군(推火郡)으로 경덕왕이 이름을 고쳐 지금도 그대로 일컫는다.”라고 하였다. 추화는 ‘밀불’·‘밀ᄇᆞᆯ’의 한자 표기이다. ‘불’·‘ᄇᆞᆯ’은 벌(伐)·불(弗)·부리(夫里)·비리(卑離) 등으로도 표기되어 평야·도읍·나라 등을 뜻한다.《삼국지》 위서 동이전 진한조에 나타난 미동(彌凍)이라고 붙여진 나라는 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주 01) 등이 있다. ‘미동’은 앞에서 말한 ‘ᄇᆞᆯ’·‘부리’ 등과 같이 ‘나라’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그러므로 ‘미리미동’은 앞에 든 밀ᄇᆞᆯ[推火]의 밀성군,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 지방에 있던 나라 이름으로 추정된다. ‘미동’은 마한의 ‘우휴모탁국(優休牟涿國)’의 ‘모탁’과 같은 말로서, 물둑[水堤]의 뜻이다.따라서, 그 위치는 신라 때 ‘밀불[推火]’이었으며, 수산제(守山堤)라는 제방이 있던 경상남도 밀양시에 비정된다. 이와는 달리 경상북도 포항시(옛 영일군)나 혹은 예천군 용궁면으로 비정하기도 한다.이 소국은 변한 연맹체의 일원으로서, 맹주국과 여러 가지 형태의 결속 관계를 맺으며 토착적인 세력 기반을 가지고 3세기 이후까지 개별적인 성장을 지속하다가 신라에 복속되었다.參考文獻(참고문헌)
삼국사기삼국지(三國志)「진·변한제국의 위치시론」(천관우,『백산학보』 20,1976)『삼한사회형성과정연구』(이현혜,일조각,1984)Analytic Dictionary of Chinese and Sino-Japanese(Karlgren,K.B.J.,1923)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
전근대 시기 변한과 가야에 대한 인식의 출발은 최치원의 삼한 인식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삼한을 삼국으로 인식하여, 변한을 백제로 보고 가야와는 무관한 존재로 파악했다. 조선 초기에 권근 등이 변한을 고구려로 상정했지만,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 의해 변한은 가야라는 인식이 정착될 때까지, 최치원의 인식은 통설로 이어졌다. 실학자들은 변한과 가야의 연원, 그 성립 시기와 역사 전개과정, 가야 여러 소국들의 위치와 세력 범위 등을 고증하여 변한에서 가야로의 계승 발전 사실을 분명히 했다. 곧 한백겸 이래로 전개된 변한과 가야 연구는 문헌 고증과 함께 사료를 폭넓게 활용했으며, 접근방법과 자료 활용 면에서 이후 근대적 역사연구의 바탕이 되었다.
근대 이후에 전개된 일본학자들의 연구는 한국에 대한 일제의 침탈과정과 궤를 같이 했다. 주로 ‘임나일본부설’에 입각한 연구 결과는 가야사의 실상과 거리가 멀었다. 일제의 식민사학에 저항했던 신채호는 상고기 ‘조선족의 이동’이라는 관점에서 변한과 가야의 관계, 가락국의 성립 등을 부각했으며, 그의 뒤를 이었던 정인보, 안재홍 등 민족주의 계열 역사가들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광복 이후에도 일제의 식민사학을 극복하고 변한과 가야의 역사상을 복원하려는 노력은 지속되었다. 1980년대 이후 고고학 자료의 증가와 『일본서기』의 비판적 활용으로 연구 자료의 외연이 넓어짐에 따라 가야사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문헌자료를 바탕으로 고고학 자료를 함께 활용하는 연구경향이 대세를 이루면서 다양한 주제와 새로운 접근을 모색했다. 특히 주변 나라들과의 관계사적 시각에서 벗어나 가야 각국의 역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가야의 구체적인 역사상에 다가갔다.
가야사의 시기구분 문제는 변한과 가야에 대한 인식과 표리관계에 있다. 가야 제국의 연원은 변한 소국들에서 찾을 수 있으므로, 변한의 역사를 가야사의 연장선에서 접근하는 것이 좋을 듯싶다. ‘변한에서 가야로의 변화’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기 위해서는 삼한 전체의 변화과정 속에서 가야의 성립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가야를 구성하는 여러 소국들의 사회발전단계와 관련된 ‘가야연맹’설의 존부 문제도 삼한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던 마한과 진한이 각각 백제와 신라로 발전하는 과정에 견주어 접근하는 비교사적 관점이 요구된다. 나아가 가야의 건국신화와 제의 행위가 어떠한 사회구조 속에서 전개되었는가를 추구하고, 민속학·종교학 등에서 일구었던 관련 연구 성과에 좀 더 관심을 갖고 수렴해야 할 것이다. 가야의 세력범위는 문헌자료를 바탕으로 개별 소국의 구체적 위치와 범위를 설정한 뒤에, 고고학 자료의 분포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조망할 필요가 있다.
The beginning of the recognition of Byeonhan and Gaya during the pre-modern period can be traced to Chih-won Choi’s perception of the Samhan. As Choi recognized the Samhan as the Three Kingdoms, he determined that the name of Byeonhan was Baekje and not associated with the Gaya. In the early Joseon Dynasty, many scholars, such as Geun Kweon, postulated that the Byeonhan changed to the Goguryeo, but Choi’s perception was accepted as common belief until the time that the perception that Byeonhan was the predecessor of Gaya was widespread by the silhak(practical learing) scholars of the late Joseon Dynasty.
The Silhak scholars clearly stated that changes developed from the original Byeonhan to Gaya by ascertaining the period of its establishment, the process of its history, and the location and scope of influence of the Gaya’s several small states. The study of Byeonhan and Gaya, which have been continuously conducted since the study of Baek-gyeom Han, has widely utilized the literature and praxis of literature, and has become the basis of later historical studies in terms of approach and data utilization.
The studies by conducting Japanese scholars after the modern period coincided with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The results of research that mostly based on ‘the Japanese Mimana Government’ was far from the reality of Gaya. Chae-ho Shin, who resisted the colonial history of Japan, emphasized the relationship between Byeonhan and Gaya, and the formation of a Garakguk, which changed from the viewpoint of ‘movement of the Joseonjok’, and directly or indirectly influenced the nationalist historians such as In-bo Jung and Jae-hong Ahn. After Korea’s liberation from Japan, the efforts to overcome a colonial history by Japanese colonial rule and restore the history of Byeonhan and Gaya were continued. Since the 1980s, with the increasing use of archaeological materials and the use of ‘Nihon shoki’ was critically extended, the study of Gaya has proceeded in earnest. In addition, as the tendency for research to use archeological documents together with documentary data have become prevalent, various topics and new approaches have been sought. In particular, the history of each state has to be studied actively from the perspectives of their respective relatives, so it has approached the specific aspect of the Gaya history.
The problem of the time division of Gaya is closely related to the perception of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Byeonhan and Gaya. Since the origins of several states in Gaya can be found in various states of the Byeonhan, it seems that it is better to approach the history of the change from the extended line of Gaya. The establishment of the Gaya has to be examined in the process of the change of the entire Samhan, in order to deepen the understanding of the process of changing from ‘Byeonhan to Gaya’. The problem of the existence of the ‘Gaya Federation’ related to the stage of social development of the various states that constitute Gaya is also required comparative history perspective that compare the process of the development of Mahan and Jinhan as Baekje and Silla, starting from the same roots as the Samhan. Furthermore, we should look at the mythology of Gaya’s founding myth and ritual in which social structure was developed, and pay more attention to the achievements of related researches in folklore and religion. In case of the Gaya’s territory, it is necessary to set the specific location and range of individual states based on the literature data, and then consider the distribution of archaeological data in a comprehensive man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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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승철 ~ 화 2020-12-29 오후 5:55 ~ 옛날에 공부한 역사를 다 잊었습니다. 새롭게 공부하게 되어 감사합니다. 좋은 역사글 잘 읽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